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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 구약성서 연구의 새로운 경향
특집 (2019년 7월호)

 

  고고학이 구약 연구에 끼친 최근 영향
  

본문

 

1800년대 초, 거룩한 그림이거나 벽 장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이집트 상형문자와 메소포타미아 설형문자의 판독은 고고학은 물론 세계사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많은 학자들이 고대의 역사를 담고 있는 그 땅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독교 배경에서 성장한 그들의 최고 목적 중 하나는 요나가 방문한 니느웨를 찾는 것이었다.
1849년 이라크의 모술 근처에서 영국인 오스틴 레이야드(Austen H. Layard)가 니느웨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을 때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기독교 사회는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발견된 무수한 유물과 벽 부조에서, 그는 앗수르의 왕 산헤립과 남왕국 유다 히스기야의 전쟁을 추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성서의 에피소드가 역사적 사실로 인지되면서 이후 100년간 수많은 사람들이 중동 지역을 비롯하여 현재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르는 지역까지 성서의 역사를 찾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렇게 드러난 성서와 관련된 유물과 유적지를 연구하는 학문을 ‘성서 고고학’(Biblical Archaeology)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위임 통치하던 1922-48년에 유럽 사회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아니라 실제 성서의 땅이라 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에 관심을 쏟았다. 당시 성서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사람은 윌리엄 알브라이트(William Albright, 1891-1971)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땅의 발굴과 연구를 진행하며 고고학은 성서 텍스트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성서의 내용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그는 여러 고고학적 발견들을 성서의 내용과 관련시켜 해석하려고 노력했다.
1947년 사해 주변 언덕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Dead Sea Scrolls, 기원전 250년-기원후 68년 사이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은 성서 고고학을 돕는 최고의 발견이었다. 성서 기록의 진위성에 대해 논하던 그 시기, 가장 오래된 성서 사본의 발견은 고고학이 성서 연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이라든가 정방형 발굴법, 그리고 과학적 기술의 도입을 통한 고고학의 발전은 신고고학이라는 용어로 대변되었고, 고고학적 요소들이 반드시 성서의 모든 사건에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부 학자들은 고고학적 발견들을 기반으로 하여 성서의 일부 에피소드들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알브라이트를 비롯한 이전의 학자들이 절대적으로 믿었던 가나안 정복 전쟁과 다윗의 통일왕국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고고학적 결과물들을 근거로 역사적이지 못하다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 문제는 여전히 도마 위에 올라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제 학자들은 적어도 더 이상 고고학으로 성서 속 사건들이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만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고고학을 통해 성서가 그리는 역사적 배경 속으로 들어가 당시 사람들의 의식주를 기반으로 고대의 문화, 관습, 종교에 대한 정보를 드러내고자 한다. 고대 문화와 역사적 배경으로 들어가 성서의 이야기를 재구성할 때, 보다 나은 이해와 해석을 동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구는 팔레스타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소위 ‘고대 근동’으로 분류되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까지의 지중해 지역, 즉 성서의 배경이 되는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므로 윌리암 디버(William Dever)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은 더 이상 ‘성서 고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성서의 배경이 되는 지역과 관련하여 ‘근동 고고학’ 혹은 ‘시리아-팔레스타인 고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후자의 용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보다 넓은 성서의 세계관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성서 한 권의 에피소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민족과 나라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했는가, 또한 어떤 문화적 관습과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이야기들이 완성되었는가를 재조명할 수 있게 된다. 더구나 신약과 달리 성서 이외의 문헌적 자료가 부족한 구약 에피소드들의 경우,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자료뿐만 아니라 주변 자료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이러한 자료들에 대한 연구로 인해 최근 고고학은 고대 사회의 문화적,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고, 주변 지역 역사와의 비교 및 고찰을 제시함으로써 구약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고고학적 자료들이 구약의 해석과 역사적 재구성에 도움을 준 사례로는 앞서 언급한 히스기야의 이야기가 있다.1 니느웨가 발견되었을 때 사람들은 산헤립의 벽 부조와 그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는 프리즘 모양의 토판 기둥에서 열왕기하 18-19장과 역대하 32장의 전쟁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프리즘에 의하면 산헤립은 북이스라엘을 비롯하여 남왕국 유다 지역까지 46개의 도시를 파괴했다. 