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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북한 방문자들]
특집 (2020년 7월호)

 

  1980년대 방북자들과 기독교 남북대화
  

본문

 

오늘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향한 진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 및 종교인들의 노력이 이루어낸 결실이다. 특히 1970년대 들어서 남북통일을 위한 해외 및 남한 기독교인들의 꾸준한 노력이 이어졌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평화통일운동을 시대적 과제로서 본격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1980년대부터였다. 한국전쟁과 군부독재정권의 반민주화 시대를 겪으면서 남한의 기독교 내에서는 반공만을 중시해 통일을 논의할 상황이나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기독교 선교사업 중 한반도 평화와 통일 문제의 비중이 커졌다. 이는 남북한교회의 통일을 위한 대화로 발전하였다. 이를 주도한 것은 진보적인 교회 세력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였다. 이후 1990년대에는 통일대화뿐만 아니라 보수 교단을 포함한 교회와 기독교 NGO의 대북지원사업이 주된 정책으로 변화하였다.1
이 글에서는 먼저 1980년대에 누가 어떤 목적으로 방북했으며 이들의 방북 후 활동은 어떠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아울러 1970년대 후반 해외 기독교인들의 목적에 따른 방북과 북한에서의 활동을 살펴보고,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의 기독교 통일과 북한선교운동을 주도했던 인물과 단체들이 북한을 방문한 목적과 활동을 평가해보고자 한다.

