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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집 (2019년 3월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무엇을 기억하고 기념할 것인가
  

본문

 

우리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란 무엇인가

2019년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대내외에 공표한 지 100년이 되고, ‘제왕의 나라’(帝國)에서 ‘국민의 나라’(民國)로 대전환을 이룬 지 100년이 된다는 뜻이다. 100년 전 이때 우리가 살고 있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탄생하고,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민주의 나라’가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민국의 성립은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고조선 이래 대한제국까지 우리나라는 군주(제왕)가 주권을 오로지하는 전제군주국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성립으로 주권은 우리 국민 모두가 갖고, 주권을 가진 국민 모두가 화합하여 정부를 세워 나라를 운영하는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근대사는 독립운동사와 같이 시작하여 발전하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민주주의의 역사는 독립운동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독립운동 시기 우리 민족은 자주독립의 꿈과 국민주권의 이상을 담아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민은 노예 상태에 빠져 있고, 주권은 빼앗기고, 영토는 강점당한 그야말로 척박한 땅 위에 ‘국민국가’의 희망을 심은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이것을 근대국가의 조건을 따져 국민, 주권, 영토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므로 근대국가가 아니라고, 그래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이 아니라 1948년이라고 주장한다면 자기비하도 그런 자기비하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임시정부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3・1독립선언과 열화 같은 만세 시위운동의 결실이란 발생가치를 가진다. 이것은 우리 민족 스스로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당시 2,000만 동포 가운데 적어도 200만 동포가 목숨을 건 독립만세 시위운동으로 분출된 참여 의사를 결집하여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묵시적 동조자까지 포함한다면 그야말로 일부 친일파를 제외한 온 겨레의 전폭적인 지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한 것이다.
이렇게 출범한 임시정부는 국내외 동포들을 아우르며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보장받기 위한 외교활동, 무장투쟁, 민족교육, 의열투쟁 등을 전개하였다. 더욱이 임시정부는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일제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과 합세하여 싸웠다. 독립운동 역정에서 임시정부가 이룬 역할가치 또한 만만하지 않다는 뜻이다.
결국 8・15광복은 연합국 승전의 부산물도, 하늘에서 떨어진 떡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손님도 아니다. 우리 민족이 피땀으로 이룬 성취이자 결과이고, 그 중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되었는가

임시정부는 3・1독립운동으로 성립되었고, 3・1독립운동은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그 불멸의 빛을 발하였다. 3・1독립운동 시기, 4개 지역에서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만주 길림에서의 대한독립선언, 일본 도쿄에서의 2・8독립선언, 서울에서의 3・1독립선언, 그리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대한국민의회 독립선언이 그것이다. 이들 독립선언의 공통 화두는 “우리 대한의 자주독립과 대한 국민의 자주” 또는 “우리 조선의 독립과 조선인의 자주”이다.
만주 길림에서 김교헌 등 독립운동가 39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은,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하였다. 또한 재일 한국유학생 대표인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발표된 2・8독립선언은, “이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세계 만국의 앞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3・1독립선언은 잘 알려진 대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다. 마지막으로 재러동포의 대표들로 구성된 대한국민의회도, “우리 이천만 동포들을 대표하여 천하만국에 독립을 선언”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 중 하나는 이들 독립선언에 보이는 “육탄 혈전”(대한독립선언) 또는 “영원 혈전”(2・8독립선언) 또는 “영구의 혈전”(대한국민의회 독립선언), 그리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3・1독립선언)는 동의어이다. 자주독립을 달성할 때까지 우리 대한의 국민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영원히 ‘피의 투쟁’을 멈추지 않겠다는 뜻이다.
