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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 부활절, 부활신앙
특집 (2019년 4월호)

 

  한국교회에서의 부활절 예배
  

본문

 

초기 한국 기독교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부활절에 조선 땅을 밟은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의 사건일 것이다. 이 장면이 기억에 남는 이유 중 하나는 종종 인용되는 아펜젤러의 말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창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사슬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1

‘부활주일’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부활은 죽음을 극복한, 생명이 넘쳐나는 순간이다. 암울한 시기의 조선은 그 어느 때보다 빛과 자유가 필요했으며, 생명의 주님이 오셨다는 것은 희망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부활절 예배가 어떠한 의미로 어떻게 지켜져왔는지를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말씀 중심적 예배로

위에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언급했지만, 이들 정주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한국교회는 이미 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는 성서 번역을 통해서 시작되었고, 말씀을 읽고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고자 청하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뜨거운 열정으로 상징되는 1907년 대부흥운동도 말씀을 배우고 나누는 사경회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만큼 한국교회의 말씀 사랑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특징은 부활절 예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사순절부터 부활주일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의례를 갖고 있지는 않다. 종교개혁가들이 의례보다는 각 절기가 주는 의미에 더 집중한 것처럼, 한국교회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마음속에 새기고, 그분의 삶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부활절이라는 특별한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명령에 따르는 것에 더 집중하였다. 부활절을 말씀 중심적으로 지켰다는 것은 다음의 예배순서2에서도 잘 나타난다.

“부활날예배예식”, 「신학월보」(1901. 3.)『부활쥬일례ㆍ비』(1905)
1. 예배임사가 교인들을 서라 하고
   찬미 49 하라 함
2. 교인들이 서서 사도신경을 외옴
3. 예배임사가 기도하고 그 끝에 교인들이
   주의기도를 외옴
4. 성경‐시편 23편을 봄
5. 영광가‐찬미 176을 노래함
6. 성경‐누가복음 24장 1-35
7. 수전과 광고함
8. 찬미 84
9. 전도함‐전도사나 혹 속장이나 전도할 것이니
   제목은 예수 다시 살아나심이오 구절은
   누가복음 24장 56절
   1관은 예수 다시 살아나시니 마귀와 죽음과
   모든 원수를 이김이 분명함
   2관은 예수 다시 살아나시니 그 하신 말씀을
   응함이 분명함
   3관은 예수 다시 살아나시니 나도 죽어도
   다시 살줄 분명함
   4관은 예수 다시 살아나시니 온갖 교인들이
   맞당히 부활도리를 기쁘고 열심히 전파함
10. 찬미 55
11. 기도함
12. 축수함과 폐회함
1. 찬양‐“우리 주를 찬양함”
2. 기도‐예배를 위한 대표기도자의 기도
3. 찬양‐“기뻐하게 하라”
4. 성경‐누가복음 24장 1-11,
요한복음 20장 1-10
5. 문답‐20항목의 카테키즘 형식으로
구성됨
6. 찬양‐“오늘 주 부활함”
7. 목사강론‐설교(말씀 선포)
8. 기도‐강론한 목사
9. 감사한 마음으로 연보
10. 찬양‐“예수 이름 권세 치하”(송영)
11. 사복기도‐목사의 기도


각각은 감리교와 장로교의 예배 순서인데, 양쪽 모두 찬송, 설교, 기도가 예배의 주를 이루고 있다. 사실상 보통의 주일예배 형식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부활날예배예식”에는 전도 항목이 들어 있고, 『부활쥬일례ㆍ비』에는 부활절 문답이 들어가 있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생소한 부활절을 알리기 위해, 스크랜튼은 <부활도리가>를 지었고 전도를 위해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에 맞는 곡조는 따로 만들지 않고 <대한애국가> 곡조를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3 여기에서 보듯 부활절 예배의 큰 맥락은 말씀을 숙고하고 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형태는 계속되어서, 1920-30년대에는 청년들이 부활의 진리를 각 지역에 전파하고 특별강연회를 통해서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일을 하였다. 부활절 한미연합예배가 드려지던 1950년대에도 기도, 찬송, 설교가 중심이 되었는데, 대규모의 성가대가 조직되어 찬양 부분이 좀 더 강조되었다. 현재에도 예배의 형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교회에서는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리며,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메시지를 널리 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춘분을 지내고 첫 보름 후 주일을 부활절로

