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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0년 4월호)

 

  천도교청우당의 창당 동기와 활동
  

본문

 

“불심으로! 대동단결!”
2002년 16대 대선에 출마해서 5만 1,104표, 0.2%의 득표율을 얻은 국태민안호국당 후보가 선거 때 내세운 표어이다. 국태민안호국당 후보는 한국 불교계의 3대 종파인 조계종, 천태종, 태고종이 아닌 소수 종파, 세계불교 법왕청 소속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불교계 후보’로 큰 인상을 남겼다. 이보다 5년 전인 1997년 15대 대선 때에는 목사 출신 후보가 나왔지만, 그 인지도는 불교계 후보와 비교하기 어렵다. 참고로 15대 대선에 출마한 개신교 계열의 바른나라정치연합 후보는 4만 8,717표를 얻어서 약 0.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2002년 국태민안호국당 대선 후보의 활동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종교를 기반으로 한 정당 활동의 시작을 알린 셈이다. 2003년 통일교는 천주평화통일가정당을, 2004년 개신교 계열은 기독당을 창당했다. 통일교 계열 종교정당은 별다른 활동 없이 사라졌다가 2008년 총선에 ‘평화통일가정당’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지역구에 후보를 냈다. 그 결과 지역구 당선인은 한 명도 없었고, 비례대표 득표 결과는 18만 857표, 득표율 1.05%에 그치고 다시 사라졌다.
기독당의 경우 2004년 17대 총선에서 1%, 22만 8,837표를 얻은 데 이어 2008년 18대에는 기독사랑실천당으로 이름을 바꿔 달고 득표율 2.5%, 44만 3,775표를 기록했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었는지, 2012년 19대 총선에는 개신교 계열 정당 2곳이 선거에 도전했다. 그런데 기독자유민주당은 25만 7,190표, 득표율 1.20%, 한국기독당 5만 4,332표, 득표율 0.25%의 성과를 내며 오히려 4년 전보다 못한 성적을 받았다. 20대 총선인 2016년에도 역시 2곳이 도전했는데 기독자유당과 기독민주당은 각각 2.6%, 0.5%의 표를 얻었다. 이를 표로 환산하면 62만 6,853표와 12만 9,978표이다. 이 두 정당의 득표율을 더한 3.1%는 원내 진입이 가능한 수치로 4년 전에 비해 큰 성과를 냈다.
21세기 종교정당 등장에 불씨를 지핀 불교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야 종교정당을 만들어 등장한다. 불교정도화합통일연합당이 총선에 나와 1명의 지역구 후보와 4명의 비례대표 후보가 출마했다. 지역구의 경우 0.08%, 68표, 비례대표는 3만 6,262표, 0.1%의 득표율을 얻었다. 이 정당은 해산 후 다시 창당하여 그린불교연합당이라는 이름으로 20대 총선에 참가했지만, 4년 전과 비슷한 3만 1,141표, 득표율 0.1%의 성적을 냈다. 개신교 계열 정당에 비해 성과가 미미하지만 불교계는 중앙불교위원회라는 이름으로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명의 당선자를 낸 경험이 있다.
한국의 종교정당은 21세기에 들어서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과거 해방공간1에서 활동한 개신교 계열 종교정당이 있었다. 한경직이 주도한 기독교사회민주당은 물론 조만식이 창당한 조선민주당도 개신교 계열 종교정당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종교는 개신교와 불교 계열이다. 대한민국 종교지형을 과점하고 있는 개신교, 불교, 천주교 중 두 곳이 종교정당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천주교가 중앙집중형 단일종파 조직인 것에 비해 개신교와 불교는 다수종파 조직이라는 특성이 작용한 측면도 있을 것
이다. 지금까지 봤을 때, 대한민국 종교정당은 그 기반이 과점종교이면서 다수종파 종교조직이었다. 하지만 과점종교도 아니면서 중앙집중형 단일종파 종교조직이 종교정당을 창당해서 활동한 적이 대한민국 역사에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때 활동했고, 현재 북한 조선노동당의 우당(友黨)으로 살아남은 천도교청우당이다.

