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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9년 10월호)

 

  나와 일본, 그리고 한국
  

본문

 

나는 2003년에 연구년을 얻어 뉴욕의 빙엄턴에 머물렀다. 2003년 4월은 이라크전 발발 직후여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나의 미국 방문을 걱정하였지만, 그곳에 한국 선교에 관한 많은 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입국 심사를 받은 시카고 공항 전체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입국 심사관이 내 여권의 비자 내역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Bad Guy’라고 외쳤고, 경관 몇 명이 몰려들어 나를 별실로 연행했다. 내 여권에 있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출입국 기록 때문에 나쁜 사람으로 분류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담당관의 몇 가지 질문에 답하고, 비자와 관련된 대학의 서류들을 보여주고, 30분 정도 뒤에 풀려났다. 이러한 미국 입국 경험은 다소 충격적이었지만, 1년간의 미국 체류는 전시하에 놓인 사회가 어떻게 변질되는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전시 중의 보도 통제, ‘애국법’ 성립 등으로 인해 민중의 의식이 어떻게 변용되는지를 현지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역사 연구자로서 귀중한 경험이었다.
당시에는 일본과 한국의 연구 환경에 차이가 있었다. 재일 한국인 2세 연구자로서 본국의 연구에 최대한 공헌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미국 동부의 대학, 연구소, 자료 보관소 등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도서관의 상호대차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미국 전체에서 기독교 선교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연구는 2006년에 『アメリカ人宣敎師と朝鮮の近代』(社會評論社)라는 책의 출판으로 결실을 맺었고, 그 이듬해에는 서정민 교수(현 메이지가쿠인대학)와 가미야마 미나코 교수(현 나고야가쿠인대학)의 번역으로 『미국선교사와 한국근대교육』(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출판되었다.
조선에 온 선교사들의 교육사업에 초점을 맞춘 이 연구는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어떤 독자가 번역자에게 이상한 반응을 보냈다고 전해들었다. 그 책 후기에서 나는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는데, 한 독자가 내 어머니의 출신에 관하여 언급한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내가 ‘잡종’이라는 것이었다.

‘잡종’은 하이브리드?
나의 아버지는 11년 전에 소천하신 이인하 목사이며, 어머니는 교토의 기독교 가정 출신의 일본인 사카이 사치코이다. 나는 1952년에 재일대한기독교회 도쿄교회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모님이 도쿄교회에 거주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식민지 시기에 고향의 학교가 폐교되면서 16살의 나이에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교토의 불교계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기독교 신자인 일본인 영어교사를 만나 영어 성경공부반에 참가하였다. 거기서 교회로 인도되어 청년회 활동을 하던 중 어머니를 만나서 결혼했다. 결혼에 대해 두 분 모두 주위에서 걱정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교회는 아버지의 결혼 상대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장학금 지급을 일시 중단하였다고 한다. 여러 고난을 넘기고 결국 두 분은 학생 신분으로 결혼하였다.
결혼 초기는 한국전쟁 중이어서 정세가 극히 불안정하였다. 그럼에도 부부가 함께 고민한 끝에 운명을 같이한다는 뜻으로 어머니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로 결단하였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지 불과 수년도 되지 않은 시기, 아직 한국 국적법이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고향에서 재판을 거쳐 국적을 취득하였다. 어머니는 도쿄교회의 신도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그곳 할머니들에게 한복 입는 법, 김치 담그는 방법을 배웠다. 한국어도 열심히 공부하였다. 어린 나에게 어머니는 일본인이라기보다는 한국인이었다.
그러나 부계 혈통주의와 가부장제가 농후한 재일교포 공동체에서 자란 나는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일본인으로서의 어머니와 직면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며, 그마저도 부친이 소천한 이후였다. 모친도 6년 전에 소천하셨는데, 현재는 이전보다 자유롭게 나의 모친이 일본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주위에서 “형은 존재 자체가 ‘한일합병’이시네요.”라며 농담을 해도 이제는 여유 있게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사상」 편집부로부터 ‘나와 일본’이라는 주제의 글을 요청받았는데, ‘나’라는 존재 자체는 단지 재일 한국인 2세라기보다는, 극히 현재적인 과제도 함께 갖고 있는 존재임을 최근에 몸소 느끼게 되었다.

