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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결혼, 이혼, 비혼동거]
특집 (2020년 5월호)

 

  사람은 결혼해야 하는가: 비판적 성서 독해를 통한 통찰의 모색
  

본문

 

결혼으로 부부의 연을 맺으면 죽으나 사나 끝까지 함께 살아야 한다고 믿던 시절이 한때 있었다. 특히 남편이 외도를 해도,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해도 아내로서 정숙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며,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 여성이 많았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이혼과 재혼이 공론의 장에서 논의되기 시작하더니, 최근 몇 년 사이에 동거와 비혼, 사실혼, 자녀 없는 부부생활 등 결혼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가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성인 남성과 여성이 ‘법적으로’ 부부가 되고 자녀를 낳아 온전한 가정을 꾸리는 것만을 정상적이고 성숙한 삶으로 간주하던 전통적인 결혼 제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사회 현상의 원인을 이기적인 여성들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고, 고생을 모르고 자라 책임감과 인내심이 부족한 청년들의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 전체의 정치·경제·문화적 변화와 관련하여 이 문제를 들여다보면 상황은 복잡하며 원인은 다양하다.
한편에는 전통적 결혼 제도를 떠받치는 가부장주의에 대한 반발이 있는 것 같다.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은 많은 여성은 한쪽 성의 더 큰 희생을 강요하는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 결혼이 여성의 자아실현에 장애물로 여겨지는 것이다.(유사한 맥락에서 여성보다 수는 적지만 비혼의 삶에서 자아실현과 삶의 즐거움 및 의미를 추구하는 남성들도 있다.)
다른 한편에는 1997년 IMF 사태 이후 장기간 지속된 경기침체가 있는 것 같다. 현재 취업의 기회조차 얻기 힘든 한국의 20-30대는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첫 세대이다. 연애, 결혼, 출산 이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삼포세대’라 부르는데, ‘포기’라는 말이 암시하듯 이들은 결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다. 그들의 불안정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결혼은커녕 연애마저 사치로 느껴지게 만든 것이다. 특히 남성이 여성보다 결혼자금 및 생활비 마련에 더 큰 부담을 느낀다는 조사 결과를 보면, 장기적 경기침체의 상황에서 가부장주의가 남성에게도 짐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게 된다.
이처럼 전통적인 결혼 제도에 의문이 제기되고, 여러 대안이 모색되고 실험되며, 그 과정에서 세대별, 성별 갈등이 불거지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성서는 우리에게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첫 번째 문제는 성서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태도가 과연 정당한가이며, 두 번째 문제는 성서가 제시하는 답이 절대불변의 진리인가이다. 주지하다시피, 성서가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서가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서에는 결혼 및 가정과 관련된 본문들이 있다. 성서 본문이 결혼을 둘러싼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구체적 문제들에 대해 실질적인 해답을 제시해줄 수는 없겠지만, 성서의 결혼 및 가정 이해, 그리고 이에 대한 교회의 해석을 살펴봄으로써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인간의 의해 기록된 역사적 산물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성서 본문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으며, 저자의 가치와 전제를 반영하기도 한다. 나아가 같은 문제에 대해 다른 답을 제시하는 본문들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 본문을 다룰 때, 역사적 상황과 저자의 의도를 고려해야 하며, 궁극적으로 본문의 메시지가 복음에 합당한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이제 이러한 전제 위에서 결혼과 가정생활을 다룬 성서 본문들을 살펴보면서 21세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지 탐구하도록 하겠다.