천도교청우당 결성 이유
천도교는 동학의 적통을 잇는 종교이다. 동학에서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이유는 첫째, 근대종교임을 내세워 조선과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 조직의 활동 폭을 넓히고, 둘째, 동학의 이름을 내세운 일진회가 친일단체로 변했기 때문에 관계를 끊기 위함이었다. 이에 의암(義庵) 손병희가 1905년 이름을 바꿨다. 천도교는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종지(宗旨)로 한다. 시천주는 수운 최제우의 말로, “한울님(하늘)을 모시는” 것이고, 사인여천은 해월 최시형이 주장한 것으로 “사람을 한울님(하늘)처럼 대하는” 것이며, 인내천은 이 둘을 합쳐 손병희가 이야기한 것으로 “사람이 곧 한울님(하늘)”이라는 뜻이다.
동학과 천도교는 이 종지를 밑바탕으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을 통해 지상천국을 꿈꾼다. 후천개벽을 위한 방법은 “종교와 정치가 함께 발전한다.”라는 뜻의 교정쌍전(敎政雙全)이다. 이는 천도교와 동학이 정치와 사회에 큰 관심을 갖는 데 중요한 교리이다. 동학과 천도교는 종교조직이지만, 다른 종교와는 달리 정치와 사회에 적극 참여했던 데는 바로 교정쌍전의 교리 때문이다. 동학혁명 때 동학군이 외쳤던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제폭구민(除暴救民), 진멸권귀(盡滅權貴), 축멸왜이(逐滅倭夷), 광제창생(廣濟蒼生)은 모두 이 교정쌍전을 구체화한 교리였다.
무너진 나라를 고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 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구하는 제폭구민, 널리 백성을 구제하는 광제창생, 일본과 오랑캐를 내쫓고 멸하자는 축멸왜이, 권력을 행사하며 고귀한 척하는 것들을 말려 없애자는 진멸권귀는 내세의 구원보다는 현세의 어려움을 없애고자 함을 말하는 교리이다. 이 중에 보국안민은 ‘국가를 바로잡고(輔) 백성을 안녕케 한다.’라는 뜻으로 국가의 ‘은혜를 갚거나’(報) ‘보호하는’(保) 것과는 다르다. 때문에 보국안민은 천도교 정치참여의 적극성과 능동성을 확인할 수 있는 교리라 하겠다. 천도교가 전위단체를 만들어 활동한 데에는 바로 이러한 교정쌍전 교리가 밑바탕이 되었다.
전위단체는 종교조직으로서 나서기 어려운 일을 행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따라서 이 전위단체가 하는 일이 곧 천도교가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천도교 교리를 실천하는 의례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천도교청우당의 역사
천도교가 처음 전위단체를 조직한 때는 일제강점기이다. 1919년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가 조직되어 교리선전과 연구를 주요 임무로 삼았지만, 곧 새로운 문화운동으로 영역을 넓혔다. 천도교가 청년교리강연부를 만든 데에는 3・1운동 이후 천도교 조직의 지도부들이 대거 연행된 것도 한몫했다. 그동안 천도교 일을 맡았던 사람들보다 젊은 인물들이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에 대거 참여했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셈이다. 청년교리강연부는 어린이운동, 농촌운동, 계몽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천도교청년회로 이름을 바꾼다. 이름을 바꾼 천도교청년회는 미래 사회의 주인공인 어린이를 올곧게 자라도록 지도하는 어린이운동, 여성의 사회지위 확대를 위한 여성운동, 노동자의 생활보장과 처우개선을 위한 노동운동, 농민의 지식향상과 복리증진을 위한 농민운동, 시일학교(侍日學校)를 통한 교육운동, 건전한 육체훈련과 건강증진을 위한 체육운동, 미풍양속과 사회계몽을 위한 통속운동으로 활동을 7개로 세분화했다.
천도교청년회는 1922년 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교단이 보수-혁신으로 분열했기 때문이다. 1년 후 천도교는 사회주의 계열을 받아들이자는 혁신파와 헤어지면서 분열을 수습했다. 이후 사회운동을 중시하는 청년단체에서 정치성이 강한 정당 형태의 조직으로 천도교청년당을 만들어 다시 활동을 꾀한다. 천도교청년당은 천도교의 영향력 확장과 실력양성을 위한 활동을 주로 진행했다. 하지만 1925년 제1차 신구 분열로 신파인 청년당과 구파인 청년동맹으로 따로 활동을 해야 했다.2 1931년 신구파가 합동을 하자 천도교청우당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지만 1933년 제2차 분열로 인해 다시 따로 활동해야 했다. 1936년 천도교청우당은 본래의 목적인 정치사회운동 대신 천도교 청장년의 교양수련으로 목적을 변경한다. 일제강점기 때 정당 활동은 현실상 어려웠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천도교의 전위단체는 정당으로 부활했다. 여운형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이 고려민주당,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조선공산당을 차례로 창당했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천도교 지도부는 천도교청우당부활준비위원회를 꾸리고 곧바로 부활취지문을 발표했다. 부활취지문에는 천도교청우당(이하 청우당)의 부활을 선포함과 동시에 “신국가 건설에 공헌”하겠다고 밝힌다. 한 달 후, 부활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당규와 정강정책들을 발표함과 동시에 민족통일기관결성 촉진, 전재동포 구제, 실업대책, 기관지 발행 등을 결의했다. 청우당이 채택한 강령은 “민족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의 건설, 사인여천 정신에 맞는 새 윤리의 수립, 동귀일체의 신생활 이념에 기한 신경제 제도의 실현, 국민개로제를 실시하여 일상보국의 철저”였다.3 천도교가 청우당을 통해 건설하려는 신국가는 자본가 중심의 자본주의와 무산자 독재의 프로민주주의가 아닌 “조선적 민주주의”였다. 조선적 민주주의는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동일한 목적으로 하는 민주주의로 자주독립과 민주정치, 민주경제, 민주문화, 민주도덕을 동시에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4 이러한 천도교와 청우당의 정치노선은 우파나 중도우파보다 중도좌파와 결이 맞았다.