도쿄에서 가와사키로
나는 도쿄에서 태어났고, 가와사키에서 자랐다. 도쿄와 요코하마 사이에 있는 게이힌 공업지대의 중핵 도시인 가와사키는 해방 이전부터 조선인 노동자가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 전후에도 그러한 경향은 계속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도쿄교회에서 토론토의 녹스 칼리지로 유학을 한 뒤 교회의 개척전도를 끝내고 도쿄교회의 부목사로 부임하여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울의 한 교회에서 청빙 제의가 왔고, 아버지는 귀국을 결심했다. 짐을 정리하던 중 갑자기 나에게 실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나의 주치의는 꼭 귀국하고 싶다는 아버지의 열망을 무너뜨리며 진심으로 아버지를 혼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귀국 준비를 중단하였다. 여러 가지 치료를 받던 중 편도선 수술을 받은 뒤 어처구니없이 시력이 회복되었다.
그런데 그사이, 목회자가 없던 가와사키교회의 신도들이 아버지에게 부임을 요청하고, 멋대로 짐을 트럭에 싣고 가와사키교회로 가져가버렸다. 이것이 아버지의 가와사키교회 목회 40년의 시작이었다. 오늘날 아들의 입장에서 돌아보면, 그 당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부모를 고국에 둔 상황에서 자식 때문에 귀국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가와사키로 이사 간 바로 그날 밤, 온 가족이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크게 놀란 기억이 있다. 제철회사의 노천식 용광로에서 생긴 불빛이 밤하늘을 새빨갛게 물들인 것을 화재로 오인한 것이다. 가와사키는 노동자와 공장이 밀집한 지역으로 공해가 심했다. 빨래를 한 뒤에 옷을 널어놓으면 옷이 금방 검게 변한다면서 어머니가 한숨을 쉬던 기억이 있다.
이사 후 나는 교회 바로 옆에 있는 사쿠라모토 소학교에 입학했다. 사쿠라모토는 조총련 귀국운동의 발상지였다. 아버지의 이야기에 따르면, 입학하기 전에 조선학교에서 입학 권유가 있었다. 당시 조선학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체제를 칭찬하는 간판을 달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간판을 내리면 아들을 입학시키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어쨌든 당시는 한일 국교정상화(1965년) 이전으로, 일본 학교에 외국인이 입학하는 것은 은혜적인 조치이며, 입학을 하려면 일본인 보증인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이 일을 바로 근처에 있던 일본기독교단 사쿠라모토교회의 세키타 히로오 목사에게 부탁하였고, 그분이 보증인이 되어 나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사실 세키타 목사님은 내 인생 전체의 보증인과 같은 분이다. 현재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의 명예교수이며, 이미 90세가 넘은 분이다. 그분은 지문날인 거부 투쟁과 시위의 선두에 섰으며, 가와사키의 여러 가지 반차별·인권투쟁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장례식 조사를 맡은 그분은 아버지를 ‘화해의 사자’라고 불렀으며, 올해에도 어김없이 아버지의 기일을 기억하시고 가와사키교회 예배에 출석하셨다. 한마디로 그분과 아버지는 국적을 뛰어넘어 일심동체와 같은 존재였다. 최근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무상교육 대상에서 제외한 일에 대해 아픔을 느끼며, 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화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실로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분이다. 그분이 쓴 『斷片の神學』(단편의 신학)은 실천신학의 모범이라 할 수 있는 대작으로, 나는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문구는 제2세대 페미니즘의 표어인데,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반차별·인권옹호를 향해 걸어간 길에서 사용한 실마리였다. 그것은 재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일본 사회에서 흔히 경험하게 되는, 사소하지만 차별적이며 굴욕적인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여동생 계순이 사립 유치원에 들어가려 했을 때에도 유치원 원장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저희 유치원에는 저쪽 분(조선인)은 안 계십니다.” 그 유치원 원장은 조선인이 없는 ‘품질 좋은’ 유치원이라고 말하며, 친절을 베풀어 특별히 입학을 허가해준다는 투로 말했다. 선의의 옷을 입을 전형적인 차별 발언이었다.
