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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 3·1운동인가, 3·1혁명인가
특집 (2020년 3월호)

 

  3・1운동과 나의 사명 (三一運動과 我의 使命)
  

본문

 

* 이 글은,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가 1930년대에 자필로 쓴 “현순자사”(玄楯自史) 중 16장 “3・1운동과 나의 사명”(三一運動과 我의 使命)을 김흥수 교수가 한글로 옮겨 쓴 것이다. 현순은 3・1운동 계획 단계에 참여했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외무차장, 외무위원, 내무부차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현순자사”와 이를 영어로 옮긴 영역본은 David Hyun과 Yong Mok Kim이 편집한 My autobiography by the reverend Soon Hyun 1878-1968: with historical documents, photographs and analysis(Institute for Modern Korean Studies Yonsei University Press, 2003)에 들어 있다. [ ] 안의 내용은 김흥수 교수가 첨가한 것이다. - 편집자 주


1919 기미년 1월 중에 나는 의주 구읍 장로교회에서 부흥회, 사경회, 신성(晨醒)기도회 등을 마치고 하루는 교우 중 장병(張丙) 1인과 동행하여 통군정(統軍亭)에 오르니 천리 장강이 앞에 누워 있고 임진왜란 시 고적(古蹟)이 완연한지라. 자연 시정(詩情)이 감발(感發)하여 칠언절구 한 수를 읊었다.(千里長江是大雄 望天一哭感吾主 統軍亭下卽行宮 融化世人眞聖風)
주일예배 시에 교우와 주일학교 학생 천여 인이 교기(校旗), 반기(斑旗) 등을 나열하고 시가(市街)에 나가서 시위행렬을 했으니 이것이 곧 독립운동 행렬의 효시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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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읍 집회를 마치고 귀경하니 시(時)는 2월 초요 태황제께셔 승하하신 후 십수일이 지났더라. 시내에는 국장(國葬) 예행연습(習儀)이 성행하였었다. 어느 날 내가 종로 청년회관[YMCA]과 기독신보사를 차례로 방문하고 주필 김필수 목사와 길동무하여 남대문 밖 제중원[세브란스병원] 약방 주임 이갑성 사저에 나가본즉 부정기 모임에 회합한 인사들은 김필수, 이승훈,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오기선, 박희도, 현순 등이었다. 일시는 2월 19일 오후 2시 경이요 토의의 큰 주제는 독립운동이었다. 해외로부터 지금까지 들어온 소식을 종합하면 2월 8일에 일본 동경에서 이광수, 최팔용 등이 유학생을 움직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하며, 미주에서는 이승만을 파리에 파송하여 평화회의에 조선독립을 요구하였다 하고,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하였다 함이라. 해외에서 운동을 앞서서 행하였으니 국내에서는 거국 일치적 운동을 필히 행해야겠다 하고 밤새워 토의하였다. 김필수는 토의 중에 귀가하고 이승훈,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오기선, 박희도, 현순 등 7인이 기독교회를 대표하여 간부를 조직하고 천도교회와 합동 운동하기로 결의하였다.
다음 날 20일 밤에 이승훈, 현순 양인이 정탐의 주목을 피하여 가며 재동에 사는 최린을 방문하여 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최씨 말하기를 우리 선생 손병희씨는 결심을 했으니 우리는 단행할 뿐이라 하였다. 이승훈, 현순 양인이 돌아와 간부에 보고하고 곧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태황제 국장일(國葬日)을 임박하여 거사하기로 하고 부원(部員) 몇 사람을 각처에 파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인사들을 얻기로 하며 서무, 외교와 통신, 회계의 3부를 나누어 부의 업무를 담임하니, 서무에 이승훈, 함태영, 오기선, 외교통신에 현순, 안세환, 이갑성, 회계에 박희도이었다. 국내의 운동을 국외에 선전하여 해외 동포들에게 알리며 열강에 선포하여 세계 여론을 일으킬 필요를 절감한 부원들은 외교통신원 1인을 상해로 파견하여 파리평화회의와 미국 하와이 교포들에게 통고하며 외양형세를 시시로 살피여 국내로 통신케 할 사명을 주자함을 의결하고 현순이 그 임무에 당선하였다.