해방공간에서 천도교청우당의 활동
천도교청우당은 신탁통치반대운동은 물론 한국민에게 정치적 자유를 부여하고 내정을 간섭하지 말 것을 미소공동위원회에 요구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제3차 신구분열이 일어나면서 청우당은 신파들의 정당이 되었고, 구파들은 천도교보국당(이하 보국당)을 창당해 활동하기에 이른다. 제3차 신구분열의 원인은 당시 정치지형이었다. 해방공간의 정치지형 특징 중 하나는 과잉정치화와 극심한 좌우대립이었다.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도 과잉정치화로 인해 정치노선이 조금만 달라도 쉽게 갈라섰다. 이미 여러 차례 분열과 통합을 경험한 천도교로서는 정치노선조차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갈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신파와 구파의 정치노선은 당시 기준으로 양끝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열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신파는 분열 전부터 중도좌파 정치단체들과 손을 잡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청우당은 민주주의민족전선과 같은 좌파노선과 함께했다. 천도교 신파가 좌파와 연대를 맺은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조선적 신민주주의와 민족해방, 계급해방이 우파보다는 좌파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민족해방은 민족개벽이고, 계급해방은 사회개벽이었다. 민족개벽은 또한 보국(輔國)이었고, 사회개벽은 안민(安民)이었다. 보국안민을 내세운 청우당으로서는 신탁통치를 찬성할 수 없었고, 단정단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때문에 좌우합작운동을 비롯해 미소공동위원회 지지, 입법의원 참여, 남북 단독정부수립 반대, 남북협상 참여에 다른 중도좌파 정치단체들과 같은 목소리를 냈다.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이 확실시될 때에도 북쪽의 천도교와 3・1재현운동을 기획한 것 역시 신파와 청우당이었다.
이에 반해 구파는 분열 전부터 우파 정치단체들과 같이 활동했다. 천도교 구파와 우파 정치단체들의 인연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어진다. 구파의 수장격인 인물들은 이승만이 조직한 독립촉성국민회의의 회장과 고문을 맡으면서 보수우파와 정치제휴를 하고 있었다. 구파가 창당한 전위단체인 보국당의 당시(黨是)는 “인내천주의의 교정일치의 실현, 오심여심의 민족주의적 독립국가의 건설, 동귀일체의 세계적 평화의 수립”이었다.5 구파와 마찬가지로 보국당의 정치노선도 보수우파였다. 우경화되었다고 비판을 받았던 입법의원에도 보국당 대표는 흔쾌히 참여했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에는 한독당보다는 한민당과 손을 잡았다. 남북한 총선에 대해 소련이 북한입경을 거부한 문제를 두고도 보국당은 군정철수가 아닌 군정연장 반대의 입장을 밝힐 정도였다.
청우당과 보국당은 각각 천도교의 전위단체로서 좌우 진영에서 활동했지만, 두 당 모두 실패하고 만다. 정당 활동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당선자 배출과 의회 진출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8년 남한의 제헌의회에는 청우당과 보국당 출신 의원이 없다. 단정단선을 반대한 청우당은 물론 단정단선을 지지했던 보국당에서도 후보조차 내지 않았다.6 청우당과 보국당이 후보조차 내지 못한 이유는 당시의 정치지형보다는 국제질서의 영향이 컸다.