아버지의 이러한 경험은 가와사키교회가 사쿠라모토 보육원을 설립한 계기가 되었다. 보육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가 그곳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정신에 기초하여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의 공생을 목표로 출발한 보육원은 현재 다문화 공생 보육 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처음에는 무인가 시설로 시작한 작은 발걸음이 현재는 사회복지법인 세큐샤로 자리잡았다. 사업 또한 확대되어서 재일 한국인 고령자들의 모임 도라지회, 장애인 사업, 가와사키시의 위탁을 받아 진행하는 빈곤 가정을 위한 어린이식당 등 다양한 복지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가와사키교회의 이러한 운동이 다른 민족단체들의 운동과 다른 점은 바로 ‘공생’이라는 슬로건 아래 지역 행정기관과 결합하여 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면에서는 선구적인 모델이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조선인 강제노동 연구 분야의 일본 최고 권위자는 ‘이렇게 활기찬 민족단체를 본 적이 없다.’고 감탄하기도 하였다. 현재 사쿠라모토는 차별적 발언, 소위 ‘헤이트스피치’(hate speech) 단체들의 타깃이 되고 있다. 가와사키는 헤이트스피치 단체와 반(反) 헤이트스피치 단체가 종종 충돌하는 지역인데, 가와사키시가 일본 최초로 처벌 조항을 수반한 헤이트스피치 금지조례를 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교회가 사쿠라모토 지역에서 오랜 시간 벌인 운동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명의 마사히코와 한일 교류
나의 청소년 시절을 되돌아보면, 인생의 향방을 결정한 여러 만남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언급한 세키타 목사의 후임 목사는 사와 마사히코 목사였다. 내가 초등학생 때 사와 부부는 우리 교회 목사관에 자주 드나들었다. 북한 기독교사 연구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사와 마사히코는 도쿄대학 법학부를 거쳐 도쿄신학대학에서 수학하였고, 아버지의 강연에 영향을 받아 한일 간의 가교가 되고자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였으며, 후에는 한국신학대학에서 강의하였다.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두 명의 일본인 마사히코로 기억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또 다른 마사히코는 구라타 마사히코 교수이다. 구라타 마사히코는 도쿄대학 교양학부를 졸업하고 런던에 건너가 엠네스티 운동에 참가한 뒤 일본에 돌아와서 오재식 선생의 눈에 띄게 되었다. 나는 대학생 시절에 지명관, 오재식, 김용복 선생 등과 자주 가와사키교회 예배에 출석하며 그분을 알게 되었다. 당시 도쿄는 지명관, 오재식 두 분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의 국제적 정보 발신 기지였으며, 구라타는 일본인으로서 민주화 운동을 뒤에서 지원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나는 1972년에 국제기독교대학과 연세대학교의 제1기 교환학생으로 1년간 국제학부에서 한국어와 한국에 관한 과목을 이수했는데, 그 경험을 근거로 구라타 부부에게 초급 한국어를 가르친 기억이 있다. 그 후 구라타 마사히코는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에서 공부하였는데 거기에서 현재 메이지가쿠인대학의 서정민 교수를 만났다.(서정민 교수는 구라타에게 일본 유학을 권유받았다고 한다.) 구라타는 일본에 돌아와 오사카의 모모야마가쿠인대학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당시 나는 일본 기독교 학교에서는 처음으로 본명인 한국 이름으로 교단에 선 사람이었다. 