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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 6·25전쟁 시기의 월북·납북자들
특집 (2020년 6월호)

 

  납북자 가족의 시련과 고통
  

본문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납북자
6・25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전시 납북자 문제는 수많은 담론을 양산해내며 오늘날까지 역사의 수면 아래에 잠재되어 있다. 오래도록 침묵의 시간을 보내온 전시 납북자 문제는 2010년 6월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새로운 납북자 담론으로 주목받게 된다.
납북자는 한반도 분단의 산물인 동시에 민족상잔의 비극이 안겨준 아픔을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증인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일반인들에게 ‘납북’이라는 말은 ‘월북’이라는 말과 혼용되며 여러 가지 담론을 양산해왔다. 학술적인 정의나 전문가들의 분류법을 떠나, 납북이든 월북이든 관계없이 ‘북’(北) 자만 들어가면 듣기 싫어하고, 모두 빨갱이로 치부해버리는 분위기가 남한 사회 전반에 팽배하게 자리잡은 것이다.

정부가 규정하고 있는 납북의 개념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북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억류된 것”이며, 반면에 월북은 “어떤 기준선을 경계로 북쪽으로 넘어감” 또는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넘어간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북한에 가게 된 자의성 유무에 따라 납북과 월북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전시 납북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전시 납북자는 전쟁이 발생한 1950년 6월 25일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27일까지
6・25전쟁 중에 북한 인민군 또는 북한에 동조하는 자에 의해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북으로 납치된 민간인”으로 정의한다. 이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52년 당시 주한 미국대사를 역임한 존 무초(John Joseph Mucho) 대사의 보고이다. 그가 1952년 1월 4일 유엔군 사령부에 보낸 자료에 따르면, 전시 납북자의 구분을 납치, 강제의용군/청년대, 자원적 의용군으로 분류하고 있다. 해당 자료에는 납치된 인원 3만 6,472명, 강제의용군/청년대 7만 3,613명, 자원적 의용군 1만 6,240명, 이렇게 총 12만 6,325명으로 집계되어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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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발간한 납북자 명부에 따르면 약 8-12만여 명이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 6・25전쟁 당시 북한의 납치가 조직적으로 자행되던 1952년과 1953년에 작성된 공보처와 내무부의 자료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단지 1952년 작성된 정부 발행의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가 2002년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모두 12개의 명부가 발굴되었다. 물론 여기에 정전협정 체결 이후 북한이납치한 전후 납북자를 합하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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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전시 납북자 및 가족들에 관한 피해 보상 및 명예 회복 등에 대한 논의가 사회적 담론으로 확산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휴전 이전에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에서 출생한 남한의 주민을 실향민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최근까지도 납북자 문제는 이산가족 담론의 하위 분야로 취급하는 상황이다.
이산가족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전에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자와 남한 지역에서 월북한 자의 당시 가족으로 규정하고, 시기적으로는 전쟁 전, 전쟁 중, 전쟁 후로 나누고, 상황적으로는 납북자, 월북자, 탈북자, 북송동포, 재중탈북자 등으로 나누어 구분한다. 그러다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이산가족의 범위가 대폭 확대되면서 이산가족을 과거 시기 및 상황에서 벗어나 ‘광의의 이산가족’ 또는 ‘특수이산가족’의 개념으로 정의하였다. 전시납북자, 미송환 국군포로, 비전향장기수, 월북자, 탈북자(북한이탈주민) 등과 함께 전후납치자(강제 납북자), 미귀환 공작원의 경우까지 ‘특수이산가족’으로 분류하여 이산가족에 포함시킴으로써 전시 납북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들의 가족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의 논의는 항상 후순위로 밀려나 있는 것이다.

