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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집 (2019년 3월호)

 

  상해 임시정부 수립과 기독교 민족운동가들
  

본문

 

들어가는 말

20세기에 나타난 한국의 ‘민족주의’ 혹은 ‘민족주의 운동’은 보편성을 지닌 ‘종교’와 특수성을 지닌 ‘민족주의’가 결합되어 더욱더 심화되었다. 일제강점기 민족지사들과 지식인들은 교회에 들어와 기독교 신앙을 통한 국권의 회복과 나라의 독립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른바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이 한국의 민족운동사에 전개된 것이다.
유동식에 따르면, 한국의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은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취했던 것으로 민족 문제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교회와 정치를 엄격히 분리하자는 입장이다. 둘째, 안창호나 김규식, 차리석처럼 기독교 정신을 중요시하지만, 교회와 관계없이 민족의 독립과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유형이다. 셋째, 이승만처럼 기독교를 통한 서구 제국과의 교류, 교회나 학교 조직의 힘을 민족독립운동의 중요한 수단으로 보는 입장이다. 넷째, 윤치호처럼 민족운동과 교회운동을 하나로 합친 입장이거나 그 중간에 선 입장이다. 다섯째, 손정도, 현순, 이필주처럼 교회 안에서의 민족운동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즉 전인적인 인간 구원을 향한 선교의 일환으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고 독립을 이루려는 민족운동이다.1 이 밖에도 초기에 기독교인으로 활동하다가 사회주의자로 전향한 인물인 여운형과 이동휘, 그리고 대종교로 전향한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등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 역사학계는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수많은 자료와 논문, 연구서를 내놓았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는 기독교가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한 역사적 사실을 소홀히 여기어 왔다. 이에 이 글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어떻게 활동하였고,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기독교 민족주의’ 시각에서 밝히고자 한다. 글의 범위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중국 관내에 가장 대표성을 띤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운형, 현순, 손정도 등을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시기적으로는 1919년 3·1운동 직전부터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4월 11일까지로 하였다.

3·1운동과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활동

1) 중국 관내 신한청년당과 여운형의 3·1독립운동 추동
신한청년당은 중국 상해에서 활동하던 여운형를 중심으로 장덕수, 김철, 선우혁, 한진교, 조동우 등이 독립방략을 논의하기 위해 1918년 8월 20일 조직하였다. 신한청년당이 창당된 직후, 미국 윌슨 대통령은 찰스 크레인을 중국에 특사로 파견하여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1919년 1월)에 중국이 대표를 파견하도록 요청하였다. 이때 상해 지역의 범태평양회의는 특사를 위한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개최하였고, 여운형도 신한청년당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크레인은 파리강화회의에서 피압박 민족의 의견이 크게 존중되어 처리될 것이라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강연을 들은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가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크레인에게 한국대표 파견 가능성을 문의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2 이에 여운형과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 파견과 독립청원서의 발송을 결정하고, 이 사실을 국내외 민족운동가들에게 알리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여운형은 장덕수와 함께 독립청원서 2통을 작성하여 1통은 크레인을 통해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1통은 상해에서 발간되던 월간 잡지 「밀라드 리뷰」(Millad Review)의 사장 밀라드에게 보내 파리강화회의 의장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신한청년당과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한국대표로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선발하여, 1919년 2월 1일 상해를 떠나 파리로 출발하게 하였다.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를 파견한 이 사건은 그 후 국내에서 전개된 3·1운동에 중대한 영향과 의미를 끼쳤다.3 특히 신한청년당은 국내외에 당원들을 파견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를 파송한 사실을 알리고, 3·1운동을 추동하였다. 서북 지역에서는 선우혁이 이승훈, 길선주, 양전백 등 기독교 지도자들을, 서울 지역에서는 김철과 서병호가 천도교측 지도자인 손병희 등을 만나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참석 경비조달 문제와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협의하였다. 이 밖에도 대구에는 김순애, 호남에는 백남규가 파견되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논의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장덕수는 일본에 가서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고취시키고, 그 후 이광수가 파견되어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이처럼 신한청년당과 대표 여운형은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국내 3·1만세운동에 직접적이고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내외에 밀사를 파견한 여운형은 1919년 3월 초까지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의 중심지인 만주와 노령을 방문하여 독립운동을 고취시켰다. 그는 길림 장춘현에서 여조현, 여준, 노령의 니콜리스크에서 박은식, 이동녕, 문창범, 조완구, 원세훈 이승복 형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채성하, 강우규, 이발(이동휘 부친), 김치보, 정재관, 강한택, 오영선, 김구하, 이강 등을 만나 김규식을 파견한 사실과 독립운동 봉기의 절호의 기회가 왔음을 알렸다. 북간도 지역에서도 전 간민회 회장 김약연과 총무 정재면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여운형을 만났다.
이러한 여운형의 활동은 이 지역 독립운동에 커다란 성과를 내었다. 즉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의 탄생, 노령 한인대표로 윤해와 고창일의 파리강화회의 파견, 간도의 ‘대한국민회’ 조직, 1919년 2월 발표된 노령의 ‘무오독립선언서’는 당시 여운형의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처럼 여운형은 만주와 노령 지역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결국 신한청년당과 여운형의 활동은 3·1운동 봉기의 진원지였으며, 결정적으로 중요한 동인이었다.

