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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 송기득, 손규태의 신학적 유산
특집 (2019년 12월호)

 

  손규태 교수의 삶과 신학
  

본문

 

* 이 글에서 손규태 교수의 삶에 관한 짧은 스케치는 손 교수의 성공회대 제자 김성호 박사(나섬교회)가 『독일 하늘 아래에서』(손 교수의 독일 체험기, 미간행)와 김윤옥 여사(손규태 교수의 부인)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손규태 교수가 2019년 9월 9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장례는 부고나 조문 절차 없이 다음 날 오전에 제자 오동균 신부가 집례한 성공회 미사로 진행되었다. 고인이 생전에 죽음의 상업화를 거부하면서 남긴 유지를 따라 진행된 간소한 의식이었다. 필자는 손 교수의 삶을 독일 유학 이전과 유학하던 시기, 그리고 유학 이후의 시기로 나누어 이야기 중심으로 기술한 뒤, 그의 신학적 관심사를 간단히 정리함으로써 고인을 추모하고자 한다.

독일 유학 이전 시기
손 교수는 1940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손 교수는 1951년 1·4후퇴 때 아버지와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피난길에 올라 배를 타고 목포에 도착한 뒤 서울 시흥동으로 올라와 그곳에서 오래 살았다. 손 교수는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차관영 목사(예장 통합)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하면서 성실히 봉사했다. 이를 지켜본 차관영 목사가 한국신학대학을 추천했고, 손 교수는 1960년 수유리에 있는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손 교수는 1972년에 성철 스님을 처음 만났다. 한국신학대학 학생과에 근무하면서 석사학위를 하던 손 교수는,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선교학을 전공하다 초빙교수로 와 있던 베르너 비더(Werner Bieder)의 한국어 통역을 맡았었다. 비더 교수는 한국 문화에 큰 관심이 있었고 한국의 종교인들과 만나기를 원했다. 그래서 손 교수는 해인사 백련암에 연락해 삼천배를 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과 함께 성철 스님을 만나게 된다. 손 교수와 비더 교수는 성철 스님에게 절을 한 번 한 뒤 앉아 깊은 밤까지 대화를 이어간 뒤 다음 날 헤어졌다. 이후 손 교수는 독일 유학길에 오르기 전 아내 김윤옥 여사와 함께 성철 스님을 다시 찾았다. 성철 스님은 “이 세상의 모든 죄와 타락의 책임은 종교인에게 있다.”라는 말을 해주었고, 손 교수는 성철 스님에게 “꼭 다시 찾아 뵙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손 교수는 문익환 목사와 함께 강화도 마니산을 자주 올랐다. 또한 김재준 목사, 이우정 선생과도 가까이 지냈다. 손 교수는 1974년 대학원을 졸업한 뒤 안병무 박사가 독일교회의 지원으로 설립한 한국신학연구소의 책임간사로 일했다. 한국신학연구소는 당시 김재준, 안병무, 서남동, 현영학,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선생 등이 진보적 신학운동을 지도하던 곳이자 민주화운동의 중심 인사들이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고 있었다. 특히 함석헌, 이문영, 문동환, 현영학, 서남동 등의 교수들이 한국신학연구소에 모여 회의도 하고 학술세미나도 열었다. 그 당시에 손 교수는 연락과 자료 준비하는 일을 했다. 그럴 때마다 손 교수는 정보부 요원들의 감시, 회유, 협박을 받았다. 손 교수는 반정부운동과는 직접 관련되지 않았지만, 당시 군사정부는 손 교수를 요시찰 인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호텔 등에서 몇 차례 중앙정보부 사람들의 심문을 받아야 했다. 심지어 정보부 요원들은 손 교수에게 정보부에 와서 본회퍼에 대해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손 교수는 거절했다.
같은 해인 1974년 9월 중순에 손 교수는 40대 초반의 독일연방공화국 제1공영텔레비전방송(ARD) 도쿄 특파원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를 한국신학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바로 그 사람이다. 힌츠페터는 일본 도쿄에서 일하는 독일 선교사 파울 슈나이스(Paul Schneiss) 목사의 소개로 한국을 찾아왔다. 파울 슈나이스 목사는 일본 도쿄에서 일하면서, 당시 한국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정치적 억압과 인권 탄압에 항거하는 교회의 투쟁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한국을 자주 방문해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을 독일교회와 세계교회에 알리고 이를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 힌츠페터가 한국을 찾은 것은 1974년 9월 26일 명동성당에서 황성민 주교가 집전한 순교자 찬미기도회를 계기로 출범하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역사적 등장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힌츠페터와 손 교수는 9월 26일 명동 근처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촬영 장비를 준비해 저녁 8시경 명동성당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길을 열어주지 않는 경찰과 신도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조명장비가 고장나 촬영을 할 수 없게 되자 손 교수는 낡은 조명장비의 거의 100미터나 되는 기다란 전깃줄을 끌고 성모병원으로 들어가 전기 콘센트를 연결해 촬영을 도우려고 했으나, 결국 중앙정보부 요원이 콘센트에서 그 전깃줄을 빼버렸다. 그래도 손 교수는 끝까지 병원에 남아 힌츠페터가 촬영을 마칠 때까지 콘센트를 지켰다. 손 교수가 1975년 11월에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면서부터 힌츠페터와의 접촉은 끊어졌다.
