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신년 권설]
특집 (2020년 1월호)

 

  고령화 사회를 살아가며
  

본문

 

요즘 우리 사회의 풍속을 보면, 어린이집은 차차 줄어들고 요양병원과 병상들은 급격하게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는 우리 자신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더 걱정한다. IMF의 한국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경제의 구조적 위험 8가지 중 저출산과 고령화 현상을 첫손가락으로 꼽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미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14%를 넘었다. 유엔에서 정한 기준으로 말하자면 ‘고령화 사회’를 넘어 ‘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그동안 반면교사 노릇을 하던 일본을 앞질러 ‘초고령 사회’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 중심에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불편해진다. 얼마 전까지 팔순(八旬)의 나이는 남의 일이려니 생각하였다. 아직 마음은 그리 늙지 않았기 때문에 세월에 부적응증을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대개 노인들이 나이 값을 하지 못하는 까닭은 마음보다 몸이 먼저 늙기 때문이다. 마음조차 몸에게 항복하면 그때는 정말 늙은 것이다.
「기독교사상」에서 원고 청탁을 받고 먼저 든 생각은, 우리 사회에 대한 진단이나 원로로서의 권고 이전에 나 자신에 대한 진단과 권고가 더 급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와 모든 세대가 겪고 있고, 어느 순간 실감할 모든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나이이다. 웬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지, 자기 나이만큼 속도감을 느낀다더니, 과연 해마다 그 흐름은 점점 빨라지고 있다.
허구한 날 언론보도는 고령화 사회를 진단한다. 전문가들의 입장을 들어보면, 마치 자신은 늙지 않을 것처럼 진단이 객관적이다. 100세 시대를 말하고 의료기술의 발전과 진보를 자랑하지만, 사실 80세를 넘어서도 마음과 몸이 균형 있게 강건함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천부적인 복이다. 100세인을 가리키는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는 그야말로 꿈일 뿐이다.
나는 은퇴할 무렵에 ‘인생 이모작’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였다. 나만큼은 꼰대가 되지 않으려 하였고, 잘 늙으려고 ‘웰에이징’(well-aging)에 관심을 기울였다. 젊은이들과 꾸준히 대화하고,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으며, 웬만하면 걷기를 실천하여 마음만 먹으면 하루 2만 보(步)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건강조차 고령화의 문제 해결책이 아닌 오히려 고령화의 이유가 된다니, 노인 세대는 정말 설 땅을 잃고 있다.
‘키케로 패러독스’(Cicero Paradox)라는 말이 있다. 2,000여 년 전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는 “모두들 노년에 도달하기를 바라면서도 일단 도달하고 나면 비난하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모순되고 이치에 어긋나는가!”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노인 세대를 가리키는 단어 ‘시니어’는 로마 시대에 경험이 많은 훌륭한 병사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사실 노인이란 이름을 미화한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부르는 ‘어르신’은 본래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영어로 ‘에이지드 퍼슨’(aged person) 혹은 ‘올드 피플’(old people)은 보다 노골적이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노인을 ‘고령자’로 부르고 점잖은 표현으로 ‘실버’라고도 하는데, 머리가 희어지는 것을 지혜에 빗대어 부르는 호칭이다. 중국에서 ‘장년’은 60대를 가리키고, 70대 이상은 ‘존년’(尊年)으로 부른다고 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노인이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단지 노화 때문만은 아니다. 내 주변의 7080세대는 어린 시절 6・25와 가난, 그리고 장기간의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거의 비슷비슷한 부정적 경험을 했기 때문에 가치관이나 관점이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다. 그래서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진통을 겪은 5060세대와도 다르고,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부흥의 수혜자인 3040세대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이렇듯 젊은 세대와 다른 트렌드를 갖고 있으니 존경받기보다는 더 많은 비난을 듣는다. 게다가 대부분의 노인 세대는 경제적으로 자립하지도 못하고, 자식에게 온전히 의존하지도 못하니 빈곤할 수밖에 없다. 가난한 노인을 ‘푸피족’(poopie族)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시대가 너무 빨리 바뀌고 있다.
예전에 나이 드신 선배들이 이런 말을 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척’해야 할 일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른다고. 인사치레하려면 돈이 들고, 집 밖으로 움직이면 돈이 들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돈이 들고, 남 앞에서 입만 벙긋해도 돈이 드니, 수입 없는 노년에는 웬만하면 존재감이 없는 모습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나이가 들수록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귓등으로 들었던 우스개조차 이젠 명심보감처럼 새겨진다.
