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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 새로운 한일관계를 향하여
특집 (2019년 10월호)

 

  한일 민주화운동 연대의 역사와 전망
  

본문

 

들어가며
올해는 3・1독립운동 100주년의 해이다. 이에 앞서 당시 동경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은 3・1독립운동의 발화점이 된 사건으로 이 또한 100주년을 맞았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각각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인 필자에게 일본이라는 맥락에서, 동시에 현대사의 흐름에서 독립운동의 의의를 재고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 주제는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1960년대 이후 한일 민주화운동 관계사와는 조금 떨어진 내용이지만, 서론 격으로 잠시 언급하려고 한다.
2・8독립선언과 3・1독립운동이 일어난 1919년은 1910년부터 1925년까지 지속된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기의 한가운데였다. 만세일계(万世一系, 제1대 천황부터 혈통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짐)의 신격이자 통치권의 총괄자인 천황의 절대주의를 주축으로 하는 대일본제국헌법(1889)과 천황 신격화의 교육적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교육칙령(1890)으로 일본 국민은 이미 통제되어 왔지만, 1910년 이후 이른바 한일강제합병 시기와 겹치면서 일본에서는 자유주의적 풍조가 퍼져갔다. 사회주의 운동도 활발히 일어나고, 자유로운 사상이 학계 및 논단에 퍼졌다. 식민지 통치에 반항하는 세력이 무단통치하에서 철저히 탄압받던 조선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일본에 건너온 유학생들은 조선에서 통제당하고 사용할 수 없던 일본 및 세계 정세에 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또한 동경의 조선인 유학생들은 반(反)식민지 문제에 시달리는 중국 유학생, 독립운동가들과도 교류할 수 있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3・1독립운동과의 관계를 고찰하려면, 2・8독립선언에 집결한 조선인 유학생들과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도쿄제국대학 정치학 교수)의 관계를 거론할 수밖에 없다. 요시노는 1914년 도쿄 학생YMCA의 이사장이 된 후 조선인 유학생과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1916년, 마침내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의 많은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요시노의 인식은 크게 변화하였다. 이후 요시노는 조선인 유학생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고,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의 성격을 반복해서 비판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2・8독립선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요시노는 식민지에 대해 유화적인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마지막까지도 식민지 지배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에 이르지는 못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요시노조차 사상적 한계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 식민지 지배를 받던 조선 민중의 고통과 독립운동을 가장 깊이 이해한 사람 중 하나로 간주된다.
요시노의 사상적 한계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한계이기도 하다. 즉 당시 일본 민주주의 사상에 앞장섰던 그가 얼마나 자유주의적이고 혁신적인 주장을 했든지 간에,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를 구미 열강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대일본제국의 식민지 정책이 부득이 필요하다는 이중적인 잣대와 모순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식민주의적 발상은 조선을 일본보다 떨어지는 존재로 여기고 멸시하는, 제국주의 특유의 차별적・서열적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근본적인 사상이 1945년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어떻게 변화했는가이다.

1960년대 이전
1960년대 이후를 논하기 전에 기억을 되살리는 차원에서 1945년 8월 이후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1945년 8월 15일은 한민족에게 광복(해방)의 날이지만, 일본에는 패배의 날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일본이 미국에는 패전했지만 아시아에 패배했다는 의식이 일본 지배층이나 일반 사회에 생긴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모순의 전체를 덮어버리고 과거의 경험을 멀리하는 듯, 일본인들은 8월 15일을 ‘종전기념일’로 기억해왔다.
전쟁 이후 중국은 황제의 복권을 선택하지 않았고, 한국 또한 이씨 왕조의 복권 대신 공화제·대통령제의 길을 선택했다. 이와 달리 일본은 ‘연합국 총사령부’(GHQ: 1945년 제2차 세계대전후 대일 점령정책을 실시하기 위하여 도쿄에 설치한 관리 기구이며, 1952년 대일 강화조약 발효 때까지 존속) 지배하에 국가신도 자체는 해체했지만, 천황제를 끝내고 공화제 정치의 길로 전환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연합국 총사령부가 일본 국민의 통합을 위해 천황을 이용했기 때문이며, 또한 놀랍게도 80% 이상의 일본 국민이 패전의 분노와 비판을 천황에게 돌리지 않고 계속 황제를 받아들이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동경 재판 당시 전범 심판에서 분리되어 살아남은 천황은 그와 동시에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 국민들도 천황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으며, 이에 대한 논의를 피하고 오로지 미국의 비호하에 전쟁의 폐허에서 회복하는 일에만 전념해온 것이다.
이러한 정치 문화를 ‘묵계’(默契), 즉 천황과 국민 사이에 암묵적으로 합의한 약속이라고 비평하는 정치 학자도 있다. 이로 인해 일본 국민들은 한반도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고 사죄하기는커녕 영토(재산) 상실의 아쉬움, 조선 식민지 생활의 향수를 품게 되었다. 그리고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일본에 불똥이 튈 수 있다는 불안감과 함께 한국전쟁으로 인한 호경기를 누리면서도 한반도 남북에 나타난 독재적 지배자에 대한 반감과 경멸도 섞여 있다. 이러한 시대적 인식과 전쟁에서의 식민지주의적 차별의식이 뒤섞인 가치관이 일본 국민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후 어쩔 수 없이 재일(在日)의 삶을 강요당한 재일교포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법적으로, 또 사회적으로도 계속 농락당했다. 1948년 조선 학교에 대한 극심한 탄압 사건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시기에는 재일교포 1세(부모)와 자녀들이 조선인 집단거주지역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광경을 일본 전역에서 볼 수 있었다.

