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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 송기득, 손규태의 신학적 유산
특집 (2019년 12월호)

 

  [좌담회]
  

본문

 

일시 2019년 11월 4일, 경동교회
참석자 김경재(한신대 명예교수), 서진한(대한기독교서회 사장), 유석성(전 서울신대 총장), 채수일(경동교회 담임목사), 김흥수(사회, 기독교사상 주간)

김흥수 지난 9월 초순에 두 분 신학자가 돌아가셨습니다. 송기득 선생님은 1933년생, 86세이고 손규태 박사님은 40년생, 79세였습니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12월호 특집으로 이 두 분의 신학과 삶을 조명해보는 기회를 갖기로 하고 이렇게 좌담회를 준비했습니다.
송기득 교수님은 1933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미 중학교 시절부터 목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셨는데요, 연세대학교 학부에서 철학을 공부하셨고, 석사 과정에서도 철학을 공부하셨습니다. 1964년에 쓴 석사학위 논문은 “하이데거의 진리의 본질적 문제”입니다. 송기득 선생님은 중앙신학교에서 3학기 공부를 하셨는데, 안병무 박사님이 교장일 때였습니다. 나중에 한산촌(결핵요양소)에서 활동을 하셨는데, 한산촌을 떠난 다음에는 서울에서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안병무 박사와 함께 활동했습니다.
이후 1969년에 창간된 안병무의 개인 잡지 「현존」의 편집장 일을 맡았는데, 1976년에 시작하여 폐간된 1980년까지 편집장으로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 후 몇몇 신학대학에 출강하다가 1985년에 목원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부임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15년 동안 한산촌에서, 15년 동안 목원대에서 활동하셨습니다.
손규태 선생님은 1940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953년 12월에 월남하셨다고 하는데요, 전쟁 직후지요. 한국신학대학에서 공부하셨고, 동 대학원에서 루터를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셨습니다. 1972년에 신학연구소가 설립되었는데, 설립 당시에 행정적인 일에 참여하시고 졸업 후에 1975년까지 약 3년 동안 신학연구소 간사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1975년에 하이델베르그대학 신학부로 유학을 가셨습니다. 거기서 기독교 윤리학을 공부하여 1986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그때 박사학위 논문은 “민족주의와 교회-일제 식민지 하의 한국개신교사에서 민족주의의 역할에 관한 연구”입니다. 그리고 1976년에 프랑크푸르트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합니다. 공부도 같이 병행하셨지요. 1988년에 귀국하여 1990년에 성공회대 교수로 신학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그 전해인 1989년에 한국본회퍼학회를 창립하셨습니다.
채수일 덧붙이자면, 손규태 박사님은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처음에는 퇴트 교수의 지도를 받았는데, 실제 박사학위 논문은 나중에 순더마이어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썼습니다.
유석성 퇴트 교수 밑에서 본회퍼를 주제로 논문을 쓰려고 했는데, 퇴트 교수가 건강이 나빠지는 바람에 순더마이어 교수에게 가서 민족주의와 교회 문제를 논문으로 다루었지요.
김흥수 두 분을 잘 아는 김경재 선생님께서 두 분 신학자들과의 인연이라든지, 두 분이 한국 신학사에서 어떤 분들인지 먼저 개괄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김경재 우리 한국 신학사에서 보면, 이분들은 신학 제3세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령 1세대를 박형룡, 김재준, 정경옥 등 그 앞의 선배까지 잡고, 그다음 세대로 윤성범, 박봉랑, 서남동, 안병무 이렇게 잡으면, 이분들은 한국 신학사에서 제3세대라고 볼 수 있는데, 벌써 제3세대 기독교 신학자들, 사상가들이 타계하신 것입니다.
제가 이 두 분을 추모하며 생각하니, 성서 이야기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송기득 선생의 경우, 창세기에 나오는 얍복강 나루터에서 야곱이 환도뼈가 부러질 정도로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도록 씨름을 하다가 아침에 이스라엘로 이름을 개명하고 강을 건너가는 그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거기에 비해서 손규태 선생은,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아래에 모여서 십계명을 기다리는데, 모세가 하도 안 돌아오니까, 백성들이 아론을 졸라서 금송아지를 만드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모세가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들고 내려오니, 산 아래에서는 금송아지 아래에서 자기가 믿고 뽑아 세운 아론부터 시작해서 전 이스라엘 백성이 춤추고 먹고 마시고, 소위 황금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돌판 두 개를 던져서 깨뜨리면서 아주 분노하는 이야기, 그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두 분이 크게 보면 인간의 근원적 문제인 우상숭배, 특히 한국 기독교가 빠져 있는 우상숭배에 대해 처절한 투쟁을 한 사람이지요. 제가 비교를 한다면 송기득 선생은 역시 ‘철학적 신학’을 전공분야로 볼 수 있지요. 소위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명제로 압축을 하듯이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거냐, 무엇이 사람이냐 등 인간의 문제를 놓고 평생을 싸웠고, 노력했고, 사색했어요. 그런 면에서 종교개혁 시대의 인물에 비하자면, 종교개혁이라는 커다란 흐름에 속해 있었지만 루터에 비해서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의 이성, 교육적 측면에 훨씬 더 관심을 두었던 기독교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를 더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사상의 맥이 현대 20세기 한국으로 오면, 다석과 함석헌에게서 엿보이고, 송 선생은 이분들과 가까이 교류하셨지요.
그에 비해서 손규태 선생은 같은 우상타파 정신, 또한 통일 문제 등도 중요하고 사회참여 문제도 중요하지만, 루터 신학자로서 정말 새롭게 평가를 해야 한다고 봐요. 지원용이나 지원상, 전경연과 같은 2세대 신학자들이 루터의 관해 쓴 몇 권의 책이 있을 뿐, 루터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서가 나온 적이 없는데, 손규태 선생은 그분 선생님들보다 훨씬 더 충실하게 루터 연구를 하셨고 큰 저작도 남겼어요. 제목이 『마르틴 루터의 신학사상과 윤리』이지요. 다른 건 다 그만두고서라도 한국 신학사에서 손규태 교수의 루터 신학에 대한 연구와 공헌만 해도 충분히 존경받고 후학들이 주목해야 할 분이에요.