22일 밤에 이·현 양인이 최린 집에 다시 가서 상기사항을 상의하니 최씨가 극히 찬성하고 천도교 측에서 경비 2천원을 치르기로 하였다. 최·현 양인 간에 밀약은 아래와 같으니 최씨 말하기를 봉천에 해천양행(海天洋行)이 있으니 그 양행을 찾아서 최운정(창식)이란 인사와 만나서 동행하라 하며, 상해에서 잠입한 김철에게 운동금 1만원을 주었으니 형편에 따라 쓰라 하고 통신상 암호는 림자(霖字)로 정하다. 다음 날 23일에 이승훈이 천도교 본부로부터 2천원을 가져와서 그 돈 중에서 1천원은 기독교측 간부에 맡기고 1천원은 현순에게 여비로 지급하다.
24일 밤에 아내에게만 고별하고 나는 용산역에서 남만주 차를 타고 출발할새 부원 중에서 박희도 1인이 역에 나와 전송하며 자기의 금시계를 간부 신표(信標)로 나에게 주었다. 노친(老親) 유아들에게 알리지 않고 극비리에 길을 떠나는 나는 중대한 사명을 지고 먼 여행에 임하매 뒷일은 부원들에게 신탁하고 신앙과 희망만을 앞세우고 남만주로 향하였다.
25일 이른 아침에 신의주역에 도착하여 그곳 장로교회 목사 장정로를 방문하고 길을 떠나는 뜻을 대강 말하였다. 휴대금은 쌀장사하는 동포에게 주어 안동역으로 미리 건네주고 나는 장 목사와 동반하여 오후에 인력거로 압록강을 건너서 평산의원 신 의사(醫師)를 방문하였다. 신씨의 접대를 받고 그날 밤 봉천행 기차를 타고 출발하여 26일 이른 아침 봉천역에 도착하여 중국인 자동차로 십간방에 있는 해천양행을 찾아갔다. 양행 주인 이해천의 관대를 받고 뒷방에서 종일 잠복하여 있었다. 날이 저물도록 최운정이 도달치 못함으로 그날 밤에 봉천역에서 봉진[봉천-천진]행 기차를 타고 출발할 점에 최운정이 역 앞으로 와서 만났으나 최군은 내일 아침에 출발키로 하고 나는 그날 밤에 출발하여 다음 날 오후에 천진역에 도착하다. 영국인이 경영하는 애스터호텔(Aster Hotel)에 투숙하고 숙박부에 한국 이름은 하균(河均), 영명은 데이비드 하(David Hah)라 하였다. 27일 오후에 최운정이 와서 그날 밤 천진에서 출발하여 상해로 향하였다.
28일 포구에 도착하여 양자강을 건너 남경역에 하차하여 금릉대학을 방문하고 재학 중인 동포 학생 수인을 만났다. 기억 중에 남아 있는 학생은 김성근, 현창운, 서병호 등이다. 내 임무를 대강 말하고 당일에 다시 출발하여 다음 날 오후 7시경에 상해역에 도착하니 이날이 곧 3월 1일이었다. 상해의 기후는 음랭하고 봄비가 내리며 버드나무 잎이 갓 생겨났더라. 출국 전에 미리 알아두었든 장로교회 선교사 피취(Rev. George A. Fitch)씨를 찾아갔다. 씨의 안내로 가장 먼저 선우혁을 만났고 삼마로(三馬路) 모 객잔(客棧)에 투숙하였다가 다음 날에는 남경 로영안공사(路永安公司)가 경영하는 대동여관(大東旅館)으로 옮겼다.
3월 2일 밤에 모 중채관(中菜館)에서 신정(규식), 이광수, 선우혁, 김철, 신헌민 등이 회집하여 현·최 양인을 접대하고 상해에 온 이유를 물어 내가 국내 독립당을 대표하여 상해에서 외교, 선전, 통신 등을 진행할 뜻으로 상해에 왔음을 말하였다. 최창식은 최남선의 저작인 독립선언서를 국산지(國産紙)에 잘게 써서 그것을 잘라 작게 꼬아서 품속에 품고 온 것을 다시 해승부합(海繩符合)하였다. 그리하고 국내에서 전보 오기만을 고대하였다.
