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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9년 5월호)

 

  동서 독일의 갈등과 화해: 독일의 경험
  

본문

 

* 이 글은 한국YMCA전국연맹이 주최하고 문화관광체육부가 후원한 2018 세계평화대회(2018년 10월 30-31일, 인천 하버파크호텔)에서 발표된 것이다. 필자 게르하르트 라인은 독일방송국 ARD의 동독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취재했다. - 편집자 주

독일 민족은 1933년 처음으로 적에게 항복하였다. 노동자와 소부르주아, 과학자, 사업가, 예술가, 신학자, 온갖 교수들이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 운동과 그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에게 항복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적이었다. 오해하지 말라. 독일인 대부분은 히틀러를 좋아했다. 그것이 우리의 파국이었다. 히틀러는 천년을 지속할 제국을 약속하였다. 12년이 지나자 그 제국은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수백 만의 여성과 남성과 아이들이 죽었다. 1945년에는 두 번째 항복이 있었다. 독일인들은 러시아와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의 군인들에 의해 해방되었다. 1945년 5월 8일은 패배의 날이 아니었다. 내 마음 속에 그날은 해방의 날이었다. 내부의 적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 해방에 대하여 우리는 크나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스탈린, 루즈벨트, 처칠은 독일을 여러 영역으로 나누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영역은 합하여 독일연방공화국(FRG), 우리가 나중에 서독이라 부르는 지역이 되었다. 러시아 영역은 독일민주공화국(GDR), 즉 동독이 되었다. 독일은 분단되었다. 하나의 민족, 두 개의 나라였다. 세계대전의 결과였고, 여기에 대해서 독일은 원죄가 있다.
서방 연합군의 지배하에서 서독은 언론의 자유, 이동의 자유, 사업의 자유, 교육의 자유가 주어진 다소 자유로운 사회로 발전하였다. 서독은 전후 몇 년이 지나자 상대적으로 번성하였고 어느 정도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동독은 소비에트연방의 지배하에 사회적 의식이 있는 정부를 가졌지만, 언론의 자유도, 이동의 자유도, 사업의 자유도 없었다. 그 결과 수십 만, 어쩌면 백여 만 명의 여성과 남성과 아이들이 동독을 떠났다.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 숙련된 의사들, 공학자들, 노동자들이었다.
동독과 서독 사이의 국경은 대체로 열려 있었다. 그렇지만 심각한 인력 유출은 경제 구조 전체에 끔찍한 파탄을 초래하였다. 1961년 동독 정부는 베를린 장벽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철조망과 중무장한 경비군이 동독의 북쪽에서 남쪽까지, 발트해 아래로부터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지켰다.
동쪽과 서쪽에 뿌리를 둔 가족들이 갑자기 나뉘어졌다. 1963년 이래 서독인들(별명: 베시스, Wessis)은 동독인들(별명: 오시스, Ossis) 가족과 친구를 방문하고 며칠간 머물 수 있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였다. 보통 국경은 자기 국민을 지킨다. 하지만 이 국경에는 다른 기능이 있었다. 이것은 자기 국민, 즉 오시스를 가두었다.

