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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0년 2월호)

 

  일본의 기독교박물관 순례
  

본문

 

들어가며
박물관은 여러 형태로 존재할 수 있으며, 그중 종교를 테마로 한 박물관은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서양은 종교박물관을 별도로 설립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역사와 문화, 예술 자체가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 등 기독교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지역의 기독교박물관은 수난과 박해의 역사를 보존하고 기억하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가치를 비기독교인들에게 소개하는 선교의 장으로서의 의미도 지닌다.
일본의 기독교 전래는, 예수회의 창설자 중 한 명인 스페인 출신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Javier)가 1549년 8월 15일 일본의 최남단 사쓰마국(현 가고시마현) 등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의 실학자들이 가톨릭을 수용하기 시작한 시기(18세기 말)와 비교할 때 훨씬 앞서는 역사이다. 하지만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치 시기뿐 아니라 에도 시대의 쇄국정책하에서 일본의 기독교인들은 오랜 박해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일본의 기독교박물관은 기본적으로 박해 시기의 순교자들, 은둔하며 신앙을 지키던 ‘숨은 기독교인들’(가쿠레 기리시탄)에 관한 역사를 기념하는 공간이 그 중심을 이룬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루어진 개혁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등 구미 개신교의 활발한 선교 활동은 일본의 근대 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본의 미션스쿨은 한국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지원을 받으며 광범위하게 설립되었고,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대표적인 명문 사학으로 운영되고 있다. 일본 개신교의 경우 이러한 교육기관의 오래된 건축물을 이용하여 박물관을 설치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 글에서는 일본 기독교박물관의 현황을 크게 기리시탄 역사박물관과 기독교 학교(미션스쿨) 박물관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지면 관계상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개신교의 교육 활동이 배출해낸 저명한 사회 지도자들이나 문화 예술가 등의 업적을 소개한 개인 기념관도 기독교박물관의 한 형태로서 널리 분포하고 있음을 알려둔다.

기리시탄 역사박물관
가톨릭에는 성인 숭배 사상과 함께 성인들이 활동하거나 순교한 땅을 성역화하는 성지 개념이 발달해 있으며, 다양한 성지에 각종 기념 성당이나 박물관을 건립하여 이를 신앙 유산으로 후세에 계승해가고 있다. 한국의 절두산(마포), 베론(제천), 새남터(용산), 미리내(안성) 등 대표적인 성지에 건립된 기념 성당 및 박물관 등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일본의 가톨릭 성지에도 최초의 성역(聖役) 기념 혹은 순교 기념 박물관이 건립되어 있다. 특히 2018년에는 나가사키(長崎)와 아마쿠사(天草) 지역의 잠복 기리시탄(潜伏キリシタン) 관련 유산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지정되어 등록되었다. 풍부한 세계유산과 더불어 조성된 다양한 기리시탄 박물관 몇 곳을 소개한다.