더 중요한 것은 독립과 자주를 말로만이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표출한 사실이다. 국내 동포는 물론 국외 동포까지 독립선언에 참여한 것이다. 국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와 미주, 그리고 일본 도쿄와 오사카까지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운동 시기 전국 각지에서 연인원 202만 3,000여 명의 동포들이 1,542회의 독립선언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우리 민족 대다수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주를 원했으니, 그 뜻을 결집할 나라와 정부가 필요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세운 나라와 정부가 절실했던 것이다. 3・1독립운동 현장의 모습은 정형화된 틀이 있었다. 우선 사람들을 공공장소, 즉 장터에 모았다. 여기서 “대한의 독립과 대한인의 자주”를 선언한 뒤, 시위 군중들은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인 면사무소나 헌병경찰주재소로 몰려갔다. 이제 우리 대한이 독립했으니, 일본제국주의는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3・1독립운동은 국제사회에 독립을 구걸하거나 청원한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대한의 독립과 대한인의 자주를 선언한 것이다. 그러니 나라와 정부를 세우는 일도 우리 스스로 해야 했다. 시급히 해야 할 일도 있었다. 바로 독립을 위해 ‘영원 혈전’하는 일이고, 이를 위해 우리 민족의 대표기관과 우리 국민의 지도기관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3・1독립운동 시기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그 가운데 3곳에서 절차적 정당성과 실체를 가진 임시정부가 성립하였다. 하나는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성립한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이다. 이른바 ‘러령정부’로 대한국민의회가 독립을 선언하고 곧이어 3월 21일 대통령 손병희, 부통령 박영효,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군무총장 이동휘 등을 각원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선포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국내에서 4월 초 홍진과 이규갑과 한남수 등이 인천 만국공원에 모여 13도 대표와 종교계 대표로 민족대표를 선임하여 조직한 임시정부이다. 세칭 ‘한성정부’로 집정관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노동국총판 안창호 등을 각원으로 하였다. 그리고 4월 23일 보신각에서 국민대회를 통해 민족대표와 정부 각원을 추인하여 대내외에 선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국민대회를 열지 못하고 취지문과 선포문만 배포하는 데 그쳤다.
또 하나는 4월 11일 상해에서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 곧 ‘상해정부’로 국회인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여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군무총장 이동휘 등을 각원으로 선출하여 성립하였다.
이들 3곳의 임시정부는 각기 절차적 정당성을 가졌다. 러령정부는 만주와 러령 동포 대표로 대한국민의회를 구성하여 수립된 것이고, 한성정부는 국내에서 전국 13도 대표를 선발하여 수립된 것이며, 상해정부는 각 도 대표와 재외동포 대표로 임시의정원 의원을 구성하여 수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임시정부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불거져 나왔다. 러령정부의 경우 의회는 활동하였지만, 정부가 운영되지 않았다. 정부수반이 피체되거나 국내 혹은 미주에 있던 탓이다. 한성정부는 의회와 정부 모두 활동하지 못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때문이었다. 상해정부만 의회와 정부가 작동하였으나, 이 또한 불완전하였다. 정부 수반인 국무총리 이승만을 비롯하여 각료 태반이 부임하지 않은 탓이다. 내무총장 안창호가 국무총리를 대리하며 정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여러 곳에 성립한 임시정부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명실상부한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지도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안창호가 나섰다.
안창호는 러령 대한국민의회에 사람을 보내 의회 통합을 꾀하고, 미주의 이승만에게 연락하여 상해로 부임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아니라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혹은 이를 대통령으로 바꿔 사무실을 내고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미 자신을 대통령으로 각국에 통보했으니, 정부 형태를 대통령제로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안창호는 이승만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대한국민의회와 권력을 나눌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그것은 바로 정부는 한성정부안을 따르고, 의회는 상해 임시의정원과 러령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명분과 실질을 아우르는 방안이었다.
재외동포 사이에는 국내를 존중해야 한다는 존내(尊內)주의가 있었다. 비록 한성정부는 실체는 미약하지만 국내 동포들의 손으로 만든 정부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각료는 한성정부안을 채택하여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과 정통성을 확보한 것이다. 의회, 즉 임시의정원에는 대한국민의회 대표를 일부 수용하여 실리를 주었다. 이렇게 해서 정부 형태를 국무총리제에서 대통령제로 바꾸는 헌법 개정이 통합 임시의정원에서 이루어졌으며,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한 한성정부의 각원을 그대로 승인하여 1919년 9월 11일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하였다.