철조망과 장벽은 28년간 존재하였다. 여전히 사람들은 동독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하였다. 1961년에서 1989년까지 천 명 이상의 여성과 남성과 아이들이 자기네 나라의 국경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1,600만 명의 사람들은 동독에서 자기네 삶을 영위하기 시작하였다. 동독에는 사회주의 체제의 지지자들이 있었는데, 처음 10년간 동독은 매우 스탈린주의적인 사회주의였다. 또한 거의 모든 사람을 통제하고 관찰하는 비밀 경찰이 있었다. 침묵하는 다수도 있었는데, 그들은 1953년 노동자들의 봉기를 러시아 탱크들이 잔인하게 진압하였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았고, 따라서 러시아 탱크는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경제 제도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였다. 실업은 없었다. 급여는 낮았다. 동독에서는 누구도 부자가 될 수 없었다. 권위주의적인 준 일당독재 국가에서 사람들은 살고 일하고, 결혼하고 이혼하였다. 일상적인 가정 생활이었다. 그들은 휴가 때 다른 나라에 갔지만,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나 불가리아와 같은 소비에트 통치하에 있는 다른 동유럽 국가들만 갈 수 있었다.
아주 유명한 독일의 사회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했다. “잘못된 사회에서 잘된 삶은 없다.” 그렇지만 동독인들은 좋은 시절도, 나쁜 시절도 겪었다. 친구와의 연대, 공통의 이해, 사랑과 실망도 겪었다. 잘못된 제도하에서도 잘된 삶은 있었다. 그리고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정치 제도에 만족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동독에 있었다.
서독은 다른 길을 갔다. 소위 자유세계의 일원이 되었다. 자유로운 노조와 독자적인 정당과 자유 선거가 있는 자본주의적 사회였다. 대기업은 정부에 크나큰 영향력을 끼쳤다. 나치 독일의 파탄 이후 서독의 발달은 일종의 기적으로 묘사된다. 서독 사람들은 세계를 탐험하였다. 그들은 매우 부유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들은 월드컵 축구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의 시작과 더불어 동독과 서독 모두에서 의미 있는 평화운동이 발발하였다. 핵 재무장은 세계를 위협하였고, 러시아의 재무장은 물론 미국의 재무장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 서독에서는 수십 만의 사람들이 본 거리로 나왔고, 시위를 하기가 어렵고 위험한 동독에서는 수백 명이 베를린 거리로 나왔다.
많은 경우 기독교인들이 시위를 시작하였다. 독일연방공화국(서독)에서는 개신교 교회가 이 운동의 핵심 중추였다. 교회 조세제도로 인하여 서독의 교회는 부유했고, 정치와 도덕 및 윤리 문제에 대한 공공 논쟁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서 개신교 교회는 가난하였다. 그들은 어떤 영향력도 없었다. 정치 제도는 무신론을 이상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렇지만 동독의 교회는 일종의 독립성을 유지한 유일한 공공 기관이었다. 따라서 교회에서, 교회의 집회소에서 반대자들, 젊은이들, 지성인들, 기타 시민사회의 일원들은 심지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함께 모일수 있었고, 모일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토의하였고, 기도하라는 강요도 받지 않았다.
독일은 분열되었고, 개신교 교회 역시도 통일된 조직을 공식적으로 나누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모두 에큐메니컬 운동의 일부였다. 서독의 부유한 교회들은 동독의 가난한 형제자매들을 재정적으로 도왔지만, 베시스 기독교도들은 오시스 기독교인들을 부러워하였다. 왜냐하면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WCC) 내에서 동독 기독교인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에큐메니컬 운동의 중추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매력적이었다. 그들이 사회주의적, 무신론주의적 환경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생존하는 방식은 아주 흥미로왔다. 그들의 신학자들은 매우 창조적이고 도전적이었다. 동독의 기독교인들에게 에큐메니컬 운동은 세계, 즉 새로운 지평을 향한 다리였다. 이 점에서는 조국 독일의 동서 갈등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1987년 무렵 소비에트의 새 지도자 미하엘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로 자신의 비전을 설명했다. 예상치 못한 새로운 개방과 투명함이었다. 소비에트연방의 위성국가들은 자국의 정치적 의제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지기 시작하였다. 헝가리는 서방에 국경을 개방하였다. 하룻밤 사이, 주로 젊은 층의 가족 수천 명이 동독에 있는 집을 떠나 헝가리로 몰려갔다. 그들은 서방에서 더 나은 삶을 기대하였다. 그들은 자기가 소유한 작은 차, 친구, 직장, 모든 것을 영원히 남겨 두고 떠났다. 사람들은 동독의 기차역에서 부다페스트와 프라하를 거쳐 서방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렸다. 그들은 외쳤다. “우리는 나가고 싶다. 우리는 나가고 싶다.” 그리고 물론 이에 대항하는 젊은 사람들의 시위도 있었다. 그들은 외쳤다. “우리는 남을 것이다. 우리는 남을 것이다.” 그들은 동독을 민주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변화시키는 일에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랐고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독일연방공화국에 대한 민주주의적인 대안 말이다. 혼란스러운 역사적 상황이었다. 이를 바라본 몇몇 관찰자들은 이 새로운 운동, 즉 헝가리를 거쳐 동독을 떠나는 운동을 ‘낙원으로의 도피’라고 묘사하였다. 이러한 묘사는 이상한 방식으로 동독 내에서 동독의 미래에 대한 논쟁에 불을 지폈다.