손 교수는 독일로 유학가기 위해 서류를 신청한 지 2년이 지난 1975년 10월경에 정보부로부터 신원조회가 떨어졌으나 가족을 동반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사실 손 교수는 가족 동반 금지가 해외에서의 반정부활동을 통제하려는 정보부의 음모라는 것을 알고 처음엔 한국신학연구소에 남아 일하려고 했지만, 가족과 지인들의 권면으로 홀로 출국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손 교수 가족의 여권이 나오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당시 한국기독교장로회 전국여신도회 총무로 일하던 아내 김윤옥 여사가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구속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명동대성당에서 열린 신구교 시국미사에서 시국성명서를 낭독해 경찰들의 감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독일 유학 시기
손 교수는 1975년 11월에 35세의 늦깎이 유학생으로 하이델베르크대학에 도착했다. 그 후 손 교수는 1976년 4월 초에 김윤옥 여사로부터 출국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편지를 받는다. 당시 상황은 이러했다. 독일개신교협의회에 속한 외무국과 해외선교단체들로 구성된 독일 대표단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매년 양국에서 번갈아 선교협의회를 열고 있었다. 그해에는 외무국 대표 헬트(Joachim Held) 박사를 단장으로 한 독일 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해 5일 동안 수유리에 있는 아카데미하우스에서 협의회를 갖게 됐다. 마침 박정희 독재정권은 독일과 독일교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 협의회에 참석한 독일 대표단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이때 초청받은 헬트 박사와 슈나이스 목사 등 10여 명의 참석자들이 김윤옥 여사의 출국을 위한 청원서를 법무부에 제출해 김윤옥 여사가 1976년 중순에 독일에 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손 교수는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지도교수인 한스 에두아르트 퇴트(Hans Eduard Tödt)의 강의와 세미나에만 참석했다. 1976년에는 퇴트 교수와 함께 국제본회퍼학회(IBF)에 참석해 전체 모임에서 30분 동안 한국에서의 본회퍼 소개와 연구에 관해 간단히 보고했다. 이후에도 그는 계속 국제본회퍼학회에 참석했다.
1976년 봄 학기에 하이델베르크대학 신학부에서 베를린의 주교 쿠르트 샤프(Kurt Scharf)를 강사로 초빙해 초청강연회를 열었는데, 한국에서 명동사건이 터지고 안병무 교수 등 민주 인사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손 교수는 이 초청강연회를 이용해 몇몇 교수, 학생들과 함께 안병무 박사의 석방 운동을 전개하면서 약 5,000명이 서명한 문서를 한국 정부에 보냈다. 또한 바덴뷔르템베르크 지방교회에 속한 대도시 울름의 60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받아 한국교회를 대표해 참석했다. 손 교수는 이 기념사업회가 모금으로 약 100만 마르크를 헌금한 것에 대한 감사의 말과 더불어 한국의 상황과 기독교인들의 투쟁을 소개했다. 또한 손 교수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학생들과 목회자들의 제안으로 하루 저녁에 ‘한국의 밤’이라는 프로그램을 열어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정치 상황을 소개하고 함석헌, 김재준, 안병무 등 신학자들과 한국의 노동현장, 그리고 반정부 시위 장면들을 소개했다.
손 교수는 1977년 7월에 정식으로 목회를 시작했다. 손 교수가 목회한 곳은 프랑크푸르트 한인교회이며, 대략 80가족으로 120명 정도가 모이는 공동체였다. 교회의 주요 구성원은 간호사와 광부가 부부를 이룬 가정들, 유학생과 그 가족들, 한국 대기업 상사 주재원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1980년 5월에 독일 제1TV방송(ARD)은 30-40분에 걸쳐 광주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잔혹한 시민 학살 장면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방영했고, 독일 제2TV(ZDF)에서도 광주 학살 장면을 방영했다. 이 장면을 촬영한 사람은 바로 1974년에 손 교수가 만난 위르겐 힌츠페터였다. 독일에 있던 손 교수는 방송 뉴스를 비디오 테이프에 저장한 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일하고 있던 박상증 목사에게 연락해 한국의 사정을 전 세계와 교회에 알리자고 했다. 박상증 목사는 그 테이프를 가지고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복사해서 유럽, 미국, 일본 교회들에 보내 한국의 처참한 실상을 알렸다.
1986년에 전두환 대통령이 독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재독한인교회협의회는 본(Bonn)에서 반대집회를 열었다. 약 3,000명이 모여 삼위일체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광장을 향해 행진했다. 광장의 커다란 동상 앞에서 손 교수는 경찰에게 빌린 스피커로 전두환 반대성명서를 읽었다.