38선 이남을 담당하고 있던 미군정은 자신들의 통치이념에 맞는 정치단체가 정부를 수립하기 원했다. 미군정이 원하는 정치단체는 우선 반공의식이 투철해야 했다. 다음으로 남북 분단현실을 인정하고,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자본주의 국가로 세계경제체제에 편입할 의사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서구식 교육을 통해 서구 민주주의 수용에 적극 노력해야 했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하는 정치단체는 우파보수 성향의 단체였다. 그리고 천도교 신파의 청우당은 이러한 조건에 모두 맞지 않았다. 천도교 구파의 보국당 역시 서구식 교육과 서구 민주주의 수용이라는 조건을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청우당과 보국당이 제헌의회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은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우선 청우당은 후보를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좌우합작운동이 실패할 즈음 천도교 신파는 우파 정치단체와 추종세력, 미군정, 그리고 심지어 천도교 구파에게까지 공격을 받는다. 이들은 보성사를 습격하고, 좌익계 인사에 대한 검거령을 내리고, 기념식장에서 신파를 공격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이하 북한청우당)은 미군정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이 성명서로 인해 남한에서는 천도교를 미군정과 대립하고 북한과 연계되어 있는, 중도좌파 세력이 아닌 ‘빨갱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청우당이 완전자주독립과 편좌편우가 아닌 중도의 길을 간다는 성명서도 소용없었다. 북한청우당이 있는 이상, 그것도 조선노동당의 우당으로 있는 이상, 천도교와 청우당은 ‘빨갱이집단’이었다.
보국당이 후보를 내지 못한 것은 신구파 통합 때문이다. 신구파는 1948년 4월 다시 통합한다. 많은 교인수가 있는 북한과의 왕래가 불가능한 가운데 분열된 상황은 정치와 종교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 공식 이유였다. 하지만 보수우파의 정치승리가 확실한 상황에서 ‘빨갱이집단’으로 몰린 천도교 신파가 보수우파와 연계가 있는 구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한 통합이었다. 신파는 정치패배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걱정했다. 어떠한 경우라도 구파와 합치는 것이 자신들의 ‘생존’ 확률을 높이는 것이었다. 천도교 구파들은 많은 것을 양보받고 통합에 응했지만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천도교인들은 신파와 구파를 구별했지만 일반인들은 그 차이를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천도교와 청우당은 여전히 조선노동당의 우당으로 있는 북한청우당과 연계된 ‘빨갱이집단’이었다. 정부수립 이후에도 청우당 간부들과 천도교인들은 간첩 혐의로 기소됐고, 청우당은 정당신청이 취소된다.
해방공간에서 이러한 경험은 교정쌍전을 교리로 하는 천도교의 ‘정’ 활동을 크게 위축시켰다. 전쟁 이후 천도교는 정당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전위단체의 활동 영역을 사회문화활동으로 못 박았다. 4월 혁명 이후, 동학당이라는 이름으로 정당 활동을 재개하려 하였으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가 반공을 국시로 하자 ‘빨갱이’ 논란에 휩싸이는 것이 두려워 정당 활동 계획을 철회한다. 이후 천도교가 전위단체 활동을 다시 시작한 것은 군사독재가 끝난 1990년대 초반이었다. 그것도 정당이 아닌 시민단체로서의 활동이었다.