이러한 혼동 속에서 동독의 몇몇 신학자들, 몇몇 기독교 평화 조직, 몇몇 개신교 교회들은 동독의 종말을 가져온 평화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나는 이것을 ‘개신교 혁명’이라고 부른다. 시위자들이 가진 애초의 목표는 더 나은 동독이었다. 그렇지만 동독 거의 대부분의 도시에서 점점 더 많은 시위가 벌어지면서 독일의 통일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이것은 세계 무대에서의 결정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중 투표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민초들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동독 국가에 대항하는 1989년의 모든 시위는 개신교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종국에는 8만 명의 평화로운 시위자들이 라이프치히에 모였다. 그들은 외쳤다. “우리가 민중이다.” 소비에트연방은 개입하지 않았다. 동독 정부는 포기하였고, 붕괴하였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온통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동베를린에 사는 내 친한 친구의 여덟 살짜리 딸은 별로 축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아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금 전에 조국을 잃었어요.” 1990년 3월, 수백 만의 오시스는 1933년 이래 최초의 자유 선거를 실시하였다. 이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들은 개신교 혁명을 이끌었던 용감한 신민주주의 운동의 주창자들도 아니었고, 대안 생태적, 반핵 평화조직을 건설한 사람들도 아니었고, 동독에서 여성의 권리를 외친 조직도 아니었다. 선거의 승자는 서독의 크고 오래된 정당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식민주의자들처럼 동독 영토에 진격하여 모든 것을 차지하였다.
오시스 대부분은 분명히 ‘베시스는 돈과 경제와 모든 것에 대해 더 잘 알잖아.’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낙원으로의 도피’가 아니었고, 동베를린의 한 여류 기자가 쓴 것처럼 ‘낙원으로의 추방’이었다.
서독과 동독 사이에 더 이상 국경은 없었다. 동독 상황에 대해 보도하는 서독의 기자로서 나는 거의 매일 국경을 넘었다. 1982년부터 1990년 동독이 끝날 때까지 그랬다. 독일계 미국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폴 틸리히는–그는 내가 몰래 섬기는 영웅 가운데 하나이다–이렇게 말했다. “경계 지역이야말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가장 비옥한 땅이다.” 그 경계는 조국과 외국의 경계, 종교와 문화의 경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경계이다.
다시 독일은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28년이 지났다. 우리는 통일되었는가?
만일 당신이 오늘날 동독을 여행한다면, 온전한 거리를 볼 것이다. 사회주의 때문에 쇠락해진 구도시들은 재건되고 재생되어 아주 멋지게 변신하였다.
만일 당신이 독일의 현재 상황에 대한 정부의 최신 공식 보고서를 읽는다면, 긍정적인 설명을 보게 될 것이다. 동독의 삶의 기준은 서독의 삶의 기준에 가까워졌다. 비슷한 일에 대한 임금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서로 근접하고 있다. 동독의 실업률은 서독의 실업률보다 높다.
변화의 과정은 계속되고 있지만, 더 좋은 일자리, 급여가 더 높은 일자리는 여전히 독일 서부에 있다. 동부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연대세가 있지만, 내년이면 이 세금은 끝난다. 동독의 연금은 서독 수준을 맞추기 위해서는 여전히 애써야 한다.
과거에는 동독이 동유럽에서 가장 산업화된 나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1990년 통일 이후 경제적으로 부강한 서독의 회사들이 동독의 산업 구조를 장악하고 파괴하였다. 무너진 산업 구조를 다시 세우는 것이 오늘날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아주 큰 장애물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젊고 숙련된 사람들,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여전히 동쪽을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생활 수준, 더 나은 급여를 제공하는 일자리, 더 평안한 분위기는 매력적인 대안이다.
DAX-30 지수[시가 총액 기준 상위 30개 상장기업의 주가 지수]에 편입된 회사 가운데 독일 동부에 있는 회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수많은 대기업들 가운데 독일 동부에 본사가 있는 회사는 단 하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공식 자료는 무시하자. 적어도 이제 독일은 통일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독일은 여전히 분단되어 있다. 정신적인 면에서 말이다. 오시스 대 베시스, 베시스 대 오시스. 40년간의 동독 체제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은 감금과 같은 것만이 아니다. 국가가 풍기는 냄새, 친구와의 연대의 경험, 평등한 가난, 지하신문 내에서의 창조적 삶, 자신의 작품을 출판할 수 없었던 나라의 시인과 작가들. 당시 동독의 시인과 작가들은 입소문으로 유명해졌고, 그들의 시와 소설은 복사되어 비밀리에 배포되었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교회 내의 평화 모임에 모였다.
동독에 대한 향수를 말하거나 신화를 만드려는 경향은 심하게 비판받는다. 따지고 보면, 동독은 독재였고, 그렇지만 서독도 낙원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 같은 민족에게 ‘외국인’이라는 말을 들어봤던 사람들 사이에는 일종의 멜랑콜리가 있다. 통일 이후 대학, 회사, 국가 공무원 내 상위 직업의 약 80%는 베시스에게 돌아갔다. 엘리트는 교체되었다. 그리고 작가, 예술가들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가 됐다. 이는 오시스에게 상처와 실망과 우울, 화와 분노를 남겼다. 독일 동부의 한 정치 비평가가 말했듯이 과거 러시아 영역, 그 당시의 동독은 오늘날 “희생 영역”이다.
따라서 몇몇 오시스는 자신들의 정체성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동독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베시스로서 이 점을 아주 잘 이해한다.
그러나 정치적 발전에 대한 큰 실망, 특히 중앙정부의 난민 정책에 대한 우려로 말미암아 독일에 온 수많은 이민자들과 동부에 있는 사람들이 민주적 정당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우익과 극우 극단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간다. 이는 아주 위험하다. 우리는 이런 현상이 요즈음 아주 많은 나라에서 생기고 있음을 알고 있지만, 독일의 역사를 보면 새로운 민족주의, 새로운 인종주의, 새로운 반유대주의는 새롭고도 오래된 내부의 적의 징표이고 그늘이다.
따라서, 당연한 말이지만, 무엇이 진짜로 잘못되었고,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지 알기 위해 진실와 화해의 절차를 요구하는 독일 내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2019년 5월호(통권 7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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