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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 송기득, 손규태의 신학적 유산
특집 (2019년 12월호)

 

  송기득 교수, 사람다움의 신학자
  

본문

 

송기득 교수는 젊은 시절에 투병 생활을 거치고 결핵 환자들과 공동생활을 하며 투철한 삶을 살았다. 교수가 되어서는 진지하고 정직하게 인간 세상을 성찰했고, 은퇴 후에는 도인과 같은 풍모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송기득 교수의 주제는 항상 예수였다. 필자는 목원대학교 강사 시절과 배재대학교 교수 시절에 그분을 뵈었다. 그분을 따르는 목원대 제자들과 함께 필자 또한 같이 계룡산에 오르곤 했다. 이제 그 제자들은 중견 목회자나 학자가 되었고, 그분은 세상을 떠났다. 짧은 글로나마 송기득 교수의 사상을 정리함으로써 그분의 삶에 대한 예를 갖추고자 한다.

인간화
송기득 교수가 말하는 신학의 핵심은 인간화이다. 사람의 사람다움, 인간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이런 용어들이 그분의 글 어디를 펼쳐도 보인다. 구원이란 인간화를 가리키며, 죄란 인간화되지 못한 상태 또는 인간화를 막는 짓을 가리킨다.1 하나님 나라는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화를 이룬 세상이 하나님 나라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렇다. 그런 점에서 신학은 인간학이다.
인간화라는 말은 그 뜻이 언뜻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의 주제가 인간화에 있다는 그 말만으로도 송기득 교수의 신학의 핵심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한국교회는 신본주의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그 결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게 되었다. 말하자면 한국교회의 신본주의는 우상숭배에 가깝다. 송기득 교수의 말이 맞다. 기독교 신앙에서 신본주의와 인본주의는 같이 간다. 신 중심주의와 인간 중심주의는 분리할 수 없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이다.
성서만 한 신본주의도 없지만, 그 신이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성서만큼 인간을 중심에 세우는 종교도 없다. 다시 말해서 성서만 한 인본주의가 없다. 성서는 신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존엄성을 말한다. 송기득 교수는 평생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를 뺀 신본주의는 기독교 신앙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셈이다. 그분이 말년에 기독교에서 떠났다고 선언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한국교회의 우상숭배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행적이야말로 가장 정직하게 기독교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화란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대체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도덕성 없이 파렴치한 사람들을 가리켜 사람답지 못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너무 가난해도 사람다운 삶을 살기 어렵다. 도덕성과 물질의 문제는 송기득 교수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전자는 인간이 도덕적 주체가 됨으로써 인간다워지는 문제이고, 후자는 물질 조건이 너무 척박하지 않도록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문제이다. 전자는 서구의 근대 철학과 실존주의와 관련이 있고, 후자는 사회과학적 접근과 관련이 있다.
결국 송기득 교수의 인간다움의 신학은 실존주의적 측면과 사회과학적 측면을 포괄하고 있다. 전자와 관련해서, 그의 글에는 그가 젊은 시절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측면이 보인다. 그리고 신학자로는 실존주의 신학자로 분류되는 폴 틸리히의 영향이 크다. 후자와 관련해서 송기득 교수는 민중신학자이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에 국한되지 않으며, 정치경제적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문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처럼 실존주의적 개인의 주체성과 사회과학적인 인간 해방이 결합되어 송기득 교수가 말하는 인간다움을 이룬다.