북한의 청우당
북한의 청우당은 남한과 사정이 달랐다. 남북한의 왕래가 힘들게 되자 38선 이북의 천도교인들은 1946년 2월 북한청우당(공식 명칭은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을 조직했다. 북한청우당의 당원은 30여만 명까지 성장한다. 이 중 90% 가까이가 노동자와 농민이었다. 조선노동당과 소련 군정이 북한청우당에 상당한 호의를 보인 이유도 당의 이러한 계급구성 때문이었다. 당의 계급구성도 비슷했지만 리(里) 단위까지 뻗어 있는 천도교의 조직도 이들에게는 큰 매력이었다. 조선노동당은 조선민주당을 버리고 북한청우당을 우당으로 삼았다. 북한청우당 역시 소련 군정과 가까운 조선노동당을 통해 ‘신국가’ 건설에 가까이 다가가길 원했다. 이러한 이해관계 속에서 두 당은 대등한 협력관계를 맺었다. 두 당의 균형은 소련 군정이 조선노동당에게 급격히 힘을 실어주고,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이 확실해지자 무너진다.
이에 북한청우당은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운동을 1948년 3월 1일에 맞춰 진행하고자 기획한다. 이른바 “3・1재현운동”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 발각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북한청우당은 조선노동당의 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북한청우당과 천도교에서 소련 군정과 조선노동당에 반대하는 우파와 중도좌파들은 쫓겨났다. 남아 있던 인사들은 대부분 조선노동당과 소련 군정과 친하거나 그들의 노선과 결이 맞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북한청우당은 지금까지도 북한의 정당 중 하나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북한청우당 내부는 사실 남한의 중앙조직과 협력하자는 쪽과 북조선 내에서 활동을 하자는 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3・1재현운동의 실패와 이에 따른 우파와 중도좌파 축출은 북한천도교와 북한청우당이 후자로 재편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들은 조선노동당과 더불어 북한 안에서 교정쌍전을 실천하고자 했다. 휴전 이후 확고한 권력 기반을 잡지 못한 김일성은 천도교인들이 많이 속해 있는, 소위 ‘갑산파’의 힘이 필요했다. 김일성과 천도교의 이러한 이해관계 속에서 북한청우당 간부들은 김일성 1인 독재가 확립된 1958년까지 각종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김일성 1인 독재에서 김씨 일가 세습독재로 넘어가던 1967년에 갑산파가 숙청당하면서 북한의 천도교와 청우당은 예전만 못한 위상으로 남게 된다.


1 일제가 항복해 광복을 맞은 1945년 8월 15일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2 신구파 분열의 원인은 겉으로는 의암 손병희의 뒤를 이어 천도교를 대표한 춘암 박인호의 인정 문제였지만, 안으로는 자치파와 독립파, 집권파와 분권파, 교파와 정파와 같이 다양한 문제가 얽혀 있었다.
3 천도교중앙총부교서편찬위원회, 『천도교약사』(모시는사람들, 2006), 405.
4 천도교중앙총부교서편찬위원회, 위의 책, 407.
5 김완수, 『동학・천도교약사』(동학도유회, 2003), 316.
6 천도교 인물 중 이종린이 충남 서산군 갑에서, 구중회가 경남 창녕에서 당선되었지만, 두 사람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박세준 | 고려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종교정당에 관한 한일비교”, “한국과 대만에서 반공과 종교의 상관관계” 등의 논문이 있다.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지식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0년 7월호(통권 7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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