열왕기하 18장 13-14절은 산헤립이 올라와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한 후 라기스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니느웨의 벽 부조에서 산헤립은 라기스를 점령하고 그 도시 앞에 앉아 조공을 받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서 고고학’을 주장했던 초기 고고학자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라기스를 발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산헤립에 의해 파괴된 라기스의 발견이야말로 성서의 역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학자들은 라기스가 제2의 행정도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고 큰 유적지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니느웨를 찾기 원했던 것처럼 라기스를 찾는 것은 하나의 큰 염원이었다.
라기스의 위치로 처음 알려진 곳은 텔 엘–헤시(Tell el–Hesi)였다. 이곳은 이집트 장군 파푸(Paapu)가 쐐기문자로 적어 보낸 토판이 발견된 곳이기 때문에 중요한 도시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 유적지는 제2의 행정도시가 되기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 또한 산헤립의 벽 부조에 묘사되어 있는, 대추야자나무와 포도나무가 가득한 풍요로운 지형과는 달랐다. 이 지역 외에도 여러 유적지들이 라기스의 후보로 발굴되었다. 알브라이트는 보다 큰 유적지인 텔 에드-두웨이르(Tel ed-Duweir)로 눈을 돌렸다. 후대의 발굴팀에 의해 이 지역에서 니느웨의 벽 부조에 묘사된 것처럼 경사진 비탈길로 이루어진 성문과 이중 성벽으로 요새화된 도시가 발견되었다. 산헤립의 프리즘과 벽 부조에 묘사된 공성퇴(적의 성문을 부수기 위해 고안된 공격용 무기–겔 4:2, 21:22)를 사용하기 위해 만든 인공 언덕이 라기스의 남서쪽 성벽에서 발견되었고, 격렬한 전투의 잔해들도 발견되었다. 산헤립의 기록들에는 성서 외의 문헌에서 처음으로 히스기야가 언급되어 있었다. 그렇게 히스기야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산헤립이 라기스를 점령한 역사적 배경과 히스기야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다. 기원전 8세기 고대 중동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는 앗수르였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유다의 아하스는 앗수르 왕에게 전적으로 복종했다. 이스라엘의 위협에 앗수르의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했다.(왕하 16장) 히스기야는 재위 초기만 해도 앗수르에게 충성을 바쳤으나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변심했다. 히스기야는 왜 산헤립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았을까?
이에 관한 대답은 성서가 아닌 앗수르의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기원전 705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의 왕 사르곤이 죽고 그의 아들 산헤립이 왕위를 계승했을 때, 속국들은 산헤립이 정세를 빠르게 장악할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에 관해 성서는 “그가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왕하 18:8)라고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앗수르의 기록에 의하면 이 정치적 불안의 시대에 히스기야는 소수 국가들과 반(反) 앗수르 동맹을 결성했다. 그는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블레셋 도시 아스글론과 에글론의 동맹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는 앗수르의 가장 골칫덩어리인 바빌론의 왕 브로닥 발라단과 친분도 쌓았다.(왕하 20장) 이사야는 반 앗수르 동맹을 절대적으로 반대했다.(사 30-31, 36:6-9) 이사야의 예언대로 이집트와 유다의 동맹국들은 앗수르에게 굴복당하고 말았다. 산헤립은 재빠르게 앗수르의 주권을 잡아 반 앗수르 동맹국들을 점령했다.
성서는 히스기야가 반 앗수르를 선포하고 예루살렘을 어떻게 재정비하였는지 설명하고 있는데(왕하 18장, 사 22장, 대하 32장),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이 역사적 위기를 재구성해 볼 수 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피난민들은 같은 민족을 찾아와 예루살렘에서 안식처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8세기 말 히스기야 시대에 예루살렘의 인구는 2만 5,000명으로 솔로몬 시대보다 5배나 더 많았다. 이들 중 대부분은 성벽 밖에 집을 지어 살았고, 히스기야는 그들을 앗수르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사야 22장 9-10절은 히스기야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을 보고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 역대하 32장 5절은 무너진 모든 성벽을 보수하여 다시 쌓고, 망대까지도 높이 쌓고 또 외성을 쌓고 다윗 성의 밀로를 견고하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1970년대에 고고학자 나하만 아비가드(Nahman Avigad)가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유대 종교인 구역을 발굴했을 때, 예루살렘 북쪽을 감싸며 서쪽으로 향한 것으로 보이는 7m 두께의 성벽 일부분과 적어도 8m 높이로 추정되는 망대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이것들이 히스기야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히스기야가 이렇게 두꺼운 성벽을 세워야 했던 이유는 앗수르의 공성퇴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함으로 해석된다.
전쟁의 위급함 속에서 히스기야는 예루살렘의 물이 적에게 보이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역대하 32장 3-4절과 이사야 22장 9, 11절은 히스기야가 성 밖 모든 물의 근원을 막고자 땅으로 흘러가는 시내를 막고, 아래 못의 물도 모으고,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고, 결국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였다고 말하고 있다.(왕하 20:20)
