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북한 방문자들]
특집 (2020년 7월호)

 

  동백림 사건: 냉전체제 속에서 남북의 경계를 넘은 사람들
  

본문

 

1967년 7월 8일부터 17일까지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은 7차에 걸쳐 이른바 ‘동백림(東伯林: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적화공작단 사건’을 발표했다. 김형욱은 외국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 유학생, 간호사와 광부, 대학교수 등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북한 측으로부터 금품을 받고 간첩 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관련자라고 밝힌 인원만 194명에 이르러 ‘해방 이후 최대의 간첩단 사건’이라고 불렸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1967년 6·8총선에서 대대적 부정선거를 저질러 전국적인 항의 시위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강력한 반공주의가 지배하던 남한 사회에서 세간의 이목이 모두 이 간첩단 사건으로 몰리면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관련자 대다수는 서독과 프랑스 등 외국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에서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외국 정부에 사전 통지나 동의 없이 이들을 연행함으로써 남한 정부와 서독·프랑스 정부 간에 외교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67년 11월 동백림 사건 관련자 중 33명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이 재판은 대법원의 파기환송과 재항소심을 거쳐 1969년 3월 재상고심이 끝날 때까지 1월 5개월간이나 지속되었다. 관련자들에게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어겼다는 간첩죄가 적용되어 사형이나 무기징역 등 중형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사건이 일어난 지 3년 6개월 만에 모두 석방되었고, 실제로 사형이 집행된 사람도 없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대로 그들이 정말 간첩이었다면, 이처럼 전원 석방이 과연 가능한 것이었을까? 실제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들은 누구이며, 왜 동베를린에 갔을까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 가운데 인적사항이 남아 있는 사람들은 62명이다. 이들 중 31명은 해외에서 연행되었고(서독 16명, 프랑스 8명 등), 국내에서 체포된 사람들의 경우 서독이나 프랑스 등에서 유학했던 사람들이 다수였다. 이들 중 절반 이상(32명, 51.6%)이 대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졌고, 그중 24명(38.7%)은 석·박사 과정을 진행 중이거나 졸업했는데, 1970년대 말까지 대학 진학 가능 연령 중 대학생의 비율이 10%를 넘지 못했던 것을 고려할 때,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은 고학력자가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관련자 중 유학생은 11명, 대학 강사 및 교수는 18명이었으며, 간호사나 광부로 서독에 이주한 이들 역시 고학력자들이 많았음을 고려할 때 전체적으로 엘리트 계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동백림 사건 관련자 중에는 국회도서관, 청와대, 농림부 등 정부 기관에서 근무한 이들과 윤이상(尹伊桑), 이응로(李應魯), 천상병(千祥炳) 등 저명한 예술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위반한 주요 혐의는 그들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을 방문(31명)하고 북한 측으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것(29명)이다. 그들 중 일부는 북한을 방문(11명)하고 조선로동당에도 입당(入黨)했다는 혐의(10명)를 받았다. 관련자들은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이러한 혐의 내용을 대부분 인정했지만, 그것만으로 관련자들이 간첩이었다고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혐의들은 모두 개인적 차원에서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을 위반한 것이며, 이는 7년 이하의 징역에 해당할 뿐이다. 게다가 이러한 혐의 중에는 중앙정보부가 고문수사를 통해 확대·조작한 내용도 적지 않았으며, 실제로 관련자들이 재판 과정에서 이 사실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로동당 입당은 북한에서 규정한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입당서에 서명만 하고 끝내는 등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간첩으로 활동했다는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동백림 사건이 국제적 외교분쟁으로 발전하면서 서독과 프랑스 정부에서도 자체 조사를 벌였지만, 중앙정보부에서 주장하던 ‘간첩단’의 실체는 결국 발견되지 않았다. 북한 측에서 관련자들에게 A3방송기기나 난수표 등의 장비를 지급했지만, 관련자들이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활용하기란 거의 불가능했고, 심지어 장비 자체에서도 결함이 발견되었다. 관련자들 중 일부는 북한 측과 더 이상 연락하지 않기 위해서 난수표를 불태워버리거나 땅에 묻기도 했다. 관련자들이 북한 측에 일부 정보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자기 주변 유학생과 광부들의 명단, 유학생들의 생활상 등 군사기밀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수준의 것이었다. 