2) 손정도와 현순 목사의 국내 3·1운동 준비 참여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과 그 대표인 여운형이 3·1운동 봉기의 진원지였다면, 상해 임시정부의 탄생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손정도와 현순이었다. 감리교 목사인 손정도는 1909년 숭실대학 재학 중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상동교회에 출석하여 전덕기 목사가 주도한 ‘상동파’의 영향으로 일찍이 구국운동에 눈을 떴고, 1910년 이전 안창호가 만든 ‘신민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손정도가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뛰어든 것은 1919년 초였다. 1918년 7월 갑자기 정동교회 목사직을 사임한 손정도는 평양 보통강변에 은거하면서, 모종의 독립운동을 위해 분주히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아마도 이때 서북 지역에 신한청년당의 파송을 받은 선우혁이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손정도는 이승훈과 자주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파송한 김규식의 경비 문제와 3·1독립만세운동에 대해 의논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가운데 조선 왕실이 의친왕 이강을 파리강화회의에 밀사로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고, 손정도는 이화학당 통역교사 하란사와 함께 이 일을 도우라는 밀명을 받게 된다. 조선 왕실의 밀명을 받은 손정도는 기홀병원에 입원해 있던 이승훈에게 이 사실을 알린 후, 친구인 평양 남산현 교회 신흥식 목사에게 평양의 3·1독립만세운동의 준비작업을 인계하고 급히 중국행 열차에 올랐다.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 손정도는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려는 의친왕 이강과 하란사를 파리로 밀항시키기 위해 먼저 중국으로 망명해 갔던 것이다.
한편 정동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한 현순 목사는 부흥사로 민족운동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복음전파에 헌신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19년 2월 19일 「기독신보」 사장 김필수 목사의 인도로 제중원 주임 이갑성의 집에 들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에 이승훈, 함태영, 안세환, 이갑성, 오기선, 박희도 등 장로교와 감리교 측 인사들이 모여 신한청년당의 파리강화회담 대표 파송과 재일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천도교와 함께 ‘국내에서도 거국적인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사실과 국내 독립운동을 해외 동포들에게 알리기 위한 외교통신업무의 책임자로 현순 목사를 지명하고, 그를 상해로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상동교회 시무 경험과 상동파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던 현순 목사는 기꺼이 이 일을 받아들이고 2월 24일 경비로 1,000원을 받아 상해로 떠났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손정도는 협성신학교 신학생 시절 상동교회에 출석하면서 신민회 인사들을 알게 되었고, 이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여 3·1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또한 손정도는 정동교회 목사직을 갑자기 사직하고 평양 보통강변에 은거하며
3·1운동을 준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손정도는 의친왕 이강의 파리강화회의 파견을 도우라는 조선 왕실의 밀명을 받고, 이의 실행을 위해 급히 중국으로 떠나게 된다. 한편 현순은 목회에 종사하던 중 우연히 3·1운동을 준비하는 긴박한 상황과 시점에 참여하여 민족대표들로부터 외교통신 업무를 부여받아 상해로 향하게 된다. 이후 현순은 상해 독립운동가들을 모아 독립사무소를 설치하여 임시정부 수립의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활동

