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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9년 4월호)

 

  신약성서가 말하는 부활
  

본문

 

우리의 오감은 쉬이 피로해진다. 짧은 시간이라도 자극이 계속 전달되면 감각기관은 그 자극에 무뎌진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의 경우 그 단어가 가진 의미와 날카로움에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고 둔해지기 마련이다. 교회에서 흔히 말하는 사랑, 은혜, 구원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래서 때로는 익숙한 것을 의식적으로 낯설게 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부활’이라는 단어 혹은 개념 역시 매번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와야 한다. 예수의 부활이 지닌 강력한 충격파와 극도의 생경함을 다시금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부활을 말하는 본문을 톺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시작하기 전에 짚어둘 점이 있다. 신약학자 다수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신학자가 아니라 역사가라고 생각한다. 역사가로서 신약성서의 부활 관련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무척 어려운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우선 예수의 부활이 정확히 어떤 식으로 일어났고, 존재론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한 물음은 역사가가 다루는 영역 밖에 있다. 역사가는 시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현존하는 자료(사료)를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정합적으로 설명하고 해석하는 일을 한다. 따라서 소위 ‘초자연적 사건’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역사학자들의 연구 주제가 아니다.
하지만 예수의 부활 사건에 대해 역사학자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예 없지는 않다. 역사학에서 사용하는 방법론으로 보면, 정치범으로 처형된 예수를 버리고 도망친 그의 제자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모여 그들의 스승을 보았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이라고 부른 모종의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부활이 정확히 어떤 모습으로 일어났는지는 역사가가 탐구할 영역이 아니다. 역사가로서 신약학자는 ‘제자들이 부활이라고 해석한 모종의 사건’이 일어났다고 판단하든지, 아니면 좀 더 신중하게 “예수의 제자들이 그들의 스승이 다시 살아났다고 믿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데서 멈추어야 한다.1
이런 한계를 인식하더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 자료–신중하게 접근한다면 역사를 재구성하는 원천 자료로 정경 복음서들과 바울서신을 사용할 수 있다–를 이해하고 해석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본문이 던지는 역사적 문제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신약성서의 순서와는 달리 예수의 부활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서는 바울의 편지들이다. 학자들은 바울의 편지들이 대개 기원후 50년대에 작성되었다고 본다.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기원후 70년경에 기록되었고, 그 후에 마가복음을 주요 자료로 사용하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작성되었다. 요한복음은 마태나 누가복음이 저술될 시기 혹은 그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바울서신은 정경 복음서보다 더 오래된 기록물이다. 역사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바울서신은 예수의 부활 사건 이해를 위한 보다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바울서신 자체를 살펴보고 그 내용을 정경 복음서의 부활 보도와 비교해보자. 그런데 부활에 관한 바울서신과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역사비평적으로 분석하면 이내 매우 곤혹스럽고도 복잡한 문제에 직면한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의 부활 사건과 부활 목격 사건이 복음서와 상충하는 면이 적지 않을뿐더러, 복음서 사이에서도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지면이 제한되어 있으니 대표적인 예를 간단히 살펴보겠다.
고린도전서 15장 3-8절을 보면, 예수의 부활 현현이 몇 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특정 인물들에게 일어난 것으로 묘사됨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부활 현현의 순서, 그리고 여성 목격자에 대한 침묵이다.

3왜냐하면 내가 전해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혹은 가장 중요하게) 전해준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대로 우리 죄들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과 4그가 묻히셨으며, 성경대로 사흘 만에 일으켜지셨다는 것과 5게바에게, 다음에는 그 열둘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6그 뒤 그분은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중의 많은 수가 아직까지 남아 있지만 몇몇은 잠들었습니다. 7그 뒤 그분은 야고보에게, 그다음에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으며 8모든 이들 중 마지막으로, 사산된 것과 다름없는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이하 성서 구절은 필자가 그리스어 원문에서 직접 번역)