3월 4일 아침에 연합통신으로부터의 소식이 영문대륙보 The China Press에 3・1운동의 대거(大擧)가 등재되었다. 당일에 동치서주(東馳西走)하여 상해 인사들을 소집하여 협의한 후에 임시사무처를 불란서조계 하비로(霞飛路)에 설치하고 현순은 총무가 되고 통신서기에 이광수, 여운홍, 서무에 신성, 신헌민, 재무에 김철, 선우혁 등이 분담하였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국내에서 맹렬한 기세로 일어난 독립운동을 영문의 긴 전보로 파리평화회의 불란서·미국·영국·이태리·벨기에·중국 6국 대표에게 발송하고 샌프란시스코국민회, 호놀룰루국민회에 긴 전보를 발송하였다. 조동호는 한문으로, 현순, 이광수는 영문으로 독립선언서를 번역하여 한문, 영문 신문에 알렸다. 또 일방으로는 손문(孫文)씨를 방문하고 선전 및 외교에 찬조를 얻고자 하였으나, 손씨가 부하 호모(胡某)를 보내 면회를 사절하고 무슨 청구건이 있거든 호군을 통하여 알게 하라 하니, 이는 손씨 역시 일인을 두렵게 여겨 한국 혁명가들을 접대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헌민의 소개로 손씨의 기관보인 상해 가제트[The Shanghai Gazzette] 주임 장경여(張敬予)를 면회하고 영국 기자 1인을 국내에 파견하여 운동 정형(情形)을 세밀히 탐색하여 오기로 결정하다. 신헌민의 권고로 나는 숙소를 불란서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 법인가(法人家)에 정하다.
3월 8일경에 현순, 최창식이 장경여를 대동하고 북경으로 출발하였다. 북경에 도착하여 북경반점에 투숙하여 중국인 혁명가 몇 사람을 만나서 동서의 국세(局勢)와 한족의 독립운동을 담론하고 중국 친구들의 권고로 나의 중국 이름을 포강번(鮑康藩)으로 지었다. 장경여와 동반하여 영국인 기자 짜일(William R. Giles)씨를 방문하고 국내에 파견키로 결정하였다.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을 파견할 시에 김군에게 많은 도움이 됐던 영국인 저술가 씸손(Leonard B. Simpson)씨를 방문하고 한국의 독립운동 정형을 말하였더니 그가 국제 기자단에 소개하여 중국과 외국 기자 수십 인을 회견하고 일본의 한국 통치의 해독과 거국일치로 발생한 독립운동의 참 의미를 해설하여 각국 신문에 크게 선포되었다.
당시에 손정도는 북경에 먼저 와서 합달문(哈達門) 내에 있는 감리교회 경영 병원에 유숙하고 하란사 여사도 북경 체류 중에 우연히 유행성 감모(感冒)에 걸려 고통을 겪다가 불행 병사하매 경성으로부터 남편 하상기가 와서 중국인 예배당에셔 장례식을 행하고 북경성 밖에 안장하였다.
그 후에 나는 합달문 내 병원으로 옮겨와서 유숙하고 외교를 진행하였는데 최운정도 동숙하고 손정도는 입정(立丁)으로 나는 석정(石丁)으로 호를 지었다. 원장 홉킨(Dr. N. S. Hopkins)씨의 친절한 대우를 받았으며 북경기독교청년회[YMCA]를 방문하고 미국인 총무 임격(R. R. Gailey)과 중국인 총무 장패지(張佩之) 등을 만났다. 임격(林格)씨와 동반하고 미국공사관에 가서 일등 비서관 텐니(Charles A. Tenney)씨를 면회하고 우리 운동의 정세와 방략을 말하고 방조(幇助)를 청하니 텐니 씨 말하기를 표면으로는 할 수 없으나 이면으로는 어디까지든지 방조하겠다 하고 임격씨에게 지휘하여 상해 인사들에게 소개서를 하여 주었으니 상해 미총영사 커닝햄(Cunningham), 중국기독청년회 전국총무 여일장(余日章) 등이었다. 최창식은 국내로 다시 가서 운동을 지휘하며 재정을 모집하여 오기로 하고 귀국하였다. 나는 손정도, 장경여 등과 동반하여 상해로 회정(回程)하였다. 북경에서 만난 인사들은 한진산 북경정부 재직 중, 한좌진 전 강화군수로 기직(棄職) 출국하여 강개(慷慨)한 생활 중, 김애희 평양여자로서 숭문문협화의학교(崇文門協和女醫學校) 재학 중 들이었다.