독일 유학 이후의 시기
손 교수는 7년 동안의 목회를 마치고 학위논문을 쓴 뒤 1988년에 귀국해 성공회대학교 신학부 교수로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이재정 총장을 도와서 신영복 선생을 비롯한 진보적 학자들을 영입하며 학교 발전을 위해 일했다. 그리고 1989년 봄,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함께 한국본회퍼학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으로서 본회퍼 사상의 연구와 전파를 위해 힘썼다. 손 교수는 2005년에 정년 은퇴했다.

손 교수의 신학
이제 손 교수의 신학을 간략하게 되돌아볼 차례이다. 손 교수는 9권의 저서와 22권의 공동저서, 23권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손 교수의 학문적 관심사는 큰 틀에서 민족과 민중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평화 문제, 현대사회 속에서 기독교사회윤리학의 주제 탐구와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사상과 윤리였다.
손 교수는 독일 유학 시절에 지도교수 퇴트의 강의와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논문 주제를 늘 생각했다. 손 교수가 한국에서 처음 생각한 주제는 독일 농민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손 교수는 특히 토머스 뮌처(Thomas Münzer) 등 종교개혁 좌파들의 사상과 활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필요한 경우에는 한국의 농민전쟁인 동학운동과 거기에 나타난 12개조의 요구사항들과 독일 농민전쟁에서 제시된 12개 조항을 비교해 연구하고 싶었다. 그런데 퇴트 교수는 자신이 농민전쟁 전문가가 아니어서 논문을 지도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대신 손 교수에게 한국에서의 본회퍼 수용을 주제로 논문을 써보라고 권유했다. 퇴트 교수는 당시 독일 본회퍼학회 회장으로서 손 교수와 함께 1976년 1월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1회 국제본회퍼학회에 다녀왔고, 그때 손 교수는 한국의 본회퍼 소개에 관한 간략한 페이퍼를 발표했다. 퇴트 교수는 손 교수가 이때 발표한 내용이 좋았다면서 그것을 좀 더 학문적으로 발전시켜서 학위논문을 쓰고, 이를 국제본회퍼학회 등에도 알리자고 제안했다.
손 교수는 박사논문 주제를 정하지 못하고 한 학기를 보냈다. 그러는 와중에 제2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의 포로로 시베리아 강제 집단노동 수용소에 오랫동안 잡힌 경험이 있는 퇴트 교수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퇴트 교수는 스위스 알프스로 장기 요양에 들어가는 바람에 더는 강의나 세미나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부득불 손 교수의 지도교수는 테오 순더마이어(Theo Sundermeier) 교수로 바뀌었다. 손 교수는 1977년에 송건호 선생이 쓴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를 통해 민족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민족 문제를 자신의 논문에서 다루기로 했다. 순더마이어 교수의 허락하에 손 교수는 논문 제목을 “민족주의와 교회-일제 식민지 하의 한국개신교사에서 민족주의의 역할에 관한 연구”로 잡았다. 손 교수는 이 작업을 수행하고자 먼저 서구의 민족주의를 연구하고, 한국 민족주의 연구가들의 사상을 검토했으며, 민족주의와 한국 개신교와의 관련성을 연구하고, 마지막으로 개신교인들의 민족의식과 민족운동을 한국의 민족사와 개신교회사의 틀 안에서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했다.
손 교수는 이처럼 일찍부터 민족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손 교수가 황해도 피난민 출신으로서 겪은 민족사적, 실존적 아픔이 민족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 관심은 손 교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책 『한반도의 그리스도교 평화윤리』에서도 나타난다. 손 교수는 남북의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길은 남북 간의 대칭적 상호주의가 아니라 강자인 남한의 호혜적 일방주의뿐이라고 말했다. 갈등을 푸는 열쇠인 호혜적 일방주의는 예수가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서 적대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손 교수는 민족만이 아니라 민중에게도 관심했다. 그는 한국 개신교의 위기의 원인과 돌파구를 찾기 위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기독교, 그리고 한국 개신교의 정치권력과의 유착 관계를 파헤쳤다. 이는 한국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종교개혁의 원리로 복귀해야 한다는 그의 열망 때문이었다.
