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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9년 8월호)

 

  해방 후 종교의 정치 개입과 정교분리
  

본문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의 언행이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정부에 대한 비판을 넘어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단식농성을 벌이는가 하면 대통령 하야를 위한 국민소환청원 서명운동까지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안팎에서는 그의 발언을 망발로 규정하고 즉각적인 대표회장직 사퇴, 나아가 한기총 해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를 따르는 세력은 자신들이야말로 정치적 박해를 받고 있는 피해자이며 이 시대의 진정한 예언자라고 자처하고 있다.
최근 한기총이 보여주는 정치적 행보는 다소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출범 당시부터 한기총은 끊임없이 현실정치에 개입해왔다. 사실 한기총만 정치에 관여해온 것은 아니다. 보수 개신교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나아가 세상의 모든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거나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배경과 동기, 방식과 내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종교가 어찌 정치 영역이라고 해서 제외할 수 있겠는가. 만일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하는 종교가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면 그보다 더 큰 자기모순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것은 정교분리 원칙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헌헌법에서 현행 헌법에 이르기까지 정교분리 조항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으며,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니고 있다. 정교분리는 말 그대로 풀이하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정치는 종교에 개입할 수 없고 종교는 정치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인가? 실제로 많은 사람이 이 조항을 종교와 정치의 상호 불개입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종교와 정치, 혹은 국가와 종교의 분리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도 세상 구원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에 명기된 정교분리는 문자 그대로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수사(rhetoric)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규정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규정은 ‘종교전쟁’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지닌 서구 근대사회의 역사적 산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구와 같은 역사적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항 이후 서구 근대성의 확산과 함께 정교분리 담론이 수용되고 제헌헌법에서 법적 규범으로 채택되었다.
어떻든 우리 사회에서 정교분리는 법적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국가권력과 종교집단은 이 규범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정교분리 개념에 내재한 모호성 때문에 이 규범은 각 집단에 의해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고 있으며, 그러한 해석에는 각 주체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투영되어 있다. 따라서 ‘정교분리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추상적 물음보다는 이 규범이 구체적 현실에서 각 주체에 의해 어떻게 전유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해방 이후 주요 종교들이 현실정치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정교분리 원칙이 어떻게 활용되어 왔는가를 살핌으로써 최근 한기총의 정치적 행보가 지닌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국가에 예속되는 종교, 혹은 정교유착의 길
해방 직후 미군정이 포고령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자, 각 종교는 교단 재건과 함께 본격적인 포교활동에 나섰다. 그런데 해방공간의 지상 과제는 국가건설이었기 때문에 각 사회세력은 건국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경합하였고, 종교계도 이에 동참하였다. 당시의 주요 종교는 ‘6대 종교’로 불린 대종교, 천도교, 유교, 불교, 천주교, 개신교였는데, 종교계 지도자 중 상당수는 민주의원이나 입법의원으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독립촉성 종교단체연합회’와 같은 단체를 결성하여 종교계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미군정과 1공화국 시기 6대 종교의 정치활동을 간략히 살펴보자. 먼저 대종교는 일제에 의해 항일단체로 낙인찍힐 만큼 독립운동에 주력한 종교이다. 따라서 해방 후 독립운동가 출신이라는 후광하에 대종교 인사의 상당수가 초대 정부의 고위 관료로 입각하였고, 이에 힘입어 개천절이 국경일로 지정되고 단기 연호가 채택되었으며, 홍익인간이 교육이념으로 지정되었다. 이처럼 건국 초기에는 대종교 인사들의 단군 민족주의에 근거하여 대종교가 현실정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나, 이들이 점차 권력에서 배제되면서 대종교도 주요 종교에서 탈락했다.
천도교는 교단과 별도로 ‘청우당’이라는 정당을 결성하여 현실정치에 개입하였다. 그런데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소련식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모두 반대하고 ‘조선적 신민주주의’를 표방한 청우당의 좌우합작 노선은 미군정과 이승만의 반공 및 단정(單政) 노선과 충돌하면서 탄압을 받았고, 얼마 뒤 청우당의 해산과 함께 천도교도 주요 종교에서 탈락했다.