3월 25, 26일경에 상해에 귀착하여 김신부로(金神父路) 법인가(法人家)에 귀숙하다. 그날 밤에 김철 군이 와서 알리기를 다수 인사가 북경에서 떠들썩하게 와서 최고기관을 조직하려 하니 주의하라 하였다. 그 이튿날 밤에 불란서조계 보창로(寶昌路) 모처에 각방(各方) 인사들이 회집하니 아령(俄領)으로부터 이동녕, 만주로부터 이회영, 이시영, 북경으로부터 이광, 조성환, 조용은이더라. 상해 인사들과 합석하여 최고기관 조직안을 토의할새 조용은이 열변을 토하여 이 안을 성립코저 하였으나 나는 국내에서 무슨 명령이 오기 전까지는 이 안을 토의할 필요가 없음을 주장하였다. 임시회장은 내가 당선하여 회의를 조종하고 국내운동을 응원하는 재외기관 설치안이 통과되어 연구위원 8인을 선정하니 위원은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이광, 조성환, 신헌민, 이광수, 현순 등이었다.
상기 위원 등이 수차 회합하여 상의하였으나 결과가 없었다. 차제에 상해에 온 인사는 만주로부터 신채호, 경성으로부터 신익희, 이봉수, 고한, 임득산 등인데 임득산은 평북 철산 사람으로 순박하며 용감한 의남아(義男兒)였다. 나의 통신을 수차 전달하였으며 접제금(接濟金)도 가져다주고 임시정부 조직 후에는 아주 적은 양의 모금이라도 정부로 납부하였다. 이봉수는 천도교측 청년으로 국내 국외 출몰하며 정부조직에 노력하고 손병희로 대통령, 박영효로 부통령, 이승만으로 국무총리로 선거할 뜻을 비전(秘傳)하였다. 신익희는 기호 인사들과 연합하여 암중 비약(飛躍)을 시(試)하였으니 상해에 온 후로 신헌민, 이시영, 이동녕, 신성 등과 교유하여 무슨 맥락(脈絡)을 결(結)하고, 하루는 나의 숙소에 내방하여 국내 인사들의 속망(屬望)을 전하며 국외 유수인물들을 망라하여 정부를 조직하라는 사명을 가지고 왔다 하며 불기일(不幾日)에 회집을 개최하니 와서 참가하라 하였다.
4월 초순경에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신헌민, 신정, 신익희, 신채호, 조성환, 조용은, 이광수, 이광, 현순 등이 남경로(南京路) 선시공사여관(先施公司旅館)에 회합하여 임시정부 조직안을 토의하였다. 논조가 귀일(歸一)치 못하여 산회하였다. 제2차로는 불란서조계 보창로 모처로 이상 인사 이외에 다수 청년들과 협동하여 우선 임시의정원을 조직하니 원장은 이동녕이 당선하고 임시정부는 통령제를 피하고 총리제로 채용하다. 제3차로는 불란서조계 김신부로 부근에 큰 양옥을 세를 얻어 임시의정원을 개하였다. 현안인 임시정부를 조직할새 2종의 숨겨진 흥미로운 일(逸事)이 있으니 하나는 유위(有爲)의 청년들이 권총 목봉(木棒)들을 가지고 와서 한쪽은 회중을 보호하며 또 한쪽은 회중을 위협하여 공정한 조직을 개최한 것이오. 다른 하나는 신채호가 총리로 추천된 인사 즉 이승만, 박영효, 이상재 등을 반대하고 박용만을 천하니 그때 청년 중에서 현창운이 웃기려고 신채호를 추천하매 회중이 큰 소리로 웃자(齊聲大笑) 신씨가 노하여 자리를 떴다. 신씨가 이승만을 반대한 것은, 그 이유가 박용만이 신성에게 이승만이 위임통치를 미국정부에 청원하였다고 전보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촉향이 오직 이승만에게 폭주하였었다. 그리하여 의회는 밤새워 토의하고 결국에 임시정부를 조직하니 각원은 다음과 같더라.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최고위원 이동녕, 이시영, 현순, 손정도, 신채호, 신헌민, 신익희, 이광수, 이광, 조성환, 조동호, 백남칠, 김철, 조소앙, 최근우, 한우근, 현창운 등이 기억 중에 남아 있다.