1) 기독교 박해의 시작, ‘니시자카 26 성인 기념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집권 시대까지만 해도,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 같은 다이묘들까지 기독교로 개종하는 등 기독교의 교세가 급속히 확대된 적이 있었다. 특히 나가사키현의 시마바라(島原) 반도와 오무라(大村) 지방, 그리고 아마쿠사 제도와 고도 제도를 중심으로 기독교가 활발하게 퍼져 나갔다. 교통과 통신이 불편하던 상황에서 기독교가 일본에 들어온 지 불과 30년 남짓한 때에 이미 기독교인의 숫자가 50만 명에 이르렀으니, 현재 일본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신구교를 합하여 100만 명을 조금 웃도는 것과 비교할 때 대단한 수치이다. 특히 나가사키의 시마바라 반도에는 세미나리오(초급 신학교)와 콜레지오(고급 신학교)가 설치되었을 만큼 나가사키는 ‘동양의 로마’라 불리며 한동안 가톨릭 선교의 전진 기지로서 주목받았다.
오다 노부나가가 내부 쿠데타로 급서(1582)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집권한 시기에 변화가 일어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 가문에서 개종했던 기독교인들과 고니시 유키나가 같은 크리스천 다이묘들과의 관계 때문에 처음에는 기독교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결국 당시 기독교의 본거지인 큐슈마저 평정하게 되자, 1587년 반천련(伴天連, 포루투갈어의 파르테, 즉 신부의 일본식 한자) 추방령을 내리며 기독교 신앙 활동과 선교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임진왜란(1592-98)이 실패로 끝나갈 무렵, 기독교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본격적인 박해와 탄압이 시작되었다. 1596년 12월에 포르투갈 신부 6명과 일본인 신자와 수사 20명(어린이 3명)이 교토(京都)에서 체포되어, 수천 리(약 900km)를 끌려 다니는 일이 발생하였다. 12세 소년부터 60이 넘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조리돌림을 당했고, 왼쪽 귀가 잘린 채 추위와 허기를 견디면서 걸어야 했다. 반대 세력에 대한 본보기였다. 이윽고 1597년 2월 5일 나가사키의 니시자카(西坂) 언덕에서 이들 26명은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다. 지진과 태풍, 무역선의 표착 등 모든 재난을 기리시탄(切支丹)의 탓으로 돌렸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신국(神國)에 해를 끼친다는 이유를 붙여 단행한 이 사건은, 이후 약 40년에 걸쳐 진행된 피비린내 나는 순교의 서막이었다.
4,000명이 넘는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들 26명은 책형(십자가에 매달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을 받고 장렬하게 순교했다. 이들 26위 순교자들은 교황 울바노 8세에 의해 1627년과 1629년 시복됐고,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처형 직전, 신앙을 버리면 살려주겠다는 말에 12세의 아이 루도비코는 “이 세상의 짧은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바꿀 수 없다.”라며 단호히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순교지인 니시자카 언덕에는 시성 100주년을 기념해 1962년 ‘성 필립보 성당’과 ‘26위 성인 기념관(박물관)’, ‘순교비’를 세워 니시자카 공원을 조성했다. 이 기념관에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최초 상륙 때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가톨릭 선교의 역사를 전시해놓았는데, 1546년 포르투갈 왕에게 보낸 하비에르의 친필 서간과 17세기 작품 ‘눈의 산타 마리아’, 7세기경 한반도에서 건너가 가쿠레 기리시탄이 기도할 때 예수상으로 사용한 바 있는 미륵보살상도 전시돼 있다. 특히 성 필립보 성당은 26위 성인 가운데 멕시코 출신 프란치스코회 예수의 필립보 수사를 현양하기 위해 멕시코로부터 기부를 받아 세워졌다. 스페인의 대표적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영향을 받은 이마이 겐지(今井兼次)가 설계한 이 성당은 26위 성인들이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걸어온 길에 있는 모든 도자기 가마에서 가져온 도자기로 장식해놓은 점이 이채롭다. 또 멕시코에서 보내온 대리석으로 제단을 만들었고, 예수의 필립보 성인을 비롯한 4명의 성해가 안치돼 있다. 1981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직접 이곳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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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리시탄 부활의 땅, ‘오우라 천주당 기리시탄 박물관’
1858년 일본이 서양 5개국과 맺은 통상조약에는 개항지 거주 외국인의 신앙을 존중하고 예배당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1859년 7월 나가사키항이 외국에 개방되었고, 외국인들이 속속 들어와 외국인 거류지인 오우라 언덕에 모여 살게 되었다. 그 직후인 1862년 6월 8일에는 교황 비오 9세가 나가사키의 순교자 26명에 대해 공식 시성(諡聖)함으로써 나가사키는 일본보다 유럽에서 먼저 순교의 땅이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부응하여 파리외방전교회의 베르나르도 프티쟝(B. Petitjean) 신부가 나가사키에 도착했고, 미나미 야마테(南山手)의 오우라에 성당을 건축해 1864년 12월 29일 완공, 그 이듬해인 1865년 2월 19일 봉헌식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이 성당은 일본 최초의 순교자들인 26위 성인들에게 봉헌되었는데, 일본인들에게는 ‘불란서 절’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기독교 신앙은 서양인들에게만 허용되었을 뿐, 에도 막부의 서슬 퍼런 압정하에서 일본인들은 기독교에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데 성당 봉헌식으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865년 3월 17일, 오우라 천주당에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250년의 박해기로 인해 일본에는 기독교인이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 속에서 새로운 환희와 조우하게 된 것이다.

당신은 누가 보냈습니까? 독신 신부이십니까? …성모 마리아상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있는 우리들의 신앙도 모두 당신과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들도 데우스(하느님)를 믿습니다.