오사카의 미션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나에게 구라타는 한일기독교사연구회를 만들자며 참여를 요청했다. 이것은 내 연구의 전환점이 되었다. 본래 나는 근대에 관심이 있었고, 석사과정에서는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연구한 바 있다. 그래서 나는 여러 명의 연구자와 같이 모임를 시작하였다. 연구 모임은 고베에 있는 세큐문고에서 한 달에 한 번 개최되었다. 세큐문고는 도시샤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한석희 선생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사설 도서관으로, 당시 일본 내에서 조선과 관련된 장서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이미 세큐문고에는 민족운동사연구회와 재일조선인연구회가 먼저 시작되어 젊은 연구자들의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훗날 많은 대학 교원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한일기독교사연구회에 모인 사람들은 그 외에도, 서정민, 히다 유이치, 고토 사토시 등이다. 연구를 계속하는 가운데 구라타 마사히코와 서정민의 관계 속에서 당시 이만열 선생이 소장을 맡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와의 교류도 깊어졌다.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0년이었다. 조선사 연구자이며 고베 학생청년센터의 주사 히다 유이치의 배려로 고베에서 교류를 시작하였다. 거기에서 동료 연구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유카타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 연구자가 아무 생각 없이 일본의 전통 의상인 유카타를 입은 것을 중진 연구자가 질책한 사건이었다. 당시는 아직 한일 간 문화교류도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였기에, 당시의 상황에서 보면 응당 일어날 수 있는 감정의 표출이었다.
고베에서 도쿄로 장소를 옮기고 ‘토미사카 그리스도교 센터’에서 사와 마사히코 1주기 기념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그 후 일본에서 서울을 방문하는 등 서울과 칸사이, 칸토와의 상호 교류가 깊어졌다. 그 교류 덕분에 윤경로, 김흥수 교수 등과의 개인적인 관계도 깊어졌다.
1991년 어느 날 이만열 소장은, 뉴욕의 장로회 선교본부의 총무 아서 브라운의 자료(Brown Material)가 한석희 선생에게 있으며 일본에서 이를 연구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때 내가 손을 들었다. 새벽까지 자료를 들여다보면서 논문의 방향을 전체적으로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전신에 전율이 흐르며 나를 덮친 지복의 시간은 연구자로서 더없이 행복한 일이었다. 그 결과 “선교사와 일제하 조선의 교육”이라는 비교적 장편의 논문이 나왔다. 이 논문은 일본에서는 1993년에 「民族運動史硏究」(민족운동사연구)에 수록되었고, 다음해에는 「한국기독교와 역사」에 수록되었다. 이 논문을 계기로 나는 선교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1995년부터는 대학에 적을 두고 떠오르는 의문에 차례로 답하는 모양으로 연구는 더 진전되었다.
세월은 화살처럼 빨라서, 그 당시의 젊은 연구자는 지금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또한 한일 교류에 지도적인 역할을 한 두 명의 마사히코는 아쉽게도 둘 다 50대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와 마사히코의 저서 『未完 朝鮮キリスト敎史』(미완 조선그리스도교사)는 그것을 상징하고 있다. 서정민 교수와 나에게는 두 마사히코의 연구를 어떻게든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남아 있다.