전시 납북자의 역사와 배경
전시 납북자가 나타나게 된 배경에는 김일성에 의한 6・25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 6・25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은 낙동강 이하 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 국토의 90%를 점령 통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북한군은 부족한 인력 충원을 목적으로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납치와 강제동원을 자행한 것이다. 북한은 ‘북조선 군사위원회’ 결정사항 18호(1950년 7월 17일)를 통해 “서울의 식량사정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북조선 내 농업 및 산업현장으로 서울시민 50만을 후송하라.”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은 북한의 김일성이 전쟁 이전부터 남한 주민의 납치를 기획했다는 점이다. 김일성은 1946년 7월 31일 “남조선에서 인테리들을 데려올데 대하여”라는 담화문(『김일성전집』 4권, 1992.)을 통해 남한에서 기술 인력을 비롯한 노동력을 확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또한 1950년 6월 26일 “모든 것을 전쟁 승리를 위해서”라는 주제의 연설(『김일성 선집』 3권, 1992, 10.)에서 ‘인민적 방조’를 언급하면서 남한 주민들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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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군사위원회는 남한의 인사를 다섯 가지 원칙에 의해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북한 정권의 수립에 참여한 남한의 정당과 단체, 둘째는 남한의 행정부와 국회, 정당, 사회단체 등에 잠복해 있던 북한의 프락치(간첩), 셋째는 남북 정치 협상에 참여했던 정당・사회단체 지도자와 개별 인사들이었다. 넷째는 자수 혹은 자발적으로 협력해오는 사람들, 다섯째는 연행 또는 체포해야 할 인사들로 구분하여 관리하였다. 특히 ‘군사위원회 8호’로 결정된 ‘모시기 공작’을 통해서는 남한의 인사들을 체포·구금하였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으로 후퇴하면서 강제로 압송해 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북한에 의해 납북된 사람은 남한의 주요 인사들뿐만 아니라, 의용군으로 징발된 자들, 전문직에 종사하던 사람들, 강제 노역으로 끌려간 이들도 대거 포함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전시 납북자들은 북한의 의도에 따라 ‘기획납북’과 ‘동원납북’으로 유형화할 수 있다. ‘기획납북’이란 북한이 체제 수립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기 위해 6・25전쟁 이전부터 구체적인 계획과 준비를 갖추고 전쟁 개시 이후 즉각적으로 납북을 실행한 경우를 뜻하며, ‘동원납북’은 전쟁 시기에 북한의 특정한 목적(병력 충원, 물자 수송 등)을 위해 강제로 인력을 동원한 사례를 뜻한다. 여러 가지 증거와 특정 상황을 종합해볼 때 북한의 남침은 영토의 야욕과 함께 전시 납북과도 관련이 있고, 사전에 이미 계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증거자료들이 명백하게 존재하지만 북한은 최근까지도 전시 납북자들을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온 사람들이라고 강변하고 있는데, 2003년 북한에서 출간된 『민족과 하나』에서 김흥곤은 “랍북이냐, 구원이냐”라는 글을 통해 “납북은 구원이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납북의 주된 원인을 북한의 정통성 강화를 위해서 자행된 범죄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게 되었으며, 1948년 12월 말 철수할 때까지 내부적으로는 소련에 의한 해방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국가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전략적인 차원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선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납북자를 자발적 귀순자로 포장시켜 체제 경쟁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물론 역사적 사실로서 북한에 의해 강제로 납치돼 북으로 간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자의로 북한으로 간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또한 남한에 남아 있는 가족이 자신들이 받게 될 피해가 두려워 강제 납북되었다고 허위 신고를 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가족과 헤어져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상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발적 귀순자라는 북한의 주장은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더욱이 전쟁으로 인해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가정을 책임져야 할 가장(자식)들이 가족을 등지고 자진 월북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혹여 그들이 북한의 주장처럼 자진해서 북쪽으로 온 것이라면, 왜 많은 납북자가 가족과 함께 북향하지 않았는지 합리적인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정리하면, 북한은 내부의 정통성 확보와 국가의 재건을 위해 남한 내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들뿐만 아니라 기술자, 간호사 등 도움이 되는 인력이라면 가리지 않고 북송시켰다. 결과적으로 전시 납북과 전후 납북, 기획납북과 동원납북 모두 단순히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북한에 의해서 치밀하게 계획된 전쟁범죄 행위이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유엔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6・25전쟁 당시의 전시 납북 문제를 북한에 의해 자행된 반인권 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남겨진 사람들과 고통의 기억