이사벨라 유리 가족을 비롯한 우라카미(浦上)의 농민 15명가량이 몰래 성당을 찾아와 프티쟝 신부에게 귓속말로 고백한 말이다. 이들은 “박해가 7대 동안 계속된 뒤 로마의 파파(교황)가 보내는 사제가 마루아(마리아)를 모시고 온다.”라는 예언을 굳게 믿으며 기다려온 가쿠레 기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 숨은 기독교인)의 후손들이었다. 이 말은 들은 프티쟝 신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랜 박해로 명맥이 끊긴 것으로 알았던 가쿠레 기리시탄이 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프티쟝 신부는 제대 오른편 성모자상 앞으로 이들을 인도하며 일본 기리시탄의 부활을 확인하는 감격을 누렸다. 1868년 당시 나가사키에서 사역하던 신부의 보고에 따르면, 나가사키 부근에는 2만 명에 달하는 숨은 기독교인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일컬어 일본 교회사가들은 ‘기독교의 부활’이라고 명명하였다.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오우라 천주당 건물 바로 옆에는 ‘기리시탄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이 건물은 원래 라텐신학교로 사용되던 곳이다. 가쿠레 기리시탄 관련 유물과 프티쟝 신부의 유품 등을 직접 확인하며 일본 가톨릭 역사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장소이다.
오우라 성당은 한국 가톨릭교회와도 인연이 깊다. 1867년 조선교구 6대 교구장 뮈텔 주교가 박해를 피해 이곳에 머문 적이 있고, 1882년 프티쟝 주교가 7대 교구장 블랑 주교의 서품식을 거행한 곳이기도 하다. 1882년부터 1884년까지는 조선인 신학생 21명이 이곳을 거쳐 페낭 신학교로 갔다. 또 1882년 3월에는 블랑 신부가 홍산 서들골에 묻혀 있던 갈매못 순교자 다블뤼 주교와 오매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주기(요셉), 황석두(루가)의 유해를 발굴했는데, 유해 손실을 우려한 프티쟝 주교가 명령하여, 1882년 11월부터 1894년 5월까지 12년간 이곳 오우라 성당에 그 유해들을 안치했다고 한다. 이들 갈매못 순교 성인의 유해들은 1894년 5월 조선으로 다시 옮겨와 용산신학교를 거쳐 1900년부터 명동성당에, 이후 1967년부터는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 성당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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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히라도시 기리시탄 자료관
히라도시 기리시탄 자료관(平戸市切支丹資料館)은 나가사키현 일대에 널리 분포하던 가쿠레 기리시탄에 관한 자료와 유품들을 전시하는 자료관으로 1982년에 세워졌다. 히라도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의 예수회 선교사에 의해 일찍이 가톨릭교회가 전해진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료관이 있는 네시코(根獅子) 지구를 포함한 히라도시마(平戸島) 서쪽 해안 지역이나 이키쓰기시마(生月島) 지역에서는 에도 시대 초기에 수많은 기독교인이 탄압을 당했고, 그로 인한 순교자도 다수 발생하였다. 따라서 이곳은 메이지 시대에 금교령이 풀리기 전까지 산속에 몰래 숨어 들어가 기독교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의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심지어는 지금도 가쿠레 기리시탄의 신앙을 계속 이어가는 지역이 있다고 한다.) 이곳 자료관에는 가쿠레 기리시탄이 신앙을 지키며 간직해온 마리아 관음상이나 난도가미(納戸神), 금교(禁教)를 명하던 고찰(高札), 신앙 변절을 요구하며 밟게 하였던 후미에(踏絵, 예수의 얼굴을 조각한 동판 혹은 그림) 등 다수의 자료와 유품이 전시되고 있다.

4) 아리마 기리시탄 유산 기념관
미나미 시마바라시(南島原市)의 아리마 기리시탄 유산 기념관(有馬キリシタン遺産記念館)은 ‘나가사키의 교회군과 기독교 관련 유산’의 중요한 자산이라 할 수 있는 ‘히노에 성터’(日野江城跡), ‘하라 성터’(原城跡)에 대한 역사를 소개하는 시설이다. 즉 시마바라 및 아마쿠사 잇키(島原・天草一揆)에 깃든 250년의 숨은 기독교인들의 삶을 소개하는 박물관이다. 제1전시실에서는 금박 기와나 그레고리안 성가 악보, 서양 선박의 모형, 활판 인쇄기 등과 함께 일본 최초의 기독교 전래 과정을 알려주고 있다. 소형 극장도 마련되어 있어 ‘미나미 시라바라에 꽃핀 기리시탄 문화’(南島原に栄たキリシタン文化)와 같은 영상물도 상영하고 있다. 제2전시실에는, 십자가나 로사리오 등 엄중한 탄압 시기에 기리시탄이 남긴 출토품 등이 전시되고 있다.