바울은 예수께서 맨 처음 베드로에게 나타나셨고, 다음으로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한다.(열둘이라는 숫자에 가룟 유다가 포함되었는지, 그를 대체한 맛디아가 포함된 것인지, 아니면 인원수와 상관없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다음으로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 그다음 야고보, 그다음 사도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참고로,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경험한 부활 현현은 신약 외경인 ‘히브리인들의 복음서’(The Gospel of the Hebrews)에 실려 있다. 이 복음서는 정경 복음서만큼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꽤 중요한 문서로 간주되었다. 유명한 교부 제롬(Jerome)의 기록에 의하면 이 복음서에 “주님께서 사제의 종에게 세마포로 만든 옷을 주신 뒤, 그분은 야고보에게 가셔서 그[야고보]에게 [자신을] 여셨다.”라는 구절이 있다.(De viris illustribus 2)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여성 목격자의 이름은 차치하고, 아예 여성 목격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에게 부활하신 예수가 ‘모든 이들 중 마지막으로’ 나타나셨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체험 이후로 어떠한 예수 부활 현현도 없었음을 암시적으로 내비친다.
고린도전서 15장으로부터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가 그를 따르던 이들에게 수차례 나타났으며, 이러한 현현이 꽤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백여 명의 형제들을 예수 처형 직후의 ‘예수 따름이들’(Jesus-followers)의 숫자라고 보기엔 너무 크고, 바울의 회심은 예수 처형 후 수년 뒤에 일어났다고 보기 때문이다. 바울의 기록이 복음서보다 더 오래되었기 때문에, 누가-행전에서 말하는 40일 동안의 예수 부활 현현을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기는 어렵다.(행 1:3)2
여성 목격자가 위의 리스트에서 누락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 여성의 증언을 무시하는 당대의 일반적인 관습 때문일 수도 있고, 바울 자신이 나중에 복음서에 실리게 된 전승을 몰랐을 가능성도 있으며, 어쩌면 초대교회에서 공식적인 목격자 리스트를 작성할 때 남성 지도자 사이의 헤게모니 싸움 중에 여성 목격자들을 의도적으로 삭제했을 수도 있다.
이번에는 정경 복음서를 살펴보자. 네 복음서 대조서를 펼쳐 보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부활 기사 사이에 세부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점들이 적지 않을뿐더러, 고린도전서의 부활 목격자 순서와도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우선 정경의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작성된 마가복음에는 부활 현현 이야기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원래 마가복음은 16장 8절에서 끝난다. “그리고 [여자들은] 밖으로 나와 무덤에서 도망쳤다. 왜냐하면 그들은 떨며 넋이 나갔던 것이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을 주요 자료로 사용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저자는 아무래도 이러한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 나름대로 얻은 구전전승 혹은 문서자료에 첨삭을 하여 서로 조금 다른 부활 현현 이야기를 보도한다. 요한복음을 쓴 저자도 그러하다.(요한복음 전승과 공관복음서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학계에서 논쟁 중이고 무척 복잡해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이 안치되는 상황을 묘의 맞은편에 앉아서 보았고, 안식일 후 주간 첫날 새벽 무덤에 가서 빈 무덤과 천사를 보고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다.
누가복음에서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를 따르던 몇몇 여성들이 빈 무덤 안에 있는 남자 둘을 만나 그들에게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열한 제자와 나머지 모든 이’에게 이 일을 알려 준다.(누가복음 24장 10절에는 이들의 이름이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다른 여성들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이 여성들이 부활한 예수를 목격했다고 보도하지는 않는다. 이 여성들은 예수가 생전에 하신 말씀을 기억해냈을 뿐이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전하는 이야기도 다르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돌이 치워진 것을 보고 베드로와 ‘예수가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고하자, 이 두 남자는 서로 경쟁하듯 무덤에 달려갔다. 그러나 정작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이다. 이후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던 제자들이 숨어 있던 곳의 문을 (기적적으로) 뚫고 들어오셔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
특히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부활 현현 이야기가 나온다. 유명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이다. 이 역시 해석하기 몹시 까다롭다. 제자들이 부활한 자신들의 스승을 아주 오랜 시간 알아보지 못하다가 그분이 빵을 떼어주신 후에야 알아보았으나 예수는 이내 사라졌다. 부활하신 예수가 어떤 모습이었기에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했는지 누가는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이와 다르게 누가복음 저자는 그가 저술한 사도행전에서 아나니아와 바울이 부활 예수의 ‘환상’[행 9:10에는 호라마(ὅραμα), 행 26:19에는 옵타시아(ὀπτασία)]을 보았다고 기술한다. 이 환상이 정확히 어떤 현상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나니아와 바울은 적어도 그들이 환상에서 ‘본’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임을 알아본 것으로 묘사된다.3 한편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빵과 생선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처럼 많은 부활 현현 기사에서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어느 장소에 몇 번 나타나셨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관해 일치된 보도가 없다.
이러한 차이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혹시 이 많은 불일치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는 아닐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잠깐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보는 것이 좋겠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다르게 전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예수가 성관계를 갖지 않은 여성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의 고갱이는 동일하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나오는 다양한 모티프와 등장인물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각각의 신학에 부합한다. 다시 말해 마태와 누가가 전하는 서로 다른 탄생 설화는 편집비평적 의미의 ‘편집적’ 요소라고 설명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부활 현현 이야기에서 여러 불일치 가운데도 도도히 남아 있는 전승의 핵이 무엇인가에 집중해야 한다.
정경 안의 네 복음서 모두 비어 있는 무덤을 증언한다. 여성들이 빈 무덤을 먼저 목격했다는 점도 괄목할 만한 공통점이다. 누구에게 먼저 부활 예수께서 자신을 보이셨는가에 대한 보도는 아마도 다양한 예수 따름이 무리들이 간직한 각기 다른 전승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고, 여러 예수 추종자 집단 사이의 권위를 반영한 산물일 가능성도 있다. 즉, 부활의 예수를 목격한 경험 자체가 원시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들 중 특정인에게 권위를 부여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목격과 해석은 사실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다양한 목격자들의 진술 사이에 차이점이 생기면서 미세한 굴절이 계속 일어나지만, 역으로 이러한 다양한 전승의 가지들을 되짚어가다 보면 하나의 사건으로 수렴된다.4 예수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무덤이 며칠 지나지 않아 비어 있는 것이 예수의 여성 제자들에게 목도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정경의 복음서들은 빈 무덤 안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CCTV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부활하신 예수의 존재 양식이 어떠한 것인지도 일관되게 진술하지 않는다. (proto-)가현설을 반박하기 위해 예수의 육체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가 처형당할 때까지의 존재 양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빼놓지 않지만 말이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부활절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더 알고 싶어 했다. 그래서 ‘베드로 복음서’처럼 무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서술한 문서도 등장했다.

