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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0년 4월호)

 

  한국 기독교 정당의 궤적
  

본문

 

21대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4년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총선은 유권자들이 정치권에 대해 엄중한 심판을 내리는 시기이다. 따라서 이맘때만 되면 여당은 현 정부의 치적을 앞세우면서 지지를 호소하고, 야당은 현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면서 정권심판론을 꺼내 든다. 각 당의 예비후보자들은 공천을 받기 위해 애쓰는 한편 지역구를 돌며 자기를 알리느라 바쁘다. 따라서 이 무렵에는 항상 거리가 북적거린다.
그런데 요즈음은 거리가 한산하다. 코로나19 사태 때문이다. 바이러스 감염자가 급증하면서 각종 모임이 취소되고 외출도 자제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예외적인 곳이 있다. 광화문광장이다.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광화문광장에서는 주말마다 현 정권 퇴진 집회가 열렸다. 서울시가 시민의 안전을 위해 집회 철회를 권유하였지만, 막무가내로 집회를 강행하였다.
주지하다시피 광화문 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세력은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현 정부를 종북정권으로 간주하면서 대통령의 퇴진마저 요구하고 있다. 극우 세력인 이 집단의 주요한 축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보수 개신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현재 한기총 회장인 전광훈 목사는 이 집회를 주도하면서 극우 집단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는 ‘기독자유당’이라는 기독교 정당의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최근의 극우 운동과 보수 개신교가 기독교 정당을 통해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기독교 정당의 궤적을 살펴보는 것은 최근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종교와 정치의 새로운 관계를 살피는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이전의 종교정당
한국 사회에서 종교정당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해방 직후이다. 미군정하에서 “정당에 관한 규칙”이 반포되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설치됨으로써 정당 활동의 토대가 되는 의회제도의 단초가 마련되었다. 이 시기의 당면 과제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정치세력이 등장하였고 종교계도 정당을 결성하여 정치활동에 나섰다. 대표적인 것은 천도교의 청우당과 개신교 계열의 정당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천도교 청년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한 청우당은 해방 직후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떠올랐다. 그렇지만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 정권과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 정치적 기반을 상실해갔다. 남한의 경우 청우당의 명맥은 완전히 끊겼지만, 북한의 경우에는 일부 세력이 사회주의 체제에 적응하여 지금까지도 노동당의 ‘우당’(友黨)으로 존속하고 있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1945년 9월 초 신의주에서 장로교 목사 윤하영과 한경직이 주도하여 ‘사회민주당’1을 창당하였다. 이 정당은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과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개량을 강령으로 삼았지만, 공산주의자들의 방해와 한경직을 비롯한 일부 간부의 월남, 신의주 학생 사건과 관련한 당 지도자들의 검거 등으로 해체되었다. 사회민주당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각 나라에서 결성된 기독교민주당의 활동에 자극을 받았으며 사회주의 세력과의 대결의식 속에서 창당되었다.2
1945년 11월 초부터는 평양에서 장로교의 김화식 목사와 감리교의 신석구 목사 등이 기독교자유당 창당을 준비하였으나 도중에 구속됨으로써 성사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조만식 장로를 대표로 한 조선민주당도 결성되었는데, 상당수 기독교인이 참여하였으며 기독교사회주의와 민족사회주의의 색채가 농후하였다. 그러나 1946년 2월 조만식 일파가 친일파로 숙청되면서 기독교적 기반은 약화되었다. 남한에서는 1945년 9월 장로교 목사 박용희가 주도한 사회민주당이 기독교적 성격을 토대로 정동교회에서 발족하였는데, 20여 일 만에 다른 정당 사회단체와 합쳐 우파 온건노선을 지향하는 국민당으로 통합되었다. 이처럼 해방공간에서의 개신교계 종교정당은 창당 실험에 그치고 말았다.

