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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0년 4월호)

 

  독일 기독교민주당의 정책 설정 및 창당 (1945-1949)
  

본문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기독교 세력들은 신속하게 기독교민주연합(CDU, Christlich-Demokratische Union, 정당이라는 점에서 ‘기독교민주당’ 혹은 ‘기민당’으로 약칭함)을 창당했다. 기민당은 바이에른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기독교사회연합(Christlich-Soziale Union, 기사당)과 함께 ‘기독교연합’(Christliche Union)을 구축하여, 1949년 8월 14일 실시한 독일 연방공화국(서독)의 첫 연방의회 선거에서 유효표의 31%를 득표하여 29.2%를 얻은 독일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사민당’으로 약칭함)을 누르고 제1당의 집권 여당이 되었다.
독일 기민당은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가톨릭과 연합하여 설립한 최초의 기독교 통합정당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사건이었다. 물론 기민당의 창당을 주도한 것은 가톨릭 세력이었으나, 프로테스탄트 세력 또한 창당 과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을 뿐 아니라 독일의 중요 정치 현안에서 점차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기독교민주당의 창당 동기와 요인
기독교의 다양한 세력이 분파주의라는 견고한 벽을 넘어서 기독교 통합정당을 결성하게 된 동기와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크게 두 가지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교회정치(Kirchenpolitik)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의 실천’이라는 차원이다.
먼저 교회정치의 차원이라 함은 기독교 정당 창당의 동인을 기독교의 사회적・정치적 지위를 확립하고 유지하려는 의도를 말한다. 전후 독일은 더 이상 기독교적 국가와 기독교적 사회일 수 없었다.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 이래 자신들의 조국 독일을 ‘프로테스탄트의 나라’로 인식하고 신을 그 나라의 수호자로 인식해온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당(나치)의 패망은 현실에서나 정신적으로나 파탄 그 자체였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이중의 압력을 받았다. 내부에서는 마르틴 니묄러 목사를 비롯한 고백교회 운동 세력이 나치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교회의 전쟁범죄 책임에 대한 죄책고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외부로부터의 압박 또한 거셌다. 점령국 사령부와 세계교회 일치운동 세력은 나치에 대한 교회의 지지를 비판하고 나치에 협력한 목회자들의 반성과 정치 사안에 대한 개입 자제를 요구했다.
게다가 전후 독일의 경제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노동 생산성은 크게 줄었고, 산업 생산이 전반적으로 위축되었으며, 수출이 급격하게 감소했다. 실업률이 오르는 등 경제 위기를 실감한 시민들의 불안이 사회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점령국, 특히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받지 못하면 ‘조국’과 ‘독일 민족’은 곤궁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내외의 압력을 거부하는 것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배반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반성을 토대로 1945년 10월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을 발표하였다. 그럼에도 일부 교회 지도부는 여전히 나치 청산에 반대하고 있었고, 여론은 교회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가톨릭교회 역시 어려운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9세기에 가톨릭중앙당을 설립해 정치 행위를 일상화한 가톨릭 역시 전후에 반(反)인도적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1933년 7월 히틀러가 독일 제국의 총통이 되자마자 ‘제국협약’을 맺어 가장 먼저 그를 국제적으로 승인한 가톨릭은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뿐 아니라 수많은 유대인 대학살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에 저항한 소수의 신부들, 훗날 수상이 된 콘라트 아데나워(K. Adenauer) 같은 인물을 예외로 하면, 가톨릭의 저항은 평가할 만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더구나 가톨릭교회든 프로테스탄트교회든 전후에 교인이 줄어들고 있었다. 전후의 혼란기에 기독교계의 구호 활동에 힘입어 일시적으로 교인수가 증가했으나, 곧바로 입교자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탈퇴자가 증가하고 있었다. 기독교계 전체가 위기를 실감하고 있었다. 독일 기독교에는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러나 분열의 벽이 너무 높아 각자 나치를 자기 편으로 오해할 정도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분파주의 벽은 높았다. 내부의 분열과 다양한 입장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전후 독일에서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진보적인 사민당의 존재였다. 나치에 대한 비판 세력이었던 사민당은 곧바로 과거 당 조직의 대부분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고, 각국 점령사령부에서 지역 행정을 맡아 확고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후에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가톨릭 내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이 사민당과 협력하여 핵심 산업을 ‘사회화’하고자 했을 때, 다른 지역의 ‘사회적’ 경향이 강한 기민당 주(州)협의회들조차 사민당의 정책으로부터 엄격하게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사민당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민당이 노동운동 세력의 지지를 얻어 집권에 성공한다면 기독교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이미 19세기에 한 차례 교회탈퇴 운동을 벌인 바 있는 사민당에 대한 가톨릭의 반대는 결연했다.