결혼과 가정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이해: 가부장제적 결혼 제도의 신성화
창세기의 창조설화, 이혼을 금지한 예수의 말씀,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는 바울의 말과 그에 근거한 제2바울서신의 가정훈령 등을 종합하여 교회는 오랫동안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해 어떤 통일된 가르침을 주는 경향이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그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다. 이리하여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이 되며, 여자를 다스린다.(창 2-3장) 남자가 가부장이 되어 아내와 자식을 다스리는 가정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속한 만큼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며, 그래서 예수는 이혼을 절대 금지했다.(막 10:1-12, 마 19:1-12) 바울도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고전 11:3, 참고-고전 14:35)
특히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가정규례는(엡 5:22-6:9, 골 3:18-41, 참고-벧전 2:11-3:12)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가부장제적 결혼 제도를 신성한 것으로 제시하기 그만인 본문이다. 가정규례는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의 관계를 진술하는 세 쌍의 호혜적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쌍에서 전자는 종속적 존재를, 후자는 우월한 존재를 나타내며, 후자에게는 전자를 향한 자애와 사랑이 요청되는 반면, 전자에게는 후자에 대한 복종이 요구된다. 특히 에베소서 5장 22-33절의 아내와 남편을 위한 규례는 결혼식 주례사로 많이 인용되는데, 부부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므로(23절), 아내는 주님에게 복종하듯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22절).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해서 자신을 내준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25절) 그리스도가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흠 없게 하는 것처럼 남편도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26-28절)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과 자애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주종관계가 희석되는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남편과 아내에게 다른 덕목을 요구한다는 것은 둘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를 반영한다. 이것은 주인과 노예에 대한 호혜적 권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부장주의 사회에서 지배자가 아무리 자애롭다고 해도 주종 관계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진정 성서와 기독교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결혼과 가정의 이상향인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기치 아래 성평등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와 너무나 대치되는 메시지가 아닌가? 근래 결혼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이슈들이 가부장주의와 경제적 양극화, 그로 인한 계급의 고착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때,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부모와 자식 사이의, 주인과 노예 사이의 위계서열을 정당화하는 교회의 성서 해석은 아무런 통찰을 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대를 역행하며 반동적이기까지 하다. 현대 사회와의 대립을 논하기 전에 결혼과 가정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 3:28)라는 복음의 평등적 에토스와 대립하지 않는가? 여기서 성서 본문을 그것을 탄생시킨 역사적 상황과 연결하여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섬세하게 찾아내는 비판적 독해가 요구된다.