서양의 초대교회사에서 나타났던 부활주일 날짜에 대한 논쟁은 한국교회에서 특별히 나타나지 않았다. 선교사들에 의해서 부활절은 춘분을 지내고 첫 보름 후 주일로 지켜지는 요일 중심의 날짜로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문제는 매번 변하는 날짜를 어떻게 잘 지킬 수 있는가였고, 그 날짜 계산에 익숙해지는 일이었다. 1897년 이래로 계속해서 부활절 날짜를 잘 계산하여 지키자는 내용이 소개되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짜에 대한 혼란은 계속되어서, 1901년 「신학월보」에서는 ‘양력
9월 6일 첫째 주일’이 부활절이라고 오보를 싣고 그다음 호에는 정정보도를 내는 해프닝을 겪기도 하였다.5 1926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은 이 날짜에 대해서 다시 분명하게 소개하고 있다.

부활주일을 작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역서를 사용하는 것이 각각 같지 아니함이니 어떤 지방에서는 양력을 사용하고 어떤 지방에서는 음력을 사용하고 어떤 지방에서는 유대 성력을 사용함이라. …춘분이 유대 성력으로 1월 14일이나 그 전에 들면 14일을 지내는 첫 주일이 부활주일이며
1월 14일 후에 춘분이 들면 다음달 14일을 지내여 당하는 첫 주일이 부활주일이라. 그런고로 제일 일찍이 되면 양 3월 22일이 부활주일이며 가장 늦게 되면 양 4월 25일이 부활주일이오 평년에는 그 중간에 왕래하느니라. …유대성력을 알지 못하고 양력과 음력만 아는 자에게 부활주일을 찾는 방법은 아래와 같으니 춘분이 망월(望月)이나 그 전에 들면 그 망월 다음주일이 부활주일이오 춘분이 망월 후에 들면 다음달 망월을 지내여 첫째로 당하는 주일이 부활주일이라. 춘분이 항상 양 3월 21일이나 2일에 된즉 춘분날을 알고 망월을 알면 부활주일을 작정할 수 있나니라.6
오늘날에도 이러한 계산법으로 부활절이 계속해서 지켜지고 있는데, 다행히도 연초에 발행되는 달력 덕분에 혼동 없이 잘 지켜지고 있다.