강단에서 엿볼 수 있는 한일관계
대학에서 나는 두 종류의 강의를 했다. 하나는 동아시아 근대사 혹은 국제관계에 관한 강의이며, 다른 하나는 마이너리티 문화론이나 다문화 공생에 관한 것이다. 사반세기에 걸친 강의와 세미나에서 절실히 느낀 점은, 내 강의가 한일 양국의 정치 상황에 일정 부분 계속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이 일본 문화에 개방적 태도를 보이고 한일 월드컵이 공동 개최될 때에는 세미나 참가생이 세 배는 늘었다. 한류의 융성, K-pop의 유행 등 순풍이 불 때도 있었지만, 교과서와 역사 인식에 관한 문제, 영토 대립, 위안부나 징용공 문제 등으로 인해 한일관계가 악화되었을 때에는 다소 악영향을 받은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과는 차원이 다른 심층에서의 구조적 변화를 일본 학생들에게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일본’ 등의 말에서 살펴볼 수 있는, 일본 정권이 그동안 펼친 아이덴티티 정치가 명확하게 관계하고 있다. 2006년 교육기본법의 개악으로 인해 ‘보편’이라는 말은 소실되었고, 대신 ‘공공’, ‘전통과 문화’, ‘나라와 향토 사랑’, ‘도덕’ 등의 말이 강조되었다. 그에 따라 역사학적으로는 도저히 성립되지 않을 것 같은 ‘자학사관’(自虐史觀)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과거 일본의 행적에 대한 성찰이 일부 역사 수정주의자에 의해 왜곡되는 사태가 버젓이 일어났다. 명성황후 살해, 위안부 등 한일 역사에 관한 일부 상징적인 항목은 일본 교과서에서 사라졌고, 그 외의 중요한 항목들도 왜소화되었다. 또한 1999년에는 히노마루(일장기)가 국기(國旗)로 법제화되고 공립학교 교원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어, 이쿠호샤(育鵬社)의 교과서와 같은 ‘천황’ 중심 사관의 교과서가 등장했다. 내가 사는 요코하마에서는 안타깝게도 이쿠호샤의 교과서가 채택되었다. 또한 최근 일본 교육에서는 도덕이 교과목으로 부활하였다.
이러한 교육 환경의 지각변동을 경험한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20년 전의 학생과 최근의 학생은 같은 내용의 강의에 대해 미묘하지만 다른 반응을 보인다. 중국 기독교사를 연구하는 어떤 일본인 연구자는 일본에 대해 조금만 비판적으로 말해도 학생들에게 ‘반일 교사’로 불리게 된다고 하였다. 내가 속한 대학은 여자대학이기 때문에 그것과 약간 다른 경향도 있다. 어머니와 함께 매일 한류 드라마를 보아온 세대, K-pop을 사랑하는 학생 등 한국을 매우 좋아하는 여학생들이 있는데, 그럼에도 강의의 리액션 페이퍼에 “자학사관에도 좋은 점이 있다” 등의 서술이 있어 복잡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때문에 오히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열정이 촉발된다고 할까, 거꾸로 가르치는 보람이 있음에 틀림없다.
올해 봄 국제관계에 관한 수업에서는 동아시아의 전근대부터 근대의 관계를 다루었다. 임진왜란 때의 조선인 강제연행, 평화 구축을 향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노력, 조선통신사, 에도막부 말기의 내셔널리즘, 아편전쟁, 정한론(征韓論), 청일·러일 전쟁과 조선, 우치무라 간조의 절대 비전론,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한국병합, 독립운동, 황민화정책, 신사참배 강요와 기독교, 아시아 태평양 전쟁 시기의 강제동원 등 1차 자료를 치밀하게 따르면서, 또한 한국에서 만들어진 안중근의 영화나 그 이외의 영상자료 등을 활용하면서 자세하게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더니, 오늘날 일본의 상황에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며 생각하는 의견이 리액션 페이퍼에 나타났다. 많은 학생이 배우지 못했다거나 몰랐다고 말했는데, 최근 한일 문제에 대한 일본 대중매체의 보도가 부끄럽게 느껴진다는 의견을 가진 학생이 나오기도 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반일/친일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얽매여 유연하고도 창조적으로 사고하지 못해 학생들에게 조금 더 거시적인 입장을 가지도록 지도할 때도 여러 번 있었다. 그것은 인류, 인간, 환경, 사랑, 평화 등이며, 이것이 바로 인문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이 목표로 해온 것이었다.

