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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 6·25전쟁 시기의 월북·납북자들
특집 (2020년 6월호)

 

  6·25전쟁 중에 납북·피살된 종교인들
  

본문

 

* 이 글은 필자가 발표한 글 “피살·납북된 목사·신부 등 358명 명단 발굴”(「월간조선」, 2003년 10월호)과 필자의 저서 『6・25전쟁 납북』(기파랑, 2006) 중 종교인 관련 내용을 주로 활용하였음을 밝힌다.


전쟁 이전의 종교 탄압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6・25전쟁 이전부터 수난을 당하고 많은 희생을 치렀다. 1948년 9월 북한정권이 수립되면서 종교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북한 공산정권의 종교 탄압과 기독교의 수난에 대해서 한국 천주교회사는 ‘침묵의 교회 형성기’ 또는 ‘제2의 박해기, 순교자들의 시대’로 규정한다.
천주교 박해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덕원 면속구와 함흥교구에서는 1949년 5월 9일 보니파시오 사우어(B. Sauer, 辛) 주교와 3명의 신부들이 체포된 이래 6・25전쟁 직전까지 73명이 체포 또는 피살되었다. 독일인 성직자 22명, 수사 25명, 수녀 20명, 한국인 신부 5명, 수녀 1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31명(외국인 25명, 한국인 6명)이 희생되었고, 42명은 후에 생환하였다.
덕원에서 시작된 교회 탄압은 평양교구와 황해도 교회로 이어졌다. 평양교구는 1949년 5월 14일 교구장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주교가 납치된 이래 6・25전쟁 직전까지 14명이 체포, 구금되어 모두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가장 늦게까지 성직자, 수도자들이 활동한 황해도 지역의 경우, 1949년 5월 20일에 체포된 한윤승(韓允勝, 필립보) 신부를 비롯하여 5명의 한국인 신부가 행방불명되었다.1
이는 전쟁 이전에 북한정권이 북한에서 자행한 천주교 박해의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 개신교에 대한 탄압도 이보다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에서 시작된 종교 탄압은 북한군의 기습남침 이후에 남한 점령지역으로 확대되어 많은 기독교인을 납치하여 북으로 끌고가거나 처형했다. 남한의 몇몇 지역에서는 교인들을 집단으로 학살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민간인 납북 관련 자료
전쟁 이후 종교인을 포함한 민간인 납북에 관한 자료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전쟁 중 많은 재산 손실이 있었고, 사회 전반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은 인적 손실이었다. 그래서 정부와 피해자 가족들은 피살 또는 납북 실상을 조사했고, 그 기록이 세월이 흐른 뒤에야 발굴되었다.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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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에는 종교인도 포함되어 있다. 「월간조선」은 1952년 공보처 통계국의 조사 내용을 정리하여 『6・25 납북자 82959명: 6・25사변 피납치자 명부』와 『6・25 피살자 59994명: 6・25사변 피살자 명부』를 2003년에 각각 두 권으로 출간했다. 이 네 책에 담긴 지역별 피살자와 납북자 명단에서 종교인을 골라낼 수 있다.
납북 민간인에 대한 종합적인 데이터베이스는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의 인터넷 사이트(www.kwari.org)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곳은 정부 기관이 아니라 민간단체인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다. 이 단체에서는 6・25전쟁 발발 직전부터 전체 전쟁 기간에 9만 6,013명이 납북된 것으로 집계하였다.2
위 표에서 제시한 6종의 자료 가운데 1954년에 치안국 정보과가 조사한 ‘피랍치자명부’는 인쇄 상태가 조악하여 글자가 보이지 않거나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자료로 활용하기는 어렵다. 또한 정부와 대한적십자사가 조사한 피살자 또는 납북자 자료 명단에는 직업이 기독교인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 사람도 많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독교계의 연구 자료와 정부가 전국에 걸쳐 작성한 피살자와 납북자의 명부를 정밀하게 조사하여 기독교의 피해 규모를 밝혀볼 수 있다.

납북 관련 자료에 수록된 기독교인들
정부와 대한적십자사의 납북자 명부 자료와 교회사 자료를 추가하여 피살 또는 납북 종교인들의 이름과 전체적인 규모를 집계했다. 정부 기록 외에도 민간 연구자들의 자료가 있는데 이를 참고로 하여 정부 조사 명단에 없는 이름을 추가하였다. <표 2>는 정부가 조사한 ‘피살자 명부’와 ‘피납치자 명부’의 직업란에 ‘목사’, ‘신부’, ‘장로’, ‘집사’ 등으로 명시된 교인을 비롯하여, 기독교사 관련 자료들을 추가 종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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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살 또는 납북된 평신도의 숫자를 합친다면 결과는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다. 1957년에 발행된 『기독교연감』에 따르면, 전쟁이 끝나지 않은 1952년 6월 25일 시점에 400명의 목자(牧者)가 희생되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북한에서만 장로교 교역자 240명, 감리교 46명이 순교 또는 행방불명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3 그런데 정부의 기록은 교역자의 직책을 명시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희생자의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의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면 위의 표와는 상당히 다른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목사 157명 / 천주교 신부, 회장, 천주교인, 천주교 사무원 23명 / 기독교인 11명 / 장로교 5명 / 감리교 3명 / 수녀 1명