종교단체 및 개인적 목적의 방북자들과 방북 활동
1980년대에는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남북종교인대화가 시작되었고, 북한에서 1988년에는 조선천주교인협회(현재는 조선카톨릭협회)가 결성되기도 했다. 한편 남한에서는 1980년대 후반 통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988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문익환, 황석영 등의 평양 방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80년대 남한 정부는 통일운동 및 남북 종교인 교류를 불허하였고,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미주와 유럽에 거주하는 기독교인 동포들이 먼저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대화에 나서면서 개신교의 남북교류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천주교의 경우, 신자 임수경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서 1989년 7월 1일부터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여하였고, 7월 7일에는 남북 청년학생 간의 접촉 및 교류를 비롯한 남북간의 다각적인 교류와 협력 강화, 평화협정의 체결, 남북불가침선언 채택 등의 남북 청년학생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1989년 문규현 신부는 6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평양을 방문했는데, 6월에는 장충성당에서 통일 기원 및 촉구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문규현 신부의 두 번째 평양 방문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임수경을 보호하고 통일의 열망을 확고히 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이후 그는 1998년 판문점에서 열린 8・15통일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해 조국의 화합과 대단결을 모색했다.
천도교의 경우, 1974년부터 교령을 맡은 최덕신은 미국 망명 중에 1981년 6월 22일부터 7월 18일까지 북한을 방문하였고, 이후 수차례 방북, 1986년 9월부터는 북한에 영주하였다. 이후 새로 교령직에 임명된 오익제는 1989년 5월 남북 천도교 교류를 언급한 후 7월 천도교 남북교류 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몇 차례 북한 천도교와 접촉을 시도하였다.2 그는 1997년 8월 15일 북한으로 망명했다.
불교도 타종교와 마찬가지로 해외 불교조직을 통해 남북교류가 성사되었다. 1988년 하와이의 기대원 스님, 1989년 법타 스님이 북한을 방문해 조선불교도련맹 박태호 위원장과 만나 남북 불교 지도자 접촉이 급물살을 탔다. 1991년 10월 말 미국 LA에서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서의현)을 포함한 16개 종단 대표들과 북한의 박태호 위원장 등이 분단 이후 최초로 만나 남북 불교의 공식 접촉을 시도하였다.
개인적으로 방북한 사람들 중 정기열은 1980년 유학차 도미한 이래 20년 가까이 미주 지역 민족민주운동의 전위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1989년 평양축전에 참석했으며, 이후 20여 차례나 북한을 오가며 통일운동에 나섰다.
또한 항일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차남인 손원태는 1991년 5월 처음 방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중국 길림에서 어린 시절 김 주석과 함께했던 그는 60여 년 만에 평양에서 다시 만나 우정을 확인했다.
최기환은 1959년 독일로 유학을 간 뒤 스위스에 정착해 1974년 독일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회) 의장을 맡고, 1980년에 조직된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기통회) 총무도 역임하였다. 1983년 6월에는 부인과 함께 방북했으며, 이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유럽지역본부 의장을 맡아 남과 북, 해외의 통일운동에 힘썼다. 「중앙일보」의 홍석현은 1998년 8월 22일 베이징발 고려항공 편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언론사 대표로는 분단 이후 처음 북한을 찾은 순간이었고, 명분은 남북간 화해 협력과 교류에 관한 논의였다.
정경모는 미국 유학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주미대사 장면의 요청으로 도쿄에 있던 맥아더사령부(GHQ)에서 문익환, 박형규 등과 함께 근무했다. 휴전회담 당시 통역 업무를 맡는 등 한국에서 지내다 1970년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40년간 망명객의 신분으로 문필 활동을 통해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역사적인 평양 방문을 결행하여, <6·15남북공동성명>의 초석이 된 <4·2남북공동성명>의 기초를 마련했다.
1980년대 주사파의 대부로 여겨지는 김영환은 198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1991년 5월 19일에는 조유식과 함께 강화도에서 북한 잠수함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으나 주체사상의 한계를 느꼈다. 방북 후 돌아온 그는 하영옥 등과 함께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조직하기도 했다.
부산대 철학과 교수였던 윤노빈은 1982년 9월 싱가포르에서 가족과 함께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망명했다.
위에서 살펴본 이들의 북한 방문의 배경 및 역사적 의미는 다양하다. 먼저 최덕신, 오익제, 기대원, 법타 스님 등 종교인들의 북한 방문과 접촉은 남북한 사이에 종교적 측면에서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개인적 목적으로 방북한 김영환, 조유식, 윤노빈, 손원태의 방북은 주로 개인의 신념이나 철학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고, 손원태의 경우처럼 김일성 주석과의 어린 시절 친분이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89년 문익환, 정경모의 방북은 통일에 대한 의지가 부족했던 남북한 당국의 가교 역할을 하여 남과 북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에 기여하였으며, 통일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아울러 북측의 김일성,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의 협의를 통한 <4・2남북공동성명>의 발표는 <6・15남북공동선언>에도 영향을 끼쳤다.
같은 해 임수경, 문규현의 북한 방문은 문익환의 방북과 함께 북한 사회에 개신교와 천주교를 이해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기독교의 위상을 제고시켰다. 특히 천주교인이자 전대협 대표로서 방북한 임수경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북한 주민들을 감동시켰고,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영향을 끼쳤다.
마지막으로 정기열, 최기환, 홍석현 등의 북한 방문은 남북간의 화해협력 및 교류와 통일을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정기열과 최기환의 방북 및 통일운동은 일회성 행사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남북간의 교류와 화해와 통일운동을 위한 그들의 노력은 주로 해외에서 몇십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꾸준히 이루어졌다.
주목할 점은 1980년대 초중반에는 주로 해외동포 및 종교단체들이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고 특히 1988년에 남한에서 통일운동이 활성화되자, 북한에서도 외부 세력의 변화에 대응하고자 종교를 적극 수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는 남한 내의 개인뿐만 아니라 종교단체 등의 사회단체의 방북도 점차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남북간의 종교교류는 인도적 차원에서 통일 문제까지 그 인식의 폭이 확대되었다.