부활절을 새벽연합예배 형태로

한국교회만의 독특한 의례를 꼽으라고 한다면 새벽예배를 들 수 있다. 한국교회에서는 성경공부 기간이나 중요한 교회 행사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새벽예배를 드렸다.7 예배 시간은 “새벽먼동틀 다섯시쯤”이었다.8 부활절 새벽에 예배를 드리는 관습이 형성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부활절 새벽예배는 ‘연합’이라는 특징이 결합되었다. 한국 선교는 다양한 교파에 의해서 출발했지만, 하나 된 교회로의 이상은 계속되어 왔다. 1905년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를 비롯하여, 문서, 교육 등에서의 연합활동은 꾸준히 이어졌다. 부활절 새벽예배는 이러한 연합정신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새벽은 정규 예배시간이 아니면서도, 한국인에게 예배를 드리기에 익숙하면서도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몇몇 교회가 연합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해방 이후에는 여러 교파가 참여하는 예배가 시작되었다.
제1회 부활절 연합예배는 1947년 4월 6일 조선신궁이 있던 서울 남산광장에서 새벽 6시에 행해졌고, 거의 20년 동안 이어졌다. 부활절 새벽연합예배는 한국적 예배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이는데, 대략 다음의 세 가지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교파에 상관없이 기독교인으로서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의미가 있다. 초기의 형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상동 달성회당에서는 예수 부활일을 예비하여 부활 전 주일부터 수난 전날까지 밤마다 모여 별 기도와 예수께서 그 동안에 하시던 일을 차례로 공부하고 수난일을 당하여 각 교우들이 상오 십점종에 일제히 모여 도배하고 성단 전후 좌우 벽상과 각 기둥들을 홍포장으로 꾸몄으며 성단 밋제는 각색 화초로 층층이 버렸는데 그 중에 요사이 열매 맺힌 실과 나무가 제일 귀하고 남회당 마잔편은 예수 부활 하셨네 일곱자를 국문 금자로 완연이 새겼으며 여회당 맞은편은 할렐루야 주찬송 일곱자를 역시 국문 금자로 완연히 새겨 붙였더라 부활일을 당하여 남녀노유 사백여명이 모여 기쁨으로 예배 했는데 로부인은 풍금을 타시고 쇄만의원은 나팔을 불고 남녀 교우들은 목소리로 찬미를 화답하니 참 쇄락한 정신이 완연이 천당에 안진 듯 하여 본처 목사와 함께 할렐루야 주찬송 노래를 왕왕이 부르는데 마디 마디 성신의 참 기쁨이 각인의 심장을 찌르는 듯 하고 또한 갑목사는 대한말을 아직 공부하지 못 하였는데 할렐루야 소리에 귀가 밝아 함께 웅성하니 참 기쁘더라 이날 남녀노유 합 이십인을 세례주고 또 아홉 사람을 입교 하는데 그 중에 한 16세된 처녀가 예수의 시험과 고난을 생각하여 사십여일을 스스로 하로에 일중만 하고 금식하였는데 얼굴이 더욱 화긔나고 조금도 초췌한 구석이 없으니 이 처녀는 참 성신을 힘입은 처녀요 이날에 평안함과 보호하심을 더욱 많이 받었을 것이며 이 처녀 마음 속에는 예수께서 참 래로 임하실 거니라.9


해방 이후에는 여러 교파가 참여하여, 각 교파의 목회자들이 예배 순서를 나누어 담당하고 신도들은 교파에 상관없이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둘째, 비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부활하심을 널리 알린다는 의미가 있다. 위에서도 부활절 예배 때 전도가 강조되었음을 볼 수 있었는데, 새벽연합예배는 전도 행위를 따로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리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경성 안에 있는 각 교회는 연합하여 부활주일 새벽에 예배할새 서부에서는 금화산꼭대기 동부에서는 락산꼭대기에 각각 수백명씩 모여 ‘예수 다시 사셨네’의 우렁찬 소리는 경성시내를 흔들고 하늘에 사무치었다.10

해방 이후에는 미군의 참여와 함께 군악대, 성가대 등이 동원되어 떠들썩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부활절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날임을 알리고, 이 날이 왜 특별히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키는 효과를 자아냈다.
셋째, 부조리한 사회에 저항한다는 의미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일제 시대의 부활절 선언과 유신체제 시기의 1973년 남산부활절 연합사건을 들 수 있다.

조선의 교회여, 조선의 교도여, 온 인류에게 승리의 소망을 알리우기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여 이날을 뜻있게 지키고 기쁨으로 지키고 성대히 지키고 이날을 외쳐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고 인류, 사회, 민족에게도 부활이 있음을 조선 사람에게 널리 힘써 알리우자11

위의 부활절 선언은 혹독한 추위의 겨울을 이기고 봄이 온 것처럼, 사망의 음험한 권세를 이기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암울한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던 그리스도인에게 다시 일어날 메시지와 힘을 주었다.
또한 1973년 남산부활절 연합사건은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전단지가 배포된 사건으로, 사실상 미수에 그친 일이었다. 그러나 박형규 목사 등이 육군보안사령부에 불려가면서 ‘내란 예비 음모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 일은 유신체제 이후의 군사정권에 저항한 첫 번째 사건이었고, 이후 한국교회 민주화운동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12 부활의 의미를 통해 저항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부활절 새벽연합예배은 20여 년 동안 유지되다가, 이후 한국교회 분열의 자취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오늘날 ‘연합예배’라는 명칭을 붙이고 드리는 예배들이 있으나 연합이라는 의미는 이미 퇴색한 상태이다.