특히 루터 신학의 여러 가지 테마 중에서도 소위 ‘율법의 제3용법’이라는 것을 그의 책 속에서도 독립된 챕터로 다루고 있어요. 왜 그랬을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조금 전에 말한 대로 한국 기독교가 물량주의에 빠져서 싸구려 은총, 본회퍼가 말한 값싼 복음을 퍼뜨리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런 난장판을 바로잡으려는 신학자로서의 처방이라고 봅니다. 종교개혁자로서 루터가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대해서는 두 견해가 있지만, 손규태 박사는 루터 자신에게서도 소위 복음 안에서 율법이 가지고 있는 대속적인 계도와 충고와 조언을 하는 조력자의 역할에 주목하고, 그런 율법의 기능을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고 많이 강조하셨어요. 물론 이런 생각은 칼뱅에서 훨씬 더 발전하지요. 그래서 몸의 훈련을 잃어버리고 값싼 은총 신앙이 판치는, 영성적 차원이 완전히 망실된 한국교회에 대한 조용한 한 신학자의 절규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두 분을 연결시키는 하나의 공통 연결고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았던 본회퍼지요. 에라스무스와 루터가 길은 좀 다르지만 종교개혁이라는 큰 흐름에서 만나듯이, 철학적 인간학을 한 송기득 선생하고 철저하게 신학적 사고를 한 손규태 선생이 본회퍼라는 신학적 천재 속에서 만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흥수 송기득, 손규태 두 분의 신학적 관심사, 특징 등을 말씀해주시고, 두 분의 공통점까지 짚어 주셨습니다. 두 분의 신학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영향을 받은 신학과 신학자들이 있는데, 어떤 신학과 신학자들로부터, 또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김경재 선생님이 잠깐 말씀해 주셨지만 더 구체적으로 손규태 선생님은 어떤 신학적 전통과 영향 속에서 자신의 신학을 형성했는지 그걸 좀 이야기해보지요.
유석성 첫째로는 한신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장공 김재준 박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2002년도에 장공에 관한 책도 쓰셨지요. 『장공 김재준의 정치신학과 윤리사상』입니다. 장공 선생님은 ‘불의에 대한 투쟁은 신앙고백이다’는 논지의 글도 쓰셨는데 손규태 박사님의 사회윤리 사상과 신학적 맥이 닿지요.
두 번째는 아무래도 루터입니다.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가지고 석사학위 논문을 쓰셨는데, 이게 끝까지, 죽는 날까지 루터와 함께 있어요. 한국에 루터교는 있지만 루터에 대한 신학은 그렇게 활발하게 소개되거나 전파되지 않았는데, 이분이 루터가 말한 율법과 복음의 문제, 조금 전에 언급해주신 율법의 제3용법, 그리고 두 왕국론 등에 대해서 올바르게 소개하고 이런 것들을 사회윤리학적인 측면에서 밝히셨습니다. 이런 노력이 『마르틴 루터의 신학사상과 윤리』라는 역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 번째로 그분 사상의 핵심이자, 그분의 신학과 삶을 연결시키는 요소는 디트리히 본회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회퍼에 관한 글은 여러 편 쓰셨지만 단행본으로는 미처 내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특히 본회퍼의 사상 중에서도 신앙고백적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의 모습, 강한 내면화와 신념화와 신학화와 그것에 대한 실천적 모습이 본회퍼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볼 수 있어요.
본회퍼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육신으로부터 도출된 현실’ 개념을 말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하나님과 이 세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라고, ‘하나님의 현실은 그리스도의 현실을 통하여 세상의 현실로 들어왔다.’라고 말할 수 있어요. 하나님과 이 세상이 둘이 아니라는 신념, 또 현실도피적인 신앙이나 내세지향적인 신앙을 거부한 신학적 근거가 바로 이 현실 개념에 있어요. 본회퍼는 이 현실 개념에 기초를 두고 기독교인의 삶과 윤리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기독교인의 삶은 이 세상에 대한 책임성과 또 자기 고백을 실천하는 데 있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구체적으로 예수를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 규정하지요. 바로 여기에서 ‘대리 사상’이 나와요.
본회퍼는 이를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기독교인 된다는 의미는 기도하는 것과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를 행하는 것 이렇게 두 가지라고 정리했어요. 저는 이 두 말 속에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과 지향점이 있다고 봅니다. 기도만 하면 수도원이 되고,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만 외치면 소위 사회운동이 되고 마는데, 이 둘이 분리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로 합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해방신학과 퇴트 교수의 상당한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흥수 손규태 박사님에게 영향을 미친 국내 신학자로는 장공 김재준 선생님을 말씀하셨는데, 안병무 선생님하고 몇 년 동안 같이 일을 하셔서 그분의 영향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유석성 손규태 박사님의 신학이 민족 문제까지 이르게 된 것, 또 민중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은 것은 안병무 박사님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선교 입장에서 한국교회의 갱신 혹은 변혁이라는 주제를 끝까지 붙잡고 있어요. 이런 것들은 장공과 더불어 역시 안병무 박사님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김경재 안병무 박사의 영향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분이 남긴 『개신교 윤리사상사』를 보면, 서구 사상사를 쭉 다루고 나서 한국 사회의 윤리를 소개하는데, 그 속에 서남동의 신학을 소개하고 있어요.
김흥수 예. 맞아요. 김재준의 사회참여 신학과 윤리사상을 말하고 나서, 서남동의 민중신학과 윤리사상을 말해요. 거기에다가 변선환 선생의 종교다원의 신학과 윤리사상까지 이렇게 세 분을 다루고 있어요.
김경재 이게 뭐냐 하면, 손규태 선생은 단순히 이분들의 윤리학적 이론이나 공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변선환과 서남동 이 두 분은 사실 어울리지 않거든요. 그런데 한국 신학자로서 그 세 사람을 다루는 이유는 현실세계 그러니까 현실을 구성하는 사회정치적 문제는 정치신학이고, 문화종교적 문제는 종교문화신학이라고 본 거예요. 또 우리가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현실 속에 폐할래야 폐할 수 없는,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와서 우리 몸 속에 녹아 있는 이웃종교의 문제를 변선환이 진지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세 사람을 다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김흥수 송기득 선생님은 어떤 분들을 만났고 또 교류해왔는지 서진한 목사님께서 말씀해주시죠.
서진한 우선 김경재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오늘 좌담회의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분들이 한 학문 영역에서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를 평가하기보다는 좀 다른 차원을 보자는 것이지요. 좁게 말해서는 민중신학, 크게 보아 한국신학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변선환과 서남동과 안병무가 엮인다는 점 등을 보아서 알 수 있듯이, 결국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셨지요. 손규태 교수님 같은 경우는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드러난 것이고요.
송기득 교수님은 규격화된 개념으로서 ‘신학자’라는 규정이 꼭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어요. 서남동 목사님이 자신을 ‘방외 신학자’라고 했는데, 그 말은 송 교수님에게도 어울릴 것 같아요. 이분이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은 첫 번째 인물은 손양원 목사님이지요. 신학자로서의 영향을 준 것은 아니지만 그 영향이 끝까지 남아 있어요. 『나는 어째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라는 책을 쓸 때에도 그렇고, “나는 대들 하나님이 없어서 외롭다” 이런 에세이를 쓸 때에도, 떠났다고 하면서 계속 물고 늘어지는 신앙의 열정이 이분에게 있어요. 어린 시절에 손양원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크게 받았지요. 속된 말로 ‘뿅 갔다’고 표현하시기도 했어요. 그래서 목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그 이후에도 조금씩 관계를 하셨어요.