전시 납북으로 인해 남한 사회에서 납북자 가족으로 낙인찍혀 살아가게 된 사람들은 가족의 피랍(被拉)과 이산(離散)이라는 아픔을 겪었으며, 이는 극도의 공포와 분노로 전이되어 그들 곁을 평생 따라다녔다. 전쟁은 끝났지만 돌아오지 않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마저 사회적 시선과 제약으로 인해 표출할 수 없었고,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이러한 삶의 구조 속에서 납북자 가족들의 침묵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고, 원망과 회한은 가슴의 한(恨)으로, 삶의 질고(疾故)로 남게 되었다.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홍릉로 28 성일빌딩 2층에 가면 지금도 남겨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전시 납북자 가족들로 구성된 단체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그곳에서 70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이 단체는 1951년 8월 ‘6·25사변피랍치인사가족회’로 출범하여 지금까지 수많은 납북자 가족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다. 남겨진 가족들은 아직도 북한에 의해 납치된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1936년생) 씨는 가족이 납치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허탈함과 그런 것이 맘에 쌓여서 나이 드니까 심장병이 생기더라고. 아버지가 고문당하신 거 생각하면 자다가도 팍팍 일어나게 되고. 그 악몽이 끔찍해요. 왜 학살하냐 이거냐. 사람을. 자기네 이데올로기가 아니면 거기서 끝나야지. 서로가 달라서 대립 상태면 그만이지, 거기서 끝나야지, 왜 구덩이 파놓고 죽이냐고.”
유○○(1924년생) 씨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증언하고 있다. “그 당시에 형하고 아우하고 다 없어지니까, 9·28 수복하고 나니까 우리를 빨갱이로 지목하더라고. 우리 시아버님은 당시 이장을 했고, 빨갱이 아니고 결백한 민주주의거든. 그랬는데도 아들 형제가 하나는 인민군 가고 하나는 행방불명이니까 오해를 받았어.”
김○○(1940년생) 씨는 그동안 무응대적인 자세와 방관적인 태도로 인관해 온 정부에 대해서도 섭섭한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잘못해도 엄청 잘못하는 나라죠. 이북에서는 아직도 우리는 납치해 간 사실이 없고, 있다면 자기들 발로 공산주의 사상이 좋아서 걸어갔지, 우리는 붙잡아 가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있잖아요. 정부에서 납북이라는 사실은 정부 요직이 다 알고 있는 엄연한 사실인데, 그러면 그 당시 공직에 있던 분들은 국가에 몸담고 있던 분들이 납치됐다면 거기에 대한 보상이라면 치사스럽겠지만, 응분의 사과나 명예회복이나 이런 등등은 해야 한 나라의 정부지….”
이처럼 필자가 만난 전시 납북자 가족들은 한결같이 납북된 가족의 명예회복을 바라고 있었다. 권○○(1946년생) 씨는 “아버지가 저를 안고서 <신라의 달밤>이라는 노래를 가르쳐준 것을 기억합니다. 그건 안 잊혀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보고 싶어요.”라고 말끝을 흐렸다. 정○○(1938년생) 씨는 “좌익활동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잃은 것도 없었죠. 그 사람들이 지금은 외지로 나가서 애들 교육도 하고 그랬으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결국 전쟁 고아로 컸으니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그렇게 산 것 같아요.”라는 말로 남겨진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을 토로하였다. 이어서 그는 “우리가 바라는 바는 명예회복, 그것이 우선이죠. 그래도 이렇게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해요. 이 다음에 우리 후손이 충무비에 가서 할아버지가 이렇게 됐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을 뿐이에요.”라는 말로 가족의 명예회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전시 납북자가 돌아오지 못한 채 잊혀져가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가족들은 남겨진 채 기다림과 그리움의 굴레와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 납북자 가족들은 북한에 의해 가족들이 납치당함으로써 1차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남한의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한 국가폭력, 즉 연좌제와 더불어 사회적인 차별이라는 또 다른 2차 폭력의 피해를 받았다. 지난 수십여 년 동안 납북자 가족들은 한쪽에 의해 가족을 잃은 고통을 받게 되었고, 다른 한쪽에 의해 평생을 감시당하는 삶을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북한 당국에 의한 납치 규모와 인권 침해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그 가운데 6・25전쟁 기간 중 무고한 남한 민간인들을 강제로 끌고 간 행위야말로 반인도적・반인권적 범죄이며, 이는 남겨진 가족들에게 지난 70년 동안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남겼다.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간접적 폭력 사례를 가장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연좌제라고 할 수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한국 정부는 가족 중 일원이 북한에 납북되거나 월북하였을 때 남한에 남아 있는 가족을 항시적으로 감시했다. 