다른 한편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는 점차 확산되고 있었으며, 특히 소련 점령지에서는 공산화 현상이 점차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다. 기민당의 깃발 아래 가장 먼저 베를린에서 기독교 세력이 하나로 뭉친 것은 이곳이 공산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압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반공주의를 이유로 여전히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 보수주의자들 역시 극우 기독교 정당을 수립하려고 했으나, 연합국 세력은 하나의 기독교 정당만을 허가하는 조치를 통해 이들의 정치적 진출을 막아야 했다. 연합국의 이 조치는 결과적으로 독일에서 기독교 세력이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도록 도운 셈이다.
독재, 전쟁, 점령지 지위 등 공동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연대 가능성이 열렸다. 그리고 현실적인 위기와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 의식은 기독교 세력을 하나의 정당으로 뭉치게 만들었다.
교회정치적 동인과 함께 기민당 창당의 두 번째 동인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 의식이었다. 간단히 말해, 기독교적 인간상과 기독교의 전통적인 세계관을 실현하기 위해서 정치 세력화를 도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의 가치에 대한 이해는 다소 논쟁적이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것은 전통적인 요소들, 예컨대 신적인 질서와 권위, 인간이 창조된 자이며 범죄로 필멸한다는 인식, 행복의 불가능성 등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 신의 자녀들의 평등, 이웃 사랑, 세계를 개선할 책임 등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정당의 정책 설정과 관련하여 내부 분열을 유발하는 요인이었다. 기민당의 정책 설정 과정은 이 문제를 해소하는 과정이나 다름없었다.

기독교민주당의 정책 설정 과정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 의식은 기독교 정당의 정강정책으로 구체성을 띠게 되었고, 그것은 대중의 지지를 얻을 방편이기도 했다. 전후 국가사회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기독교의 논리적 대안은 기독교 사회주의였다. 가장 먼저 기독교 정당을 창당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세력 역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미 1945년 6월 26일에 소련 점령지 베를린에서 기민당 최초의 창당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민족에게 호소함”이라는 글이 발표되었다. 베를린 선언문은 두 가지 점에서 기민당 건설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하나는 새로운 정당이 신앙 분파를 뛰어넘어야 하며 반(反)성직주의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선언문에서 기독교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을 분명히 표현했다는 점이다.
한편 독일 서부와 남부 지역의 가톨릭-사회적 지향을 가진 그룹 역시 기독교 사회주의의 실현을 요구했다. 쾰른의 가톨릭 신부 라우렌티우스 지머와 에버하르트 벨티,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목사 한스 엔케 등이 1945년 7월 “쾰른 강령”을 도출하는 데 성공했다. 베를린과 거의 동시에 그러나 독립적으로 작성한 “쾰른 강령”의 전문은, 우선 국가사회주의의 반이성적 행태를 비판한 후 거대 자본의 무기 생산과 군사주의가 결합한 지배구조를 고발함으로써 “공동재산” 혹은 “광범위하고 강력한 사회적 그리고 사회주의적 질서개념”을 끌어냈다. “쾰른 강령”은 전문에 이어, 개인의 소유권은 보호받아야 하지만 소유 관계는 사회정의라는 기본 전제에 따라 조정되어야 하며 대자본의 우선권, 개인의 독점, 그리고 콘체른은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진영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의 반대로 1945년 9월에 발표한 제2쾰른 강령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한 분명한 고백은 삭제되고 말았다.