두 번째는 연세대학교의 김하태 교수를 들 수 있어요. 송기득 선생님은 신학을 하기 위해 철학과에 갔는데, 거기에서 김하태 교수를 만났고 이 만남에서 신학의 골간이 갖춰진 것 같아요. 철학적 신학, 틸리히의 신학 사고 체계, 이런 것들이 평생을 가지요. 어떻게 보면 서양적인 시각의 틀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이 틀에 내용을 채운 것은 유영모와 함석헌의 사상입니다. 아시다시피 송기득 선생님은 젊어서 결핵을 앓으셨는데, 병원에서의 치료가 일단 끝나고 동광원에서 요양할 때 유영모 선생을 처음 만난 것 같아요. 그 후로도 유영모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교류하셨던 것 같아요. 유영모 선생은 말년에 입을 닫으셨다고 하는데, 그 즈음에 젊은 송기득이 혼자 찾아갔대요. 그래서 유영모 선생이 조어(造語)한 대로 한 ‘말숨’만 하시라고 소리를 쳤는데, 딱 한 마디 하셨대요. “예(여기)가 게(거기)야.” 이 세계와 그 너머 저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 이후로 입을 안 여셨다고 해요. 그러니까 유영모 선생이 과거에 여자 문제로 함석헌을 나무랄 때나, 아내와 해혼(解婚)할 때만 해도 이 세계와 저 세계가 구분되었을 텐데, 마지막에는 그 구분을 넘어선 경지에 계셨음을 송 선생님은 알게 되신 거지요.
하여튼 『다석일지』도 송 선생님이 정리하시고 또 그분에게 몰입했던 것 같아요. 또 유영모 선생이 대단히 철학적이잖아요. 이게 무언가 맞았던 거 같아요. 이렇게 여러 면에서 유영모 선생님의 영향은 지대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함석헌 선생의 영향도 많이 받았지요. 사회적 지평을 열어주는 ‘씨알 사상’의 영향 말이에요.
마지막 인물을 들자면 안병무 선생님이지요. 안병무 선생은 한산촌에 있을 때 집중적으로 만나셨어요. 같이 토론하고 책 쓰는 것도 도우며 일을 하셨는데, 안병무에게 배운 것은 새로운 예수 연구지요. 그래서 김하태 교수가 철학과 신학의 얼개를 제공했다면, 거기에 유영모와 함석헌 등 한국 기독교, 한국 사상이 진하게 얽혀들고, 그것이 새로운 예수 연구를 통해서 마무리되어 갔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것이 민중신학으로, 인간화신학으로 응축되지요.
그런데 그분의 삶과 신학을 이야기할 때, 빠뜨리면 안 되는 것이 있어요. 앞에서 언급한 여러 사람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이분은 책이나 이론으로 신학을 대한 것이 아니라 삶에서 신학을 배운 분이라고 강조해야 맞습니다. 한 예로, 이분이 하나님에게 대든다는 생각을 명료하게 한 것은 자기가 결핵을 앓던 시절이었어요. 결핵을 하도 심하게 앓아서 여러 날 잠을 못 자고 고열에 시달리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하나님과 내기를 하는 거지요. 자기는 신학을 위한 열정 때문에 전도창창한 길을 다 버리고 아버지에게 쫓겨나면서까지 미션 스쿨을 가서 그렇게 신학을 했는데, 하나님이 계시다면 자기를 좀 자게 해달라고 말이에요.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기도를 해요. 그러고도 못 자요.
그런 경험에서 나온 생각이 80세가 넘도록 이어져요. 인간의 비참 앞에서 하나님께 대든다는 생각 말이에요. 토스토엡스키의 소설과 거의 같은 맥락이에요. 인간의 비참 앞에서 신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께 대들 수밖에 없는 상황, 이 주제를 놓지 않아요. 그리고 그 경험과 주제는 한산촌으로 이어져요. 거기에서 죽어가는 결핵환자들과 살면서, 그들을 데리고 토론하고 교육하고 그렇게 지내셨으니까요. 그 경험이 그분 사상의 골간을 형성한다고 생각합니다.
김흥수 송기득 선생님은 순천 매산고등학교 다닐 때 기독학생운동을 하셨는데, 그때 황성수 목사를 초대해서 강연을 들었다고 합니다. 해방 직후 기독학생운동을 재건할 때 강원용 목사님, 나중에 목사가 된 황성수 이 두 분이 기독학생운동의 중요한 지도자로 등장하지요. 강원용 목사님은 진보 쪽에서, 황성수 이분은 보수 쪽에서 운동을 하셨지요. 그러니까 송기득 선생님은 기본적으로 신앙적 뿌리가 손양원과 황성수로 보수적인 바탕이었는데….
서진한 네. 보수적이었던 것 같아요.
김흥수 초기에는 보수적인 바탕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그것을 뛰어 넘는 변화가 있었습니다.
서진한 맞아요. 마지막에 그분은 굉장히 래디컬했어요. 하지만 그 바탕은 보수적이에요. 고등학교 때는 노방 집회도 하고 다녔대요.
유석성 그분이 말년에 교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침 김하태 교수님이 목원대 학장으로 가시게 되어서 그분을 교수로 초빙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서진한 학교 이야기를 짧게 하면, 송기득 선생님이 시간강사를 하고 있었는데 안병무 선생님이 한신대에 교수로 넣어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철학과에서 반대를 했서 결국 못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리고 여기저기 강의를 다니는, 이른바 보따리 장사를 오래 하게 된 거죠. 그러다 김하태 교수님이 목원대 학장으로 갔어요.
그런데 송기득 선생님께 동시에 두 군데에서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하나는 당시 학장이던 변선환 교수님이 감신대로 오라고 한 것이었어요. 거기에 종교철학과가 있으니까. 또 목원대에서도 오라고 했지요. 송기득 선생님은 마음으로는 감신이 더 좋았겠지요. 하지만 송 선생님은 밥을 먹게 해준 것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했어요. 조교로 밥을 먹게 해준 분이 오라는데…. 그래서 결국 목원으로 간 거예요.
채수일 한신대에 가지 못한 이유가 혹시 학위가 없어서였나요?
김경재 그런 이유는 아니었고, 당시 철학과 교수진에서 송기득 선생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면 안병무 박사가 참 사람이 크다고도 말할 수 있어요. 자기가 밀어 붙이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지만, 해당 과에서 굳이 반대한다면 강요하지 않겠다고 하신 거니까요.
어쨌든 서진한 목사가 내 수수께끼를 하나 풀어줬는데, 송기득 선생은 삶의 과정을 통해 신학을 배웠다는 말에 크게 공감합니다. 특히 사람의 비참 앞에서 하나님께 대드는 그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 그 이야기와 연관지어 볼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분만큼 폴 틸리히를 한국 신학계에 자세하게 소개한 분이 없습니다. 그건 김하태 박사의 영향이기도 하겠지요. 송기득 선생이 번역한 『그리스도교 사상사』나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만 봐도 틸리히를 굉장히 깊이 공부했다는 게 드러나지요.