한일조약에 대하여
1960년 이후, 일본에서는 미일안보조약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학생운동, 노동운동과 함께 일본에서 반체제 사회운동이 크게 성장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한국과 일본 양국 사이에 한일조약이 체결되었다.
한국에서 반대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그것은 박정희 체제를 향한 비판이라기보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망령에 대한 반발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한편 일본에서도 자민당이 지배하는 일본 정부가 군사독재 대통령이 지배하는 분단 국가 한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일에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반대운동의 사상적 성격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일본의 반대운동에는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과 사죄의 이념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일본의 반대운동은 오히려 일본의 자민당 보수정권과 박정희 독재정권의 결탁에 대한 반발이라는 측면이 주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 문제와 한국에 대한 일본의 비판적 사회운동 사상에는 식민지주의 사고와 가치관이 무의식적으로 숨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 군사독재체제라는 한국의 현실, 냉전체제하에서 남북 분단이라는 구조적 요인, 그리고 그 배경에 일본 식민지 지배의 전후적(戦後的) 영향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이다.
일본의 좌익운동 중에는 독재정치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미숙을 지적하는 의견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일본의 좌익운동조차 식민지주의 사고가 청산되지 않은 채 전후에 끌려온 현실을 지적하고 싶다. 그 무렵 일본교회는 아직 한국 문제, 식민지 지배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 상태였다.