1) 현순의 상해 독립임시사무소 활동
현순이 민족대표의 파송을 받아 상해에 간 것은 망명정부인 ‘상해독립사무소’를 중국에 수립하려는 계획이었다. 현순은 상해에 도착한 후 장로교 선교사 피치를 찾아갔다. 현순은 그의 안내로 선우혁, 신규식, 이광수, 신헌민, 김철 등을 만나 자신이 국내 민족대표의 파송으로 상해에서 외교·통신업무를 하기 위해 왔음을 전하였다. 그는 3월 하순경 상해 독립운동가들과 의논한 후 프랑스 조계 보창로 329호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 현순은 이 사무소의 대표 격인 총무를 맡고 이광수, 여운흥이 통신과 서기, 신규식과 신헌민이 서무, 김철과 선우혁이 재무업무를 맡았다. 이때 독립임시사무소의 주된 활동은 세 가지였다. 첫째, 3·1운동 소식을 세계에 알리는 것, 둘째, 국내외 주요 독립운동단체 대표자들을 상해로 모아 향후의 진로와 방향을 모색할 수 있도록 주선하는 것, 셋째는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을 조직하는 것이었다.4
한편 현순은 3월 8일 중국 내에서의 선전활동을 위해 북경을 방문하였다. 이때 손정도와 하란사는 의친왕 이강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려는 조선 왕실의 밀지를 받고 북경에 와 있었다. 그러나 고종의 급사 소식으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하란사가 유행성 감염으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어쩔 수 없이 손정도는 현순과 함께 상해로 향하였다. 1919년 3월 25일 손정도와 함께 상해로 돌아온 후 현순은 다음 날 보창로에서 최고기관을 수립하는 문제에 대해 각지에서 모여든 인사들과 모임을 가졌다. 상해 독립임시사무소에서 활동하던 현순과 손정도, 이동녕, 이회영과 이시영, 이광, 조성환, 조소앙 등이 함께 자리했다. 이때 현순이 전면에 나서고 손정도가 뒤에서 지원하는 형태로 모임은 전개되었다.
이날 의제는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을 건립하는 안이었다. 이때 임시의장 현순은 국내의 운동을 지원하는 재외기관 설치안을 통과시키고, 현순,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이광, 조성환, 신한민, 이광수 등 8명을 연구위원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인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각지에서 온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의견이 대립하여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독립임시사무소를 이끌던 현순과 이광수는 민족대표 33인의 의사를 확인한 후 정부를 조직하자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이들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독자적인 ‘임시정부안’을 만들고, 국내에 이봉수를 보내 천도교 측과 민족대표들의 의사를 타진하였다.
4월 10일 오전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독립임시사무소에서 활동하던 29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 청사로 마련해 둔 프랑스 조계의 한 양식주택에서 모였다. 그러나 의견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이광수는 그동안 임시정부 조직이 지연된 이유를 설명하고, 정부 조직에 관한 모든 일을 모임에 참여한 모든 분들께 맡기겠다고 말하였다. 결국 현순은 3·1운동 직전 민족대표의 파송을 받아 상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임시정부를 조직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노령과, 상해, 만주 지역 등 지역에서 온 독립운동 세력들 간의 입장 차이로 인하여 현순 주도의 임시정부 수립은 어려워졌다.

2)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의 수립 과정과 기독교인의 활동
이광수의 설명과 더불어 독립임시사무소의 역할은 끝나고 그날 저녁 10시부터 회의가 진행되었다. 손정도와 이광수의 제의에 따라 각 지방 대표회를 먼저 구성하기로 하여 29명의 인물을 선출하였다. 밤을 새워가며 제1회 회의가 개최되었고 다섯 가지 중요한 의제가 논의되었다.
먼저 조소앙이 동의하고 신석우가 제청하여 회의체의 이름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으로 정했다. 이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세우며 최초의 입법 기관으로 임시의정원을 출범시킨 것이다.5 임시의정원 29명의 명단을 살펴보면, 각 지방대표라고 불리었지만 대부분 서울과 경기, 충청 지역 출신이었다. 종교적으로 보면, 기독교인 11명, 대종교인 7명, 확인되지 않은 사람 11명이다. 그런데 대종교인 가운데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등은 한말 기독단체인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한 인물들이고, 신석우와 신익희는 나중에 기독교인이 된 인물들이다.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은 이동녕, 부의장은 손정도, 서기에는 이광수와 백남칠이 선출되었다. 이후 손정도는 임시의정원 부의장(4.11)으로 시작하여 임시의정원 의장(4.13), 임시정부 평정관(4.16), 임시정부 의정원법 기초위원(4.25), 1921년에는 임시정부의 교통총장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와 의정원의 조직체계를 잡는 데 깊이 참여하였다.6
두 번째 결정사항은 국호와 연호를 제정하는 것이었다. 신석우의 동의와 이영근의 제청으로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셋째로 정부 조직과 내각 구성원을 선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여 국무원에 내무, 외무, 재무, 교통, 군무, 법무의 6부를 두도록 하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각 부의 대표자들을 총장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총장 선출 결과 대부분 상해에 있지 않아 실제 업무를 진행시킬 차장을 두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정부의 편제와 인물로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7