유림 세력은 건국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대립하였으며, 최고 지도자였던 김창숙은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 반대하여 탄압을 받았다. 1공화국하의 유교는 자유당 정권의 개입을 초래한 유림 분규에 휩싸여 내홍을 앓았고 점차 국가권력에 예속되어 갔다. 불교 역시 교단 재건 과정에서 좌우익 갈등에 휩싸였고, 미군정의 지원을 받은 우파에 의해 좌파 세력이 척결되었다. 자유당 정권하에서는 비구-대처 갈등이 본격화되었는데, 이때 정권이 깊숙이 개입하였다. 이승만은 ‘정화유시’를 통해 소수파였던 비구 측의 편을 들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비구 측은 경무대 앞에서 북진통일 지지 시위를 벌이고 경무대를 방문하여 이승만의 대통령 선거 재출마를 호소하였다. 이후 불교는 유교처럼 국가에 예속되는 길을 걸었다.
천주교는 해방공간에서 우파 노선을 철저하게 견지했다. 당시 천주교를 대표한 노기남 대주교는 반공을 매개로 미군정과 두터운 관계를 맺었고 이승만과도 친분을 유지하면서 단정노선을 지지하고 5・10총선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하에서 천주교의 「경향신문」이 보도연맹 사건 등과 관련하여 이승만 정권의 도덕성을 비판하면서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그후 천주교는 정권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다.
개신교는 미군정의 친기독교 정책에 의해 가장 많은 특혜를 받았다. 군정청 고위 관리의 압도적 다수가 개신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적산 처리 과정에서도 가장 많은 재산을 불하받은 것이다. 물론 개신교 역시 좌우익 갈등을 겪었으나, 우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하였다. 1공화국하에서 이승만은 군목제도나 형목제도와 같은 제도적 장치를 통해 개신교에 많은 특혜를 주었고, 개신교는 선거를 통해 보답했다. 당시 개신교가 국가권력으로부터 획득한 물적・제도적 자원은 교세 성장의 주요한 발판이 되었다.1
거시적으로 보면 미군정에서 1공화국에 이르는 시기는 건국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사회 전체가 이데올로기에 깊이 채색되었고, 종교계도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냉전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약한’ 종교들이 ‘강한’ 권위주의 국가에 예속되는 길을 걷거나, 개신교의 경우처럼 종교권력이 국가권력과 밀월 관계를 맺는 정교유착의 길을 걸었다.

군사정권하 종교적 보수와 진보의 이중주
1960년 4월 민주항쟁이 열매를 맺기도 전에 군사 쿠데타에 의해 군사정권 시대가 막을 열었고, 이와 함께 종교와 정치의 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종교계의 판도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 대종교, 천도교, 유교가 소수 종교로 전락하고 개신교, 천주교, 불교가 주류 종교로 부상하였다. 종교 지형이 6대 종교에서 3대 종교의 각축 구도로 재편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3대 종교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5・16쿠데타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연합회는 반공과 친미를 이유로 쿠데타 세력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렇지만 1965년 한일협정과 관련해서는 전국 교회가 비준 반대운동에 동참하면서 정권과 대립하였다. 1969년 3선개헌 정국에서는 보수와 진보로 분화되어 진보 진영은 개헌 반대, 보수 진영은 개헌 지지 입장을 취하였다. 이때부터 개신교는 정치적 이슈와 관련하여 보수와 진보의 입장이 확연히 갈리기 시작했고, 10월 유신을 계기로 양자의 갈등은 한층 거세졌다. 진보 진영이 남산 부활절연합예배,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 개헌청원 백만인서명운동 등을 통해 유신독재에 저항할 때, 보수 진영은 대통령조찬기도회에서 10월 유신을 찬미하였다. 신군부가 집권한 5공화국 시절에도 보수와 진보의 대결 구도는 지속되었다. 진보 진영이 군사정권과 대결하면서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주력하는 동안, 보수 진영은 세상 권세에 대한 복종의 논리를 내세워 군사정권을 지지하였다.