그런데 『사람다움과 신학하기』를 보면 틸리히를 한 섹션으로 다루고 나서 틸리히를 비판해요. 틸리히의 신학 속에 ‘모호성’(ambiguity)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송기득 선생은 ‘왜 역사 현실이 모호하다는 말이냐. 우리는 지금 피터지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데 이것을 모호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관념적인 역사 이해가 아닌가.’ 하고 비판을 하지요. 그런데 내가 이해하기로는 폴 틸리히가 말한 모호성은 그런 것은 아니고 생명과 실제를 형성하는 양극 관계가 서로 실존 속에서 엇박자를 내면서 길항작용을 하는 그런 상황을 나타내는 표현이지요. 이 단어가 우리말로는 ‘모호성’이라고 번역되어서 이도저도 아닌 뜬구름이 아닌가 오해되는 측면도 있고요.
틸리히도 인생을 경험할 만큼 한 사람이에요. 유대인 학살도 경험하고, 군목 생활도 했고, 현실을 알 만큼 안 사람이지만, 폐결핵을 앓으면서 다 죽어가는데 하나님 도와주시오 해도 응답이 없는 송기득 선생의 처절한 경험이, 그 진한 농도가 틸리히보다 송기득이 더 강했어요. 그래서 그 입장에서 보면, 틸리히도 크게 보아 서구 기독교, 독일 관념론의 큰 흐름에 물들어 있다고 보고 비판하지 않았나 생각을 해봅니다.
조금 전에 송기득 선생이 보수적이라고 하셨는데, 결국 이분이 어렸을 때부터 배웠던 초월적인 하나님, 인격적이고 유신론적인 하나님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께 대들고 싸운다는 말이 가능하지요. 그것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와도 연관되고, ‘예가 게야.’라는 다석의 마지막 말, 또 송기득 선생의 말년까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저도 송기득 선생을 전형적인 신학자로는 보지는 않는데, 신학적 인간학을 한 학자, 삶의 비참에서 배운 신학자라는 말이 저에게는 매우 강하게 다가오네요.
서진한 저는 김경재 교수님의 판단이 맞을 거라는 느낌이 들어요. 제가 모호성에 대한 강의를 들었어요. 거기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하셨어요. 그리고 틸리히가 ‘마성’(魔性)에 대해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게 다 삶을 형성하는 거잖아요. 이분이 삶의 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이것을 긍정적으로 인정하셨지요. 하지만 그 어떤 지점에서 틸리히와 갈라지는 것 같아요.
유석성 말씀하신 모호성은 라인홀드 니버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니버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된 피조물이고 죄인이라고 보잖아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어 자유와 자기 초월성이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피조물이기 때문에 유한성, 한계성, 제약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의 본성은 애매함이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니버는 인간의 본성을 파악할 때 이 모호성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요.
김경재 아무튼 송기득 선생이 틸리히를 다룬 섹션에서 비판하는 마지막 항목은 자기가 경험한 삶의 현실, 피가 튀는 삶의 실제, 그 리얼리티를 표현하기에는 모호성이라는 말, 엠비규이티라는 말이 부적절하다고 본 것 같아요.
채수일 두 분에 대한 학문적 평가를 해주셨으니, 저는 두 분의 인간성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어요. 물론 제가 경험한 부분적인 인간성이지요. 제가 송기득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그분이 신학연구소에서 「현존」을 편집하실 때였어요. 저에게 글을 써서 기고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안병무 선생님이 연구소에 계실 때, 제가 로즈마리 류터의 Radical Kingdom을 번역했는데, 석사학위 가진 사람의 번역서는 연구소가 낼 수 없다고 하셔서 서남동 선생님의 이름으로, 『메시아왕국』이라는 제목으로 낸 적이 있어요. 그러니 「현존」이라는 무게 있는 잡지에 석사학위를 가진 학생의 글을 실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을 거에요. 송기득 선생님이 쓰라고 하시어 제가 사울왕에 대해 글을 썼는데, 그런 파격이 송기득 선생님의 성품과도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두 번째 파격은 제가 귀국해서 한산촌 디아코니아자매회를 안 선생님과 방문했는데, 내려가기 전에 송기득 선생님이 저를 만나자고 해서, 왜 꼭 결혼하지 않은 여성하고만 디아코니아자매회를 하느냐, 결혼에 실패하고 혼자 사는 남성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꼭 하라고 하셨어요. 저도 같은 생각이라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로만 구성된 자매회는, 오늘날 가톨릭 수녀회나 독일의 디아코니아자매회의 현실을 보아도 오래 가지 못한다고 말했지요. 또 제가 보니 자매들이 밭일하고 노동만 하는데, 기쁨이 없는 공동체에 미래가 있겠느냐, 좀 개방하자고 말했더니 안 선생님이 화를 내시면서 반대를 하시더라구요. 이런 점도 송기득 선생님의 파격, 어떤 형태의 틀이든지 매이지 않으려 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 같아요.
그리고 송 선생님이 혹시 학위 때문에 한신대에 들어가지 못한 게 아닌가 제가 물어본 것은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1982년에 독
일에 가기 전에 송기득 선생님이 꼭 만나자고, 할 말이 있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출국 전에 만나뵈었는데, 박사학위를 꼭 하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는 거에요.
서진한 그런 말 안 할 분인데. 그런 말 안 할 분이 그 말을 했다는 이야기는….
채수일 예. 학위 문제가 당신에게 큰 상처로 남았나 보다 생각했지요. 물론 저는 일하러 간 것이었지만, 그 말씀을 듣고 꼭 하고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김흥수 손규태 선생님의 독일 경험을 이야기해보지요.
채수일 손규태 박사님은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몰랐고 독일에 오셔서 뵈었는데, 1975년에 유학가실 때 왜 하이델베르크의 퇴트 교수에게 가셨는가, 아마도 안 선생님이 가라고 추천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왜냐하면 사회윤리를 공부하려면 보쿰에서도 할 수 있고, 베를린도 있잖아요. 굳이 하이델베르크로 간 이유는 확인해봐야겠지만, 제가 듣기로 퇴트 교수가 안 선생님의 하이델베르크 유학 시절에 보른캄 교수의 조교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퇴트가 아파서 퇴트 밑에서 학위를 못 하게 되자 순더마이어 교수에게 간 것은 또 그때 순더마이어가 안병무 선생이 공부하는 동안 신학대학 조교를 하면서 안 선생님에게 장학금을 준 적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 인연들이 있어서 나중에 순더마이어의 지도로 학위논문을 쓰신 것 같아요.