5) 아마쿠사 기리시탄관
나가사키의 남쪽에 있는 구마모토현(熊本県) 아마쿠사(天草)에는 또 하나의 시립 기리시탄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아마쿠사 기리시탄관(天草キリシタン館)이 바로 그곳이다. 꽤 오래 전인 1966년에 세워진 이 박물관은 아마쿠사 지역의 기리시탄들이 남긴 역사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내부는 ‘기독교의 전래’, ‘남만 문화’(南蛮文化), ‘박해’, ‘아마쿠사・시마하라의 난’(天草・島原の乱), ‘가쿠레 기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 ‘난후의 대관행정’(乱後の代官行政) 등의 주제로 구성되어 각각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 등을 설명하고 있다. 2010년에 리뉴얼 작업을 거쳐 재개관하였다.

6) 일본의 교우촌, 이바라키 시립 기리시탄 유물 사료관
맨 처음 소개한 최초의 순교자 26인의 순교 현장은 나가사키였지만, 그들이 체포된 곳은 교토였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 정권의 중심지는 교토였으므로, 그곳을 중심으로 여러 교회가 세워지고 기독교 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 따라서 기리시탄 탄압이 거세진 직후부터 교토 지역의 기독교인 다수가 산속에 들어가 가쿠레 기리시탄으로 살아가게 된다. 간사이 지역의 대표적인 교우촌이 바로 교토부와 오사카부의 변두리인 이바라키시에 있었다. 그러한 역사를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1987년 9월에 이바라키 시립 기리시탄 유물 사료관(茨木市立キリシタン遺物史料館)이 시 교육위원회의 주도하에 개관하였다.
이바라키시는 기리시탄 다이묘로 유명한 다카츠키성(高槻城)의 성주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의 영지였다.[우콘은 2015년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복자’(福者)로 시복됨.] 이 지역은 그의 영향하에 당시부터 기독교 신자가 된 주민들이 많았는데, 기독교 금교령 이후에도 가쿠레 기리시탄이 되어 그곳의 산속에서 몰래 신앙을 지켜왔다. 1919년에 기리시탄 연구가인 후지나미 다이초(藤波大超)는 이바라키시 센다이지 지구(千提寺地区)가 가쿠레 기리시탄 마을이었음을 밝혀냈고, 이를 계기로 그 지역에서 수많은 기리시탄 유물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마리아 십오현의도’(マリア十五玄義図), ‘하비에르 화상’(ザビエル画像) 등이 그것이다. 특히 ‘하비에르 화상’은 일본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반드시 수록돼 있을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현재는 고베시립박물관에서 관리 중이라 특별한 시기에만 원본을 전시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평상시에 그 지역 마을 주민들이 봉사의 개념으로 돌아가며 관리하기 때문에, 가쿠레 기리시탄 출신 주민들이 박물관 안내를 할 경우에는 그 가족의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방대한 전시물을 보유한 것은 아니지만, 박물관 주변 야외에도 가쿠레 기리시탄의 유적들이 점재하고 있으므로 현장 답사도 아울러 계획하면 좋은 곳이다.