기독교 연구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피살 또는 납치당한 개신교 교역자는 장로교 177명, 감리교 44명, 성결교 11명, 성공회 6명 등이었다.4 가톨릭에서는 남북한을 합쳐 한국인 52명(교구장 1, 신부 40, 수녀 7, 신학생 4)과 외국인 98명, 총 150명이 희생되었다.5 기독교인 납북자 178명과 기타종교인 39명을 더하면 216명이 된다는 또 다른 연구도 있다.6 기독교 성직자 처형 212명, 납북 100여 명으로 집계한 연구도 있다.7
연구자들의 논문과 납북자 명단을 토대로 정리한 숫자에 차이가 나는 현상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납북자 명단에 ‘기독교인’ 또는 ‘목사’ 등으로 직업이 구체적으로 기재되지 않았거나, 정부 자료에 수록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군이 점령했던 기간에 도처에서 무자비한 집단학살도 자행되었다. 대표적인 경우로는 1950년 9월 전남 영암읍교회에서 신도 24명을 학살한 사건이 있었고, 전북 옥구에서도 20여 명의 신도가 학살되었다. 전남 서쪽 바다 임자도에서는 구덩이를 파서 양민과 교인을 100명 혹은 150명씩 학살했다. 또한 10월 5일 새벽에는 임자진리교회 이판일 장로의 일가족 13명이 학살당했고, 교인 43명이 집단으로 학살당했다. 충남 논산 병촌교회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로부터 육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교인 60여 명을 집단으로 학살했다.8

희생과 납북
북한군의 서울 점령 이후인 7월 10일경, 과거 경동교회 교인이던 김욱(金旭)이 종로 YMCA에 ‘기독교민주동맹’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위원장으로 행세했다. 김욱은 8월 23일을 전후하여 많은 교인에게 집회에 참석하라는 초청장을 보내어 교인들을 유인하여 집단으로 납북했다. 김욱의 초청장을 받고 마지못해 불려나갔던 김유순 목사가 그 피해자였다. 이때 지하에 숨었다가 자수한 교역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궐기대회에 나가서 남북통일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틀 후 궐기대회에 참석했던 많은 교인들이 검속되었거나 북으로 끌려갔다.9
북으로 끌려간 종교인들은 갖은 고통을 당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사도 모르는 상태로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피살되거나 납북된 기독교인 가운데 중요한 인물을 임의로 추려본다.(아래에 언급하는 인물들의 나이는 1950년 6・25전쟁 당시의 나이)