4월 12일경에 임시헌장 10조와 임시정부 조직 선포문을 청년 2인에게 주어 국내에 입하야 선포케 하고 차장(次長)을 선임하여 정무를 집행케 하니 내차(內次) 신익희, 외차(外次) 현순, 법차(法次) 이광수, 재차(財次) 선우혁, 군차(軍次) 조성환, 외차(交次) 김철 등이더라.
나는 외차의 직임 유무를 불구하고 실무에만 주력하여 상해로 돌아온 후에 중국인 중에는 여일장(余日章), 당소의(唐紹儀), 미국인 중에는 미총영사(美總事), 기독청년회 총무(總) 피취(George A. Fitch Jr.), 미 해군출장소 장교 콥, 삐솝, 마티낵을 방문하고 교제를 시작하였다. 불란서 거주지에서 안전책으로 불란서인 변호사(律士)를 매달 보수금 6백 테일을 주고 고빙하여 불란서 영사와 연락을 지어 적의 암행을 예통(豫通)하게 하고 선전책으로는 상해 가제트에 매월 3백원을 지불하여 영문선전을 시작하였는데 나의 한국독립운동의 전말이란 긴 영문 논문을 등재하였다. 또 짜일씨(氏)에게서 나온 적의 폭행 사진들을 모집하여 발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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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하경에 한남수, 이규갑, 홍진, 장붕 등이 국내로부터 상해에 와서 한성국민대표회에서 조직한 정부를 선포하니, 즉 총재에 이승만을 올린 소위 다번다단(多煩多端)의 한성계통인 정부였다. 상해 인사들과 연석하여 수차 협상하여 한성정부는 무효로 하고 상해 계통인 임시정부를 그대로 추재(推載)하여 내외 시정(施政)에만 노력하기로 하였다.
5월 초에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홍콩에 도착하여 상해로 가는 안전로를 조성환에게 전보로 문의하였다. 그때 조씨는 북경으로 돌아가면서 안씨를 맞이하라고 나에게 위탁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홍콩에 가서 4일간 안씨를 찾다가 우연히 한 여관에셔 만나니 동행인은 정인과 황진남이었다. 수일간 민족사업에 대하여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4인이 함께 홍콩에서 미국 선박으로 출범하여 무사히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에서는 나의 부재중에 일대소란이 있었으니 적의 경찰이 불란서 영사의 허가를 얻어 불란서조계에 불쑥 들어와 신헌민을 체포하여 경성으로 호송하고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이광 등은 다 북경으로 피해 갔다. 안창호와 나는 김창세 의사의 근무하는 홍십자병원에 투숙하다. 그때 나는 장염으로 고생하다가 김성근의 소개로 영국조계 잡덕로(卡德路)에 있는 중국인 의사 호씨가 경영하는 의원에서 복약 치료하였다.