이렇게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27년 동안 대한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대한 국민의 지도기관으로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1919년 이후 상해시기와 1932년 이후 장정(이동)시기, 그리고 1940년 이후 중경시기에 이르기까지 민족 독립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떤 활동을 하였는가

영토도 없고, 국민도 국외 동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부였지만, 임시정부는 국내 동포에 대한 통치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수립 직후부터 국내 행정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이는 초대 내무총장으로 국무총리를 대리하던 안창호에 의해 이루어졌다. 안창호는 국내 지방 행정과 정보의 연결망으로 연통부와 교통국을 설치하였다. 내무부 산하 조직으로 설치된 연통부는 국내에 통치 기반을 확보하고, 지방 행정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교통부 산하 조직으로 설치된 교통국은 만주와 국내 등 각 지방을 잇는 통신 연락망이었다.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전달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국내 행정 장악과 연결망 확보를 목적으로 삼은 연통부와 교통국은 임시정부 인력과 재정의 주요한 공급선이었다. 국내에서도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많은 비밀단체가 조직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대한독립애국단, 조선민족대동단, 의용단 등이 있었다.
임시정부는 대외 외교활동에 역점을 두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것을 마무리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강화회의를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임시정부의 활동에 앞서 1918년 11월에 조직된 신한청년당은 1919년 2월 초 김규식을 파리로 보내 국제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펴나갔다. 두 달 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규식은 임시정부의 대표로 추인되어 파리대표부를 설치하고, 전권대사로 활약하였다.
임시정부의 외교 대상으로는 중국 정부가 가장 중요했다. 중국 정부의 양해와 협조를 얻지 않고는 활동할 수 없는 ‘셋방살이’ 신세였기 때문이다. 손문(孫文)이 광동에서 호법정부를 수립하자, 1921년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이 광동으로 손문을 방문하였다. 여기서 신규식은 국빈 예우를 받으며 손문으로부터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중국이 국민혁명의 와중에 있었던 관계로 그 성과를 지속시켜 나갈 수는 없었다. 결국 국민당정부 수립 이후에도 일본의 견제에 쫓긴 중국 정부의 소극적인 정책으로 양국 정부는 협조체제를 마련하지 못하다가, 1932년에서야 한인애국단의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계기로 긴밀한 협조관계를 구축하고 항일 연대투쟁을 벌였다.
미국에 대해서는 상당한 기대를 갖고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임시정부는 구미위원부와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여 이승만을 중심으로 미국 의회와 정계에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이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카이로선언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일조하였다. 한편 러시아에 대한 외교는 임시정부 수립 초기 국무총리 이동휘가 레닌(Lenin)에게 경제적 지원을 요청하여 200만 루블의 자금을 지원받았으나 이후 공식적인 관계를 지속하지는 못했다.
임시정부의 가장 큰 외교 업적은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일제 패망 이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은 것이었다. 김구 주석과 외교부장 조소앙의 노력으로 카이로 영수회담에 참석하는 중국 대표 장개석의 동의를 받고, 또 장개석의 열성적인 지원으로 미국 대표 루즈벨트와 영국 대표 처칠의 양해 아래 얻어진 성과였다. 비록 ‘적절한 절차’(in due course)라는 경과 조치를 두고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 식민지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을 보장받은 외교적 성과를 거둔 것이다.
물론 임시정부가 외교활동에만 치중한 것은 아니었다. 1919년 말부터 임시정부는 군사활동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해나갔다. 1919년 말 상해에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고 군사간부 양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육군무관학교는 1920년에 1기 19명과 2기생 24명을 졸업시킨 뒤 재정적 어려움으로 폐교되었다. 미주에서는 군무총장이던 노백린이 재미동포 자산가 김종림의 지원으로 1920년 2월 샌프란시스코 윌로우스에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다. 비행사를 양성하여 공군을 창설하려는 시도였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삼아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들과 연계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고자 애썼다. 그 결과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북간도의 북로군정서가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 군정기관으로 편제되었다. 사실 독립군 전쟁사에 빛나는 청산리대첩에도 임시정부의 군사적 노력이 스며 있는 것이다. 1920년대 중반 만주에서 정의부・신민부・참의부가 군정기관으로 정립한 삼부시기에도, 참의부는 임시정부 군무부 직할 독립군 부대로 활약하였다.