기독교 정당의 도전기
기독교 정당이 다시 등장한 것은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흐른 2000년대 초반이다.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조용기 목사와 김준곤 목사가 기독교 정당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창당 작업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 모두 기독교인과 교회의 정치참여를 강조했다. 조용기 목사는 ‘강도 만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한국 사회가 ‘강도당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면 지탄받아 마땅하다면서 ‘가장 어둡고 썩어 있는 정치’에 기독교인이 들어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준곤 목사도 비슷한 논리를 펼쳤다. 교회 주변에서는 ‘신령한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데 이는 악마의 계략일 뿐이며 현재 한국의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탄이라고 외쳤다.3 그러면서 기독교인의 정치참여를 역설했다.
두 사람의 메시지에는 어떤 위기의식이 감지된다. 그것은 참여정부의 대북정책 및 대미인식과 관련된 것이다. 국민의정부에서 시작된 햇볕정책의 지속과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 이후 확산된 반미정서가 냉전 이데올로기에 깊이 젖어 있던 보수 개신교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시청 앞 광장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개최된 ‘나라를 위한 기도회’나 구국기도회로 표출되었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독교 정당이 등장하였다.
17대 총선에서 도입된 정당투표제는 기독교 정당의 출현에 촉매 역할을 하였다. 이 제도는 정당투표에서 3% 이상의 표만 얻으면 어떤 정당이라도 의회에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 정당과 같은 군소정당에 유리한 제도였다. 실제로 2004년 총선에서 군소정당인 민주노동당은 정당투표에서 8석을 얻는 쾌거를 이루어 국회에서 단단한 입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보수 개신교계의 이념적 위기의식과 정당투표라는 제도를 배경으로 하여 탄생한 한국기독당은 국회의원 출신 최수환 장로를 상임대표로 선출했고, 조용기 목사와 김준곤 목사는 고문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1,200만 성도 중 절반만 기독당에 투표해도 600만 표가 되기 때문에 국회 입성은 물론 제1당이 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 지역구는 말할 것도 없고, 정당투표에서도 1%대의 득표율에 머물러 의회 진출의 꿈은 무산되었다.
17대 총선 직후 득표율 미달로 한국기독당은 자동 해산되었지만, 보수 개신교계는 뉴라이트 운동의 형태로 우파 정권 창출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기독교사회책임(2004)과 뉴라이트전국연합(2005)으로 대변되는 개신교 보수 진영은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주력했고 마침내 2007년 이명박 정권을 출범시켰다. 한국기독당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를 적극 지지했지만, 2008년 18대 총선을 맞이하여 기독교 정당의 재건에 나섰다. 이때 재창당의 주요 명분 중 하나는 통일교의 선거 참여였다.
통일교는 2003년 천주평화통일가정당을 창당했으나 선거 불참으로 해산되었다가 2008년 총선을 맞아 ‘평화통일가정당’이라는 이름으로 재창당하였다. 이들은 ‘가정’의 가치를 핵심 구호로 내세우면서 모든 지역구에 후보를 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 개신교계 인사들은 통일교의 국회 입성 봉쇄를 외치면서 창당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980년대 말 통일교의 「세계일보」 창간 소식을 접한 보수 개신교계가 「국민일보」 창간으로 맞대응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선거 초기 국면에서는 두 정당이 등장하였는데 하나는 최수환 장로가 창당한 ‘기독민주복지당’이고, 다른 하나는 청교도영성훈련원 대표 전광훈 목사가 창당한 ‘사랑실천당’이었다. 두 정당은 대립을 피하기 위하여 ‘기독사랑실천당’(기독당)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였다. 창립 취지문에서는 당시 사회적 쟁점이 되었던 차별금지법 문제를 비롯하여 개신교계의 민감한 사안이었던 사학법, 종교인 과세, 교회건축 기반시설분담금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번에도 조용기 목사를 비롯하여 교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적극적 지지를 표명하였지만, 득표율은 2.59%에 그쳐 의회 진출에는 실패했다. 그렇지만 2%를 넘겼기 때문에 정당은 해산되지 않았고, 다음 번에는 의회 진출의 관문인 3%를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선거이기도 했다.
2012년 19대 총선은 삼수에 해당하는 세 번째 도전이었는데, 이 선거에는 세 정당이 등장했다. 전광훈 목사가 새로 창당한 기독자유민주당, 기존의 기독사랑실천당, 그리고 정훈 목사를 대표로 한 한국기독당이 등장한 것이다. 기독자유민주당과 기독사랑실천당은 ‘기독자유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지만, 한국기독당은 독자 노선을 걸었다. 기독자유민주당은 ‘12대 정책’을 내걸었는데 ‘종북좌파 척결’을 첫 번째 정책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수쿠크법 및 동성연애법 반대, 교회의 은행이자율을 2% 이하로 낮추는 법안 제정, 국가자격시험의 일요일 시행 금지법 제정 등을 12대 정책에 포함시켰다. 특히 선거 시기에는 교회의 은행이자율 감소 법안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이는 창당의 주요 동기가 교회의 ‘제도적 이익’ 수호에 있음을 잘 보여준 것이다. 개표 결과 기독자유당은 1.2%, 한국기독당은 0.25%를 얻는 데 그쳐 양자 모두 의회 진출에 실패하였다. 직전 총선보다도 훨씬 못한 초라한 성적이었다.
기독교 정당 세력은 2016년 총선에 다시 등장하였다. 네 번째 도전에 해당하는 20대 총선에서도 세 정당이 출현했다. 지난 총선에 등장했던 두 세력이 각각 ‘기독자유당’과 ‘기독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재집결했고, ‘진리대한당’이라는 간판을 건 기독교 정당이 새로이 등장했다. 기독자유당과 기독민주당은 통합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여 결국 세 정당이 총선에 임했다. 기독자유당의 경우 더불어민주당의 이윤석 의원이 입당하여 일시적으로 현역 의원을 보유한 원내 정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영훈, 김홍도, 장경동, 윤석전과 같은 대형교회 목사를 동원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 따라 그 어느 때보다도 의회 진출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렇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득표율은 2.64%에 그쳐 또 다시 의회 진출에 실패했다. 기독민주당은 0.55%를 얻었고, 진리대한당은 거의 표를 얻지 못했다. 기독자유당과 기독민주당은, 만일 양 진영이 통합했다면 3%를 넘는 득표율로 의회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다. 심지어 기독민주당은 조용기 원로목사를 비롯한 목회자 53명을 검찰에 고발하였는데, 그들이 기독교자유당만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정당이라는 허위 정보를 유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기독교 정당을 추진하는 세력 사이에 헤게모니 투쟁이 작동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당시 20대 총선에 나온 기독교 정당들의 핵심 구호는 반동성애, 반이슬람, 그리고 차별금지법 반대였다. 어떤 비전을 가지고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반대 일색의 구호였다. 이러한 극단적 반대의 논리에는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성찰과 포용의 몸짓보다는 혐오와 증오의 정서만이 작동한다.
이제 2020년, 21대 총선이 다가왔다. 이번에도 기독교 정당들은 총선에 나설 채비를 갖추고 있다. 다섯 번째 도전인 셈이다. 지난 총선에서 통합에 실패하여 의회 진출의 꿈이 좌절되었던 두 당은 이번에도 통합 시도를 하였다. 그렇지만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아 통합 작업이 성사되지 않았다. 기독민주당은 ‘통일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었고, 정강도 상당 정도 혁신했다. 20대 총선 당시 기독민주당은 핵무기 보유를 주장할 만큼 극우적 성격이 강했지만, 이번에는 기독교 정당의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보수 우파의 성격을 보이고 있다. 한편 기독자유당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는 전광훈 목사는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와 함께 극우 정당인 자유통일당을 창당하였다. 따라서 자유통일당과 기독자유당 사이의 관계 문제가 대두되었다. 전광훈 목사의 선거 전략에 의하면 두 당은 분업을 통한 협업의 관계이다. 즉 자유통일당은 지역구에만 후보를 내고, 기독자유당은 비례대표 후보만 내어 서로 협력한다는 것이다. 현재 전광훈 목사가 회장으로 있는 한기총과 그가 후원회장으로 있는 기독자유당 사이에는 상호양해각서(MOU)가 체결되었는데 이는 한기총의 전국 조직을 이용하여 자유통일당의 지방 조직을 돕기 위한 방략이라고 한다. 극우 종교 조직(한기총), 극우 기독교 정당(기독교자유당), 극우 정당(자유통일당) 사이에 연결고리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과연 이번 총선에서 기독교 정당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3%의 벽을 깨고 국회에 입성하여 4전 5기의 신화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또 한 번 넘어진 오수생(五修生)의 실패담으로 기록될 것인가?