두 명의 일본 친구
올해 여름, 전국기독교학교 인권교육연구협의회는 인권교육 세미나 30년을 맞이하였다. 앞서 언급한 세키타 히로오 선생이 오랫동안 회장을 맡아오다가 그 시점에서 물러나셨다. 이 세미나는 매해 여름, 전국에 있는 기독교 학교 교직원을 중심으로 100명 정도가 참가해왔다. ‘계속’은 힘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이런 단체가 과연 한국에 있을까?
나는 이 협의회의 설립에 참여하였다. 이 협의회는 당시 일본그리스도교협의회(NCCJ)의 청년협의회, 마을(부락) 차별문제에 관여하는 기독교인, 재일 한국인·조선인 문제에 관여하는 기독교인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나는 기독교 학교 교육동맹에서 기독교 학교의 교육은 인성교육에서 인권교육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이런 주장에 공감하는 동료가 늘어났고, 지금은 기독교 학교 교육동맹의 후원을 받는 단체로 성장하고 있다.
그중에도 재일 한국인을 위한 계간 잡지 「三千里」(삼천리)의 편집장을 역임한 사토 노부유키는 오랫동안 재일대한기독교회의 한국문제연구소에 관여하였다. 외국인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여 도호쿠 지진 재해 후에는 후쿠시마를 중심으로 한 외국인 이재민의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도 분주히 활동하고 있다. 또한 도쿄 한국YMCA의 이사로서 내가 좌장을 맡은 2·8연구회의 사무국을 담당하고, 올해 2·8독립선언 100주년 국제세미나를 성공리에 치를 수 있게 만든 주요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협의회의 운영위원으로 지금도 활약하고 있다.
올해 여름 본 인권 세미나에서 채택된 성명서는 조선학교의 무상화 배재에 대한 반대, 이쿠호샤의 공민교과서 채택에 대한 항의, 문부과학성의 도덕 교과목화에 대한 반대, 오키나와 헤노코에서의 미군기지 이전 반대, 천황의 즉위 관련 행사에서 천황의 숭경·절대화에 기여하지 않도록 기독교 학교에 호소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우리는 일본 역사의 책임을 직시하고, 한국의 기독교인 및 시민사회와 건설적인 대화를 계속한다.”라는 일본·재일코리안교회의 성명에 찬성했다.
나와 가까운 또 다른 일본인 친구는 히다 유이치이다. 히다는 현재 내가 회장을 맡고 있는 동아시아 그리스도교 교류사 연구회의 칸사이 사무국장을 맡고 있으며, 연구 활동도 함께하고 있는데, 세큐문고의 재일조선인연구회의 중책도 맡으면서 조선인 노동자의 ‘강제 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를 주도하고, 그 분야의 시민 네트워크를 설립한 주요 인물이다. 그는 현재 한일 간 강제동원 문제가 부각된 것이 일본인이 역사를 직시한다는 의미에서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다고 말하며, 노무현 정권에서 발족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를 이명박 정권에서 폐지하고 다른 위원회와 통합한 것에 대해서 진상규명을 계속할 것을 호소하며, 일본인으로서 이의를 제기했다.