군사정권과 개신교 보수 진영이 개신교 진보 진영의 민주화운동을 공격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로 삼은 것은 정교분리의 원칙이었다. 이들은 진보 진영의 사회운동을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되는 불온한 정치활동이자 종교의 본령을 벗어난 정치 개입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정교분리는 종교의 정치 불개입을 의미했다. 반면 개신교 진보 진영은 정교분리를 다른 식으로 해석했다. 진보 진영에 의하면 정교분리는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의 야합을 막기 위한 규범이지 종교의 정치활동 금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 진영은 종교의 정치 참여의 근거를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서 찾았다. 하나님의 선교는 좁은 의미의 복음전파를 넘어 ‘세상의 인간화’와 ‘인간 해방’을 위한 활동을 포함하기 때문에 노동자의 인권옹호를 위한 산업선교는 정당한 선교활동에 속한다.2 이러한 논리에는 유대 기독교의 ‘예언자 전통’과 ‘하나님의 형상’ 개념이 연계되어 있다.
천주교는 심도직물사건(1967)을 신호탄으로 지학순 주교의 구속, 명동성당 3・1절 기도회 사건, 동일방직 사건, 오원춘 사건 등을 거치면서 군사정권과 갈등을 빚었다. 그 과정에서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같은 운동 단체들이 등장하여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선도했다. 물론 ‘구국사제단’처럼 천주교의 저항운동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 시기 천주교의 사회정치적 활동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 것은 ‘윤리적 판단’ 개념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의 산물인 이 개념에 의하면 인권 문제와 관련된 경우 교회는 정치질서에 관해서도 윤리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 한국 천주교는 이 개념을 무기로 인권운동과 사회민주화운동을 적극 전개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불교는 기본적으로 군사정권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일각에서는 불교의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군사정권은 그동안 기독교에만 허용하던 특권을 불교에도 제공하는 한편 불교재산관리법을 통해 불교계의 재산을 관리했다. 따라서 국가에 대한 불교의 의존과 예속은 심화되었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불교계는 박정희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군사정권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국법회나 호국법회를 통해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1980년 10.27법난을 계기로 소장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민중불교운동이 등장하였다. 불교의 탈사회적 경향을 비판하고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주창한 이 운동은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개신교의 민중신학이나 천주교의 해방신학에 비견될 수 있다.
이처럼 군사정권하 종교계의 정치 참여는 각 종교 내부에서 보수와 진보의 분화를 통해 각기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다. 거시적으로 보면 보수 진영은 정교분리를 표방한 정교유착 노선을 견지한 반면, 진보 진영은 종교의 정치 참여를 차단하는 정교분리 개념을 비판하면서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하였다.

민주화 시대 종교적 보수의 길과 욕망의 정치
1987년 6월항쟁을 계기로 군부정권이 퇴각하면서 한국 사회는 민주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민주화 시대의 초기에는 시민운동이 활성화되고 종교계도 시민단체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87년 대선 과정에서 등장한 공명선거기독교대책위원회를 비롯하여 2000년 총선에서 등장한 기독교총선연대, 천주교총선연대, 불교총선연대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 시민단체들은 공명선거와 부패 정치인 추방이라는 공익과 공동선을 목표로 정치에 개입하였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종교의 현실정치 개입과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가장 큰 주목을 끈 것은 노무현 정권의 출범 이후 등장한 보수 개신교 진영의 이른바 ‘정치적 행동주의’이다.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한 조직은 한기총, 기독교사회책임과 뉴라이트전국연합, 그리고 기독교 정당이다. 한기총은 2003년 새해 벽두 시청 광장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를 개최하였는데 이것이 ‘기도회 정치’의 신호탄이었다. 그후 다양한 이름으로 거리에서 행해진 기도회는 외형상으로는 군사정권 시절의 ‘목요기도회’를 연상시키지만, 두 기도회의 주체와 내용은 상반된다. 군사정권 시절의 목요기도회가 진보 진영의 교회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몸짓이었다면, 한기총 주도의 기도회는 보수 진영의 교회가 민주정권에 도전하는 몸짓이었다.