1970년대 북한과 해외 기독교인들의 만남
해방 이후 북한에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은 자신들의 체제에 호응하지 않는 종교세력을 탄압하였다. 북한은 천도교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온화한 정책을 취한 반면, 기독교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특히 반미주의적 관점에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에는 주민들에게 극도의 반종교 의식을 심어주었고, 반종교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북한 정권이 정략적으로 만든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및 조선불교도련맹 등 종교단체들의 활동마저 중지되었으며, 북한에서 모든 종교단체와 종교의식은 사라지거나 지하화되었다.
1970년대 들어서자 남북한 상호 교류 제의 및 외국에서의 접촉 시도가 이루어졌다. 국제정세가 데탕트 분위기로 전환되고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상황에서 종교집단은 활발한 대남활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강양욱 목사는 1972년 9월에 남북한 기독교인들의 직접 접촉을 언급하였다. 또한 1974년에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서신을 보내는 등 북한의 기독교는 타종교에 비해 일찍이 해외에 그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70년 중후반에 해외교포 기독교인들은 개인적으로 방북을 시도하였다. 1976년부터 미국이 북한에 대한 방문 금지를 해제함으로써 미국에 거주하는 교포 기독교인들의 북한 방문이 활기를 띤 것이다. 1976년에는 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 선우학원이 방북했으며, 1978년 당시 미국 연합장로교 선교부 중동지역 총무 이승만 목사는 고향방문 목적으로 북한에 간 후 강양욱 목사와의 면담이 성사되었다. 이를 통해 그는 미국의 장로교를 비롯한 미국교회 전체가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해외 거주 기독교인들이 개인적 목적으로 방북하였으나, 북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접촉을 시도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북한 기독교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활동이 정치적, 대외선전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양측 간에 인식의 차이가 있다는 한계를 간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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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기독교인들의 방북 쇄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북관계는 매우 호전되었다. 남북총리회담, 남북국회회담, 남북체육회담 등 연이은 대화와 접촉이 이루어졌고, 남북 이산가족과 예술공연단의 교차 방문이 성사되는 등 남북관계는 급진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종교를 대남 통일전선 구축에 이용하기 위한 노력을 가속화했다. 그리하여 북한의 종교인들을 해외에 방문시키고 국제적인 종교회의에도 참여케 했다. 그 일환으로 1980년대 초부터 해외동포들, 특히 기독교인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국제적 종교인회의를 주최하기도 했다.
1981년 11월 북한과 해외의 한인 기독교인 사이의 최초의 접촉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이루어졌다. 이 모임에는 재미 강위조 목사, 재독 이영빈 목사와 북한의 고기준 목사 및 전금철 조평통 부위원장 등 수십 명이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자주통일, 평화적 통일, 이념을 초월한 민족단결의 원칙을 강조하는 선언문(일명 ‘비엔나선언’)이 발표되었다. 다만 이는 북한과 해외에 거주하던 친북 기독교인들과의 만남이었고 ‘고려연방국가창립안’을 설명하는 정치 모임의 성격이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만남은 <7·4남북공동선언>의 3대 원칙을 재확인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두 번째 모임은 1982년 12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렸다. 이때 (1) 미군 철수·자주화의 실현, (2) 반독재·민주화 실현, (3) 통일 촉진 노력, (4) 전쟁반대·평화보장 등을 담은 <헬싱키 선언문>을 발표하였다.3 이 역사적인 대화는 1981년부터 1986년까지 네 번, 그리고 1990년과 1991년에 개최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북과 해외동포 기독교 신자들 간의 대화는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뿐이었고 그 후로는 북과 해외동포들 사이의 대화로 확대, 진행되었다.4 이러한 만남은 해외에 거주하는 남한교회 출신의 기독교인과 북한의 기독교인이 분단의 장벽을 깨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화해운동에 참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였다.