내 경우 70대의 10년을 농부로 살았다. 1년의 절반을 농촌에서 지내면서 인생 이모작을 실천하였고,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안빈낙도를 꿈꾸기도 하였다. 그리고 팔순에 접어든 올해, 이제는 농부마저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0년 농부생활 끝에 다시 은퇴를 결심한 것은 농사를 짓는 데에도 적절한 나이가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자식농사도 소중하고 밭농사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농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생농사가 아닐까 싶다. 이 세상에 노년의 위기를 단박에 해결해줄 ‘불로초’(不老草)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누구나 은퇴 이전에 체력 관리, 취미 생활, 친구 관계, 부부 간 다정함, 지적 감수성, 부업 능력 등 나이들 준비가 요구된다. 나이 먹는 것을 긍정적으로 빗대어 인생은 늙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또 노인 세대를 가리켜 ‘실년’(實年)이라는 표현도 사용하지만, 나이 값이 그리 후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기에 흐르는 세월 앞에서 ‘내가 사라지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내 인생의 부피를 채우고, 삶의 자존감을 만들 이유가 있다. 탈무드는 “이제부터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기에 정녕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라고 하지 않던가?
감사한 것은 노인이 되어서도 목사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이다. 평생 목사로 살면서 설교에 짓눌렸지만, 지금 한 달에 한 차례 돌아오는 설교는 아주 행복한 일과이다. 서대문사거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빌딩에 세 들어 사는 더불어한교회는 네 명의 은퇴 목회자가 공동설교를 하는, 소위 ‘젊은 노인’들의 세상이다. 네 명의 은퇴 목사들은 저마다 당당한 젊은 시절도 있었지만, 이젠 세상을 근심하면서도 더 이상 몸이 따르지 않아 아쉬워한다.
내 경우는 조금 달라, 평생 교회 안에 살면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불의한 세계를 향해 외치기보다 늘 교인들에게 불편한 잔소리를 늘어놓듯 설교하였다. 그런 좁은 안목과 시야를 지닌 사람이었기에 노인이 되었다고 젊은이들에게 ‘인생지남’(人生指南)이 될 만한 덕담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현직에 있을 때 좀 더 진취적인 생각을 갖고 살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미련이다.
나이가 들수록 늘 배워야 한다는 것은 노인 생활에서 깨달은 순리이다. 귀가 어두워지기 전에 더 많이 들을 것을…, 눈이 노경(老境)에 이르기 전에 더 많이 읽을 것을…. 후회심이 크다. 지금 노인들은 고령화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지만, 점점 노인의 주장은 외면당하고 존재감마저 없이 퇴물 취급을 당하고 있다.
목사로서 은퇴하면 명예롭게도 자연스레 ‘원로’(元老) 소리를 듣는다. 물론 그건 나이에 따른 대접에 불과하며, 또 하나의 노인이라는 뜻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없는 원로 호칭은 아무개라는 이름처럼 무의미하다. 정말 나이가 들었다고 모두 원로인가? 내 생각에 원로란 단지 나이 값이 아니라, 인생의 무게에 대한 연륜과 희생에 따른 명예여야 한다.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원로의 싹은 이미 청년 시절부터 드러나게 마련이다. 훌륭한 청년만이 훌륭한 노인이 되는 법이다. 그러기에 원로가 될 준비에 소홀했던 내 젊은 시절이 안타깝다. 앞만 보고 살면서 시대의 변화에 둔감했던 중년 시절이 아쉽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자신의 색맹 상태를 깨닫지 못했던 장년 시절이 답답하다. 돌아보면 눈부신 변화를 재촉하던 부름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다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새삼스럽지만 이제라도 당당한 노인으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시대착오적 경험을 무기로 삼아 미래 세대에 무임승차하는 그런 노인은 사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 세대가 우리를 극복할 수 있도록 희망의 징검다리가 되는 일은 우리 몫이다.
2020년 새해의 말머리로 ‘불안’을 손꼽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안은 언제나 문턱에 앉아, 혹은 베개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는 듯하다. 노인일수록 더 많은 불안을 괴고 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 기반에 대해 불안정성을 느끼고, 자주 흔들릴 것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한 시대를 살아온 노인으로서 보다 세상의 평화를 염려하고, 의미 있는 근심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다. 우리 세대는 어려서부터 전쟁과 가난을 겪으면서도 그나마 잘 살아왔다고 감사했지만, 앞으로 우리 후손들은 경제적으로 유복한 세대이고 대부분 대학교를 졸업했음에도 취업, 결혼, 출산, 그리고 긴 노년 등 더 많은 인생의 전쟁을 치루며 살아갈 듯하다.
교회는 어떤가? 어떤 사람은 진단하기를, 지금은 7년 대풍년의 마지막 해라고도 하고, 이미 7년 대기근이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자신감이 넘치던 한국교회는 이제 무거운 멍에를 후배들에게 넘겨주고 있다. 우리 세대는 성장과 부흥을 한껏 일구면서 자부심을 누렸지만, 그럼에도 물량주의니 세습이니 부끄러운 신앙적 유산과 책임을 결코 피해갈 수 없다.
새해에 우리 노인 세대에게 진정한 혜안(慧眼)이 있어 마지막 봉사를 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는다. 더 이상 구시대의 안목으로 진취적인 사회에 대해 불편한 잔소리를 하기보다는, 경험의 우상을 버리고 제3의 눈인 대안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 산 스마트폰을 손에 익히기 위해 여러 날 씨름하듯이, 다음 세대의 현실에 눈뜨기 위해 진실한 돋보기를 써야 할 것이다.
고령화 시대에 백발의 노인에게 거는 기대는 거창한 비전이 아니다. 다만 소박한 성찰과 후회일 것이다. 어렸을 적 무더위가 가시고 해가 기우는 초저녁이면 할아버지는 느티나무 아래에 멍석을 깔고 여치집도 꼬아주시고, 수수깡 안경도 만들어주시곤 하셨다. 불행하게도 우리 세대의 할아버지들은 그런 손재주가 없다. 게다가 주변에서 밀짚이나 수숫대를 찾아보기는 더 어렵다. 맑은 눈으로 투명하게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그런 수수깡 안경이 그리워진다.

 
 
 

2020년 4월호(통권 736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