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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9년 10월호)

 

  1960년대 이후의 한일관계, 그 특성과 비전
  

본문

 

위기에 빠진 한일관계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일본이 시비를 건 이래 나빠진 한일관계가 지금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와 아베 신조 정부의 충돌은 민간 부문에까지 악영향을 미쳐 양국 국민의 감정도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빠졌다. 1965년 한일 국교 재개 이래 가장 험악하다.
한일관계가 파탄에 이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정적 요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 이행을 둘러싼 대립과 전시 노무동원 피해자(이른바 ‘징용공’)에게 일본의 해당 기업이 배상하라는 한국 대법원 판결을 둘러싼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더디고 느슨한 대응에 잔뜩 화가 나서 마침내 핵심 부품 소재 등의 수출 관리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국 정부는 이것을 경제 보복으로 받아들여 격렬한 반일 자세로 응수했다. 양국 정부에 휘둘려 국민들도 서로 원색적인 비난 공방을 되풀이하고 있는 현실이다.
한일관계는 원래 잘못 관리하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유리그릇처럼 불안하였고, 사소한 부주의로 불똥이 튀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가스탱크와도 비슷하였다. 다만 이번 경우는 위기관리 책임자인 양국 수뇌들이 오히려 대결을 부추겨 파열이 넓고 깊게 퍼질 수밖에 없었다. 양국 수뇌들의 강경한 자세는 지지 세력의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기 때문에 한일관계가 정상으로 복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대 한일관계를 보는 시각
한국과 일본은 1965년에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과 이에 관한 네 개의 부속협정(‘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일본국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폐멸한 이후 단절된 국교를 재개하였다. 한국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 동안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는데, 일본이 패전하고 한국이 해방된 이후에도 20년 동안 두 나라는 정식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다.(1945-65년) 반면에 두 나라는 미국과 각각 안보동맹을 맺음으로써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는 보루 역할을 담당하였다.
기간으로 보자면, 근대 한일관계(1875년 강화도사건부터 1945년 식민지배 종료까지 70년간)보다 현대 한일관계(1945년 해방 이후 현재까지)가 더 오래다. 근현대에서 국교가 단절된 기간은 55년인데(1910-65), 국교가 열린 기간은 90년이나 된다. 특히 현대에서 55년간 국교를 맺은 동안 한국과 일본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공유하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제3자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과 일본처럼 인종이나 문화 등 여러 면에서 서로 닮은 나라도 드물다. 웅장한 스케일로 세계 문명의 흥망성쇠를 탐구한 미국 UCLA의 교수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자신의 명저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에서 한국과 일본을 “유년기를 함께 지낸 쌍둥이 형제”와 같다고 규정했다.
세계사의 수준에서 볼 때 한국과 일본은 ‘쌍둥이 형제’와 같이 밀접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왜 지금도 원수처럼 으르렁대고 있는가?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과 일본의 역사 대화를 이끌어온 필자로서 ‘양국 국민이 선입관과 편향성을 가지고 한일관계를 보아오지 않았는가. 그 과정에서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틀린 것을 맞는 것처럼 확신하고 떠들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한일관계는 우여곡절과 다사다난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면만을 도드라지게 보아서는 전체적인 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현대 한일관계만 하더라도 세계사 속에서 장기적·거시적으로 파악해야만 원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 따라서 한일관계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재구성하여 양국 국민에게 제공하는 일이야말로 위기 상황에 빠진 작금의 한일관계를 개선하는 데 꼭 필요한 작업이다.
먼저 현대 한일관계사를 파악하는 관점을 몇 가지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장기사적·문명사적 관점을 염두에 둔다. 역사 속의 한일관계는 2,500여 년에 걸칠 정도로 길고 깊다. 그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문명을 형성해왔다. 문명의 전파와 수용은 폭력과 강제에 의해 이루어진 적도 있고, 평화와 교류에 의해 이루어진 적도 있다. 현대 한일관계는 어떤 경우에 해당할까?
둘째, 복합적·중층적 관계를 중시한다. 보통 한일관계를 운위할 때는 정치나 경제 또는 역사 등의 어느 한 측면에 치우치기 쉽다. 그러나 한일관계는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힌 사안이기 때문에 어느 한 면만을 보고 전체를 재단할 수는 없다. 인간의 이동과 문화접변, 전쟁의 충격과 사회변동, 물자의 교역과 생활변화 등을 시야에 넣고 현대 한일관계를 보아야 한다.
셋째, 현재적·모색적 관점을 견지한다. 한일 양국 사이에서는 오래되거나 새로운 현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100년 전, 50년 전에 이미 양국이 치열하게 논쟁을 펼친 역사인식이나 과거사 처리 문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로운 과제로 부상하는 것이 그 사례이다. 따라서 현재의 관점에서 이런 문제의 내력을 추적하고 극복 방안을 모색하는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넷째, 교류협력과 상호의존의 관점도 중시한다. 겉으로 보면 현대 한일관계는 반목과 대립으로 꽉 차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교류와 협력의 길을 걸어왔다. 이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평가가 아주 인색하여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을 뿐이다.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근대 한일관계에 대해 150여 쪽을 기술하고 있지만, 그보다 긴 기간에 해당하는 현대 한일관계에 관해서는 3쪽 정도의 분량만을 기술하고 있다. 그것도 대립과 갈등의 내용뿐이다.(일본 역사교과서의 한국사 왜곡에 대한 비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갈등,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반박 등) 현대 한일관계를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일본의 학교교육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양국 국민은 서로에 대한 무지와 오해, 편견과 왜곡의 늪에서 벗어나기 힘든 구조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이 현대 한일관계사의 이해를 돕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다.