1940년 9월 임시정부는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임시정부는 중경에 도착하기 약 1년 전인 1939년 11월 서안으로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여 병력을 모집하는 한편, 군대 조직에 대한 양해와 재정지원을 약속받기 위해 중국 정부와 교섭하였다. 그 결과 중경에 도착한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설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정신적으로는 대한제국의 국군을, 인적으로는 독립군을 계승한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것이다.
한국광복군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공동작전을 수행하였다. 중국군의 대일 항전을 지원하고,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공동작전을 폈다. 또한 미국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과 합작하여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미 전략첩보국과 합동으로 공작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광복군을 잠수함이나 항공기로 국내에 투입시키고자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을 계획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가운데 특이한 점은 의열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의열투쟁은 민족 독립과 조국 광복을 위해 선택하는 최후의 투쟁수단이다. 살신성인의 자세로 침략세력에 대항하여 민족의 독립과 인류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정의의 길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총괄 지도기관으로 임시정부의 위상이 급격히 쇠락하였다. 특히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의 발생과 이를 이용한 일제의 이간책, 곧 이어 터진 일제의 만주 침략과 그에 부화뇌동한 친일파의 발호 등에 따라 한중 두 나라 국민의 갈등과 대립이 극에 달하였다. 일제의 침략을 두 나라 국민이 연대하여 막아내도 쉽지 않은 일인데, 적전분열 양상을 보인 것이다.
이렇게 되자 임시정부는 한중 양민의 갈등을 일거에 해소하고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특무공작을 계획하고, 그 임무를 김구에게 맡겼다. 그래서 김구는 임시정부 특무조직으로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특공작전을 펼쳤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일왕 폭살 기도 의거,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가 대표적이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는 상해사변으로 상해를 점령한 일본군의 전승기념식이자 일왕의 천장절 기념식장을 물통폭탄으로 날려버린 임시정부 최고의 의열투쟁이었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 결과, 임시정부는 오랜 침체기를 벗어나 점차 독립운동 지도기관이자 민족 대표기관의 위상을 되찾게 되었다. 중국 국민들의 오해도 풀려 한중 양민이 항일 연대투쟁을 구축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나아가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재차 각인시키고, 국내외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조시켜 독립운동이 아연 활기를 띠게 만들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첫째,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국가와 정부를 거부하고 한국인 스스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임시정부’를 세웠다는 사실이다. 이는 민족혁명과 민주혁명을 지향한 3・1독립운동의 정신을 구현하였다.
둘째, 민주주의의 역사를 처음으로 열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이는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정체이자 국체이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1919년 4월 10일 열린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제정 선포되었다. 여기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제’를 채택함으로써, 반만년 지속된 군주전제 국가가 사라지고 민주공화제 국가가 새롭게 성립하였다. 이로써 ‘제국’에서 ‘민국’으로, 봉건국가의 ‘신민’(臣民)에서 근대국가의 ‘국민’으로, 나아가 무권리의 ‘백성’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으로 거듭나는 민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셋째,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꿈과 희망을 주었다는 점이다. 우리 민족이 꿈과 희망조차 잃어버린 고난의 시기가 일제강점기 아닌가. 그런 엄혹한 시기에 우리 민족에게 위안이 되고 등불이 되어 민족독립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게 했던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존재였다. 그래서 저명한 여성독립운동가 김마리아도 상해 국민대표회의 석상에서 임시정부의 존재가치를 목청 높여 이야기하며, 국내에 들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팔지 않으면 밥 한 끼도 얻어먹지 못한다고 언급했다. 일제 말기 학병으로 끌려간 수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죽기 살기로 탈출해 찾아간 곳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사실도 그 존재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넷째, 현재 대한민국의 뿌리이자 연원이라는 점이다. 1948년 8월 15일 정식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호, 연호, 헌법을 계승하여 재건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와 광복군 지도자들은 정부와 국군 성립에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뿌리이자 기원이 된 것이다. 헌법 전문에 새겨진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는 생생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김용달 | 국민대학교에서 한국독립운동사를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 겸임교수,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한국독립운동의 인물과 노선』, 『일제의 농업정책과 조선농회』, 『살신성인의 길을 간 의열투쟁가 김지섭』 등이 있다. 현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도산학회 운영위원, 문화재청 근대문화재분과 전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 6월호(통권 7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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