1838년 이스라엘을 탐사한 미국의 성서학자 에드워드 로빈슨(E. Robinson)은 예루살렘의 기혼 샘에서 시작되는 533m의 긴 터널을 지나면 다윗 성 끝 실로암 연못이라 불리는 장소에 다다를 수 있다고 기록했다. 최근 이 터널과 기혼 샘 주변을 재발굴한 로니 라이히(R. Reich)에 의하면 기원전 9-8세기경 기혼 샘에서 시작해 다윗 성의 경사면을 따라 설치되어 있던 수로가 있었는데 밖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수로는 적들에게 들킬 염려가 있었기에 사용을 금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히스기야는 지하에 터널을 뚫어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 터널이 건설된 시대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벽면에서 발견된 비문 덕분이었다. 터널을 만들기 위해 양쪽 끝에서 장인들이 굴을 파기 시작해서 1.5m 정도를 남겨두고 반대편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서로 만나게 되었는데, 이렇게 양쪽 굴이 만나 터널이 완성된 지점을 기념하여 비문을 새긴 것이었다. 이 비문은 기원전 8세기 히브리어 글자체로 판명되었다.
성서의 히스기야 시대는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재구성되어 보다 풍성한 스토리로 재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자료들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재구성에 있어 아직까지 부족한 측면이 많다. 신약 시대는 동전이라든가 성서 외의 문헌에서 밝혀지는 인물들의 이름이 있어서 보다 역사적 힘을 갖는 데 반해, 이스라엘의 구약 시대는 그렇지 못했다. 몇몇 성서 속의 이름들이 인장이라든가 불라(Bulla), 토기에 글을 쓴 오스트라콘(Ostracon) 등에서 발견된 바 있지만, 왕의 이름은 거의 발견된 적이 없었다.
2005-2009년 예루살렘 오펠에서 발견된 33개의 불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갈급증을 해소시켜주었다. 오펠 지역은 솔로몬의 궁전이 있었던 언덕 아래에서 다윗의 궁전으로 내려가는 왕실 구역으로 최근 에일랏 마잘(Eilat Mazar)의 지휘 아래 히브리대학교 예루살렘 고고학 연구소가 발굴하고 있었다. 불라는 고대 근동에서 문서를 작성하고 둘둘 말아 끈으로 묶어 고정한 후 봉인할 때 점토 덩어리를 얹어 인장을 찍은 흔적을 말한다. 각인된 불라는 서명과 문서의 신뢰성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오펠에서 발견된 불라들은 물에 씻어 건조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글자가 불분명하지 않은 것들도 있어 해독에는 시간이 걸렸다. 처음부터 분명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 중에는 예레미야 38장 1절에 등장하는 그다랴와 유갈이 있었고 이는 다른 성서의 인물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했다.
2015년, 보존 처리된 불라들의 글자가 선명하게 드러나면서 불라 하나가 그 기대를 채워주었다. 지름이 불과 1cm 밖에 안되는 이 불라에는 양쪽에 날개를 단 원형의 태양, 그리고 생명을 상징하는 이집트의 앙크(ankh) 기호가 있으며, 여기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에게 속함’이라는 히브리어 비문이 찍혀 있다. 과거에 출처가 불분명한 히스기야 불라가 예루살렘 유물 시장에서 거래되기도 하였지만, 이번에 오펠에서 발견된 것들은 출처가 분명한, 발굴 현장에서 나온 최초의 불라이기에 더욱 값진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함께 발견된 불라들 중에는 히스기야와 동시대에 살았던 선지자 이사야의 이름으로 읽히는 불라도 있다.2
히스기야 불라의 모습은 기원전 8-7세기 ‘라멜레크’(lmlk, 왕에게 속함)라 불리는 항아리들에 찍혀 있는 인장을 연상케한다. 이 항아리들은 기름이나 포도주 등을 저장했던 것들로 4개의 손잡이에 인장이 찍혀 있다. 인장의 가운데에는 고대 중동 지역 왕을 상징하는, 두 날개를 펴고 있는 원반이나 4개의 날개를 펴고 있는 풍뎅이가 있고, 위에는 ‘라멜레크’라고 새겨져 있다. 인장의 아래에는 4개의 다른 장소가 기록되어 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 항아리들은 히스기야가 앗수르와의 전쟁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군대를 위해 거두어들인 포도주나 올리브유와 같은 세금 혹은 조공품을 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자들은 앗수르가 히스기야의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했다고 본다. 히스기야가 막대한 조공을 바친 것은 사실이다.(왕하 18:14-16) 또한 산헤립의 프리즘에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만, 만약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점령했다면 그의 벽 부조를 장식한 것은 분명 예루살렘과의 전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라기스만을 자랑하고 있다. 이 고고학적 흔적은 성서의 내용과도 일치하고 있다.
성서만 가지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구성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역사를 증명하기 위해 고고학을 동원하여 무엇이든 연결시켜 고증하려는 태도는 올바르지 않다. 고고학은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의 자료를 함께 연구하여 일반 역사 안에서 성서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으로 들어가 그 맥락을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성서는 당대 사람들의 독특한 종교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고대 일반의 문화와 관습도 그리고 있다. 따라서 그 시대의 인물과 사건을 해석하고 재조명하는 데 있어 최근 고고학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다.


1 히스기야의 이야기와 관련된 고고학적 자료는 필자의 저서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CLC, 2016)에서 인용했다.
2 이사야의 이름 아래에 있는 히브리어 ‘איבנ’(선지자)의 마지막 철자 알레프(א)가 희미해서 ‘나비’라고 읽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임미영 | 이스라엘 바르일란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저서로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등이 있다. 현재 평촌이레교회 협동목사로 일하고 있으며, 안양대학교와 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9년 7월호(통권 7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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