현대 한일관계의 단계별 특징
가까운 이웃인 한국과 일본은 지난 70여 년 동안 변화무쌍한 국내외의 정세 속에서 우여곡절로 점철되고 복잡다단하게 얽힌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 궤적과 성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몇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제1기(1945-65년)는 한국과 일본이 식민지 지배로 야기된 과거사를 정리하고 국교를 재개하기 위해 노력한 시기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은 일본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 조인, 1952년 4월 발효)을 체결하여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처리를 마무리했다. 한국과 일본은 그 틀에서 14년에 걸친 마라톤회담을 전개했다. 이른바 ‘한일회담’이다. 한일회담은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 등을 둘러싼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난항을 거듭했다. 한국에서는 자유당, 민주당, 공화당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일본에서는 자민당 1당 집권체제가 구축되었다.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일어나는 등 냉전의 분위기가 세계를 휩쓸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체제 전환을 이룩하였다.
제2기(1966-79년)는 한국과 일본이 수직적·비대칭적 관계를 맺은 시기이다. 한국과 일본은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하여 일단 과거사를 정리하고 대등한 국가로서 국교를 재개하였다. 한국은 ‘청구권 자금’과 연계하여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는 등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신흥공업국가의 선두로 부상하였고, 외국으로부터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한국은 일본과 경제적 측면에서는 수직적 분업관계, 정치적 측면에서는 비대칭적 유착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을 뒷받침한 것은 한국의 개발독재·권위주의, 일본의 자민당 1당 우위의 정치체제였다. 일본과 미국이 중국과 수교하는 등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요동치기도 했지만, 남북한의 대결이나 베트남전쟁 등에서 보듯 세계는 당시에도 여전히 냉전의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제3기(1980-97년)는 한국과 일본이 수직적 관계에서 벗어나 상대적 수평화 단계로 진입한 시기이다. 한국이 일본에서 소재와 설비를 도입하여 수출하는 무역구조는 여전했지만, 자본과 기술 면에서 일본 의존도는 현저히 낮아졌다. 세계무대에서 일본 기업과 다투는 한국 기업이 늘어났다. 세계가 냉전에서 탈피함으로써 한국과 일본의 반공 연대도 약화되었다. 때마침 한국에서는 정치의 민주화와 사회의 다원화가 괄목할 만하게 진전되었다. 또한 권위주의 시대에 억눌렸던 반일 내셔널리즘이 때때로 분출하였고, 일본을 극복하자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일본에서는 자민당 1당 중심 체제가 무너지고 자민당 위주의 연립정권이 출현하여 역사인식 등을 둘러싸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다. 일본의 국력이 답보 상태를 보인 반면, 중국의 세력이 강대해져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대변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제4기(1998-현재)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상대적 균등화가 이행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의 12분의 1에 불과하던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2012년 통계를 기준으로 5분의 1에 이를 정도로 그 격차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한국의 대일 무역의존도는 1965년 수출 25.5% 수입 37.8%에서, 2012년에는 수출 7.1%, 수입 12.4%로 현저히 낮아졌다. 한국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일본 기업을 제치거나, 한일 합작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사례도 등장하였다. 스포츠나 예술 등 다른 분야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잦아졌다. 한류(韓流)와 일류(日流) 붐에서 보듯이 두 나라 국민의 생활과 의식이 많이 비슷해졌다. 한국에서는 여야의 정권교체를 경험하면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시민운동이 확산되었다. 일본에서는 한때 야당이었던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었지만, 국민의 지지를 상실하여 자민당 독주의 보수정치로 회귀했다. 그리하여 역사인식과 영토 문제 등을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이 노골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이 빈번해졌다.