사실은 퇴트의 영향도 상당한 것 같아요. 특히 퇴트는 국가사회주의 치하에서의 교회와 정치권력과의 관계를 많이 연구했으니까요. 한 2년 정도 공부하다가 7년 동안 목회를 하셨는데, 77년부터 84년까지 어간은 광주 민주화운동 등등 한국이 굉장히 어려웠던 시절이지요. 한국과 독일, 일본의 슈나이스 목사를 통해서 한국에서 나오는 자료를 중심으로 독일 내 한인들의 민주화운동에 열심을 다하셨고, 광주민중항쟁을 독일 사회에 알리는 일도 열심히 하셨습니다.
목회에 관해서 말하자면, 프랑크푸르트 한인교회는 손 박사님 훨씬 이전에 생겼어요. 이영빈, 이화선 이분들이 한인교회를 쭉 해오셨지요. 특히 동베를린 사건 이후에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한인교회가 그나마 진보적인 민주화운동을 하는 데 중심에 있었습니다.
손 목사님의 인간적인 부분도 말할 게 있어요. 이분이 몸이 좋지 않아서 투석을 하셨잖아요. 한인교회 모임이라든지 목회자들 모임 있을 때마다 좋은 강연도 물론 하셨지만, 대부분 동역자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분의 유머에요. 그분이 돌아가실 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빈소를 차리지 않은 것도, 물론 본인의 평소 의지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슬프게 받아들이기보다는 담담하게 받아들인 성품의 결과가 아닌가 싶어요.
유석성 손규태 박사님은 독일에서 정식 과정을 거쳐 공부하고 온 기독교윤리 혹은 사회윤리의 첫 번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러면서도 사회윤리학의 기본을 꿰뚫어서 학문적으로 전개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여기서 기본이라는 말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사회문제를 다룬다고 사회윤리가 아니라, 사회 구조 문제를 다뤄야 사회윤리입니다. 다시 말해, 정책이나 제도, 체제와 연관시켜 그것들을 합리적으로 개선하고 사회비판적 기능을 하고 공동선과 사회정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 사회윤리인데, 이런 관점에서 그분은 본격적으로 사회윤리를 다루고 학문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정의, 평화, 한국에서의 통일문제, 세계교회협의회의 신학적인 부분 등을 다뤘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윤리학을 독일에서 공부한 첫 번째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즈는 그의 『해방신학』에서 “신학이란 ‘비판적 성찰’(theological reflection)”이라고 했고, 몰트만은 “비판적 성찰이면서 동시에 실천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정신을 손규태 박사님이 이어간 것입니다. 세계 변혁과 해방이라는 밑바탕의 생각이 결국 평화로 귀결되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그렇게 신학을 하신 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때 마침 독일이 통일될 무렵이었기에 독일교회의 통일에 대한 역할들을 잘 소개하셔서 계몽적인 역할, 교육적인 역할을 해주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진한 송기득 선생님의 삶에서 단편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이분이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했잖아요. 중학교 때는 이불이 없어서 흙바닥에서 가마니떼기를 덮고 자요. 대학 강단 보따리 장사를 할 때도 너무 가난했고. 그러다가 과부를 만났어요. 사모님의 전 남편이 여순사건 때 그냥 길을 가다가 덜컥 불심검문을 당했는데, 그 친척이 관계되었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했어요. 그 자리에서. 그래서 사모님은 아주 젊은 나이에 애가 셋 딸린 미망인이 되었어요. 정신대 보내지 않으려고 일찍 결혼시켰으니 젊은 나이에 자식 많은 과부가 된 거죠.
두 분은 교회에서 만났어요. 11살 차이. 결국 결혼식은 못 하고 살았지요. 그런데 어찌 보면 사모님에게는 송 선생님이 구원자인 셈이에요. 대학 다니는 훤칠한 총각이 결혼을 해준 거니까요. 두 분은 몹시 사랑했고, 선생님은 사모님이 돌아가신 뒤 매일 편지를 쓰면서 사모님이 어머니이자, 여인이자, 구원자였다고 고백해요.
송 선생님은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결심해요.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신이 경험한 인간의 비참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결과적으로는 아들이 하나, 유일한 피붙이가 하나 있지요.
채수일 11년 연상의 애 셋 딸린 과부와 결혼한 청년이네요.
김흥수 한산촌은 여성숙이라는 의사가 운영했는데, 송 선생님은 여기서 사직당했지요?
서진한 당시 한산촌을 양평으로 옮기려고 했거든요. 환우들을 디아코니아자매회가 돌보고, 사람들이 와서 의식화 교육을 하면서 같이 무언가를 하고, 이렇게 얽을 생각을 한 것이에요. 송 선생님은 환자들이 결국 대상이 된다고 본 거에요. 또 경제적으로도 양평은 난방비가 많이 드는 지역이라서 결국 가난한 환자들이 어려워질 것을 걱정했죠. 그래서 반대하니까 결국 내보낸거죠. 그런데 송기득 선생님은 이 이야기를 수십 년 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70세가 넘어서야 꺼냈어요. 더 대단한 것은 자기는 짤렸는데도 양평에 가서 3년간 돌집을 지어요. 그리고 안병무 선생님의 「현존」을 1976년 안 선생님이 감옥 간 다음에 맡아요.
군소리 없이. 그리고 한신대에 오라는 제안을 받은 것 같아요. 그 제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분으로서는 폭발할 지경까지 쌓인 셈인데, 그것도 말 안하고 온 것 같아요. 하여튼 그렇게 어렵게 살았는데, 누구에게도 구걸하지 않고 살았어요. 물론 그분의 자존심도 있었겠지만, 인간의 비참 이런 걸 생각하면 신에게도 구걸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어요.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겠지요? 지독했어요. 저는 이분이 자기 자신을 평생 빳빳히 세우며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빳빳히 선다는 것, 그게 바로 주체성 아니에요? 그 주체성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거죠. 그 점은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살아온 그분에게 꿈이 하나 있었어요. 자기처럼 배고프고 오갈 데 없는 학생들을 불러모아서 먹고 자고 공부하게 하는 기숙사를, 학사를 만들고 싶어 하셨어요. 그런데 여러 여건도 안 되고, 돈도 없어서 끝내는 못했지요. 마지막에는 자신의 재산을 탈탈 털어서 북에 보내려고 했어요. 굶주리는 어린이들을 위해서.
김흥수 두 분의 신학에 관하여 조금 더 말씀을 나누시지요.