6월 중에 새로 도착한 인사는 경남으로부터 윤현진, 함북으로부터 이춘숙, 해주로부터 김구, 의주로부터 이유필, 아령으로부터 원세훈, 경성으로부터 남형우 등이요 7월 중에는 최창식이 경성으로부터 돌아왔다. 최군은 상해에 도착하여 즉시 나의 숙소에 동거하다. 안창호가 상해에 와서 각방 인사들을 망라하여 정국을 수습하였으나 여의치 못하고 단 몇몇 인사들이 안씨를 추재(推載)하고 빈약 중에서 정국의 현상을 유지하였으니, 그 인사들은 양준명, 이유필, 김구, 서병호, 김홍서, 이광수 등이요, 외교는 정인과 황진남으로 신문 선전만을 계속할 뿐이었다.
이전에 재미 이승만은 상해 계통인 임시정부의 총리의 직을 받아들여 선포하고 또 차제에는 한성계통인 정부의 총재의 직도 받아들여 선포하고 상해정부에 총리를 대통령으로 개제(改制)하여 달라하였으며,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국민회에 지휘하여 애국금을 모집케 하였는데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공채금을 모집키로 결정하고 또 임시정부에 요구하였으되 애국금을 변경하여 공채금으로 개정하여 달라 하였다. 안창호는 이러한 다단다번(多端多煩)의 시국에 임하여 정서(政緖)를 정돈하며 시정(施政)을 일층 새롭게 하기로 결심하고 총리를 대리하고 차장을 선발하여 총장을 대리케 할새 상해 인사들 중에 유위(有爲)의 인물들에게 찾아가서 출각(出閣)을 간청하였다. 종국에는 나의 숙소에 수차 내방하여 최창식에게는 내각서기관장의 직책을 탁하고 나에게는 내차(內次)의 직책을 맡겼다. 나는 이 직책을 고사하여 받아들이지 않다가 단 내각을 성형(成形)키만을 뜻하고 출마를 허하였다. 그리하여 6차장의 서임을 선포하였으니 내차 현순, 외차 여운형, 법차 신익희, 재차 윤현진, 군차 이춘숙, 교차 김철이요, 내각서기관장은 최창식이었다. 정부청사는 불란서조계 하비로(霞飛路)에 설치하고 부서를 배정하여 하층 전면 우측 방에는 내부와 교통부를 두고 좌측 방은 재무부가 전용하고 후면 우측 방은 접대실로 정하고 상층 큰방은 총리실이요 전방은 법무와 서기관장이 병용하며 후방은 외부와 군부가 병용하고 장랑(長廊) 한 좌석에는 김구의 지휘하에 있는 경호원 20명이 정복으로 근무하며 정부청사 정문에는 인도인 순경으로 지키게 하였다.
매일 출근은 오전 9시로 오후 4시까지 하고 매일 아침 출근 시에는 정부 직원들이 집합실에 회집하여 무궁화가 1절을 제창하고 총리의 고유(告諭)가 있은 후 각부로 나뉘어 시무하니 큰 수양소와 흡사하였다. 대리총리 안창호가 제1회 각의를 소집하고 의안을 제출하니

1. 총리 이승만이 총리를 대통령으로 개제(改制)하여 달라 함이오.
2. 총리 이승만이 애국금을 물시하고 공채금만을 인준하야 달라함이오.
3. 상해정부를 한성정부로 개조하고 이동휘를 맞이하자 함이었다.


이상 3건을 토의한 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여 의결케 하기로 하고 노령에 사람을 보내 이동휘를 맞이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정부 측으로는 현순, 김용겸을 특파원으로 임명하여 노령 인사 원세훈과 동반하여 길을 떠나게 하였다. 떠나기 전에 현·최 양인은 잡덕로(卡德路) 소재 호씨가 경영하는 의원(胡醫處)에서 장병로(長浜路) 수인리(受仁里) 작은 집으로 이전하고 개인 집 생활을 시작하였다.