피살 기독교인
1) 목사

•김예진(金禮鎭, 53) 후암교회 목사. 8월 2일 11시경 서울 신당동에서 여러 명의 북한군이 연행하여 군용차로 납치당했다. 그는 정부가 6・25 직후에 조사한 피살자 명부에 수록되어 있고, 『기독교대백과사전』(1984)에도 8월 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미아리 골짜기에서 피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1956년에 적십자사에서 납북 상황을 신고토록 했을 때에 가족들이 ‘납북’으로 신고했다. 가족들은 혹시라도 납북된 상태로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희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복(金正福, 61) 장로교 목사. 소록도교회에서 나환자를 대상으로 목회하던 중 체포되어 고흥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이 후퇴하던 9월 28일 애국청년 30여 명과 함께 고흥읍 뒷산에서 피살되었다.
•김종한(金鍾漢, 45) 전북 만경교회(장로교) 목사. 김제군 백산면 신기리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다가 1950년 같은 군 만경교회에 부임하였다. 9・28 수복과 함께 후퇴하던 공산군은 김종한 등 교인 15명을 김제 내무서 뒤뜰 우물에 생매장하였다. 이때 금산교회 장로 조기남, 주일학교 교사 김윤철, 대송교회 장로 정기봉을 비롯하여 김형배, 하치오, 김성두, 권태술 등을 죽였고 대창교회 목사 안덕윤을 잔인하게 창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박연서(朴淵瑞, 62) 석교감리교회 목사. 1949년 10월부터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을 지냈다.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가 8월 15일에 서대문형무소에서 피살되었다.(9월 19일 피살이라는 설도 있다.10)
•백남용(白南鏞, 54) 복음교회 목사. 과도정부 입법위원을 지냈고 전북 김제에서 목회했는데, 공산군 점령 치하에도 예배 인도를 계속하다가 8월 28일 연행되었다. 9월 27일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피살되었다.
•손양원(孫良源, 50) 전남 여수 나병원 애양원교회(장로교) 목사. 9월 13일 애양원에서 공산군에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치되었다가 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목사와 함께 피살되었다.
•원창권(元昌權, 51) 영광읍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이 진주한 후 피난을 가다가 11살 난 아들과 임신 7개월의 부인과 함께 피살되었다.
•유동희(劉東熙, 44) ‘피살자명부’의 제주도 피살자에 등재되어 있다. 7월 4일 평양 정치보위국에서 피살되었는데 어떤 경위로 평양에서 피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본적은 대동군 시족면 호남리이며, 주소는 강동군 원탄면 송오리였기에 북한 출신으로 월남하여 제주도에 거주하다가 어떤 경로로 북한에 갔다가 피살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정인태(鄭仁泰, 34) 전남 무안군 몽탄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에게 교회당을 빼앗기고 고향인 함평으로 내려갔다가 퇴각하는 공산군에 체포되어 10월 24일 죽창에 찔려 피살되었다. 그의 아버지 정재련(전도사)도 같은 해 12월 6일 함평에서 공산군에게 피살되었다.
•조흥식(趙興植, 37) 장로교 전도사였던 그는 8월 21일 빨치산에게 붙들려 간 후 팔치골에서 피살되었다. 한편 ‘피납치자명부’에는 그가 목사였으며 10월 20일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서 납북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 가톨릭 신부
•유재옥(劉載玉, 53)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서울대교구 겸이포 주임. 6월 24일 밤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납치되어 해주(海州) 형무소에 수감 후 10월 5일 해주 백사장에 생매장당했다.11 정부의 ‘피랍치자명부’에는 6월 중 종로구에서 납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현종(李顯鍾, 29) 세레명은 야고보. 서울대교구 신부. 7월 3일 도림동 천주교회 본당 사제관에서 피살되었다.

3) 성공회 신부
•윤달용(尹達鏞, 61) 세례명 모세. 성공회 서울대성전 관할 사제 겸 한국성공회 총감사제. 7월 18일 저녁 무렵 정동 3번지 대한성공회 구내에서 세실 쿠퍼 주교와 함께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연행되어 소식이 끊어졌다.
•Charles Hunt(홍갈로) 신부. 한국성공회 총감사제. 7월 18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 중에 11월 20일 해창리에서 사망하였다.

4) 구세군 사관
•노영수(盧永守, 46) 구세군 고등참령. 9월 5일 지리산 기슭에서 총살당했다. 그는 세계 구세군 100년 사상 첫 순교자로 기록되었다.