일본교회의 전쟁 책임 고백과 한국 민주화투쟁 연대
패전 후 22년이 지난 1967년 3월, 일본기독교단 총회장 스즈키 마사히사(鈴木正久) 목사는 총회장 명의로 “제2차 세계대전하의 일본기독교단
의 책임에 대한 고백”(이하 전책고백)을 발표하였다. 많은 반대 의견이 있어 결국 교단의 결의가 아닌 총회장의 이름으로 발표하게 되었지만, 이 전책고백은 침략전쟁을 반성하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전후 책임을 자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교회에 대한 사죄가 시작되었고, 한국교회는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으며, 용서와 화해를 향한 교류가 서서히 시작된 것이다. 이 전책고백은 다른 종교에도 영향을 주었고, 또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일본의 번영과 조선(아시아) 침략의 관계가 폭넓게 논의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에는 박정희 독재에 맞선 한국의 민주화투쟁에 주목하며 연대하려는 기운이 생겨났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양국의 노동운동과 시민 차원의 연대는 매우 미성숙했지만, 전책고백의 신학을 내세운 일본교회가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연대했다는 점이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삼엄한 감시하에서도 일본그리스도교협의회(NCCJ)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왔다. 1973년 8월에 김대중 씨가 도쿄 중심가의 호텔에서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난 후,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의 월간 잡지 「세까이」(世界)는 민주화가 실현될 때까지 “한국으로부터의 통신”(필명 ‘TK生’)을 장기 연재하고 한국 민주화운동의 내용을 일본에 정확하게 전하는 역할을 했다. 거기에서도 NCCJ를 비롯한 일본 기독교인들의 남다른 연대와 협력이 있었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사실이다. 동시에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이 전 세계 교회의 지원과 연대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NCCJ는 단지 한국의 민주화 문제뿐만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전후 책임이 이제는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문제에 이르게 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세계교회협의회(WCC)가 1984년 10월에 한반도 화해와 평화를 위한 “동북아시아의 정의와 평화” 회의를 개최하려 할 때, NCCJ는 그 회의를 일본 YMCA동맹 도잔소(東山荘)에서 개최하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이를 계기로 NCCJ는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7년 5월 NCCJ는 3명의 대표를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련맹(KCF)에 보내어 KCF와 NCCJ 간의 교류 가능성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989년 6월에는 KCF 대표단 환영 실행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그해 9월 28일 KCF 대표단 4명을 일본으로 초청하여 마침내 계획이 실현되었다. 이 계획이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그해 7월에 6명의 대표단을 KCF에 파견한 재일대한기독교회(KCCJ)와 NCCJ의 밀접한 연대 덕분이었다. 최근에 NCCJ와 KCCJ가 공동으로 북한을 방문(2019. 7. 27-8. 1)한 것 역시 1980년대의 협동 경험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와 평화의 선교에 사용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가며: 일본 입헌민주주의 위기, 그리고 한반도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대화
1989년에 이르러 대일본제국의 전쟁, 식민지 지배, 전후 부흥의 ‘쇼와’(昭和) 시대가 끝나고, ‘헤이세이’(平成) 시대가 시작되었다. 전후 처음으로 천황이 교체된 것이다. 삼엄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쇼와 천황의 장례식에서는 천황의 신격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 행사 ‘대상제’(大嘗祭)가 정교 분리를 주장하는 일본 헌법 아래에서 전후 최초로 진행되었다. 이 시대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체제가 붕괴한 시기이다.
오늘날 세계는 사무엘 헌팅턴이 말한 ‘문명의 충돌’과 같은 새로운 세계 분쟁, 세계화, 세계화의 반동으로 인한 포퓰리즘, 난민의 급증, 배타적 민족주의와 ‘헤이트크라임’(증오 범죄)이 만연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1990년대 전반까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성 노예를 경험한 분들의 용기 있는 증언을 통하여 크게 다루어졌으며, 일본에서는 1993년에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를 언급하는 ‘고노(河野) 담화’가, 1995년에는 일본의 침략 전쟁을 반성하는 ‘무라야마(村山) 담화’가 발표되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일본 민주주의가 성숙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또한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일본에 영주하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재일 외국인의 지방 참정권 문제가 크게 다루어지면서 이에 관한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일부 정치인들은 이 운동에 협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일본 정부는 국가의 전쟁 책임 문제인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끝까지 사죄와 배상을 피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전쟁 중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가 부상을 당했고,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전후 일본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조선 사람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전후 보상 재판에서 일본 재판소는 모두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셋째, 1990년대 중반부터 자민당 우파 내에 역사수정주의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여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반성을 자학사관(自虐史觀)으로 간주하고 배척하였고, 이를 불확실한 근거로 반박해나가는 우경화의 경향이 오늘날 아베 정권에 이르기까지 대두되었다. 결국 헌법 9조를 파괴하고, 일본 헌법에서 ‘공공’(公共) 개념을 ‘공’(公) 혹은 ‘공익’으로 바꿔 인권 개념을 현저하게 억제하는 심한 우경화의 흐름이 오늘날까지 30년 동안 일본 정치를 석권하게 되었다. 아베 정권의 이러한 움직임은 극우 집단인 ‘일본회의’의 지원을 받으면서 2012년 제2차 아베 내각 이래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 정권은 미국의 강요로 제정된 일본 헌법을 개정하여 ‘전후체제’를 끝내고 일본의 독자적인, 즉 과거 대일본제국의 헌법 이념을 복고한 헌법과 정치체제를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에서 노동조합운동은 이미 약화되었고, 분산된 야당은 무기력하다. 이러한 상태에서 불안해하는 일본 국민 다수에 따른 이 정치적 흐름이 실질적으로 주류가 되는 상황이다.
한편, 한국에서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 2017년 촛불 시민혁명으로 불리는 시민 민주주의 운동의 승리로 문재인 정권이 탄생하였고, 또한 2018년 초부터 남북 대화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물론 남북의 화해 평화 프로세스는 복잡하고 불안정한 국제 정세하에서 앞으로도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의 최근 2년간의 동향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현재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와 오늘을 비교하면 한국과 일본의 정치는 정반대 상태가 되어 있다. 일본은 바로 현재 민주화투쟁의 시대이다. 그리고 동시에 현재 일본에서 민주화투쟁을 담당하는 평화운동은 올해 한국 3・1독립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가운데, 지금이야말로 시민 민주주의 혁명을 이룬 한국의 시민운동과 연대해야 하고, 지원을 받아야 함을 절감한다. 다시 말해서 3・1독립운동의 비폭력 평화주의 이념은 지금 일본에서 평화운동을 사수하려는 헌법 9조에서 결정화(結晶化)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베 정권이 파괴하려고 하는 헌법 9조야말로 현재 문재인 정권이 추진하는 남북 화해 및 평화통일 노선과 통하고 있는 것이다. 즉, 헌법 9조의 이념은 극우화와 군사 대국화의 길을 가는 아베 정권에 대항하면서 동북아 평화공동체 구축의 길을 가기 위한 한일 공동 이념인 것이다.
지난 8월 초에 일본 나고야에서 일어난 ‘평화의 소녀상’ 전시 중지 사건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것은 일본 헌법 21조가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가 일본에서 빈사 상태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일본 시민이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입헌 민주주의를 지켜나기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연대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7월 초순부터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와 징용공 문제에 대한 보복조치로 반도체 관련 세 개 품목의 수출 규제를 단행하였고, 이로 인해 현재 한일관계는 해방 후 최악의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해보면, 지금이야말로 깊이 숨어 있던 것이 여실히 표출되는 상황에 두 나라가 놓이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넘을 수 없었던 식민지주의의 잔재를 제대로 응시하고,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전후 책임 정신으로 이를 극복하며, 우애와 연대의 정신으로 동북아 전체의 비핵화와 평화구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한국과 일본이 우애와 연대의 정신으로 함께 평화운동을 펼쳐나가며 그 유대를 강화해나가는 출발점에 서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자각해야 한다.


김성제 | 재일동포 3세이다. 메이지학원대학과 도시샤대학원 신학부를 졸업하였으며, 캘리포니아의 연합신학대학원(GTU)에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재일대한기독교회(KCCJ) 총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일본기독교협의회(NCCJ) 총간사(총무)를 맡고 있다.

 
 
 

2019년 10월호(통권 7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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