나, 나의 메시아
송기득 교수에게 사람은 각자가 자기를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는 힘을 가진 삶의 주인이요, 누구나 자기 인간화의 책임을 가진 책임적 주체이다. 젊은 시절 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아무도 내 삶을 살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 자신이 나의 메시아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사람의 구원은 사람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다. 나는 자기 구원의 주체이다.”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말은 한 개인의 주체성을 중요시하는 선언이다. 개인은 현재에 충실하게 자기 상황을 돌파하는 주체이다. “나이다 하는 사람은 이미 구원을 손에 쥐고 있다.” 주체가 진리이다.
어떤 면에서 송기득 교수는 타자보다 먼저 자기를 잘 정립하는 일을 중요하게 본 것 같다. 민중 메시아론을 주장하는 측면을 보자면, 타자의 고통이 제일 먼저 의식에 포착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일보다 먼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나를 확립해야 한다. 나에 대해서 1인칭을 똑바로 말해야 한다.”2 타자에 대한 책임과 사랑 이전에 나를 정립하는 일이 먼저이다. 자신이 누군지를 묻고,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 세워야 한다. 이것은 개개인이 모두 떨어져 각자 자기를 위해 자기 삶을 사는 그림을 연상케 한다. 타자와의 모든 관계는 자기 자신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타자를 만나는 것도 “나의 깊이에서 너를 만난다.”
송기득 교수는 자기 자신의 육화를 말한다. 모든 노동과 직업 활동은 나의 육화이다. 사람은 끝내 자기를 살아야 한다. ‘산다’라는 동사를 타동사로 놓고, 그 동사의 목적어를 ‘나’로 삼는다. 삶의 대상이 ‘나’라면, 결국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를 위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자신을 ‘사람답게’ 만드는 문제와 떨어질 수 없고, 사람이라는 보편 개념 속에는 타자의 문제가 들어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타자와의 문제 곧 도덕성 문제도 결국 주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선과 악이 무엇인지 스스로 결정하고 행하는 일을 감행해야 한다. 사실 철학사상의 역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문제를 놓고 틸리히에게서 영감을 받은 송기득 교수는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사건을 “주체롭고 자유로운 삶을 향한 발돋음”으로 본다. “아담의 얘기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을 보여준다.” 계명을 어긴 대가로 추방되어 고통을 겪지만, 고통에 대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에덴으로부터의 추방은 사람으로 서라는 하나님의 뜻이다.”3 그러므로 죽더라도 자유를 행사해서 선악과를 따 먹어야 한다. 주체가 되는 길에는 계명을 어기는 일이 포함될지도 모른다. 물론 거기에 따른 수난도 수반된다.

민중, 민중 메시아
그러나 인간화의 문제를 개인에게 맡겨놓을 수만은 없다. 인간화란 약자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책임지는 일이기도 하다. 이때 인간화의 주체는 집단이다. 송기득 교수는 약자를 주로 정치경제적 계층으로 이해해서 ‘민중’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인간화의 대상은 민중이요, 인간화란 민중 해방을 가리킨다. 약자나 민중은 사람답게 살 조건을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인간화란 사람이 덜 된 사람을 사람이 되게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사람답게 살 조건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그러한 조건을 다시 마련해주는 일이다. 이는 정치경제적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한 정치경제적 투쟁이 수반되는 일이다. 거기에는 해방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인간화란 인간 해방을 가리키고, 송기득 교수의 신학에서 인간 해방은 곧 민중 해방을 가리키는 측면이 있다. 이때 민중을 인간화의 대상으로 생각하면, 인간화의 주체는 공동체 전체이다. 공동체 전체는 약자들의 해방에 대한 책임을 가진다.
그런데 민중 자신에게서 인간 해방의 가장 근원적 힘을 발견한다면, 민중은 인간화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된다. 민중이 인간화의 주체라면 송기득 교수의 개념으로는 메시아가 된다는 말이다. 또한 그의 시각에 따르면, 민중이란 한 사회의 구조악으로 피해를 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정의를 내려도 좋을 것 같다. 집단적 억압이 있다면 억압을 받는 집단이 주체가 되어야 그 억압을 이겨낼 수 있다. 그래서 이른바 민중 메시아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억압받는 집단이 힘을 합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일은 스스로 사람답게 살 조건을 되찾는 일이요, 동시에 자신들을 억압하는 자들에게 사람답게 될 기회를 주는 일이다. 민중의 투쟁은 자신들을 억압에서 해방시킬 뿐 아니라 억압자들을 그들의 죄에서 해방시키는 일도 한다. 모두가 인간이 되는 길이 거기에 있다면 민중 메시아론이 나올 만하다.
그런데 송기득 교수의 후반부 글을 보면 민중에 대한 실망을 많이 드러내고 있다. 사람답게 살 조건을 위해 투쟁하는 일을 통해 곧바로 사람답게 된다고 볼 수는 없다. 외부 물질 조건의 문제도 매우 중요하지만, 사람답게 되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인간 내면의 문제이다. 민중 집단 속의 구체적 개개인을 보면 사람이 덜 된 사람도 많다. 민중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렇다. 그럴 때에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보편 명제가 다시 힘을 얻는다. 인간화는 여전히 모든 인간의 책임이고, 인간화의 주체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다. 송기득 교수는 청년 시절을 민중으로서 살고 민중을 위해 한산촌이라는 결핵요양소를 만들어 살면서 사람에 대한 실망도 많이 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민중의 무지에 대해 실망했다. 사람에 대한 기대가 배신으로 돌아왔음을 말한다. 그래서 거의 마지막에 낸 책 제목이 『사람, 아직 멀었다』이다.
송기득 교수의 생각의 변화는 이렇게 표현된다. “바닥사람들이라고 모두 사람일까? 나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게 되었다. 바닥사람들 가운데서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소외계층(민중)이라고 무조건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다. …가졌든 못 가졌든, 배웠든 못 배웠든 상관없이 사람다워야 사람이라는 주장을 버릴 수 없다. 이제 예수의 인간학도 고쳐 읽어야겠다는 생각이다.”4 이런 상황에서 민중 메시아론은 여전히 유효한가? 이 문제는 그의 사유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만일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후 더욱 사람을 존중하고 섬기는 쪽으로 나아간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럴 수도 있다. 아예 사람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인간을 더 불쌍히 볼 수 있다면, 인간의 악을 보고 오히려 인간에 대한 연민이 더 커졌다면 말이다. 송기득 교수에게는 그런 모습도 보인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상처를 받지 않는다면, 칸트와는 좀 다른 의미에서 자연과 자유가 일치한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에 대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민중 메시아론을 살려둘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덜 된 사람이 된 사람이 되는 인간화 문제는 계층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답게 살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집단적 저항의 차원과 사람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사람이 되어 자기 구원을 성취해야 하는 차원, 인간화에는 그 두 차원이 언제나 수반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는 하지만, 송기득 교수의 글에는 그 두 차원이 모두 있다.