납북 종교인
1) 목사

•구자옥(具滋玉) 전 조선기독교중앙청년회(서울YMCA) 총무. 광복 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총무로 당선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1946년부터 제1대 경기도지사를 지냈다. 종로구 누하동 187번지 자택에서 납북되어 백암산 줄기를 따라 끌려가다가 용연(龍淵)에서 약 20리 떨어진 산속에서 숨을 거두었다.12
•김경종(金庚鍾, 56) 후암동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인 6월 28일 오전 7시에 서울 용산과 삼각지 사이 노상에서 인민군에 납치되어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노역 중이라는 사실을 원산에 살던 이 아무개 장로가 가족들에게 알려주었다.
•김유순(金裕淳, 69) 기독교대한감리회 제9대 감독. 1947년부터 북아현교회(현 아현감리교회) 목사를 지냈다. 8월 23일 오전 8시 50분경 서대문구 충정로3가 3의 140 자택에서 기독교민주동맹 김욱(金旭) 명의의 회의 소집장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자동차로 연행하여 납북되었다.
•김유연(金有淵, 50) 서울신학대학 교수. 서울 신공덕동성결교회 목사. 성결교 잡지 「활천」(活泉) 주무. 한국기독교연합회 기관지 「기독공보」 주필. 1923년 6월부터 1930년까지는 「동아일보」 경서(京西)지국을 경영한 일도 있었다. 1945년 9월부터 신공덕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임 중, 1950년 8월 10일경 마포구 공덕동 111-10호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 납북되었다.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건, 최석모, 박현명, 박유연 목사 등과 함께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납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전 이사장 김성호 목사의 아버지이다.
•남궁혁(南宮爀, 69)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 교수. 대한기독교연합회(현 NCCK) 총무. 1950년 8월 24일 밤 11시경 경기도 독도 중곡리에서 정치보위부 고급 간부 두 사람에 의해 연행되었으며, 납북된 후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현명(朴炫明, 48) 성결교 목사. 서울신학대학 교수. 광복 후 교회와 신학교 재건에 앞장서 1946년 재건총회 초대 총회장에 선출되어 3년간 시무하였다. 8월 23일 서대문구 충정로3가 35 기독교대한성결교 총회본부에서 김유순, 이건, 최석모, 박형규 목사 등 성결교 지도급 목사들과 함께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되었다.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이다.13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8월 10일 납북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형규(朴亨圭, 51) 성결교 목사. 서울신학대학 사감. 8월 23일 오후 3시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35 기독교대한성결교 총회본부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하여 납북되었다.
•송창근(宋昌根, 53) 조선신학교 교장. 8월 23일 오전 7시경 서울 중구 도동 자택에 보안대원이 와서 지프차로 연행.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북한으로 이송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납북되었다가 탈출한 사람이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다.14 한편 조철의 『죽음의 세월, 납북인사들의 생활실태』(성봉각, 1963)에는 1951년 7월 하순경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평양 근처의 대동군 문성리 산 아래 농가에 수용되었다가 사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5
•양주삼(梁柱三, 73) 적십자사 총재. 감리교 목사. 조선기독교서회 총무. 8월 23일 기독교민주동맹 김욱 명의의 소집통지서를 가지고 와서 서소문교회 목사 김동철과 함께 납북되었다.
•오택관(吳澤寬, 63) 장로교 목사.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독립운동가 및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제헌국회의원으로 한국독립당 옹진군당위원장을 맡았다. 9월 2일 저녁, 서울 종로구 혜화동 22-76 자택에서 민청원에게 연행되어 정치보위부에 감금되었다가 납북되었다.16 문화공보부 장관, 「동아일보」 사장, 기독교방송 이사장을 지낸 오재경이 그의 장남이다.
•이건(李鍵, 53) 서울신학대학 교수. 성서학원장. 1950년 8월 23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35번지 기독교대한성결교 총회본부에서 연행, 납북되었다.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김유연, 박현명 목사와 함께 8월 10일에 납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상현(崔相鉉, 61) 대한기독교신학교 교수로 재직 후 미군정청 군정장관 고문으로 활동하였으며, 돈암그리스도의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 8월 25일 저녁 9시경 성북구 돈암동 482-58 자택에서 인민군 2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된 사실을 들었으나 그 후 소식이 두절되었다.
•최석모(崔錫模, 61) 서울신학대학 교수. 1949년 기독교대한성결교 총회장 피선. 8월 23일 오후 3시경 서대문구 북아현동 1-379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에 의해 연행, 납북되었다.

2) 수녀
•장정온(張貞溫, 45) 세례명 앙네따.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초대원장. 10월 4일 행방불명. 정부의 “6・25사변 피랍치인사명부”에 따르면 10월 10일 순천에서 납북되었으며 순천시 천주교회 수녀원장이었다. 부통령과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인 장면(張勉)의 여동생. 『한국가톨릭대사전』(1992, 1994-2002)에는 전쟁 발발 후 평남 대동군 송림리 공소(영유본단 관할)에 피신해 있다가 10월 4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행방불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3) 장로
•김규식(金奎植, 74) 새문안교회 장로. YMCA 학관 교사 및 경신학교 학감, 중경(重慶) 임정 부수석. 6・25전쟁 후 피납되어 1950년 12월 10일 만포진 부근에서 사망하였다.

덧붙이는 말
전쟁을 전후하여 기독교인들이 혹독한 수난을 겪었다는 기록은 여러 종류가 있다. 피살과 납북된 기독교인들의 구체적인 자료가 많은데도, 종교계는 기독교인의 회생에 소극적인 자세로 외면하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7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납북된 종교인들 가운데 생존해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전쟁 당시에 처형된 종교인도 많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는 말아야 한다. 북한에서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 임무는 살아 있는 종교인들이 짊어져야 할 과제이다.


1 차기진, “6・25사변과 천주교회의 순교자들”, 「사목」(1994년 10월호).
2 이미일 외,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집 1』(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2006), 1118.
3 『기독교연감』 (대한기독교서회, 1957), 37-42.
4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신개정판(연세대학교출판부, 1993), 526.
5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911.
6 허만호, 『휴전체제의 전환과 전시(戰時) 민간인 납북자』(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2010), 80.
7 허만호, 위의 책, 29.
8 박완, 『실록 한국기독교 100년』 제6권(선문출판사, 1973).
9 박완, 위의 책, 42.
10 박완, 위의 책, 119-124.
11 차기진, 위의 글, 29.
12 조철, 『죽음의 歲月, 납북인사들의 생활실태』(성봉각, 1963), 78.
13 대한적십자사 편, 『이산가족백서』(대한적십자사, 1976), 201.
14 대한적십자사 편, 위의 책, 202.
15 조철, 위의 책, 127-128.
16 조철, 위의 책, 95, 118.



정진석 | 런던대학교 정경대학(LSE)에서 언론과 역사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언론중재위원, 방송위원, 한국신문협회정책자문위원장, 국무총리 직속 6·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이다.

 
 
 

2020년 6월호(통권 7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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