기독교 정당의 실패 요인
네 차례에 걸친 기독교 정당의 의회 진출 시도가 좌절된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정당투표에 힘입어 의회 진출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만일 이 도식이 종교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면, 기독교 정당도 신자와 교회의 정당투표에 힘입어 의회에 진출할 수 있다. 1,200만 성도와 수만 개 교회가 지닌 표의 힘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이다. 실제로 보수 개신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시나리오가 그대로 작동할 것으로 믿고 기독교 정당의 창당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대와 현실은 확연하게 달랐다.
사실 이런 결과는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다. 한국 개신교는 일찍부터 기독교 정당에 대해 우호적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56년 5월 15일 정・부통령 선거 직전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대변하는 기관지 「기독공보」는 사설을 통해 종교정당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피력하였다. 기독교 정당이 생기면 타 종교정당도 조직되어 혼란이 생기고, 기독교 정당이 정권을 장악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고, 소수의 기독교인과 다수의 일반 국민이 대립하여 전도활동에 부정적 효과가 나타나고, 교인 간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교회분열이 조장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4 진보적 신학자 김재준도 기독교와 교회의 위신 추락 등을 이유로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1992년 「신학사상」 특집으로 마련된 심포지엄에서도 보수적 교계 지도자들의 사적 욕망에 의한 기독교 정당의 이용 가능성을 경계하였다.5
기독교 정당에 대한 한국교회의 부정적 인식은 여론조사에서도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1992년 교계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기독교 정당의 후보에게 투표하겠다고 대답한 사람은 18.6%에 불과했다.6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뉴스앤조이」와 포털사이트 갓피플이 설문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기독당에 대한 반대가 86%였고,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발표한 『2019년 주요 사회 현안에 대한 개신교인 인식 조사』에서는 기독당 반대가 79.5%였다. 기독교 정당의 창당 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운동도 있었다. 2004년 총선 당시 공의정치실천연대를 비롯한 교회개혁 운동 단체들이 연대하여 기독당 창당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 2008년 총선 직전에도 통일시대평화누리를 비롯한 17개 개신교 단체가 기독당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한국 개신교 안에서 기독교 정당에 반대하는 논리는 크게 보면 세 가지이다. 첫째는 창당 주도 세력의 대표성과 도덕성 문제이다. 기독당의 주도 세력은 군사정권 시대에 독재에 아부하고 민주정부하에서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확산하는 사람들로서 과거사를 고백하지 않는 부도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인사들이 주도하는 기독교 정당은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시기상조론이다. 한국교회는 양적 성장에는 성공했지만 기독교적 정치사상과 생활신앙의 뿌리가 약해 아직 기독교적 정치를 논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교회의 문화적 미성숙이 기독교 정당의 설립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는 종교갈등에 주목하는 시각으로 「기독공보」나 김재준의 발언에서 이미 등장한 관점이다. 대부분의 서구 국가에서는 기독교가 지배적인 종교문화로 오랫동안 자리 잡아왔기 때문에 독일의 기민당과 같은 기독교 정당이 등장한다고 해서 종교갈등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종교가 치열한 교세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 종교의 정당 창당은 다른 종교들에 파급효과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통일교가 가정당을 창당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개신교에서 기독당이 등장하지 않았던가?