로마제국의 질서 아래에서 자리 잡은 교회의 가부장주의화
초대 교회의 세례고백문으로 바울에 의해 인용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 함축하는 것처럼, 가부장적 사회 구조 안에서 정교한 계급질서를 발전시킨 로마제국과 달리 초대 교회는 인종(유대인과 헬라인), 성(남자와 여자), 계급(자유인과 종)을 뛰어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을 추구하는 에토스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만큼 초기 교회는 제국의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빠른 속도로 많은 여성과 노예를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제국의 질서와 대치하는 부분이 많았지만 기원후 70년대까지 기독교는 제국이 허용한 유대교의 우산 아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기원후 80년대 이후 유대가 대로마항쟁에서 패배하면서 성전과 영토를 잃고 바리새파를 중심으로 새로운 유대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에서 추방되었고, 그 결과 유대교와 기독교는 결별하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가 제국 안에서 매우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무렵부터 본격화된 로마 당국의 기독교 박해가 이를 보여준다.
제국의 엄격한 계급질서 아래에서 살아가는 일반인들의 눈으로 볼 때, 인종과 성, 계급을 초월한 전대미문의 공동체는 불온세력으로 보였을 것이다.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는 시대에 교회는 복음의 정신을 지킴과 동시에 제국 안에서 살아갈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한편으로는 세상의 나그네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집’ 역할을 함으로써 복음의 정신을 지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사회의 위계질서와 가부장제 질서를 받아들였다.(박경미, 『신약 성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전하다』, 251-267.) 여러 학자에 따르면, 제2바울서신과 베드로전서, 그리고 목회서신의 가정훈령은 그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기록되었다.
신약성서의 가정규례는 그리스도론적 해석이 부가된 것을 제외하면 당시 그레코-로마의 가정규례와 유사하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그 본문들을 그레코-로마 가정훈령의 개작으로 본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레코-로마의 가정훈령이 그 세계의 지배와 통치체제를 반영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당시 지배적인 정치 및 경제 양식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앞서 암시한 것처럼, 고대 그레코-로마에서 가정의 범위는 핵가족이 아니라 노예와 후원관계에 있는 친구를 포함할 정도로 광범위했으며, 따라서 그 안에서의 지배관계과 경제관계는 그대로 그 사회의 정치·경제 관계를 반영했다. 이것은 그레코-로마 세계에서 가정규례가 국가관리 및 결혼에 관한 논의와 관련하여 제시된다는 데서 드러난다.
사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정은 국가와 세계의 축소판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초기 교회는 가정교회의 형태를 띠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2바울서신과 목회서신의 가정규례는 그리스도인 가정을 넘어서서 교회 자체가 가부장주의화되고, 나아가 로마제국의 지배질서에 일정 부분 순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베드로전서의 가정훈령(2:11-3:12)은 국가에 대한 복종까지 포함하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베드로전서를 비롯하여 제2바울서신과 목회서신의 가정훈령은 그때까지도 교회 안에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들과 노예들이 많았음을 반증한다. 가정훈령은 그들이 비그리스도인 이웃들과 당국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그 사회의 통념을 권면으로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피오렌자,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신학적 재건』, 299-330.)
그러나 예수가 가부장제 질서와 계급질서에 직면하여 그것을 타파하려 했고, 바울이 복음의 빛에서 이와 관련된 자신의 시대적 편견과 한계를 극복하려 한 데 반해, 이후 교회와 교부들에게서는 복음의 평등적 에토스와 제국의 질서 사이의 긴장은 느슨해졌고, 결국 추는 제국의 지배질서로 기울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부장적 결혼 제도를 옹호하는 설교와 가정훈령은 복음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가정: 가부장적 결혼 제도로부터의 해방
그렇다면 성서와 복음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결혼 및 가정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는가? 성서는 직접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의 공생애와 바울의 사역에서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한 기원후 30년 무렵의 갈릴리는 로마에 바치는 세금, 성전세와 십일조의 삼중고에 소규모 자영농이 소작인으로, 자유인이 노예로 전락할 만큼 황폐화의 일로를 걷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듣던 대다수 민중에게 가난은 주어진 삶의 조건이었고, 때가 왔다는 그의 외침은 이 가난한 자들에게 가장 먼저 전달되었다. 마가복음 10장 32-45절에 따르면, 예수는 제국와 성전의 지배구조와 참된 제자직을 대조하며 지배질서를 전복한다. 그는 제자들 가운데서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청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42-44절)
이것은 분명 지배자와 피지배자, 부자와 빈자, 주인과 노예가 존재하는 사회질서를 전제하며, 종말론적 역전의 희망 속에서 이 모든 계급질서를 거꾸로 세운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서 가부장제에 균열이 생기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평등의 에토스에서 비롯된다. 사실, 가부장제는 여성의 출산을 남성의 통제 아래 둠으로써 사유재산을 지키려는 욕망에서 유래했다. 나아가 로마제국이 무제한적 사적 소유를 열렬히 추구하며 법을 무기로 피지배 백성을 악랄하게 착취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로마제국하에서 빈곤과 가부장제는 깊은 관련성을 맺는다. 이것은 예수가 회당과 잔치에서 상석을 차지하고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과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전 재산을 헌금으로 내놓는 가난한 과부를 대조하며 비천한 과부를 높일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막 12:38-44) 예수가 식민지적 상황에서 파괴된 갈릴리의 가정과 마을의 회복을 추구하면서도, 가부장제를 넘어서는 결혼 및 가정 이해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수는 이혼을 금지했다.(막 10:2-9, 마 19:1-12) 그러나 그가 이혼을 금한 맥락을 살펴보면 이것은 가부장제적 결혼 제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도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에 빠뜨리려고 모세법을 근거로 남자가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 것이냐를 물었을 때, 그들은 가부장제를 전제하고 있다. 