1984년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WCC 국제위원회가 주관하여 동북아시아의 정의와 평화협의회(일명 ‘도잔소 회의’)를 일본YMCA 시설 도잔소에서 개최함으로써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에 중대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 회의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문제를 한국교회와 해외교회들이 함께 본격적으로 협의한 최초의 회의였다. 아시아, 태평양, 유럽, 북아메리카 등 20여 개 국가에서 한국의 상황보고, 교회의 평화적 사명에 관한 논의 끝에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전망-도잔소 협의회 보고서와 건의안’(일명 ‘도잔소 보고서’)를 채택하였다. 그 내용은 분단극복과 평화통일은 화해 복음의 실천 및 목표이며 한반도 평화통일은 남북교회의 공동과제이자 세계교회의 공동책임이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5
이 회의에는 북한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이 공식 초청되었으나, 대표자들이 참석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도잔소협의회는 이후 북한교회와 세계교회, 남한과 북한의 교회를 맺어주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 회의에서는 북한 기독교 공동체와 접촉할 것을 각 회원국들이 촉구하는 건의안이 작성되었고, 이로 인해 WCC 산하의 각국 교회협의회들과 북한교회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도잔소 회의는 WCC의 주선으로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남북한 기독교인들의 직접적인 만남으로 연결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제1차 글리온회의가 1986년 9월 스위스에서 열렸고, 남한의 NCCK 대표 6명과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대표단 5명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이는 비록 이국 땅에서의 만남이었지만, 남북교회 지도자들이 분단 이후 최초로 만났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이러한 성과는 해외 한인 기독교인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후 1988년 11월에는 제2차 남북 기독교 대표자들의 만남이 글리온에서 성사되었고, 이들은 “1995년을 희년으로 선포하고 평화적 통일에 앞장설 것”을 결의하였다.
다음으로 1980년대 북한과 해외 한인 기독교인 간의 개인적 만남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이승만 목사, 이화선 목사, 이영빈 목사, 김성락 목사, 홍동근 목사, 고종옥 신부 등은 이후 북한을 자주 방문하면서 남북한 기독교 간의 가교를 놓는 데 토대를 마련하였다. 1981년 6월 이화선 목사, 이영빈 목사, 김순환으로 구성된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대표단의 방북은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의 대화’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또한 LA의 김성락 목사는 1981년 6월 방북하여 김일성과 오찬 및 면담을 했으며, 이를 계기로 교포 목사들의 방북이 잇따르게 되었다. 그는 이듬해 9월에 재차 방북하여 조선그리스도교련맹에 한글 성서와 찬송가집 수백 권을 전달했다. 아울러 홍동근 목사는 그해 9월 고향방문을 목적으로 방북했는데, 이를 기화로 그는 10년 후 김일성대학에서 기독교학을 강의하게 된다.
고종옥(마태오) 신부도 1984년 3월 북한을 방문하였다. 그는 방북 직후인 1984년 7월 남한 천주교회 북한선교부에 의해 해외활동위원으로 임명받음으로써 북한선교와 민족화해의 일치를 염원하는 한국교회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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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이후 기독교인들의 방북은 계속 이어졌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 문규현 신부, 임수경 등의 북한 방문은 북한 기독교와 통일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들의 기도와 강연, 예배와 미사 등이 북한 전역에 생생하게 방송됨으로써 기독교에 대해 다른 인식을 갖게 하였다. 아울러 이들의 방북은 북한에서 기독교의 위상을 제고시켰다. 1989년 3월 말에 방북한 문익환 목사는 평양 봉수교회에서 부활절예배에 참석하였고, 신구교 지도자들과 환담을 하였다. 또한 그는 두 차례에 걸친 김일성과의 회담 및 <4·2남북공동성명>을 통해 북한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통일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변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하였다.