한국과 일본의 위상 변화
현재 한국과 일본이 직면한 갈등과 대립을 장기적·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100여 년 전에 형성된 두 나라의 관계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은 절치부심 끝에 이제 특정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는 지위에 올라섰다.
우리 속담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라는 말이 있다. 100년 전 한국은 열강의 고래 싸움에 휩쓸려 나라를 상실한 새우 신세에 불과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는 열강의 고래 싸움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은 한국이 더 이상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은 이제 열강의 고래 싸움 속에서 요리조리 헤엄쳐 다니면서 자신의 생존은 유지해갈 수 있을 돌고래 정도로 성장했다.
일본은 지난 20여 년 동안 정치 혼미 등으로 내외 문제의 극복이 늦어져서 국력신장에 활기를 띠지 못하였다. 반면에 중국은 경제·군사 등 모든 면에서 일취월장하여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결과적으로 100여 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인 일본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와중에서 한일관계도 일방적인 종속·의존 관계에서 벗어나 상대적 경쟁·경합 관계로 바뀌게 되었다. 오랫동안 멍에로 작용했던 식민지 대 제국의 수직적・비대칭적 관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파트너 대 파트너로서의 수평적·대칭적인 관계가 현실적인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은 여전히 강대국이다. 육지 국토면적은 남한의 4배이고, 배타적 경제수역(EZZ, 영해 기선으로부터 200해리에 이르는 수역)은 몇십 배나 된다. 인구와 국내총생산은 각각 3배 이상이다. 첨단 과학기술이나 문화예술, 사회 안전망이나 인프라 등에서 일본은 한국보다 상당히 앞서 있는 일류국가이다.
한국과 일본은 먼저 서로의 처지가 크게 바뀌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장기적·거시적 관점에서 한일관계를 파악하고, 발생하는 현안에 그때그때 적절히 대응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불필요한 충돌과 대립을 많이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한일관계의 변화는 당연히 역사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수반하게 마련이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정치와 사회의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권위주의 체제에 억눌려 있던 민족주의적 에너지가 일본을 향해 분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한때 여유로움과 유연함을 보이던 정치와 사회가 보수 쪽으로 기울어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 문제에서 퇴행적인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하여 한국과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참배, 일본군 위안부, 역사교과서 기술, 독도 영유권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연례행사처럼 공방을 벌이는 상황을 맞았다.
중국과 북한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한국과 일본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자 북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대국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한국은 어쩔 수 없이 중국의 눈치를 보며 중국을 가깝게 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한국이 중국 쪽으로 기우는 게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지정학적·생태학적 측면에서 그 위치가 약간 다르다. 아시아 대륙과 중국이 한국과 일본에 미친 서로 다른 영향은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특색에도 잘 반영되었다. 그리고 오늘날 현실적으로 생존 전략을 모색하는 데에도 일정 부분 차이를 드러나게 만들고 있다. 양국은 처지와 대응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 상위(相違)를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보완제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이전에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견이나 충돌이 발생할 경우 양국의 유력 정치인이나 재계 리더 등이 전면 또는 막후에서 교섭하고 타결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였다. 그러나 ‘1965년 체제’를 구축했던 양국 세대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각 분야에서 물러났고, 양국 사이에서 마찰과 대립이 확대되지 않도록 조정하고 관리하던 시스템도 약화 또는 붕괴되었다. 한국과 일본이 서로 한 수 접어준 듯 대하던 특수한 관계의 유풍은 거의 사라지고, 다른 나라를 대하듯 하는 보통 관계의 모습이 자리를 잡았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이 없지 않지만, 한일 양국이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세대교체를 직시하고 후속 세대를 양성하여 서로에 이익이 될 수 있는 식견과 경험을 전수했더라면 한일관계는 좀 더 안정되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한일관계를 향하여