7) 신구교의 조화, 교토라쿠사이교회
교토 시내의 료안지를 나와 정남쪽으로 한참 내려오면 있는 츄쿄우쿠(中京区) 니시노쿄바다이쵸(西ノ京馬代町)에는 일본침례파연맹 소속의 교토라쿠사이교회(京都洛西教会)가 있다. 이곳의 주임목사인 스기노 사카에(杉野榮)는 평생 교토 지역 기리시탄의 역사를 연구하며 그 신앙의 뿌리를 알리기 위해 애쓴 인물이다. 10여 년 전에는 『교토의 기리시탄 사적을 돌아보다: 바람은 도읍으로부터 불다, 또 하나의 교토』(京のキリシタン史跡を巡る: 風は都から: もう一つの京都, 三学, 2007)를 출판하기도 했다. 스기노 목사는 이 책을 통해 오랜 과거에 이미 수만 명에 달하는 기독교인이 교토에 존재했음을 강조한다. 교토 시내의 기리시탄 유적 40여 곳을 소개한 이 책은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켜 초판 3,000부가 모두 팔려 2쇄에 들어갔을 정도였다. 스기노 목사는 이 책에서 특히 수많은 순교자를 낸 교토의 기독교 역사를 대부분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강조한다.
스기노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교토라쿠사이교회에 들어서면, 곳곳이 기리시탄 유물들로 가득 차 있다. 아기를 안고 있는 불교의 보살상과 흡사한 마리아상을 비롯해, 에도 시대 당시 배교를 강요하기 위해 제작했던 후미에(踏み絵) 등이 박물관 수준으로 갖춰져 있다. 스기노 목사의 평생어린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진 ‘박물관 교회’인 셈이다. 특히 예배당에 앉아 좌측 창문의 정원을 내다보면 아담하고 예쁜 십자가 모양의 기리시탄토로우(キリシタン灯篭)가 세워져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일파인 침례교회이지만, 이곳은 수백 년 전 목숨을 건 가쿠레 기리시탄의 가톨릭 신앙과 한 배에 있음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신구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같은 신앙을 아름답게 조화시키고 있는 일본 기독교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8) 나고야의 에이코쿠지(栄国寺) 기리시탄 박물관
나고야 지역은 기독교를 수용한 오다 노부나가와 이후 박해를 시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다. 이 지역 오와리번(尾張藩)의 2대째 영주 도쿠가와 미쓰토모(徳川光友)는 에도 막부의 기리시탄 탄압 정책하에서도, 처음에는 기리시탄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고 한다. 하지만 1631년부터 번 내에서 기독교 전도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 처형하기 시작한다. 1644년부터 1645년까지 나고야성 안에서도 기리시탄이 처형되었다. 이 땅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마을 언덕 위에는 1649년에 돌로 쌓은 공양탑이 세워졌다. 하지만 1661년 봄 이후에도 수많은 기리시탄을 여러 마을에서 잡아들여 그중 적극적인 전도자 200명을 색출하여 1665년 2월 3일 기후의 센본마쓰바라(千本松原) 처형장에서 죽였다. 1665년 도쿠가와 미쓰토모(徳川光友)는 기후의 처형장을 현재의 기요스시(清須市)인 가와라케노(土器野)로 옮겨 온다. 그 후 막부의 명령이 더욱 엄격해졌고, 검거한 2,000명 남짓의 기리시탄 모두를 1668년에 새로운 처형장에서 모두 죽이게 된다. 그 후 오와리 지역의 기리시탄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아이치현 나고야시의 정토종(浄土宗) 사찰인 에이코쿠지(栄国寺)는 1665년 도쿠가와 미쓰토모가 기독교인을 박해한 센본 마쓰바라 형장에 세워진 사찰 ‘청량암’(清涼庵)에서 유래하며, 1685년부터 오늘날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 절은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비호하에 계속 이어져, 근대 시기에도 살아 남았다. 1945년 태평양전쟁 시기에 도시를 초토화시킨 나고야 대공습 때도 이 절과 그 주변은 피해가 없었다. 1986년부터 가톨릭 나고야 교구는 이 절터에서 수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순교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나고야 순교자제’(名古屋殉教者祭)라는 이름의 미사를 열었고, 1996년 11월 23일에는 현창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일본 쥬부(中部) 지역에서 자행된 가톨릭 신자 박해의 역사와 다양한 기리시탄 유물을 소개한 ‘기리시탄 유적 박물관’(切支丹遺跡博物館)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비극적인 역사와 신앙의 숭고함을 불교와 가톨릭이 협력하여 널리 전파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기독교 학교 박물관
한국에서도 최근 서울 정동의 배재학당 박물관이나 이화학당 박물관, 연세대학교의 ‘연세 역사의 뜰, 광혜원’이나 세브란스병원 동은의학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의 이화역사관, 숭실대학교의 한국기독교박물관, 가톨릭신학대학 성심 교정의 박물관 등 미션스쿨의 교육 활동이 기독교박물관의 중추를 이루어가고 있다. 교육 사업이 활발했던 일본에도 수많은 기독교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그 학교들은 저마다 ‘학원사 박물관’의 형태로 각 지역 기독교박물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1) 최초의 미션스쿨, 메이지가쿠인대학
메이지학원대학(明治學院大學)은 1859년부터 33년 동안 일본 북장로회 선교사로 활약한 햅번(James Curtis Hepburn)에 의해 창립되었다. 햅번은 의료사역은 물론 『일영어림집성』이라는 사전을 편찬하였고, 성서를 번역하였으며, 부인과 함께 햅번학원을 설립하였다. 햅번학원은 이후 미국 북장로회, 미국 화란개혁교회, 그리고 스코틀랜드 일치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Scotland)가 연합하여 1877년 ‘도쿄일치신학교’(東京一致神學校)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1886년 또다시 여러 학교를 합병해 메이지가쿠인대학을 발족시킨다.
메이지가쿠인대학의 시로가네다이 캠퍼스 정문에 들어서면, 학교의 상징물처럼 우뚝 선 메이지가쿠인기념관(구 신학부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학원사 자료실로 사용되어 학교가 펼쳐온 오랜 교육 및 선교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신학부는 전시하에 ‘일본신학교’로 통폐합되어 현재 일본기독교단의 ‘도쿄신학대학’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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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윤동주가 마지막 시를 쓴 곳, 릿쿄대학의 ‘릿쿄학원 전시관’
미국 성공회 출신의 선교사 윌리엄스(Channing Moore Williams) 신부는 1859년 6월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일본의 개신교 역사의 서막을 열었다. 막부의 기독교 탄압 속에서도 전도에 힘쓴 그는 중국과 일본의 새로운 거점으로서 우창(武昌, 현재의 우한 지역)과 오사카(大阪)를 개척하여 1874년 2월 츠키지(築地)에 릿쿄대학의 전신이 된 사숙(私塾)을 열었다. 1889년 후진 선교사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 주교직을 사임한 그는 1895년 교토로 옮겨 간사이 지역의 전도활동에 생애 마지막 힘을 쏟았다. 일본의 대표적 선교 개척자인 윌리엄스가 불과 몇 명의 학생을 데리고 시작한 소규모 학당이 훗날 일본의 명문대학인 릿쿄대학으로 성장한 것이다.
릿쿄대학은 지금도 영국과 미국, 한국 등지의 성공회 조직과 깊은 관계를 맺고 교류하고 있으며, ‘성서, 전통, 이성’의 균형을 중시하는 ‘비아 메디아’(Via Media) 정신을 잘 구현하고 있다. 1918년에 츠키지(築地)의 사숙으로부터 이케부쿠로(池袋) 캠퍼스로 본격 이전하게 되면서, 튜더아치 스타일(tudor arch style)로 지어진 아름다운 적벽돌 건축군이 형성되었다. 봄여름이 되면 담쟁이로 뒤덮인 본관(모리스관), 도서관, 기숙사(현재 2호관, 3호관), 식당 등이 머피앤다나 건축사무소(Murphy and Dana Architects)의 설계와 시공으로 완성되었다. 이 건물들은 간도대지진의 충격도 견뎌내어 일본 안에서도 보기 드문 서구적 대학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본관 바로 옆의 구 도서관 건물 2층은 ‘릿쿄학원 전시관’으로 조성되어 일본의 성공회 전래 역사와 함께 릿쿄대학의 발전 역사를 한눈에 확인하도록 도와준다. 이 학교는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시인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를 마치고 일본 유학을 와서 처음 재학한 학교이기도 하다. 그러한 인연을 기념하여 전시관 한쪽에는 윤동주의 도쿄 시절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자료를 모아놓은 특별전시 코너가 별도로 마련돼 있다.