칸토와 칸사이의 한일 인권을 위하는 일에 이처럼 일본인 기독교인도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다. 아니, 이미 한국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것 같다. 201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센터는 사토 노부유키에게 제32회 인권상을 수여하였으며, 히다 유이치는 2014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8회 임종국상을 받았다.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과 평화를 향한 걸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의 교육계에서는 지각변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현 정권의 움직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일본이 향후 헌법개정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면, 현 정권은 그다음으로 대체 무엇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현 정권은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을 강조하면서도 국민에게 설명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그 윤곽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본래 민간 차원의 문제인 징용 피해자의 소송 문제에 일본 정부가 억지로 개입하고 한일관계를 의도적으로 악화시킨 현 정권의 여러 시책이 큰 틀에서 무엇을 목표로 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명료하지 않은 것과도 관련된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의 현 정권은 일본이 설명 책임을 다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8월 15일 광복절 연설에서는 해방 100주년인 2045년까지 한반도의 통일을 명확히 제시하였다. 평화경제 등 새롭게 제기한 구상을 통해 통일에 대한 윤곽이 전보다 명료해진 시대로 크게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계에서 냉전 구조가 남은 것은 동북아시아뿐이라고도 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한국전쟁의 종결과 동아시아 신시대의 도래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국 대통령이 우주통합군의 창설을 표명하고 미・중, 미・러의 대립으로 인해 앞으로 군사 확대가 진행되면, 언제 신냉전의 시대로 돌입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마 군사 확대와 같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계실 것이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한 종말에 더하여, 인간이 스스로 초래할지 모르는 종말을 우리는 현실로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맞이하여 우리들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인내심을 가지고 희망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야 한다. 강자의 정치에 먹히지 않도록 약자의 정치를 구사하면서, 지혜가 충만한 현명한 선택을 쌓아가야 고난의 시대를 돌파하고 새로운 지평에 도달할 수 있다. 여러 모순이 층층이 겹친 고난의 시대에 단순한 정답은 없으며, 이것 때문에 선택 자체에 모순이 내포될 때도 있다. 때로는 고심 끝에 내린 결단으로서 모순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커다란 에너지와 상호 이해를 위한 꾸준한 노력, 그리고 끈기 있는 대화가 더욱 필요하다.
작년에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서 ‘이데올로기보다 아이덴티티’가 울려 퍼졌다. 한반도가 통일을 향해 걷기 시작하면 한국 정부의 아이덴티티 정치가 강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아마 그때에는 한국 사회에서 민족이 지금보다 더욱 강조될 것이다. 민족은 어쩔 수 없이 ‘피의 논리’를 내포하는 것이며, 그것은 민중의 신학이 지향하던 것과는 다름을 우리는 자각해야 한다. 민중이란 다양성이며, 여러 복잡성과 민족성으로 구성된 것이다. 1980년대 구로 지역의 노동운동은 억압된 한국인 노동자가 그 주체였지만, 현재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도 그 주체임이 분명하다.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은 혼합민족론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전후에는 단일민족론이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그러나 아이누 민족의 존재를 정부가 인정한 후 단일민족론은 언론계나 교실에서 사라졌다. 현재 학생에게 단일민족론이라는 말을 알고 있는지 질문하면 극소수의 학생들이 손을 든다. 그러나 전후의 일본 정부가 극단적으로 난민을 적게 받아들인 것이나, 이민자 수용이 지지부진하고 답보되는 상태를 보아도, 단일민족론으로 뒷받침된 자민족 중심주의는 여전히 그 뿌리가 깊다. 본래 역사적 구성물인 단일민족론은 한국의 교육 현장에도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고 한다. 중국, 러시아 등 주변 나라들은 다민족 국가인데, 동아시아 끝에 위치한 반도와 섬나라에서만 단일민족론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나의 부친 세대에는 부친의 자서전에서 상징되고 있는 것처럼, 『역사의 사이를 산다』는 것이 주제였다. 하지만 나의 경우,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일본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다는, 장소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일종의 복잡성이 각인된 삶을 짊어진 채 살고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로 하나님에게 받은 선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에게는 ‘사이를 산다’는 의식이 약하다. 차라리 한・일이라는 중심성을 띠면서도 세계로 펼쳐진 그물망 속에서 ‘연결을 산다’고 말하는 것이 나의 인생이라 할 수 있다. 민중이 참된 주인공이 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을 희망하며 이 글을 마친다.


이성전 | 국제기독교대학에서 비교문화학을 전공하였고, 릿쿄대학(立敎大學)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글로 번역된 저서로 『미국 선교사와 한국 근대교육』 등이 있다. 현재 게이센여학원대학(惠泉女學園大學) 명예교수이며, 동아시아기독교교류사연구회 회장, 도쿄 한국YMCA 부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2019년 10월호(통권 7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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