8월 중순경에 현순, 김용겸, 원세훈 3인이 상해에서 영국 선박으로 출범하여 영구(營口)에 도착하니 벌써 한국인 밀정 1인이 미행하였다. 객잔(客棧)에 투숙하여 잔주(棧主)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교묘한 꾀를 내어 내일 아침에 출발하겠다고 큰 소리로 알리고 밤중에 이웃집으로 몰래 빠져나와 대석교(大石橋)역에셔 출발하여 3인이 다음 날 아침 봉천에 안착하여 신잡가(新卡街) 중국인 여관에 투숙하고 조반은 채관(菜館)에 가셔 매식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불교 대표 신상완이 역시 동숙(同宿)하였다가 말하기를 우리가 나간 후에 왜(倭) 헌병이 방을 조사하고 갔으니 주의하라 하였다. 또 3인은 여관에서 나와 다른 여관에서 하룻밤을 숙박하고 다음 날 아침에 봉천에서 출발하여 빈강(하얼빈)으로 직행하였다. 빈강(濱江)은 북만에서 가장 번영한 도회지인데 건축과 시가(市街) 제도는 다 러시아식이더라. 그때에 호열자[콜레라]가 크게 번져 매일 3백여 명 사망자가 있었음으로 오래 머물지 못하고 빈강에서 출발하여 해삼위로 향하였다. 도중에 우연히 탔던 차를 떠나 앞차로 바꿔탔더니 뒷차들에서 호열자가 발생하여 모든 차 승객들을 다 떼어냈다. 우리 3인은 천행으로 환자의 차에서 옮겨 타 이 화를 면하였다.
8월 30일경에 해삼위에 안착하여 신한촌을 방문하고 이동휘를 상봉하매 망국의 한을 느끼며 서로 눈물을 흘렸다. 온 뜻을 고하니 이씨가 응낙하였다. 숙소는 이강 군(君) 사저에 정하다. 어느 날 밤에는 아령 인사들이 러시아 요리점에 회합하여 정부에서 파견한 현순, 김용겸 양인을 초대하였다. 그때에 나는 상해에서 조직된 정부는 지방의 원격(遠隔)과 시기의 급박으로 적법적이 못된 것을 느껴 이제부터는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정부를 지지하기로 본 정부 제직(諸職)은 결심하였으니 이동휘씨는 속히 상해로 와서 총리의 직에 취임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다. 회합한 인사들은 다 가합(可合)하게 들었다. 그 후 상해행 안전로를 찾았다. 우선 미군함에 가서 해군참위 마틴낵씨(氏)를 방문하고 해삼위에 온 뜻과 우리의 중요 인물을 안전히 상해에 모시고 가려고 하는데 만주에는 적의 경비가 엄밀하여 통과키 어렵고 해로(海路)로 가겠는데 미함(美艦)에 타는 것을 허용하겠는가 물은즉, 마씨 답하기를 1개월 후에 상해로 떠나니 그때 일꾼으로 변장 승함하라 하였다. 그리하고 마씨가 나를 대동하고 미육군사령부에 가서 사령관 아이철벅 정령(Col, Ichellberg)에게 소개하였다. 그에게 일본의 포악한 정략과 우리 민족의 용감한 자유를 위한 전쟁을 알려주고 겸하여 상해행 안전로를 물으니 마씨가 이태리 군용선을 소개하여 승선하라고 하였으니 여의치 못하고, 러시아 선박에 자리를 얻어 4인이 한 방에 합승키로 매표하니 곧 이동휘, 김립, 남공선, 현순이었다.
해삼위에 있는 동안 항시에 미사령관에게 이동휘를 접견케 하고 또 사령관의 위탁에 의하여 일본군의 대러시아인 폭행 수십건을 조사 공급하였다. 상기 이동휘, 김립, 남공선, 현순 4인이 출항 2일 전에 러시아 선박에 올랐는데, 일본군 한 소대가 내가 유숙하였던 이강 집을 포위하고 나를 잡으려 하였으나 헛걸음만 하였다. 4인은 극비 중에 안전히 출항하여 연태(煙台)를 경유하여 9월 하순경에 상해에 안착하였다.