반기독교?
한국교회에 대한 송기득 교수의 실망은 반기독교로 이어졌다. 송기득 교수는 자신을 특히 반(反)그리스도론자로 자처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지만, 기독교의 그리스도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어쩌면, 인간화를 신학의 핵심으로 삼은 사유가 도달할 수 있는 종착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인본주의를 말하는 신학이 모두 반기독교로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현실에 대한 실망이 송기득 교수를 말년에 반기독교로 넘어가게 한 것 같다.
송기득 교수에게서 예수는 인간 해방자요, 그리스도는 대속론을 통해 인간 해방을 방해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결국 그가 말한 반기독교에는 대속론에 대한 거부가 있다. 사실 대속론은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기독교적 인간관과 신앙의 반영이다. 그러나 자칫 그리스도의 은총을 값싸게 만들 수 있는 대표적인 교리이기도 하다. 만일 십자가의 은총 앞에서 우리 일상생활에 들어와 있는 세상의 폭력과 죄를 깊이 느끼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런 세상의 죄에 자신도 참여하고 있음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대속론은 사도 바울이 말한 자유와 너무 멀어진다. 자유와 멀어지면 기독교와도 멀어지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무책임하게 십자가를 걸어놓고 무책임한 설교로 사람들을 협박하고 유혹하고 혹세무민하는 현실을 답답하게 여긴 송기득 교수는 교회에 나갈 하등의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근대 인문주의 철학자 칸트는 신 존재를 도덕적 노력의 요청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 양심에 따라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바라고 믿는다. 의롭게 사느라고 세상에서 당한 고난과 손해를 알아주고 갚아주는 존재가 최고선의 신이다. 그런데 송기득 교수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만 하나님을 인격화해서 말한다.” 물론 기독교의 신이 모두 칸트의 도덕종교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미신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칸트의 도덕종교를 신앙의 짝으로 삼아야 한다. 신본주의는 인본주의의 견제를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예수는 짝을 이룬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말한 ‘예수’는 십자가에서 세상 죄를 지신 ‘그리스도’와 동일한 분이다.
사실 개신교는 그 도덕성과 정신으로 인해 서구 유럽을 물질주의로부터 구원했다. 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무역과 상업으로 부가 늘어나 새로운 시민계급이 생겨날 때, 그들은 개혁신앙을 받아들여서 도덕성으로 무장하고, 물질주의에 빠질 수 있는 에너지를 세상을 주도하는 시민의식과 민주주의의 에너지로 바꾸었다. 루터 신학의 연장에서 칸트의 도덕철학과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나왔다.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에 무슨 도덕성을 주고 무슨 정신을 주었는가? 신앙이 도덕성으로 다 설명될 수는 없지만, 도덕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은 성서만 펼쳐보면 알 수 있다. 신앙은 초윤리인데, 초윤리는 윤리를 폐하지 않고 자유를 통해 윤리를 완성한다. 송기득 교수는, 도덕성을 찾아보기 어렵고 기독교 정신이 무엇인지 관심이 없는 한국교회와 한국 기독교로부터 벗어났다.
말년에 그분은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싶다고 했다.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는 황홀경을 맛보았다. 자신의 가르침대로 자기 삶을 살았던 송기득 교수는 이제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며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곳을 찾아 떠나갔다.


1 송기득, 『나는 왜 그리스도교를 떠났는가』(신학비평사, 2010), 48.
2 송기득, 『사람, 아직 멀었다』(대한기독교서회, 2016), 62.
3 송기득, 『그리스도교 신학과 인간해방』(대한기독교서회, 1998), 33.
4 송기득, 『사람, 아직 멀었다』(대한기독교서회, 2016), 31.



양명수|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20년 4월호(통권 7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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