하늘이 열리고 두 사람이 찬란한 광채를 내며 그곳에서 내려와 무덤으로 다가와… [무덤] 입구에 놓여 있던 돌이 저절로 굴러 한쪽으로 비켜서고 무덤이 열리자 두 젊은이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떠받치고 십자가가 그들 뒤를 따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머리는 하늘까지 닿아 있고 그들이 손으로 모시고 가던 분의 머리는 하늘 위로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소리가] 말하였다. “너는 잠들어 있는 이들에게 말씀을 선포했느냐?” 그러자 십자가에서 “예”라는 응답이 들려왔다.5

베드로 복음서 외에도 ‘니고데모 복음’이나 ‘바돌로매 복음’처럼 아리마대 요셉에 대한 자세한 묘사나 예수가 지옥에 내려간 일, 혹은 바돌로매 자신이 부활한 예수를 본 이야기 등 정경의 복음서들이 말하지 않는 부분을 지어내고 재창작한 문헌들이 후대에 속속 등장했다. 인간이 지닌 호기심의 발현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추동력이겠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정경의 복음서들과 바울서신이 예수의 부활 사건을 꽤나 듬성듬성하게 보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바울이나 복음서 저자들이 공들이고 애써가며 예수의 부활을 묘사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어떤 역사가에게는 바울서신과 정경 복음서의 부활 보도를 더 신뢰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현존하는 문서 자료를 간략히 분석해보았다. 그렇다면 신약성서와 초기 기독교 문헌에 나타난 예수의 부활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까?