여기서 아내의 운명은 남편의 처분에 달려 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고 둘이 한 몸을 이루었다는 창조설화를 근거로 이혼을 금한다. 바리새파와 대결하는 맥락에서 이것은 예수가 결혼을 남성과 여성이 공통적인 인간적 삶과 사회적 관계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피오렌자, 위의 책, 181-182.) 예수는 하느님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본래의 뜻을 바로 세우기 위해 모세의 법마저 수정한다. 심지어 바울은 이혼을 금한 예수의 전승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그리스도인 배우자가 이혼을 원할 경우에는 이를 허락한다.(고전 7:15) 이것은 결혼이 구원의 조건이 아님을 보여준다. 나아가 이혼 문제와 관련하여 예수는 모세법을, 바울은 예수의 말씀을 수정했다. 이것은 이혼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혼생활이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한 본래 목적과 복음에 합당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임을 일깨워준다.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보여준 평등의 에토스 덕분에 그의 주변에는 남성 제자들만이 아니라 여성 제자들도 많았다. 근래의 복음서 연구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남성으로 이루어진 열두 제자에 국한되지 않으며, 남성 못지않게 활약한 여성 제자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에게도 겐그리아교회의 “사역자” 뵈뵈, 바울의 “동역자” 브리스가(와 아굴라) 등 여성 동료가 많았으며(참고-롬 16장), 그들은 지역 교회에서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다. 이처럼 가부장제를 초월하는 초대 교회의 분위기 속에서 일부 여성들은 복음을 위해 독신생활을 택하기도 했다.
이는 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바울 자신이 과거에 결혼을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적어도 사도가 된 이후에는 독신이었고,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믿었기에 그리스도인에게 이를 장려한 측면도 있다.(고전 7장) 2세기 후반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외경 『바울과 테클라 행전』에 따르면, 테클라는 정혼자를 버리고 바울을 따라나선 것으로 그려지는데, 여인들이 마치 바울에게서 권한을 받은 것처럼 세례와 가르침을 베푼다고 테르툴리아누스가 비난한 기록을 보면, 많은 여인이 테클라를 본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당시 여성 그리스도인들에게 독신주의와 수덕주의(asceticism)는 가부장주의가 여성에게 지운 한계를 뚫고 자아를 실현하는 일종의 해방구였다.(캐롤 A. 뉴섬·샤론 H. 린지, 『여성들을 위한 성서주석-신약편』, 378-379.) 이처럼 바울과 그를 따르는 일부 남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헌신하기 위해 독신을 택한 사실 역시 결혼이 구원의 조건이 아님을 말해준다.
무엇보다도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빛에서 가정을 새롭게 정의했다. 예수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했다.(막 3:35) 그리고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라고 선언했다.(마 23:9) 하느님의 가정 안으로 초대된 사람들은 인종, 성, 계급에 따른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한 분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 아래에서 모두 형제자매가 되었다. 하느님에게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 가정은 가부장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느님 외에 어떤 인간 아버지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부장적 성격을 벗어난다. 하느님에게만 ‘아버지’란 칭호가 돌려지는 한, 하느님의 가정에서 가부장주의는 로마제국에서와 같은 위세를 떨치지 못한다.(비교. 피오렌자, 위의 책, 187-190.; 박경미, “예수/예수운동과 가정: Q공동체와 역사적 예수의 층위에서”, 「신약논단」, 25권 3호, 655-688.) 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가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예표라고 할 때, 하느님 나라, 다시 말해 하느님의 가정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실제 그리스도인 가정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상으로 성서에 나타난 결혼과 가정 이해, 이에 대한 교회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로부터 이혼과 재혼, 동거와 비혼, 사실혼처럼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직접적인 해답을 들을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첫째, 가부장제적 결혼 제도에 들어가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은 결혼에 대해 열린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결혼은 부부 사이의 상호 존중과 동등한 파트너십이 전제된 사랑이 흐를 때에만 복음의 정신과 일치하며, 그러한 관계를 법적 결혼생활 안에서 찾을 수 없을 때 또는 다른 관계 양식에서 실현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 여러 가지 다른 대안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기존의 가부장적 결혼 제도의 변화는 사회의 불의한 정치·경제·사회 구조의 개혁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근대 이후 사적 영역으로서의 가정과 공적 영역으로서의 사회가 분리되었다고는 하지만, 가정은 여전히 사회와 세계의 구조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사회에 경제·정치적 불의가 만연하고 보이지 않는 계급질서가 존재하는 한, 건강한 결혼과 가정생활은 불가능하다. 초기 교회들이 새롭게 맞닥뜨리는 상황과 문제들을 복음의 정신에 비추어 헤쳐나가려고 한 바울처럼, 우리도 복음에 대해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그것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물론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그리고 걸음을 잘못 내딛어 복음이 현실에 먹혀버릴 위험을 의식하면서….


장양미 |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독교학과에서 신약신학 전공으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논문으로 “바울의 자유 개념에 대한 정치신학적 고찰: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서를 중심으로”(2020)가 있으며, 역서로 『풍성한 생명』(공역) 등이 있다. 이화여성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다.

 
 
 

2020년 6월호(통권 7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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