1990년대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교인들의 행보
1990년대 들어 남과 북은 화해와 협력의 길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 정부는 ‘7・7선언’을 통해 “남과 북은 모든 부문에 걸쳐 교류를 실현할 것”을 선언하여 남북한 대결구도의 청산과 남북 교류협력 시대의 개막을 천명하였다. 1991년 12월 남북간에 진행된 고위급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국제적으로는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등 한반도와 주변 환경이 급속히 변화하였다.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남북한 교류에 관한 합법적인 제도가 갖추어짐에 따라 그동안 진보적 교회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남북교회 교류에 보수 진영의 교회가 참여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보수교회 지도자들의 방북이 성사되고 보수교회와 북한교회의 교류가 시작됨으로써 남북교회 교류의 지형이 달라졌다.7
1990년대에 들어 통일과 북한 선교에 대한 교회 관심이 증폭되면서, 진보와 보수의 연합운동이 일어났다. 1993년 4월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나눔운동’이 대표적이다. 남한 기독교는 북한을 선교 및 교류를 목적으로 접근하였고, 남한교회의 물질적 지원이 필요했던 북한에서는 나눔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나눔운동은 남북교회의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진보와 보수의 균형이 깨지고 복음주의권이 주축이 되는 느슨한 형태로 연합의 정도가 다소 완화되었다.
한편 ‘남북 기독교인들의 정례모임’이 1990년 7월부터 이루어져 ‘조국의 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도쿄회의’가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1991년 7월, 1992년 10월, 1994년 5월, 1996년 6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도쿄에서 모임을 가졌고, 1998년 10월에는 오사카, 2000년 12월에는 후쿠오카에서 7차 모임까지 이어졌다.
주목할 점은 1990년대 이전에도 남북 기독교인이 여러 차례 만났지만, 이 시기의 만남은 WCC나 미국, 일본, 독일 교회가 주최하는 형식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역할에 관한 토론회’ 자리였다. 즉 제3자의 중계로 남북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대화 주제도 평화와 통일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도쿄에서의 정례모임은 남북교회가 직접 만나 평화통일뿐만 아니라 선교라는 담론이 제기되었다. 그동안 북한에서는 ‘북한선교’를 제국주의 침략의 토대로 인식하고, 반면 남측에서는 이를 평화통일을 위한 기초로 인식하는 등 커다란 입장 차를 보였다. 그러나 남북교회의 선교적 사명과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평화와 통일이라는 영역에 있음을 인식하게 되어 선교에 대한 북의 거부반응은 약화되었다.
남북 기독교 모임은 다방면으로 이어졌다. 1991년 3월 LA에서 열린 남북 학자 심포지엄, 5월 북미기독학자 연례대회가 연이어 개최되었고, 1996년 3월 일본 교토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교 국제협의회 등을 통해 남북교계 지도자들의 이해의 폭이 확대되었다.
더불어 1980년대 1, 2차에 걸쳐 열린 글리온회의가 다시 1990년 12월에 재개되어 남북교회의 만남이 더욱 진전되고 그 내용도 심화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남북교회의 평화·통일교육 실시를 통한 통일의식 심화, 민족통일을 위한 연대사업의 전개, 당국간 상호 불가침선언 체결, 단계적 군비 축소, 이산가족 상봉과 고향방문의 실현 등의 내용을 선언하였다. 또한 이 글리온회의에서 남북한 교회 대표들은 해방 50년인 1995년을 희년으로 삼고, 희년5개년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글리온회의는 5년간 열리지 못하다가 1995년에야 네 번째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남북한 기독교인들은 판문점에 모여 ‘8・15 희년 공동예배’를 열기로 합의했으나, 남한 당국의 불허로 무산되었다.
1990년대에도 단체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방북도 진행되었다. 이에 대해 살펴보면 1980년대 중후반 이후 기독교인들의 방북이 꾸준하게 이루졌으며, 1990년 들어 해외동포의 북한 방문이 크게 증가하였다. 북한이 고향방문과 함께 관광 목적의 입국도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미 1991년 6월까지 열두 차례나 방문했던 홍동근 목사와 1992년 10월까지 열차례 방문한 이승만 목사, 1994년 초까지 일곱 차례 방문한 조동진 목사는 해외교포였다.
특히 1992년 5월에 있었던 조동진 목사의 방북은 남한 한국기독교출판협의회에서 수집한 기독교 관련 서적 2,500여 권을 전달하기도 했다. 곽선희 목사와 문규현 신부는 남한교회 소속이면서도 북한을 두 차례나 방문하였다.