3) 한국 선교의 문을 연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자료센터
한국 기독교사의 여명을 비춘 미 북감리회의 가우처, 매클레이 등의 인물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도쿄의 대표적 미션스쿨은 아오야마가쿠인대학(靑山學院大學, 1878년 설립)이다. 오랜 전통의 신학부가 있었지만, 일제 말기에 통폐합(1943)되어 현재의 도쿄신학대학이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학교 정문에는 존 웨슬리의 거대한 동상이 우뚝 세워져 있다. 그 안에 길게 뻗은 메타세콰이어 길을 따라 걸어가면, 현대식으로 새롭게 지어진 ‘가우처 기념 예배당’이 눈에 들어오고, 학교 중심부에는 마지마기념관(間島記念館, 1929)과 신학부 건물이었던 베리홀(Berry Hall, 1931)이 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웅변하고 있다. 본관인 마지마기념관에는 ‘아오야마학원 자료센터’(青山学院資料センター)라는 박물관을 겸한 역사자료실이 1977년부터 설치되어 있다. 상설전시는 물론 각종 기획전을 이어가고 있으며, 일본 감리교회 연회록과 총회록, 일본 주재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의 선교 보고서, 일본에서 간행된 기독교 잡지인 「護敎」, 「六合雜誌」, 영문 선교 잡지 Japan Vanguard 등 140년에 걸친 이 학교의 교육과 선교 역사 관련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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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김창준 목사,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전영택 목사, 그리고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소설가 심훈의 친형 심명섭 목사, 서재필의 조카 손자인 교회사가 서태원 목사, 전후 재건에 큰 공을 세운 류형기 감독, 조선신학교(현 한신대)를 세운 송창근, 김재준, 김정준 목사 등 수많은 한국인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문학인들 가운데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 5:8)라는 성서 구절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김동명 시인도 이곳 신학부 출신이며, 그 밖에 김영랑, 백석 등의 문인들도 이 학교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창작활동을 펼쳤다.