상해 인사들은 열광적으로 이동휘를 환영하고 속히 국무총리에 취임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씨가 내심에 무엇을 품었던지 유련(留連) 후 수일에 소위 승인 개조란 언단(言端)을 시작하여 취임키를 고사하였다. 열광 중에 있던 상해 인심은 크게 격동되어 이씨를 강권하니 이씨 답하기를 각원 중 신규식, 이동녕, 이시영 등을 다 와줄 것을 청하여 합동 취임케 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에서 신익희를 항주에 파견하여 신규식을 와달라고 청하고 현순을 북경에 파견하여 이동녕, 이시영을 와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북경에서 먼저 돌아온 지 수일 후에 불란서 영사의 권고로 정부청사를 닫게 되었다. 10월 하순경에 북경으로 두 이씨가(兩李)가 북경으로부터 내려왔다. 그리하여 11월 초에 총리 이동휘, 내장 이동녕, 법장 신규식, 재장 이시영, 노동총판 안창호 등이 일시 동처(同處)에 회합하여 광대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정부청사 사무처는 각부를 나누어서 두고 시정(施政)에 착수하였다. 이 기간에 지난 에피소드(逸事)는 내무부 경무국장 김구가 일제 스파이(敵偵) 선우갑을 잡아 징계하여 다스렸으며 국내로부터 선교사가 가져온 금 1만원을 내가 찾았는데 해주 사람 박희숙이 자기의 돈이라 하여 주었더니 김구가 또한 박을 잡아 가두고 금액을 전부 압수하여 정부에 납부한 일이었다. 11월 중에 안창호가 나의 숙소에 와서 말하되 정국에 일대 비난이 일어나서 해삼위에 사람을 보낸 책임은 내가 지고 사직할 수밖에 없다 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최고의 책임자로 군이 사직할 것이나 군은 대국을 수습할 인망이라든지 수완이라든지 다 나에게 비견할 바 아니니 군은 사직지 말고 내가 사직하겠다 하고 수일 후에 내가 내부차장의 직을 사하였다. 얼마 오래지 않아 최운정이 또한 내각서기관장의 직을 사하였다. 겨울에 장빈로(長浜路) 애인리(愛仁里) 집에서 불란서 공원 부근 군관로(軍官路)에 집을 얻고 주거를 옮겼는데 이층 앞방에는 나와 최운정이 동숙하고 뒷방에는 이화숙, 김원경 두 여사가 동숙하였다.
경신년 1920년 2월경에 임시정부의 특파로 북경에 올라가서 미국감리교회 동양선교총회에 참석하여 본국에서 나온 총대들을 만났다. 총대는 최병헌, 김종우, 노블[William A. Noble], 케불[Elmer M. Cable] 등이었다. 그때 손정도도 왔다가 선교사 수십인을 청하여 접대하고 동양평화의 관건은 오직 조선독립에 있음을 역설하였다. 상해로 돌아와서 다시 애인리 집으로 이전하였다.
3월 1일 제1회 3・1절 기념식을 영국조계 잡덕로(卡德路)에 있는 올림픽 극장에서 거행하였는데 순서 중에 내가 독립선서를 낭독한 것과 여운형이 상기식(上旗式)을 행한 것은 잊지 아니한다.
4월 초에 최운정, 안현경과 동반하여 항주에 가셔 서호를 구경하고 전일 소동파의 향락하던 삼담인월(三潭印月)을 보고 칠언절구 한 수를 읊었다.(喜看秋水三潭月 緩步春風九曲橋 亘古文章 安在哉 月白風淸韻不消)
동월 하순경에 수양아들 김성근 집에 작탄(炸彈)이 폭발하여 뒷방 벽이 파손되었는데 이화숙은 머리 빗고 김원경은 누워 독서하다가 깨진 벽돌에 맞지 아니하여 위험을 면하였으나 집은 불란서 경찰들에게 빼앗기고 축출을 당하였다. 수일간 타처에서 유연하다가 다시 가구 등 물건을 찾아서 애인리 다른 집으로 옮겼다.
그때 이강호가 나의 가족을 대동하고 상해에 나왔다. 1년 동안 분리하였던 가족을 반가이 만나고 다시 가족의 단련(團戀)한 줄거움을 보았다. 5월경에 이승만이 나를 주미 워싱턴 구미위원회(駐美京毆美委員部) 부원으로 임명하고 여비 500달러를 보냈다. 그리하여 정계에 파란(波瀾)이 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6월 25일에 구주로 길을 떠났다.

 
 
 

2020년 6월호(통권 7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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