부활 사건의 낯섦을 되살리기

우선 신약성서의 부활 메시지에서 우리가 종종 놓치는 측면을 짚어보자.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부활과 소망에 대한 목사님의 말씀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소망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다. 부활은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이다.(예를 들어 로마서 4장) 초기 기독교인들이 인간의 궁극적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을 ‘잠’이라고 가볍게 표현할 수 있었던 담대함은 바로 하나님의 압도적인 힘에 근거를 둔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력을 신뢰하며 죽음을 그저 지나갈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대담하게 선언했다.6 예수의 부활은 1세기의 예수 숭배자가 가지는 소망이 단단한 기반에 서 있음을 보증했다.(고전 15:18-19, 살전 4:13, 클레멘트 1서 24-26)
예수의 부활 사건이 당대에 던진 커다란 충격파가 여전히 느껴지지 않는가? 이렇게 말을 바꿔 표현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부활 사건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고, 모든 이의 상상력과 세계관을 산산조각 낸 사건이라고! 고린도전서 6장 14절에서 볼 수 있듯이 부활은 하나님이 지닌 폭발적 힘의 구현이다. 이러한 힘을 그리스어로 ‘뒤나미스’(δύναμις)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다이너마이트의 어원이다. 부활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다이너마이트 같이 강력한, 하나님의 폭발적 힘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부활 사건을 다시 음미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폭발적 힘에 기반을 둔 부활은 새로운 창조와 거의 동의어라고 보아도 된다.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가 사람들의 실재관을 붕괴시키면서 이 세상에 돌입한 사건,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부활은 죽음을 삼켜버리는 하나님의 힘이 명시적으로 나타난 사건이다.(고후 5:4,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되다.”) 나와 나의 친지, 친구, 가족 사이의 관계를 고통스럽게 찢어놓는 죽음을 굴복시킨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 사건이다. 그 무시무시한 죽음을 꿀떡 삼켜버리는 부활의 어마어마한 생명력은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는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넉넉한 승리를 보장한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단순히 장례식장에서 전해지는 흔한 설교보다 훨씬 더 크고 단단하다.
시공간에 일어난 충격적 사건인 빈 채로 발견된 예수의 무덤, 그리고 시공간의 모든 물리법칙을 무너뜨리는 특이점으로 이 세상에 돌입한 하나님의 압도적 힘이 고스란히 드러난 예수의 부활 사건. 이 두 가지를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실재관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부활절을 맞이할 때마다 마가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나타난 ‘정신이 아득해지고 입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두려워 떠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될 것이다.

1 E. P. Sanders, The Historical Figure of Jesus(London: Penguin Books, 1993), 280.
2 제임스 던, 김경민 옮김・해설, 『부활: 왜 예수의 부활을 믿는가?』(비아, 2018), 32, 58.
3 제임스 던, 위의 책, 62-63.
4 앤서니 르 돈, 김지호 옮김, 『역사적 예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도서출판100, 2018).
5 송혜경 역주, 『신약 외경 상권: 복음서』(한님성서연구소, 2009), 271-273.
6 Michael Wolter, Paulus: Ein Grundriss seiner Theologie(Neukirchen-Vluyn: Neukirchener Verlag, 2011), 208 n.73.


김선용 | 시카고대학 신학부에서 신약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약성서를 포함한 초기 기독교 문헌을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그리스-로마 시대의 종교, 그리고 고전 수사학의 맥락에서 연구하고 있다. 현재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 4월호(통권 7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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