4) 윤동주와 정지용 시비가 세워진, 도시샤대학 해리스이화학관 도시샤 갤러리
도시샤대학의 전신은 1875년 일본 초기 기독교인 니지마 조(新島襄)가 중심이 되어 야마모토 카쿠마(山本覺馬)와 미국인 선교사 제롬 데이비스의 도움을 받아 창립한 도시샤영학교이다. 1876년 가을, 이 학교는 니지마 사택에서 쇼코쿠지(相國寺)와 고쇼(御所) 사이의 옛 사츠마번(薩摩藩) 소유 토지로 이전했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오랜 교토의 역사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도시샤대학의 고색창연한 학풍을 느낄 수 있다.
구 신학부 건물인 클락 기념관을 지나 캠퍼스의 중심로 이동하면 해리스 이화학관(ハリス理化学館) 건물이 우아한 자태를 드러낸다. 1890년 7월에 준공된 이 적벽돌 건물은 1979년 5월에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도시샤의 역사와 함께 창립자인 니지마 조의 교육이념과 기독교 정신 등을 귀중한 사료들과 함께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공식 명칭은 ‘해리스 이화학관 도시샤 갤러리’(ハリス理化学館同志社ギャラリー)이다.
이 건물의 왼쪽 측면에는 한국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기독교가 배출한 대표적인 두 현대 시인, 정지용과 윤동주를 기념한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두 사람 모두 도시샤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인연이 있다. 그 박물관에 이들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는 것은 그들이 이미 이 박물관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5) 롯코산 병풍 아래, 관세이가쿠인대학 학원사 전시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학 캠퍼스를 꼽으라면, 많은 일본인들이 주저 없이 고베와 오사카 사이의 니시노미야(西宮)에 있는 관세이가쿠인(關西學院)대학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스탠포드대학을 연상케 하는 오렌지색 지붕과 아이보리색의 건물 벽면, 그리고 녹색 잔디밭이 인상적이며, 병풍 같은 롯코산(六甲山) 산맥과 푸른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캠퍼스이다.
정문에 들어서면 보이는 건물들은 고베에서 이전할 당시(1929)에 지어진 그대로여서, 이 캠퍼스는 그 자체로 거대한 근대 유적인 셈이다. 가장 관심을 가질 만한 건물은 시계탑 건물이다. 이 건물은 원래 도서관이었지만, 현재는 그 후면에 거대한 현대식 도서관이 신축되어서 학원사 편찬실과 박물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학교에서 신학을 연구했을 수많은 한국인 신앙 선배들의 발자취를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낸 박대선 감독, 여권필화사건의 김춘배 목사, 감리교신학대학 학장 홍현설 박사, 중앙신학교 설립자 이호빈, 새문안교회 김영주 목사, 이화여대 현영학 교수 등 수많은 한국 교계의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그들이 책을 탐독하던 도서관은 미국 남감리회와 캐나다 감리회 선교부의 일본 선교 역사와 교육 활동을 소개하는 역사박물관으로 조성돼 있으니 방문과 견학을 권할 만하다.