사실 동백림 사건 관련자 대부분은 오랫동안 외국에 거주하면서 국내 사정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북한 측은 이들을 통해 이른바 고급정보를 얻어낼 수도 없었다. 서독 경찰은 난수표 등의 증거를 중앙정보부에서 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당시 북한은 남한 해외 교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은 남한 교민들의 집에 각종 선전・선동 자료를 발송하는 한편, 그들이 북한대사관에 방문하면 냉면 같은 한국 음식을 대접해주면서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돈을 주기도 하였다. 남한 정부는 유학생, 간호사, 광부들의 어려운 생활상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들에 대한 감시나 통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발전에서 오는 자신감을 가지고 교민들에게 접근했다.
북한은 어째서 이들과 접촉하고자 했을까? 북한은 1960년 4월혁명을 통해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남한 자체의 ‘혁명 역량’을 키워서 통일에 대비하게 한다는 ‘남조선혁명론’을 1960년대 중반까지 주장했다. 그들은 아마도 외국에 거주하는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우호적 생각을 가지게 만들고, 그들이 북한의 ‘평화통일’ 방침을 전파하는 역할 정도를 수행하기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대남정책은 1966년부터 군부 강경파들에 의해 군사적 도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38선에서 남북한 군인들의 충돌이 10배 넘게 증가하는 한편, 1968년 1·21사건(박정희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과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으로 인해 전쟁 위기가 고조되기까지 하였다.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은 간첩이 아니었고, 개인적 차원의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사건들을 중앙정보부가 인위적으로 하나의 간첩단으로 결합한 성격이 강했다. 박정희 정권은 간첩단 조작을 통해 6·8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잠재우는 한편, 반공주의 사상이 약한 지식인들이 정권의 잠재적 반대자가 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등의 학생운동 세력을 동백림 사건의 일부로 조작하여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은 어떠한 이유 때문에 동베를린을 방문하여 북한 측과 접촉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전쟁 때 헤어진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건이 발표된 1967년은 휴전이 이루어진 지 15년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프랑스에 거주하던 화가 이응로의 경우 전쟁 때 헤어진 아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북한 측과 접촉하게 되었다.
북한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들과 접촉한 이들도 있었다. 뮌헨(Mün-chen)의 대학생 김택환(金宅煥)과 같이 단순히 “냉면을 얻어먹으러” 간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서베를린에 거주하던 작곡가 윤이상은 한국전쟁 때 헤어진 친구의 행방을 찾으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고구려의
<사신도>(四神圖)에 관한 오페라를 작곡하려고 준비하던 중 고분 벽화를 실제로 보고 음악적 영감을 얻고자 북한에 가게 되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한발 더 나아가 남북 분단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동베를린에 간 사람들도 있었다.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강사 김종대(金鐘大)는 서독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에 방문한 동독 라이프치히(Leipzig) 대학생 30여 명이 자기 체제의 약점과 상대의 문제에 대해 서슴없이 토론하는 모습을 보며, 어차피 남북 정부는 당장 대화할 것 같지 않으니 자신들만이라도 동포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에 동베를린에 가게 되었다. 프랑스 그르노블(Grenoble)에서 유학한 동국대 강사 조영수(趙榮秀)는 “우리 세대에 통일을 못 이루면 통일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패전국 일본은 소니가 유럽에 진출하는 등 엄청나게 발전하는데 우리는 무슨 죄가 있어 남북이 갈려 으르렁거리냐는 울분”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통일을 위해선 공산주의를 직접 알아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하여 동베를린을 방문하고 북한대사관 직원들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남한 사람이 동베를린에 방문한다는 자체가 남한의 실정법을 위반하는 것이었지만,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은 외국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동백림 사건 관련자 중 해외 이주 시기가 확인되는 51명의 출국 시점을 살펴보면, 24명이 이승만 정권기(4월혁명 이전)에 이주하였고, 동백림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귀국하지 않고 해외에 거주하던 이들은 19명(해외 이주가 확인되는 관련자 중 37.2%)인데, 이들은 박정희 정권에서 1961년에 제정한 반공법 자체를 잘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분단의식을 내면화시키는 반공교육은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들 대부분은 그러한 반공교육을 받지 않은 채 외국으로 갔고, 나중에 서술할 분단 환경의 차이 때문에 국내에 거주하던 이들에 비해 반공의식이 약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은 북한 측과의 접촉 행위가 남한의 실정법에 저촉되는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며, 큰 거부감 없이 경계를 넘어 동베를린으로 갈 수 있었다.