한국과 일본은 잦은 마찰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수준에서 본다면 국교 재개 이래 절차탁마하면서 꽤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두 나라는 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 인권옹호 등 전 지구적인 가치를 공유하는 동질의 국가를 이룩하였다. 그리고 각각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동아시아의 안전과 평화를 담보하는 지렛대로도 기능해왔다. 국민의 생활양식과 문화수준에서도 선진성과 보편성을 공유하고 있다. 양국 대중 속에 깊게 침투한 한류와 일류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이 서로의 성취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좀 더 적극적인 협력 방법을 모색한다면 세계의 문명 발전에 함께 기여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한일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미래와 비전에 관한 확고한 신념을 갖는다면, 역사인식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다. 양국 국민은 먼저 역사문제의 책임을 다음 세대로 미루기보다는 지금 세대에서 해결하겠다는 분위기를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양국의 정치가와 여론 주도층은 인류가 지향해온 보편적 가치의 기준에서 한일관계를 해석하는 식견을 가져야 한다. 나아가서 자신들이 솔선하여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에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아울러 양국 국민을 납득시키고 선도할 수 있는 전략과 방법을 마련하고 실천해야 한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한일 양국은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 문제를 다뤄온 경험, 노하우, 실적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 노력과 성과, 한계와 결함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평가함으로써 보완과 개선, 극복과 해결의 지혜를 얻어야 한다.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 문제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양국 관계의 모든 부문을 좌지우지하는 절체절명의 사안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밖에도 양국이 함께 협력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많다. 다만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 문제는 두 나라 국민의 정서와 감정, 애국심과 정체성 등과 결부되어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노력과 시간, 배려와 결단이 필요하다. 이번의 격렬한 충돌을 계기로 삼아 한국과 일본이 두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를 향해 공동의 비전을 제시하고, 그런 가운데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 문제에 관하여 포괄적 해결을 도모하기를 바란다.
끝으로 앞서 소개한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쓴 논문 “일본인의 뿌리”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역사는 한일 양 국민들에게 상호 불신과 증오의 여지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결론을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아랍인과 유대인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핏줄이 이어져 있지만, 서로 오랜 전통적인 상호 적대적 감정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대립과 갈등은 상호 간에 파괴적일 뿐 이로울 건 아무것도 없다. 분명히 한일 양국 국민들은 유년기를 함께 지낸 ‘쌍둥이 형제’와 같다. 이제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그들 사이의 오랜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하는가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이다.


정재정 | 서울대학교와 도쿄대학에서 한국근대사, 한일관계사, 역사교육을 전공하였다. 『일제침략과 한국철도(1892-1945)』, 『서울과 교토의 1만 년』 등의 저서가 있다.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이다.

 
 
 

2019년 10월호(통권 7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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