6) 홋카이도대학의 뿌리, 시계탑 박물관과 농학부 박물관(존 베철러 기념관)
메이지 초기인 1876년에 세워져 일본 최초로 학사학위 수여가 이루어진 삿포로농학교(札幌農學校)는 일본 근대 고등교육의 효시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삿포로의 신도시 건설과 홋카이도 전체의 개척(開拓)을 주도할 농업지도자 양성이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에 홋카이도의 발전과 함께 점차 그 규모도 확대되어 1918년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초대 학장(교감)이었던 클락 박사가 남긴 “청년들이여 큰 뜻을 품어라!”(Boys, be ambitious!)라는 격언이 학교의 공식 교훈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자신의 회고록 How I Became a Christian에서 증언하기를, 실제로 클락에게 직접 배운 학생들은 클락이 작성한 ‘예수를 믿는 자의 계약’(イエスを信じる者の契約)에 서명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렇게 처음 기독교를 접하게 된 삿포로농학교 1기생 16명 가운데 빼어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국제연맹 사무총장을 지낸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를 비롯해 앞서 언급한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김교신, 함석헌의 스승), 홋카이도제국대학 초대 총장을 지낸 사토 쇼스케(佐藤昌介)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도 삿포로를 찾는 방문자들이 반드시 들러야 하는 명소로 꼽히는 곳이 바로 유명한 ‘시계탑 건물’(Sapporo Clock Tower)이다. 이 건물은 본래 삿포로농학교의 연무장(演武場) 겸 강당으로 1878년에 지어졌으며, 이후 1903년에 현재의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도심 한복판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1층은 시계탑과 삿포로 개척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는 자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장소를 조금 옮겨 아름다운 홋카이도대학 캠퍼스 쪽으로 가면, ‘농학부 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1871년에 영국 성공회 선교사이자 ‘아이누의 아버지’라고 불린 존 베철러(John Batchelor) 박사의 사택을 식물원 내에 이축한 것이다. 건물 내부가 항상 공개되는 것은 아니지만, 2층에는 베철러가 사용하던 가구와 유품, 문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7) 침례교회 선교의 열매, 세이난가쿠인대학 박물관
큐슈(九州)의 관문인 후쿠오카의 대표적인 미션스쿨(침례교)인 세이난가쿠인대학(西南学院大学)의 대학 박물관도 기독교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1921년에 W. M. 보리스의 설계로 건축된 적벽색의 본관 건물이 2006년 5월에 대학 박물관으로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정관에서 밝힌 이 박물관의 설립 목표는 ‘기독교 문화의 연구와 전시’이며, 기독교주의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더 나아가 유대교 관련 자료도 함께 전시하여 신구약을 관통하는 종교사적인 흐름을 파악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세이난가쿠인의 창립자인 도저(Charles Kelsey Dozier)의 유품과 선교 활동 등도 전시하고 있다. 평생 학습의 장소로서 지역사회에 열려 있는 대학 박물관을 목표로 하여, 성서나 교과서에 등장하지만 평소에 보기 어려운 물건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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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일본의 갈릴리 땅, 토호쿠가쿠인대학 학원사 자료센터
일본의 토호쿠(東北) 지역을 대표하는 미션스쿨인 토호쿠가쿠인대학의 예배당 지하에는 2001년부터 토호쿠가쿠인 사료센터(東北学院史資料センター)가 세워져 있다. 목회자를 양성하던 센다이신학교(仙台神学校)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도호쿠가쿠인에 관한 역사 자료를 수집, 보존, 전시하며 이 지역의 선교 역사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특히 이 학교를 세운 세 명의 설립자 오시카와 마사요시(押川方義, 개혁파), 호이(William Edwin Hoy, 미국 루터교회), 슈네더(David Bowman Schneder, 개혁파)와 관련된 자료 200점 정도가 상설 전시돼 있고, 기획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나가면서
일본 열도 각지에 분포하는 기독교박물관을 숨가쁘게 달려가며 순례해보았다. 필자의 부족함으로 인해 소개하지 못한 곳도 다수 존재할 수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일본 기독교가 지닌 역사・문화적인 풍요로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신도와 불교, 신종교 등 토착종교들이 압도하는 사회 분위기로 인하여 기독교의 세력이 확장되기 어려운 나라이다. 그럼에도 신앙의 숭고함, 교육사업과 문화예술을 통한 사회 공헌, 양심적인 사회 지도자 및 사상가의 배출을 통한 일본 사회의 자정 능력 확보 등은 일본 기독교의 큰 업적이며, 오늘날 일본 사회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을 시민들이 손쉽게 찾아와 목격하고 확인할 수 있도록 돕는 박물관과 기념관 등의 시설은 그러한 일본 기독교의 현재와 미래를 견인해나가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일본 기독교박물관의 면면을 살펴보고 나면, 한국의 기독교박물관이 어떤 면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일본에서 주류 종교가 아니라며 일본 기독교를 무시하거나 간과하기보다는 사회와의 소통 과정을 통해 오랜 공헌의 역사를 축적해온 일본 기독교를 이해하고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위해 일본 기독교박물관의 현황을 파악하고 직접 방문해 배우는 것은 한국 기독교의 성숙에도 분명 도움이 되는 작업일 것이다.


홍이표 | 연세대학교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였다. 동 대학원에서 한국교회사를, 교토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일본 기독교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Ph.D.) 감리교 선교사로 파송된 이후 일본 기독교단 탄고미야즈교회(丹後宮津教会) 주임목사로 활동하는 등 일본의 목회현장과 함께하고 있다.

 
 
 

2020년 5월호(통권 7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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