임시정부 초대 각료 명단
직책성명직책성명
국무총리이승만국무원 비서장조소앙
내무총장안창호차장신익회
외무총장김규식차장현순
재무총장최재형차장이춘숙
군무총장이동휘차장조성환
법무총장이시영차장남형우
교통총장김규식차장선우혁


이상의 임시정부 초대 각료 총 14명 가운데 5명이 기독교이었다. 특히 임시정부의 수반인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은 해외 독립운동의 대표적 지도자들로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기독교 신앙으로 민족의 독립운동을 해오던 지도자들이었다. 또한 외무차장 현순은 정동교회 목사로 임시정부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하였고, 교통차장 선우혁은 신한청년당의 일원으로 국내에 파송되어 평안도 지역의 3·1운동을 이끌어낸 기독교인이었다. 이외에도 군무총장 이동휘는 사회주의자로 전향하기 전 기독교에 입문하여 한때 상동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였고, 법무총장 이시영도 상동청년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볼 때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각료 14명 가운데 많게는 7명이 기독교와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사실상 기독교 인사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8

나가는 말

1919년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두고, 1918년 8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에 의해 추동되었다. 3·1운동이 거국적으로 일어나고, 국내외 여러 지역에서 다수의 임시정부가 탄생하였으나,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후에 모두 통합되었다.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후 독립운동 세력들 간의 여러 갈등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요 중추적 기관이었으며,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의 법통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지킨 민족운동가들 가운데 다수의 인물들이 기독교계 인사들이었고, 한때 기독교에 입교한 인물들이었다.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파송하고 국내외의 3·1운동을 추동시킨 여운형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교회의 전도사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상해 한인교회와 인성학교를 설립하고, 상해 교민단을 창단하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는 후에 사회주의자로 전향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고수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상해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초대 외무차장으로 임시정부 수립과 임시정부 통합 과정에 결정적 기여를 한 현순은 감리교 목사였다. 그는 국내의 3·1운동 민족대표들로부터 외교통신 업무를 위탁받아 평생 민족운동에 헌신하였다. 비록 그는 임시정부의 지도자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그가 임시정부 수립과 통합 과정에서 한 역할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손정도 또한 감리교 목사로 3·1운동을 준비하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의정원 부의장, 의장, 평정원, 임시정부 교통총장을 지내면서 임시정부의 조직과 체계를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이 외에도 손정도는 임시정부 외곽단체인 한국노병회, 대한교육회 조직에 깊게 관여하였고, 상해한인교회와 대한기독교연합진정회를 조직하여 교회 기관을 통한 독립운동에도 헌신하였다.
이상과 같은 기독교 민족지도자들도 모두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그리고 중국 관내에서 임시정부 외곽단체들을 설립하거나 참여하여 기독교 신앙을 끝까지 지키며 민족운동에 헌신하였다. 이들 모두는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중추적 인물들로 시기적으로 3·1운동 이전에는 여운형, 3·1운동 이후 임시정부의 창립 과정에서는 현순과 손정도가 상해 독립운동계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이들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임시정부의 기초를 놓고, 기반을 다져 상해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만든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1 유동식, 『정동제일교회의 역사(1885-1990)』(기독교대한감리회, 1992), 200.
2 박찬승, “1910년대 말–1920년대 말 여운형의 민족해방운동론,” 「역사와 현실」 6호(1991), 67; 신용하, “몽양 여운형 선생의 독립투쟁,” 몽양 여운형 선생추모사업회・몽양연구소 공편, 『여운형 노트』(학민사, 1994), 204.
3 신용하, 위의 글, 206.
4 김창수·김승일, 『해석 손정도의 생애와 사상』(넥서스, 1999), 147.
5 김명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정에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역할,” 「한국교회사학회지」 제51집(2018년 12월), 123.
6 김명배, 위의 글, 125.
7 김명배, 위의 글, 125.
8 김명배, 위의 글, 126.


김명배 | 숭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신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회일치와 협력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현재 숭실대학교 베어드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9년 3월호(통권 7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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