“민주적 토대 위에서 경제적 사회주의”와 같은 좀 더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해 사회적인 지향을 확고히 드러낸 것은 1945년 9월에 발표한 “프랑크푸르트 강령”이었다. 이 선언문을 주도한 발터 디르크스와 오이겐 코곤 등은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결합을 위해 분투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프랑크푸르트에 모인 기독교인들은 기초생산, 거대산업, 거대은행 등 국가의 중요한 요소들을 사회의 공동소유로 넘길 것을 요구하고 경제 시스템이 통일적으로 계획에 따라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5년 12월에 처음으로 기민당 지구당 준비위원회들이 참여한 전국 창당준비대회가 열렸다. 이때 위에서 언급한 지구당 위원회들은 기독교 사회주의의 실현을 주장했지만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이미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기독교 보수 진영은 부르주아적 경제 질서를 강력하게 지지했고, 그들이 승리했다.
가톨릭 보수주의자들은 특히 종교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는데, 전후 일시적으로 시민들의 교회 가입이 늘어난 것에서 자극을 받기도 했지만 정치적 가톨릭주의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프로그램은 신과 열 번의 기도를 직접적으로 언급했고, 가정을 사회의 핵심에 두었으며, 교육과 문화 부문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신앙 분파 학교, 즉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각각 분리된 초등학교를 세우자고 주장하였다.
프로테스탄트 보수 진영은 이보다 좀 더 보수적인 견해를 밝혔다. 북부 독일의 기민당 창당 발기인들은 기독교 사회주의 대신 개인 재산을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보호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새로운 국가가 개인의 재산권을 보호해준다면 반드시 기독교적 국가가 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가톨릭 보수 진영의 주장과 달리 그들은 분파 학교가 아니라 통합 초등학교를 선호했는데, 종교교육을 하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보았고 기민당에 붙어 있는 ‘기독교적’이라는 단어조차 거부했다. 그 후 슐레스비히-홀스타인의 기민당 지역구 당원들은 당명에서 “기독교”를 제외하고 “민주연합”으로만 부르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각 지역구 차원의 입장 차이와 갈등도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가톨릭 지역인 라인란트-팔츠에서는 문화정책에 관심을 두었고, 북부 개신교 지역 슐레스비히-홀스타인에서는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투쟁에 골몰했다. 헤센이나 니더작센처럼 양 분파들이 공존하는 지역들에서는 개신교 보수주의와 가톨릭의 ‘사회적’ 인사들이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헤센주(州) 지역구는 가톨릭 사회적 경향의 강령을 획득했지만, 지역구의 신자들은 대부분 개신교도이기도 했다.
다양한 입장이나 지역들의 차이를 넘어선 통합은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때 영국 점령지 기민당 대표인 아데나워는 가톨릭 출신으로서 기민당의 노선 통합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그는 우선 한편으로 독일 북부 지역이 부르주아적 우파 정당으로 기울지 않도록 제지했고, 다른 한편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를 들어 사회적 가톨릭주의자들에게 “기독교 사회주의”와 같은 종교적 파토스가 담긴 용어를 사용하지 말 것과 분파 학교를 설립하자는 주장을 철회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강령의 초안을 작성해 1946년 2월 말 지구당 준비위원회에 제출했고, 1947년 2월 3일 마침내 자신이 구상한 당의 노선을 지구당대회에서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알렌 프로그램”(Ahlener Programm)이 탄생했다.
알렌 프로그램의 전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규정했다. “자본주의 경제제도는 독일 민족의 국가 및 사회적 삶의 이해에 합당하지 않게 되었다. 범죄적 권력 정치의 결과로 놀라운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붕괴를 맞은 후 이제 기초부터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새 질서의 내용과 목적은 더 이상 자본주의적 이윤 및 권력 추구가 될 수 없으며 우리 민족의 복지가 되어야만 한다.” 상당히 강한 톤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함으로써 반(反)자본주의를 표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알렌 프로그램은 한편으로는 사회적 형평을 주장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주장 또한 포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알렌 프로그램은 초기 기민당의 다양한 분파 노선들을 중도로 통합시켰다는 점에서 하나의 진전이었다. 신중한 부분적 양보를 통해 대립하는 양측 모두가 스스로 승자라고 여기게 만든 것은 아데나워의 정치적 역량 덕분이었다.