납북자 가족들은 ‘북한에 협조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이라는 오해와 우려, 그리고 자진 월북자라는 의혹으로 인해 취업, 해외여행, 훈장, 공직 진출 등 각종 권리와 기회가 차단되거나 제한되는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2017년 5월 국무총리 소속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는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조사보고서”를 통해 연좌제 피해 현황을 보고하였다. 4,777명의 납북 결정자 중에서 연좌제를 적용받은 피해자들은 322명(6.7%)으로 나타났다. 납북자 가족을 둔 이유로 피해를 당한 사례를 살펴보면 시험, 취업, 승진 혹은 군복무상의 불이익이나 해외 이주 및 여행 시 신원조회상의 불이익 195명(60.6%)으로 나타났으며, 주변으로부터의 따돌림, 기관으로부터의 감시 등은 104명(32.3%)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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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발발 후 30년이 지난 1980년에 우리 정부는 공식적으로 연좌제를 폐지하였다. 헌법 제13조 3항에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라는 내용이 추가되면서 납북자 가족들은 연좌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내무부는 새 헌법 규정에 따라 해방 직후의 혼란과 6・25전쟁 등 특수적인 정치상황 아래에서 발생한 ‘신원특이자’들에 대한 기록을 일제히 삭제했다고 했는데, 그 대상이 약 67만 명(“連坐制 폐지”, 「동아일보」, 1980년
8월 1일)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에 따르면, “당시 납북자 가족들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던 정부가 삭제한 인원을 공표함에 따라 이는 역으로 납북자 가족들에 대한 국가폭력이 자행된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70년을 돌아보며
전쟁이 발발하고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사라진 사람들과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납북자들이 사라진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가족은 남겨진 사람들로 지금도 우리 주변에 머물고 있다. 납북자 가족의 생애사에 대해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폭력을 당했다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다. 분단이 만들어놓은 인위적인 금기의 체제 때문에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인권과 사회・정치적인 권리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차별과 편견의 시선을 감내해야만 했던 이들이 전시 납북자 가족인 것이다. 납북자 문제는 북한에 의해 납북된 사람뿐만 아니라 남겨진 가족과 주변인들이 함께 연결되어 있는 고통과 기억의 공간이다.
6・25전쟁은 민족 분단의 아픔을 낳은 ‘역사의 상흔(傷痕)’이다. 올해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을 맞는 해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강산이 일곱 번 변할 동안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잊혀져가고 있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나마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이들조차도 이제는 하나둘씩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얼마 남지 않은 납북자 가족들마저 고령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있다. 헤어진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는 일은 그들의 남아 있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70여 년간 이어진 남과 북의 단절과 이념 대결, 그리고 남남 갈등으로 인해 파생된 납북 피해자, 납북 가족들은 오랫동안 그 피해 사실을 숨긴 채 살아왔다. 그들의 ‘침묵’에 동조할 수밖에 없게 만든 정부, 그리고 사회적인 차별에 동조한 우리 자신들에 대해 통렬한 반성을 촉구한다. 그리고 실질적인 보상에 대한 논의가 이제부터라도 시작되어야 한다.
납북자들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지만, 그들의 이름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삶은 우리 곁에 없지만, 그들이 남긴 가족들은 지금 우리 곁에 있으며 앞으로도 함께 있을 것이다.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예방하고 또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더욱 어루만져야 하는 것이 우리 한반도 구성원들의 숙명이다. 차별이 아닌 통합을 더욱 중요한 화두로 내세워야 할 시점이다.


1 존 무초의 보고 자료는 당시 대한민국 내무부가 전국에 걸쳐 납북자의 성명, 출생지, 연령, 납치된 장소와 날짜를 조사해 명부를 작성했다고 기록했다.
2 전후 납북자의 대부분은 어선원으로 전체 3,835명 가운데 3,729명에 이르며, 이외에 대한항공(KAL) 납치 50명, 군・경 30명, 기타 26명이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 2010)


여현철 | 고려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통일·북한의 공간적 이해』, 『기독교와 통일 그리고 북한』 등이 있다. 한국정치학회 총무이사, 한국평화연구학회 연구이사, 전국대학통일문제연구소협의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였다. 현재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통일부가 지정한 통일교육위원 서울협의회 및 서울통일교육센터의 사업단장 직책을 수행하고 있다.

 
 
 

2020년 10월호(통권 7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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