1992년 1월 권호경 목사의 방북은 개인 자격이 아니라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의 남측 상대인 NCCK 총무 자격으로 이루어졌다. 그가 글리온회의에서 합의한 ‘희년 5개년 사업’을 협의할 목적으로 방북하였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아울러 그는 김일성을 만나 남북교회 간 교류 및 협조를 약속받아 북한교회의 위상을 높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맺음말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까지 방북한 사람들과 단체에 대해 검토해보았다. 그중에서도 남북한 종교교류는 남북한의 대화가 답보상태일 때 상호 이해의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한반도의 냉전적 상황에서 남북대화의 돌파구를 제시한 것은 국제종교기구와 해외동포 종교인들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는 기독교인들의 방북이 개인적 차원의 고향방문뿐만 아니라 통일을 위한 선교적 사명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통일 문제가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1981년 11월 북미, 유럽에 거주하는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와 북한의 조평통과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대표들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통일대화를 가졌다. 이는 남북한교회 간의 교류를 촉진시켜 주었다.
1984년 10월 WCC 국제문제위원회가 개최한 도잔소협의회는 조선그리스도교련맹과 남한교회 대표들이 초청되었지만, 북한의 대표단이 불참하자 남한교회 대표들은 WCC가 남북 기독교인들이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를 계기로 1986년 글리온회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글리온회의에서 NCCK 대표들과 조선그리스도교련맹 대표들이 WCC의 주선으로 통일대화를 처음 시작하였다. 1988년 11월 이들은 스위스 글리온 2차 모임에서 1995년을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한 희년으로 선포하였다. 이를 계기로 1980년대 후반부터는 남북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기독교인들이 공동으로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단체의 대표 자격 및 개인의 차원에서 방북한 황석영, 문익환, 임수경, 문규현 등이 있다. 1990년대에는 NCCK 총무 권호경과 남한교회 대표자들이 방북해 김일성과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이는 북한의 기독교를 변화시키고 남과 북의 통일에 대한 견해를 좁히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그간 북한은 정치적・군사적인 목적으로 남북대화를 시도하였고, 남한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 문제의 해결을 비롯한 사회・경제적인 목적으로 통일 논의를 해왔기에 결국 북한은 이들의 방북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반면, 남한은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기독교계의 통일운동을 사실상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 기독교인들의 통일을 향한 남북대화는 꾸준히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과 북의 기독교인들은 정치적・사상적 색채를 떠나 민족적 관점에서 이념을 초월하여 교류와 협력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분단된 남과 북 사이의 교류와 대화는 민족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1 김흥수, “한국 개신교의 통일선교 운동”, 「불교평론」 60호(2014년 겨울): 110.
2 김흥수・류대영, 『북한 종교의 새로운 이해』(다산글방, 2002), 177.
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위원회 편, 『1980-2000 한국교회평화통일운동자료집』(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00), 28.
4 김흥수, “분단 70년, 북한 기독교의 이해”, 「한국 기독교와 역사」 44호(2016. 3): 83.
5 이유나, “문익환의 통일론과 통일운동에 대한 연구”(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9), 128.
6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북한교회사 집필위원회, 『북한교회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454.
7 김병로 외, 『남북한 통합을 위한 종교교류・협력의 제도화 방안』(통일연구원, 2002), 72.



이유나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하고 “문익환의 통일론과 통일운동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 홍익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한신대 초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표 저서로 『문익환의 삶과 분단극복론』이 있다.

 
 
 

2020년 8월호(통권 7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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