김경재 두 분을 연결시키는 고리로 본회퍼를, 또 주체성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본회퍼의 핵심은 책임성이라고, 또 기도와 정의를 동시에 추구했다고 요약할 수 있지요. 이 말은 결국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세를 강조하면서 또 우리에게 성찰할 부분을 안겨줍니다. 우리 현실에 적용해보자면, 한국 기독교가 십일조를 꼭 내라든가 하나님의 종인 목사에게 복종하라는 보수적인 내용은 많이 강조하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계명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이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무효화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본래적인 의미에서 복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실천되고 구체화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오늘날 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오늘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자신만 해도, 함석헌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은 측면을 돌아보아도, 제가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반성을 해요.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는데, 6・25때 남북이 갈라져서 엄청난 살인을 저질렀잖아요. 핵무기를 갖고 있고, 수많은 국방비를 쓰고 있고. 이게 다 생명살상에 관계된 문제인데, 이것에 대해 한국 기독교가 제대로 발언한 적이 없고, 그렇게 살지 않아요. 자본주의의 근본적 문제도, 함석헌의 표현대로 구조적으로 누군가의 억울함과 피땀이 묻어 있는 돈인데, 헌금 낸 후에 목사나 신부가 축도하면 그것이 다 깨끗한 돈으로 변하느냐 하는 독설과 함께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네 이웃의 재물을 탐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이 시대에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한국교회에 없어요. 그 외에도 전쟁 문제, 남북평화 문제, 화해 문제, 자본주의 사회가 내뿜는 여러 가지 독소를 진지하게 다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줄여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고 율법이 완전히 폐기처분된 것이 아니라, 율법이 명령한 바를 본래적 의미에서 더 진지하게 살아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복음이다. 이것이 송기득, 손규태 두 사람이 강조하려던 바가 아닌가. 두 분을 추모하는 이 대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바로 실천성, 책임성, 주체성 이런 것들이고, 이분들은 우리 기독교가 이런 것들 없이 허황성세, 과대망상, 물량주의, 형식주의, 교리주의에 빠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일종의 폭탄 선언을 하고 몸으로 들이받은 사람인데…. 솔직히 말해 한국교회나 신학계마저도 송기득은 저 남쪽에서 방외 신학을 하다 갔고, 손규태는 기장 사람도 아니고 성공회 가서 교수하다가 갔구나, 이 정도로 그쳐요. 이럴 수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절실히 듭니다.
유석성 한국교회에 좀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분들인데, 저도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규태 박사님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봉사와 사회적 책임성을 신앙고백의 문제로 인식하고, 그래서 민주화나 인권, 통일과 같은 문제들을 선교적 과제로 파악했다는 데 공헌이 있어요. 그러니까 독일에서 핵무기를 인정하면 신앙인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듯이,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봉사와 사회적 책임성을 곳곳에서 강조했지요. 이런 것을 잘 받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기독교의 과제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채수일 두 분을 각각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손규태 교수님은 ‘평화’, 송기득 교수님은 ‘인간화’ 이렇게 축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손규태 교수님의 견해대로 평화는 신앙고백의 문제이고, 따라서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과 불신앙의 문제이지요.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평화를 규정하는 많은 이론이 있지만, 그런 것들을 넘어서서 신앙고백의 문제로 여기신 것 같아요. 1970년대부터 독일에서는 ‘과연 예수의 산상수훈으로 정치를 할 수 있는가?’라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평화 이슈가 굉장히 지배했거든요. 손규태 박사님이 그 시절에 독일과 유럽에서 살았기 때문에 평화 담론, 핵무기 문제가 자기 신학적 성찰의 중심에 온 것 분명하다, 또 그것이 오늘날 한국 목회자에게도 한반도 평화를 둘러싼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교회의 위치는 신앙과 불신앙의 문제이지, 특정한 정치적 입장, 좌우나 진보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확인되고 강조되어야, 그래서 진영 논리에 의해 평화가 왜곡되지 않아야 오늘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석성 손규태 박사님은 그것을 복음의 문제로 보거든요? 복음을 어떻게 실천하는가의 문제인데, 산상설교를 가지고는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비스마르크가 했어요. 그런데 몰트만은 산상설교를 가지고 정치를 해야만 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핵무기라든가 이런 것들은 결국 원수를 사랑해서 창조적으로 끌어안지 않으면 인류가 다 망하니까 산상설교를 가지고 정치를 해야 한다는 논리를 핵무기가 나온 다음에 폈어요. 독일 루터교는 핵무기를 인정하고, 개혁교회는 인정하지 않고 이런 과정에서 핵무기를 인정하면 신앙고백을 제대로 안 하는 거라는 생각으로 본회퍼의 신학을 기초로 하여 끝까지 계속해서 사회참여, 정치참여의 문제를 선교적 과제, 신앙고백의 문제로 여겨 이것을 복음의 실천의 문제로 파악했지요.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서진한 저는 김경재 교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가지고 두 분을 이을 수 있다고 봐요. 두 분 모두 자기가 믿고 생각하고 뜻한 바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실천하려고 기를 쓰고 살았어요. 그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송기득은 얼, 씨알, 민중, 인간 이런 식으로 사상이 이어져 와요. 민중은 구체적이고 또 조금 특수하지요. 민중을 인간으로 바꾼다는 것은 보편화의 과정이지요. 그런데 이 보편화 과정은 구체성을 놓지 않는 보편화라고 할 수 있어요. 그분의 인간화는 민중이 빠지지 않은 인간화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아요.
또 이분이 자기에게 얼마나 엄격했냐면, 주변 사람들을 불편할 정도에요. 놀이가 없어요. 즐기는 게 없어요. 오직 글 쓰는 게 즐기는 거에요. 그것은 삶의 의미를 철저하게 따졌기 때문에 그래요. 거기에 자신을 맞춘 거에요. 말하자면 믿는 바를 실천한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성실 성(誠), 의미 의(意) 이 두 글자로 이분을 규정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그분 말년에, 팔순 즈음에 ‘일상의 신학’이라는 말을 하기 시작해요. 인간화 신학을 대체할 만한 개념은 아니지만. 그것은 뭐냐면, 일상은 의미로만 채워지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무의미해 보이는 것도, 불성실해 보이는 것도 용납하기 시작하세요. 이런 점으로 보았을 때, 송기득 선생님은 의미로 충만한 세계에서 의미를 넘어선 세계로 넘어갔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게 머리로는 넘어가도 몸으로 다 넘어간 것 같지는 않아요. 『사람 아직 멀었다』에서 주체성을 갖추지 못한 인간, 남 앞에서 윤리적이지 않은 인간에 대한 실망을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 선은 이미 넘어간 거에요. 윤리적이든 아니든 사람으로, 일상으로 다 받아들이는 거죠. 그 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어요.