한편 미국과 영국은 1948년 통화 개혁을 단행하여 독일의 경제 회복을 촉진하고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유도하였다. 점차 동서 냉전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어 서독의 서방 편입이 긴급한 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국면을 맞아 기민당 창당 주역들은 점차 ‘사회적 시장경제’로 가는 길을 닦았다. 사회적 시장경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경제적 자기 결정과 자유이다. 그리고 공정경쟁과 시장가격을 통한 성과주의가 그 두 번째 원칙이었다. 이 원칙들은 자유시장경제의 기본 원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회적 시장경제 시스템은 기독교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이자 그 ‘대안’이었다. 부르주아적 자유시장경제와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국가가 공정경쟁이 실현되도록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고, 노동력의 유지를 위해 국가가 사회복지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사민당의 사회민주주의와 기독교 사회주의가 아니면서 동시에 다소 진보적인 기독교 세력을 포용할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사회적 시장경제’였다. 기민당 창당 세력은 서부 독일 뒤셀도르프에 모여 ‘사회적 시장경제’의 기본 내용을 고스란히 담은 새로운 강령인 “뒤셀도르프 강령”(Düsseldorfer Leitsätze)을 만들었다. 초안을 만든 강령분과위원회와 당 지도부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기독교적 사고”, “기독교적 인간상”,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구현하는 제도로 정당화했다.
어쨌든 뒤셀도르프 강령으로 기민당은 다양한 정파들을 모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그 후 가톨릭 중앙당 출신은 물론이고 바이마르공화국 시대 민족주의에 기초해 반유대주의를 주창하던 독일민족인민당, 민족적-자유주의적 경향의 독일인민당, 그리고 좌파 자유주의를 표방하던 독일민주당 등 정치적 지향이 다른 여러 세력이 기민당이라는 한 깃발 아래 각자의 둥지를 마련했다. 기민당은 그야말로 종합 정당이 되었다. 그 모든 지향을 아우르는 선거 슬로건은 “그리스도 혹은 반(反)그리스도”였다.
당원의 직업 구성 역시 이를 확인해주고 있다. 기민당의 당원은 노동자 35%, 농민 14%, 자영업자 11%, 사무직 노동자 10%, 공무원 8%, 그리고 연금생활자 18%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전체 인구 중 이들 직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39%, 15%, 11%, 12%, 8%, 19%였다. 전체 인구에서 각 직업군이 차지하는 비중과 당원에서 해당 직업군의 비중이 거의 같은 수치를 나타낸 것이다. 기민당이 이른바 ‘국민정당’이라는 증거였다. 그러나 기민당이 국민정당이라는 사실만으로 기독교적 인간상과 세계관이 충분히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기독교민주당과 교회의 관계
기민당에 대한 초기의 전폭적인 지지는 가톨릭에서 나왔다. 가톨릭 지도부는 가톨릭 언론 매체와 사목 서신을 총동원했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기민당의 광역지역구와 소지역위원회 결성에 적극 나섰고 지역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 결과, 1949년 첫 연방의회 선거에서 기민당은 가톨릭이 우세한 라인란트-팔츠에서 과반을 획득했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 그리고 남부 바덴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프로테스탄트 우세 지역에서도 기민당은 교회의 지원을 받았으나, 프로테스탄트 성직자들은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한 예로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한 니더작센의 경우, 첫 연방의회 선거에서 기민당은 17% 득표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기민당이 교회의 전통적인 관심사를 정치적 차원에서 관철해내자 프로테스탄트 교회 지도부 역시 기민당에 우호적으로 돌아섰다. 교육 및 양육 부분에 대한 투자,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보험 및 의료 개혁의 확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형사제도의 도입 등은 교회의 관심사였고 기민당은 이 분야들에서 교회의 요구를 입법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프로테스탄트 교회 지도부는 평신도들에게 의회 민주주의적 국가체제에 동참할 것과 정당과 의회에 힘을 실어줄 것을 요청했고 신자들은 실제로 기민당에 투표했다. 이렇게 하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가릴 것 없이 독일교회는 기민당의 입지를 강화해나갔다.
그러나 기민당과 교회의 밀월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기민당은 기독교 세력을 당의 신뢰성 제고와 정체성 강화에 이용했을 뿐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적 인간상과 세계관의 실현에는 점차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독일의 재무장(再武裝)과 동서 냉전은 분열의 뇌관이었다. 1957-59년 사이 기민당이 독일의 핵무장을 다시 시도하자 이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본격화했다. 교회는 기독교 윤리적으로 핵무장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때 구스타프 하이네만(Gustav Heinemann, 1966-69년 대통령 역임)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함께 핵무장 반대 투쟁의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이 투쟁에서 기민당이 아니라 교회와 사민당이 승리했다.