2004년 11월 출범한 ‘기독교사회책임’은 로잔언약에 나타난 기독교인의 사회책임을 기치로 내세웠다. 한기총의 정치 참여가 소수의 대형교회와 전쟁세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데 비해 이 단체는 중도통합을 내세우면서 수구적 우익세력과의 차이를 내세웠다. 그렇지만 이들이 내세운 ‘중도’는 보수와 진보 사이의 중도라기보다는 극우와 보수 사이의 중도였다. 2005년 11월 김진홍 목사의 주도하에 설립된 ‘뉴라이트전국연합’은 올드라이트(Old Right)와의 차이를 강조하였지만, 기독교사회책임의 정치적 스펙트럼과 큰 차이가 없다. 뉴라이트전국연합과 기독교사회책임은 비정부기관(NGO)의 형식을 취하였지만, 공익이나 공동선이 아니라 우파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고 있는 특정 이데올로기 집단이다.
17대 총선에서 통일교의 가정당과 함께 출범한 기독교 정당은 의회 진출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재도전하고 있다. 기독교 정당의 주도 세력은 기독교의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창당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일요일 국가고시의 폐지나 교회의 기반시설부담금 인하와 같은 교회의 제도적 이익 옹호에 주된 목적을 두고 있다. 한편 이들은 군사정권 시대에 진보 진영의 민주화운동을 정교분리 위반이라고 비난한 전력이 있다. 따라서 기독교 정당의 창당이 정교분리 원칙에 위반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자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이들에 의하면 정교분리는 종교의 정치 불개입이 아니라 정치의 종교불간섭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 정당을 통한 정치활동은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중적 태도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민주화 시대의 정교분리 문제와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불교계의 움직임이다. 2008년 20여만 명의 불교인이 참여한 가운데 시청 광장에서 열린 범불교도대회는 ‘헌법파괴 종교차별 이명박 정부 규탄’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주최 측은 이명박 정부의 공직자들이 기독교를 우대하고 불교를 차별하고 있다면서 종교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보수 개신교 진영은 공직자 개인의 종교자유를 강조하면서 종교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였다. 결국 불교와 보수 개신교 진영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 논쟁에서도 정교분리가 핵심 이슈로 등장하였다. 불교 측은 공직자들의 종교차별이 정교분리 원칙의 위반이라고 주장한 반면, 보수 개신교 진영은 공직자들의 종교차별로 간주되는 종교활동은 정교분리 위반이 아니라 종교자유의 행사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종교차별금지법의 제정 대신 공무원복무규정의 개정으로 일단락되었지만, 민주화 시대의 정교분리 문제와 관련된 의미 있는 사례이다.3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해방 이후 한국 종교계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정치에 개입해왔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민주화 시대 이전에는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의 정교유착이 관행으로 자리 잡은 가운데 소수파에 속하는 진보적 종교 진영이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에 정치적 도전장을 내미는 형국이었다면, 민주화 시대에는 진보 진영의 종교계 인사들이 참여한 민주정부에 보수적 종교 진영이 정치적 도전장을 내미는 형국이다. 그런데 진보 진영의 도전장은 인권과 공동선의 증진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내장하고 있는 반면, 보수 진영의 도전장은 집단의 이익과 기득권 수호라는 국지적 욕망을 내장하고 있다. 최근 한기총의 정치적 행보에는 정교분리 원칙의 전유를 통해 보수 진영의 도전장에 내장된 집단 이기주의적 욕망을 좀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충족시키려는 몸짓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 강인철, 『종속과 자율: 대한민국의 형성과 종교정치』(한신대학교출판부, 2013).
2 김용복, “해방 후 교회와 국가”, 『국가권력과 기독교』(민중사, 1982), 191-254.
3 정웅기, “범불교도대회의 배경과 성격”, 『불교와 국가권력, 갈등과 상생』(조계종출판사, 2010), 309-354.



이진구 | 한국 근현대 종교사를 전공하였다. 대표 저서로 『한국 근현대사와 종교자유』가 있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2019년 10월호(통권 7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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