‘신학은 인간학’이라는 말은 결국 사람이 신학을 할 때 신이 보여주는 것 외에는 끝내 알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 보여진 것조차 왜곡이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언어를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고요. 그래서 신을 결코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지요. 그러니 신을 말한다는 것은 신을 묻는 인간을 말한다는 것이라고 보는 거지요. 송 선생님은 ‘신학은 인간학이다’는 불트만의 말을 가지고 이런 논지를 펴는데, 어쨌든 신학은 인간학이라고 생각을 하고 인간을 묻는 것이 신학의 목적이라고 생각하셨어요. 인간을 볼 때에도 자기가 내부에서 보는 것보다 신의 자리에서 볼 때 제대로 본다는 생각도 하셨고요. 이분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그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원래 창조하시고 세울 때처럼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참 인간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오늘 교회에 적용해서 말하자면, 신앙 공동체인 교회가 사람을 사람되게 만들고 사람을 살리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리나 제도, 위계 등으로 사람을 속박하고, 결국은 그 목사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이 광화문 거리로 뛰어나가는 상황에 이른 거지요. 그런 점에서 깊이 생각해볼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또한 일상의 인간을 생각하게 만드는 ‘일상의 신학’이라는 단초는 곱씹어볼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유석성 기독교에서 인간을 이야기할 때 기본이자 기독교의 정통은 하나님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가지고 풀거든요. 본회퍼의 경우도 그냥 하나님이 없다는 게 아니라 잘못된 하나님이 없다는 거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자는 이야기인데, 이것을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만 부정하는 것으로 볼 때는 그런 사고는 정통 기독교로 생각할 수 없지요. 우리가 인간을 이야기할 때에도 결국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다움을 발견해야 이것이 신학적인 인간다움이라고 생각되는데, 그분은 어떤 입장이셨는지 모르겠어요.
서진한 한 인터넷 언론과의 대담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길은 하나님의 자리를 내려놓고 거기서 내려와야 된다는 거에요. 같은 어법이에요. 금관의 예수, 사람들이 만든 하나님인 거죠. 참 사람이 누구냐 하는 물음에 대해서도 비슷해요. 참 사람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라는 거에요. 고백되고 전승되는 과정에 수많은 언어와 사상의 덧칠과 왜곡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분은 예수에게서 참 사람,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사람의 원형을 봐요. 이분 표현으로는 ‘맨 사람’의 원형을 봐요. 예수의 삶에 집중하지요. 나중에는 예수 연구에 매진해요. 그리스도라는 것은 대속의 이데올로기로 짜여져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김경재 송기득 선생이 마지막에 의미 추구, 도덕성, 책임성에 스스로를 매이던 삶에서 일상의 신학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송기득을 1급 신학자로 보지 않을 거에요. 사람이 70-80 넘어가면 그때야 평범하거나 사소한 것, 또 비루한 것들이 위대한 것 못지 않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잖아요. 기독교는 그동안 평범한 것, 사소한 것을 우습게 본 잘못이 있는데, 송기득 선생이 말년에 그런 것을 추구했다는 점도 참 귀중하다고 봐요.
어느 인터넷 신문 기사의 제목으로 나왔듯이, 송기득 선생이 기존 교회에 던진 가장 중요한 말, 특히 성직자들에게 던진 말이 ‘하나님 가지고 놀지 말아라, 하나님 놀이 그만해라, 중단해라.’ 이것 아니에요? 이 말은 송기득의 신학과 신앙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한국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또 제 자신부터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노자의 『도덕경』 첫 구절에 표현되었듯, 한국 목회자와 신학자는 자기가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너무나 다 알고 있고, 그것이 모범답안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해요. 다른 종교에서 보면 ‘자기들이 뭔데 그렇게 자신만만한가’ 좀 우습지요. 그 점에서 하나님 놀이 중단하라, 하나님 너무 잘 아는 체하지 말라는 송기득 선생의 충고는 그분의 방외 신학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정직하게 돌이켜보아야 해요. 물론 목회자가 하나님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고 신학자가 하나님 말 하지 않고 신학을 한다는 건 문제겠지만, 이 둘이 긴장을 이루어야 건강해진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와 예수의 문제도, 송기득이 그리스도인이냐는 궁극적 질문을 하면 저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어요. 그런데 통념적, 제도적 잣대로 보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사람들도 있을 거에요.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말에 내포된, 역사 속에 축척된 여러가지 때꼽재기 때문이지만, 그리스도와 예수를 분리할 수도 없고 동일시할 수도 없는 역설적인 긴장과 그 고뇌를 깊이 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송기득에게 질문할 수 있어요. ‘당신은 왜 끝까지 예수야? 왜 불교의 보살은, 지장보살은 안 돼?’라는 질문을 할 수 있거든요. 왜 예수 안에서 가장 인간다움이 드러난 참 사람의 모델을 보느냐는 질문 앞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그리스도론은 아니지만 그런 문제에 부딪치게 될 거에요. 한 가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송기득은 끝까지 주체적인 인간의 책임성을 말하면서 기독교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대속의 교리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서구 신학이 만들어낸 일종의 노예도덕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가 존경하는 함석헌 선생의 경우에는 제도적인 것, 그러니까 속죄론의 교리신학자들이 설명하는 속죄신앙은 받아들이지 않지만, 바울의 편지 속에서 바울의 몸이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예수의 삶과 자기의 삶의 일치를 통해서 죽고 또 산다는 새로운 시각에서 그 속죄론을 다 틀렸다고 내팽개치지 않거든요? 다른 말로 하면, 최근에 타계하신 나의 은사 문동환 선생까지도 바울과 예수를 대립시키고(바울은 예수의 복음을 망쳐먹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시는데), 함석헌만큼 신학적 인간학, 주체적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없는데, 그분은 굉장히 바울을 변호합니다. 바울을 그렇게 값싸게 보면 안 된다는 것이죠. 당신들이 바울만큼 살고 나서 바울을 비판하든지 말든지 하는 것처럼, 그래서 송기득 선생이 신학적 인간학을 강조하고 역사적 예수를 강조한 나머지, 바울이 증언하려 한 기독교의 중요한 체험, 신앙의 알맹이, 그 유산을 놓치거나 약화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지요. 특히 오늘 우리 대담 내용이 활자화되어 한국 기독교 목회자나 신자를 설득하려면 그 점에 대해서도 분명히 선을 긋고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서진한 기본적으로 늘 문제가 되는 지점인 것 같아요. 안병무 선생님도 마지막에 그 지점에 서신 것 같아요. 송기득에게 예수는 메시아에요. ‘메시아’나 ‘그리스도’나 똑같은 말인데, 그리스도라는 말은 수천 년 누적되어온 인간이 만든 결과물이라는 이해 때문에,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메시아라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불교 스님들하고도 자주 만나셨는데 ‘자기는 기(基)씨 집안이다.’ 하시면서 기독교에 속한 사람이라고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밝히셨어요. 바꿔 말하면, 민중신학이 근본주의 신앙과 제도화된 교회에 도전했듯이, 인간화신학 역시 두꺼운 금관에 둘러싸인 그리스도의 벽을 깨는 데 집중했다고 봐요. 종합보다는 타파에 좀 더 기울은 듯해요. 그런 점에서 정(正)과 반(反)을 넘어선 새로운 종합이 가능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분은 실존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실존철학이 대개 무신론적이잖아요. 이분은 유신론, 무신론이라는 말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셨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은 그것을 가지고 신에게 가는 거죠. 신 앞에 선 인간이지요. 이분이 마지막에 꿈꾼 것은 ‘하나님 없이’를 넘어서 아예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되, 그러나 끝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거죠. 그래서 신본주의냐 인본주의냐를 놓고 접근하면 이분을 이해하기 어렵지요. 하나님의 뜻과 하나 되는 경지, 이것은 굉장히 동양적인 표현이에요. 서양적인 표현이 아니에요. 거닐 유(遊) 자를 써서 유천주(遊天主), 하나님 앞에서 노닌다고 말씀하셨지요. 틸리히의 영향을 받았는데도 동양적인 사고가 크게 작동하고 있어요.