북한 측과 접촉한 사람들은 이후 북한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의 경우를 보면, 조영수는 북한 당국자들과 접촉한 후 “북한 체제, 북한식 사회주의로는 어렵겠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김종대는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그들은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 있고 자신은 그들의 사고를 고쳐놓을 수 없으며 그들이 “격의 없이 대화할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 북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오히려 그들을 더 ‘반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박정희 정권이 반공교육을 통해 주입시킨 ‘북한의 악마화’와는 달랐고, 북한 체제의 문제점을 가감 없이 보면서 그것에 비판적으로 접근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과 서독, 너무나 달랐던 분단 환경과 분단 인식
사실 북한과 전쟁을 치른 바 있고 그 이후 인적·물적 교류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던 1960년대 남한 사회에서는,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처럼 사회주의권 영토에 들어가 북한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들이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이 오랜 기간 외국에서 체류하면서 경험한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렇다고 서독과 프랑스 등에서 반공주의가 약화되어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서독을 예로 들면, 1966년부터 보수 성향의 기독교민주연합(CDU)과 진보 성향의 사회민주당(SPD)의 대연정(Große Koalition)이 시작되었지만, 동독을 승인하거나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는 나라들과 관계를 설정하지 않겠다는 ‘할슈타인 독트린’(Hallstein-Doktrin)은 여전히 건재한 상황이었다.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일어난 반(反)베트남전쟁 운동이 반미(反美) 성향을 보이자 안보에 극도로 민감한 서베를린 시민들이 거부반응을 보인 데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여전히 강력한 반공의식을 가지고 있던 서독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남한의 분단 상황과 반공주의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에 흩어진 이산가족들이 서로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을 가리켜 “비인간적”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서독인들 사이에서는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이 한국전쟁 때 헤어진 가족을 만나기 위해 저지른 행위를 법으로 처벌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서독의 분단 상황과 반공주의가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서독과의 비교를 통해 남한의 분단 상황과 반공주의에 대해 보다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분단국이었지만, 서독은 남한과 달리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르지 않았고, 분단 40년 동안 동독과 제한적으로나마 인적·물적 교류를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독일 땅 전체, 그리고 수도 베를린은 영국·미국·프랑스·소련에 의해 각각 네 구역으로 분할점령되었다. 영국·미국·프랑스가 점령한 지역은 독일연방공화국(BRD, 서독)이 되었고, 소련이 점령한 지역은 독일민주공화국(DDR, 동독)이 되었다. 특히 서베를린(Westberlin)은 동독 땅 한가운데에 섬처럼 홀로 존재하는 서독 땅이 되었고, 그 존재 자체만으로 동서독이 인적·물적 교류를 유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베를린 봉쇄(1948-49) 시기를 제외하면 서독 ‘본토’와 서베를린의 인적·물적 왕래는 계속 이어졌다.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역시 처음에는 왕래에 크게 제한이 없었지만, 1950년대에 서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망명하는 동독 이탈 주민이 급증하자 1961년 8월 13일 동독 측에서 베를린 장벽(Berliner Mauer)을 세워 동서 베를린 주민들의 자유왕래를 통제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동서독 간 인적·물적 교류는 제한적인 형태로나마 계속되었다. 우편 교류가 계속되었고, 동독 라이프치히에서 수백 년 전통을 자랑하는 박람회와 도서전시회가 해마다 열릴 때 서독의 기업, 출판사, 문인들도 참석할 수 있었다. 베를린의 대중교통망 역시 단절되지 않은 형태로 계속 운행되었고, 동서독의 이산가족들도 비자를 발급받아 상대 지역에 방문할 수 있었다.