나가며

가벼운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을까 한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서원보는 “여러 나라에서 한 이상한 풍속이 있는데 부활성일 알을 쓰는 풍속이 있다. 그 알은 새알과 닭알과 오리알과 다른 알을 채색으로 염색하며 사람들이 그 알을 서로 드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알을 지니며 어떤 사람들은 그 알을 먹으며 아이들은 알을 굴리며 알을 서로 두드리게 하고 노는지라 예전에 봄에 알을 쫓는 풍속 뜻은 자연히 다시 살고 초목이 나오는 표이며 지금 그리스도인 풍속은 부활과 영생의 표”라고 소개한다.13 또한 이승만은 “미국 백악관에서는 이날 오후에 대통령과 부인이 모든 어린아이들을 불러들여 부활일알(계란 등)을 굴리는 예식” 등이 있어서, 그들은 어려서부터 부활절 문화에 익숙하다고 말한다.14 또 1950년대에도 여전히 색다른 것을 소개하듯이, 서양 여러 나라에서 색칠한 달걀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고 알리고 있다.15
1970년대 이전까지 서민 가정에서 달걀을 먹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달걀이 비쌌기 때문이다. 즉 주일학교에서 재미있게 달걀에 색칠하며 나누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즘 흔하게 행해지는 이 나눔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부활절 달걀은 한때 나누고 싶어도 너무 귀해서 나눌 수 없는 것이었고, 한때는 부활절을 지키는 즐거움이었고, 계란이 너무 흔해진 시기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부활절은 어떠한 의미와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1 이만열 편, 『아펜젤러: 한국에 온 첫 선교사』(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270.
2 “부활날예배예식”, 「신학월보」 1권 4호(1901. 3): 184; 『부활쥬일례ㆍ비』(1905), 안수강, “『부활쥬일례ㆍ비』(1905)를 통해서 본 예전전통과 교훈 고찰”, 「한국교회사학회지」 50(2018): 150에서 재인용. 안수강은 『부활쥬일례ㆍ비』의 저자를 언더우드로 제시하고 있다.
3 “부활날예배예식”, 「신학월보」 1권 4호(1901. 3): 184; 스크랜튼, “부활도리가”, 「신학월보」 1권 4호(1901. 3): 186; 아펜젤러, “부활일을 성경에 말함”, 「신학월보」 2권 3호(1902. 3): 19-28.
4 “부ㆍ싱일 ㆍ히마다 다른 것”, 「죠선크리스도인회보」 1권 10호(1897. 4. 7): 46; “예수 부활하신 고담”, 「그리스도 신문」 2권 14호(1898. 4. 7).
5 “부활일 론리”, 「신학월보」 1권 4호(1901. 3): 182-186; “부활주일 경축”, 「신학월보」 1권 5호
(1901. 4): 191.
6 배위량, “부활주일 작정하는 법”, 「신학지남」 8권 2호(1926. 1): 153-154.
7 Harry A. Rhodes, ed.,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1884-1934(1934), 251-252.
8 “부활주일초천예배”, 「기독신보」 1928년 4월 4일.
9 “부활경축”,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8년 4월 13일.
10 “경성의 부활예배”, 「기독신보」 1931년 4월 8일.
11 “부활운동의 선언”, 「기독신보」 1928년 4월 1일.
12 김흥수, 『자유를 위한 투쟁: 김관석 목사 평전』(대한기독교서회, 2016), 136 이하.
13 서원보, “부활셩일례졔”, 「신학월보」(1902. 3): 15-18.
14 이승만, “부활”, 「기독신보」 1924년 5월 14일.
15 “부활절계란”, 「기독공보」 1953년 4월 6일


송정연 | 연세대학교에서 교회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으로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L. H. Underwood)의 선교사 정체성” 등이 있다. 현재 경민대학교 강사로 재직 중이다.

 
 
 

2019년 6월호(통권 7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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