김경재 맞아요. 노장사상의 요소가 있어요.
서진한 주체성 이야기를 말하자면, 두 분이 돌아가시면서 아무도 안 불렀잖아요. 손규태, 송기득 두 분이 돌아가시면서 장례식을 안 했어요. 손규태 선생님은 마지막 떠나는 이별 예배만 했고, 송기득 선생님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자들이 있으니까 예배만 한 번 드렸어요. 손 박사님의 이별 예배 때, 김윤옥 선생님[손규태 선생님의 부인]이 기뻐해야 한다고, 삶의 연장, 축제, 기쁨이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송기득 선생님은 한산촌 젊은 시절부터 언제나 ‘죽음은 없다. 내가 죽을 뿐이다.’(앙드레 말로)의 구절을 말씀하셨어요.
죽음에 관해서 두 가지를 생각하신 것 같아요. 하나는 삶이라는 거에요. 죽음 앞에서, 자기가 죽을 뿐, 죽음이 따로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성서에 보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 혹은 바울이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따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해요. 두 번째는 죽음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죽음에 대해서도 주체적이고 싶은 것이에요. 삶이라는 게 실존철학으로 보면 내가 선택한 것 하나 없이 기투(企投)된, 던져진 거에요. 누구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나서 지독한 가난과 병, 내전에 시달리고, 누구는 강남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산다는 것은 내가 삶을 결정하지 않고 내던져진 것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던져진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그분은 이제 내던져지는 게 아니라 내던지려고 한 거죠. 만들어진 자기가 아니라 스스로 미래를 향해 자기를 기투하여 자기를 창조하겠다는 거죠. 그래서 자기 창조가 중요해지고, 그것을 기독교 신앙 안에서 그 틀과 어울리게 세워보려고 끝까지 노력한 거죠.
유석성 손규태 박사님은 마지막에 한 달 전쯤에 제가 갔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시냐면, 신영복 교수를 보니까 말기 직장암으로 몹시 고통스러워 하다가 열흘을 굶으니까 죽더라고, 그러면서 자신도 그 방법을 택하려고 하는데 가족들이 반대해서 못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손규태 박사님이 그렇게 하실 줄 몰랐는데, 결국 그 방법을 선택하셨어요. 결국 자기가 죽음을 선택한 것이지요.
서진한 죽음을 선택했다는 말이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 있으니, 삶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때 그때에도 스스로를 선택하신 거라고 정리할 수 있겠지요.
유석성 예. 그렇죠. 신장투석도 말을 잘 안 듣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마지막 침상을 보니, 책이 한 권 있었어요. 본회퍼 전집 중 한 권이었어요. 마지막까지 본회퍼를 생각하시면서 생을 마감하신 것이죠.
한국교회나 신학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겼나 생각해보니, 그분은 한국교회를 교회답게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이 모든 사회윤리의 실천적인 내용을 다 선교적인 과제로 여기고 복음의 실천이라고 생각했고, 그러면서도 이 사회를 변화, 변혁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목표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한마디로 정리하면, 본회퍼가 평화를 하나님의 계명이요 그리스도의 현존이라고 파악했듯, 그분은 결국 복음의 실천으로서 평화를 실천하고 교회를 개혁하고 세상을 바꾸자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았나 생각해요.
서진한 앞으로 한국 신학계에 그런 학자는 보기 어려우리라 생각해요. 지금은 전문가의 시대잖아요. 신학 각 분야의 전문가가 많지요. 하지만 해당 분야의 전문가일 뿐 삶을 통째로 놓고서 신학과 엮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아요. 그런 시대가 끝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점에서도 이 두 분의 삶과 죽음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김흥수 두 분이 남긴 마지막 책이 그분들의 신학을 잘 나타내는데, 손규태 교수님은 평화윤리에 관한 책을 남기셨고, 송기득 교수님은 『탈신학 에세이』에서 인간화 신학자로서 사람의 문제를 고심했지요. 저는 송기득 선생님께 은덕을 입은 사람인데, 목원대학에서 교회사가로 성장하도록 바탕을 마련해준 분입니다. 그분이 저에게 농담처럼 하신 마지막 말씀이, 제가 교회사가이니까, 한국 신학사를 정리하게 되면, ‘인간화 신학자로 살았다’ 이 말을 꼭 기억해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충분히 논의하지 못한 것 한 가지는 이 두 분이 평화운동, 통일운동에 깊이 관련된 분이라는 것입니다. 1988년 글리온 회의가 끝나고 나서 일본에서 재일본대한기독교회가 주체가 되어서 북한과의 통일 대화를 했는데, 손규태 선생님은 두 번이나 거기에서 주제강연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송기득 선생님은 북미주기독학자회, 미국에 가서 그런 내용으로 주제강연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분의 강연을 살펴보며 제가 공통점을 발견한 것인데, 1972년에 발표된 7・4공동성명을 언급하셨어요. 그 공동성명은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말하는데, 두 분은 강연에서 그 내용을 분석하면서 앞의 두 말보다 마지막 단어인 ‘민족대단결’을 강조해요. 적어도 사상적으로는 기독교와 주체사상, 또는 기독교와 맑시즘을 가지고 민족대단결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죠.
서진한 송기득 선생님은 중국 연변대학에서 한 학기 강의를 하셨어요. 맑스주의 철학을 공부한 교수들도 들어와서 강의를 듣고 했는데, 호응이 굉장히 좋았대요. 나중에 그 강의를 정리한 책이 『하느님의 두 아들』이에요. 거칠게 정리하자면, 우리는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대립적으로 보지만, 둘 다 인간을 비참에서 구원하려 했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본 거죠. 물론 방법, 이데올로기 등이 다 다르지만요. ‘인간화’라는 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것인데, 기독교와 맑스주의 둘 다 사람이 사람답게 되기를 추구하니, ‘하나님의 두 아들’이라는 비유 언어를 쓴 거죠. 이것은 기독교와 맑스주의 대화의 한 노력인데, 사실 기독교와 맑스주의의 대화는 유럽에서는 많이 있었지만, 송 선생님의 시각은 좀 독특해서 좀 더 연구발전 되었으면 좋겠다 싶어요.
김흥수 장시간 두 분 신학자에 대해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이 어떤 분들인지 이해할 수 있는 좌담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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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호(통권 7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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