손 교수의 두 번째 학문적 관심사는 현대사회 속에서의 기독교 선교와 실천의 과제였다. 기독교사회윤리학자로서 손 교수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인식할 때, 한국 사회와 개신교의 문제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 치환적 관계로 파악하고자 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분단을 치유하고 극복하는 한국 개신교의 사회운동 목표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에 포섭된 한국 사회의 양극화와 금권 지배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교회가 물질적 부와 성공을 신봉하는 맘몬신학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보았고, 신보수주의적 가치관의 세례를 받은 정치와 교회의 유착과 같은 보수 동맹의 현실에 대한 타개책으로는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및 시민사회에서 교회의 공적 역할을 전략적 방법으로 제안하였다. 손 교수는 한반도에서 분단의 내상(內傷)을 치유하고 평화를 실현하는 것과 한국 사회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일과 맘몬과 권력의 포로가 된 교회를 해방하고 갱신하는 일을 기독교의 실천운동에서 하나의 역동적 프로세스로 보았다.1
손 교수의 세 번째 학문적 관심사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였다. 손 교수는 한국에 본회퍼를 최초로 소개한 사람은 아니지만, 일찍이 본회퍼의 윤리학 6판을 번역(1973)하였고, 평생을 본회퍼 연구에 헌신했다. 손 교수는 본회퍼의 신학사상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한국교회에 확산시키기 위하여 1989년 3월 20일에 한국본회퍼학회를 창립해 신학 강연, 세미나, 그리고 연구발표회를 개최하였으며, 더 나아가 일본본회퍼학회와 국제본회퍼학회와의 학술 교류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2010년에는 한국본회퍼학회 회원들과 함께 본회퍼 전집 가운데 주요 저서 8권을 번역 출간했다. 그리고 한국본회퍼학회를 설립한 초대 회장으로서 한국에서의 본회퍼 수용 역사와 그간 회원들의 연구를 총람한 책을 기획하고 손수 원고를 모아 본회퍼 연구서2를 출판하였다. 손 교수에게 본회퍼는 1960년대부터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현실에서 기독교인의 정치적 봉사와 사회적 책임성을 ‘신앙고백의 문제’(status confessionis)로 파악하고 실천하도록 일깨운 신학자였다.3 본회퍼는 예수를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라고 형이상학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라고 질문하며 바로 ‘타자를 위한 존재’(Dasein für andere)로 규정했다. 손 교수는 한국 사회를 ‘타자 부재’ 혹은 ‘이웃 부재’의 사회로 명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 죽었듯이, 믿는다는 것은 타자를 위해 사는 일이라고 강조했고, 자기 자신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끝으로 손 교수의 마지막 삶의 여정을 기술하고자 한다. 손 교수는 순조롭게 학자의 삶만 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삶은 육체적 질고를 짊어진 고난의 삶이었다. 1988년 독일에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신부전증 판정을 받은 후부터 2019년 9월 9일 소천하기까지, 27년 동안 신장투석을 받고 10여 차례 입원하는 등 병마와 투쟁하며 지냈다. 1주일에 세 번씩 병원에 가서 한 번에 4시간씩 투석을 받았고, 돌아가시기 전에는 요양병원에서 지냈다. 손 교수는 요양병원에 있는 동안 독일 체험기인 『독일 하늘 아래에서』(미간행)를 집필했다.
글을 마치며 한마디 덧붙인다. 필자는 손 교수의 삶과 신학이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옥중에서 남긴 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산다”와 신영복 선생이 손 교수에게 써준 중국 당나라 시인 맹호연의 글귀 ‘운심월성’(雲心月性)에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손 교수는 그 글귀의 뜻 그대로,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 집착과 욕심없이 달과 같은 품성으로 살았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그가 좋아하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도 만나고, 고 신영복 선생과도 기쁘게 재회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독일과 한국에서 함께 지내며 당신에게 감수성을 일깨워주었다고 회상하신 고양이 삼낙(三樂)이, 소냐와도 만나시길 바란다.


1 손규태, “오늘날 한국에서 신학 함이란 무엇인가?”,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교회적 실존』(대한기독교서회, 2014)
2 한국본회퍼학회 엮음,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사상 연구』(동연, 2017)
3 손규태, “한국 교회의 본회퍼의 수용과 윤리적 판단”,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교회적 실존』(대한기독교서회, 2014), 270.



강성영 | 한신대학교 교수로 기독교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현재 한국본회퍼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8월호(통권 74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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