기독교인 정치인과 기독교적 정치인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기독교 정당을 추진하는 세력은 좌파의 척결, 반이슬람과 반동성애, 정치권 복음화를 주된 구호로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교회의 ‘제도적 이익’과 종교권력의 확장을 위한 강한 욕망이 흐르고 있다. 이는 ‘기독교인 정치인’과 ‘기독교적 정치인’의 혼동에서 기인하는 욕망이다. 전자는 기독교인이지만 정파적 이익에만 몰두하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기독교의 이념인 공의, 평화, 사랑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정치의 장에 임하는 사람이다.



1 학계에는 ‘기독교사회민주당’으로 알려져 있지만, 윤하영과 한경직이 1945년 9월 26일 연합군사령부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이 당의 이름은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이다. 김흥수, “분단 70년, 북한 기독교의 이해”,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44호(2016).
2 김흥수, “한국 기독교의 현실정치 참여의 유형과 역사”, 「신학사상」, 제78집(1992), 608.
3 “오 마이 갓! 한국기독당 출범”, 「뉴스앤조이」, 2004년 3월 23일.
4 「기독공보」, 1956년 12월 31일.
5 “심포지엄”, 「신학사상」, 제78집(1992), 749.
6 기독교윤리실천운동·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인의 정치의식 조사연구』(1992), 84.



이진구 | 한국 근현대 종교사를 전공하였다. 대표 저서로 『한국 근현대사와 종교자유』가 있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2020년 6월호(통권 7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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