이산가족들이 서로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게 만들고 분단 극복이나 통일 논의 자체를 금기시하는 남한의 반공주의를 가리켜 진보 성향의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Frankfurter Rundschau)는 “권위주의적이고 잔인한 반공주의”라고, 중도 성향의 「쥐트도이체 차이퉁」(Süddeutsche Zeitung)은 “타협의 여지가 없고 증오로 가득 찬 반공주의”라고 규정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서독과 프랑스에서 자의적으로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을 연행해온 사건에서 잘 드러나듯, 반공을 빌미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무시하는 박정희 정권의 행태 역시 문제가 되었다.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는 중앙정보부의 이러한 불법 행위가 한독간의 연대를 무너뜨려 “자유를 위한 투쟁”을 함께 이루어내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보수 성향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Frankfurter Allgemeine)까지도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에서 자신들의 미래를 찾고자 하지만 막상 통일을 위한 때가 “무르익었을” 때에는 남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성숙했는지, 또한 인권에 대해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는지가 중요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독을 비롯한 외국의 지식인들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동백림 사건 관련자 연행, 박정희 정권의 간첩단 조작, 그리고 관련자들에 대한 간첩죄 적용 및 중형 선고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카라얀(Herbert von Karajan)과 스트라빈스키(Igor Strawinsky) 등 세계 각국의 저명한 음악가들, 기독민주학생연합(RCDS) 라인란트-팔츠(Rheinland-Pfalz) 지부와 같은 기독교 동아리, 고백교회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던 독일개신교회(EKD)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지역 비숍 샤르프(Kurt Scharf) 등의 기독교인은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을 위해 한・독 양국 정부에 탄원서를 보냈다. 서독 대학가에서는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이 사건에 대해 지속적으로 항의 시위를 벌이며, 자기 학교에서 연행된 한국인 학생들의 석방 및 귀환을 요구했다. 서독인들의 이러한 문제제기와 저항은, 서독 정부가 남한 정부와 정치적으로 타협하여 사건을 무마시키지 않고 관련자 전원 석방 및 귀환을 계속 주장하여 끝내 실현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분단 현실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산가족 상봉, 북한에 대한 호기심, 분단과 통일에 대한 문제의식 등 다양한 이유로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은 동베를린에 가서 북한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의 행위는 전쟁 때 헤어진 이산가족들이 서로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게 만든 분단의 현실, 북한 사람들과 마주 앉아 분단과 통일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조율해나가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박정희 정권의 반공주의가 얼마나 폭압적이었는지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은 분단된 지 40년 만에 통일을 이루어내고, 유럽에서 냉전은 ‘과거’가 되었지만, 70년 넘게 여전히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정치·군사적으로 긴장과 대립을 이어가고 있는 한반도에서 어쩌면 냉전은 아직도 ‘현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과 북은 어떻게 해야 서로에 대한 증오를 뛰어넘어 평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50여 년 전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이 가지고 있던 분단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 서독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반공과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생각은 지금 우리가 분단을 극복해나가는 데 단초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동백림 사건을 다시 돌아보는 이유이다.


이정민 |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한국현대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드림교회 부목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강사로 재직 중이다. 논문으로 “동백림사건과 한독관계”(학위논문), “함흥 전후복구사업을 통해 본 북한-동독 관계” 등이 있다.

 
 
 

2020년 7월호(통권 739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