한편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져 냉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자 교회는 동서를 중재하는 다리 역할을 떠안았다. 정당들이 여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사이 1962년 독일개신교연합(EKD, 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은 독일 영토의 일부를 폴란드로 넘겨 두 나라 사이에 평화공존을 이룩하자는 ‘튀빙겐 메모랜덤’을 발표했다. 이 제안은 냉전체제에 대한 용기 있는 도전이었고 여론의 지지를 받아 마침내 실현되었다. 독일개신교연합은 동독의 교회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독일의 재통일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것은 교회가 반공주의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성과를 얻는 데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이바지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교회의 지원으로 운영하는 각종 프로테스탄트 연구소들, 아카데미, 전문위원회 등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문적 경력을 쌓은 젊은 연구자들은 프로테스탄트 교회 총회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지향해야 할 사회적-정치적 방향을 다소 진보적으로 논리화하고 논증하는 데 앞장섰다.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목회자들 역시 새로운 역사적 상황을 맞아 기독교적 세계관의 재인식을 통해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기민당이 아니라 교회의 이들 집단, 그리고 이들을 지지해준 평범한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힘이야말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통감하고 실천했다고 말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이와 달리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은 권력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기민당의 창당 이후 성직자의 권력 의지가 직접적으로 혹은 신자들을 거쳐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된 결과로 예배와 공동체 활동 그리고 종교 교육이 정치화했다.”라는 정치학자 토마스 엘바인(Thomas Ellwein)의 비판은 대체로 유효하다. 그러나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 기민당의 보수화에 끌려가지만은 않았다. 교회와 기민당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느슨해졌다. 기민당의 정치적 성공과 반대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모두에서 교회 탈퇴자 수가 1949년 이래 지속적으로 증가했다는 사실은 이런 관계를 보여주는 추세이다.
독일 기민당의 창당과 정강 정책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몇 가지 유용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독일 기민당은 비교적 높은 수준의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갖고 출발했다. 특히 초기에 창당을 시도한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의 지향은 더욱 그러했다. 그 결과, 기민당은 ‘공동체의 회복’이라는 기독교 본래의 가르침을 실현하려고 노력했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성취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기독교 정당을 만들려는 일부 기독교계 인사들의 지향을 떠올리면 그것은 더욱 뚜렷해진다.
지금 한국에서 기독교 정당을 만들려는 인사들은 공동체성의 회복 대신 기복신앙에 기대어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경쟁을 정당화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역사 과정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체제로 맹신하고, 세계 도처에서 자연이 파괴되고 기후위기가 이미 닥쳤는데도 여전히 경제성장 중심의 ‘근대화’라는 신화에 얽매여 있다. 실로 반(反)기독교적인 행태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독일 기민당의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정당이란 생리상 권력 의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정당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독일의 기민당이 점차 교회의 가르침에서 멀어지고 교회와 무관한 권력집단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보험의 확대와 핵무장 저지 그리고 동서 독일의 통일과 같은 긍정적 결과들은 대부분 1950년대 후반부터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세운 여러 연구소, 아카데미, 전문 위원회 등에서 담론을 만들고 전파해서 결실을 맺은 것들이다. 한편 동독에서 통일로 가는 길을 마련한 것 또한 동독교회 내 젊은이들이 중심이 된 제3세계운동, 평화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등 비판세력의 성장에 힘입은 것이었다. 기민당이 환경정당이라는 착시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핵발전소의 폐기 예고는 연정(聯政) 파트너인 녹색당의 요구에 떠밀려 채택한 것이었다. 연동형 비례제를 전면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독일의 정치 지형에서 그 길만이 기민당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독일 기민당의 역사는 우리를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인도한다.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결코 안 되지만 결국 교회가 할 일은 정당을 창당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성서적인 그래서 진보적인 담론을 형성하고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장수한 | 교회사를 전공하였다.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역사』, 『종교개혁, 길 위에서 길을 묻다』 등의 저서가 있다.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다.

 
 
 

2020년 5월호(통권 7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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