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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 ] 3·1운동 100주년
특집 (2019년 2월호)

 

  중국 잡지 속의 3·1운동
  

본문

 

1919년 3월 1일부터 일제의 식민통치를 반대하고 민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운동이 한반도 전역에 불타올랐다. 이 3·1운동은 한국근대사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또한 “조선의 혁명은 세계 혁명의 일부분”이었다.1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인접하며, 처한 시대상황이 비슷했던 중국은 3·1운동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중국 언론들은 3·1운동에 대하여 동시적이고 전면적인 보도와 논평을 진행하였는데 그 범위가 넓고 횟수가 많아 마치 우리나라 현지 언론을 방불케 하였다. 신문들은 3·1운동의 긴박한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도하였고, 여러 잡지에서는 3·1운동에 대한 논평을 발표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적극 성원하였다. 아울러 중국 자국의 사회적 상황과 국민들의 정신 상태를 비교 분석하면서 외세, 특히 일본에 굴욕적으로 굴복하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반성하기도 하였다. 이는 3·1운동 직후에 발발한 중국 5·4운동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필자는 「기독교사상」 2018년 3월호(통권 711)에 “중국 신문 속의 3·1운동”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3·1운동 당시 중국 신문들의 반향을 살펴본 바 있다. 그에 이어 이 글은 중국의 여러 잡지에 발표된 대표적인 논평들을 중심으로 3·1운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을 살펴보고 아울러 중국 5·4운동과의 연관성을 살펴보려 한다. 관련 사료의 가치를 존중하여 가급적 직역한 그대로 인용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3·1운동에 대한 인식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발발한 3·1운동은 며칠 뒤인 5일 이후부터 「신보」(申報), 「경보」(京報), 「신보」(晨報), 「대공보」(大公報), 「익세보」(益世報), 「민국일보」(民國日報), 「순천시보」(順天時報) 등 중국의 주요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중국 신문들의
3·1운동 보도는 매우 신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신문들의 동시적인 보도는 3·1운동의 전개 과정, 참가인원 통계, 일제의 진압 실상 등 그 내용을 소상히 소개함으로써 3·1운동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와 더불어 발표되는 중국 잡지들의 논평은 3·1운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식과 입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19년 당시 중국에는 약 500여 종의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었다. 이 중 비교적 영향력이 있는 중국 잡지로는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이 1904년 상해에서 창간한 「동방잡지」(東方雜誌), 진독수(陳獨秀, 1879-1942)와 이대소(李大釗, 1889-1927)가 1918년 북경에서 창간한 「매주평론」(每週評論), 북경학생구국회가 1918년 북경에서 창간한 「국민잡지」(國民雜誌), 북경대 학생들이 1918년 북경에서 창간한 「신조」(新潮),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이 1919년 장사(長沙)에서 창간한 「상강논평」(湘江論評)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잡지들을 통해 보여주는 3·1운동에 대한 인식은 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3·1운동의 발발은 일제의 무자비한 폭정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동방잡지」는 “조선에서 발생한 폭동의 진정한 원인”(朝鮮發生暴動之眞因)이라는 논평을 발표하면서 3·1운동 발발의 원인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에 있다고 분석하였다. (1) 조선인과 일본인이 받는 대우가 불평등하다. (2) 정치가 번잡하고 조선인들이 고통을 당하며 특히 조세 고통이 크다. (3) 언론이 극단적인 압박을 당한다. (4) 강제로 동화(同化)시킨다. (5) 세계 사조(思潮)의 변천에 따라 조선인들의 민족자주사상이 매우 발달하게 되었다. (6) 천도교, 예수교 이 두 신자들이 선동한 바이다.2
사실 3·1운동 발발의 진정한 원인이 일제의 폭정에 있음은 일본 언론도 인정한 바이다. 「동방잡지」는 일본의 「동방시사신보」(東方時事新報)에 발표된 글을 번역하여 “조선 통치의 현황”(朝鮮統治之現狀)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하였는데 그 글에서는 “일본의 조선 통치에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즉 “무관(武官) 정치의 악폐, 잔혹한 진압 수단, 총칼로 감행한 조선인 교육과 그로 인한 배일(排日) 사상, 무자비한 도살, 가렴잡세와 농민들의 고통, 재한 일본인들의 비행(非行)과 법관들의 불공명(不公明)” 등이 악폐라고 언급하였다.3
둘째, 3·1운동은 평화시위의 모범이라고 칭송한다. 조선인들이 총칼의 무력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에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민심을 무기로 한 평화적인 방식을 취한 것은 세계 혁명사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는 것이다. 「매주평론」에는 당시 중국 혁명의 지도자인 진독수가 ‘지안’(只眼)이라는 필명으로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감상”(朝鮮獨立運動之感想)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는 3·1운동에 대하여 “위대하고 간절하며 비장하고 명확한 관념이 있으며 민의(民意)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고, 세계 혁명의 신기원(新紀元)을 열었다.”라고 평가하였으며, “찬미, 애통, 흥분, 희망, 참괴(慙愧) 등 많은 감상을 가진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조선이 독립된 이후에도 여전히 오늘처럼 ‘민의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고, 영원히 군인 한 명도 모병하지 않고 총알 하나도 만들지 않으며 전 세계 여러 민족들에게 모범”이 되기를 희망하였다.4
또한 「신조」에는 당시 북경대 학생운동의 지도자 부사년(傅斯年, 1896-1950)이 ‘맹진’(孟眞)이라는 필명으로 “조선독립운동에서의 새로운 교훈”(朝鮮獨立運動中之新敎訓)이라는 논평을 발표하며 3·1운동을 “비무장 혁명”이라고 규정하였다. 즉 “자유를 취득하는 도구로 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이러한 거동은 오늘에는 비록 성공할 수 없지만, 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독립운동은 그 가치에 있어서 사실은 무기를 사용한 독립운동보다 더욱 값진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무기가 없는 혁명은 결국 정의의 결실이 되는 것”이라고 3·1운동의 평화적 방식을 극찬하였다.5
셋째, 3·1운동의 주체를 학생들과 기독교인으로 보았다. 「동방잡지」는 3·1운동의 발발 원인을 “천도교, 예수교 이 두 신자들이 선동한 바”라고 규정하였고,6 진독수는 “이번에 조선에서 활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주로 학생과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았다.”라고 전했다.7 특히 「동방잡지」 제17권 제2호는 존오(存吾)가 기고한 “고려 기독교와 이번 독립운동의 관계”(高麗基督敎與此次獨立運動之關係)라는 글을 발표하여 3·1운동에서의 “애국지사들은 모두 기독교에 헌신하는 이들”이라고 단정하였다. “예수는 세상을 위해 피를 흘리셨고, 국민들은 마땅히 나라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한다.”라는 것을 지상(至上)의 신조로 삼아 “국민들에게 혁명사상을 주입”시켜 “교회가 혁명의 발원지가 되었다”는 것이다.8
부사년은 “조선독립운동에서의 새로운 교훈”에서 아예 3·1운동을 “순전한 학생운동”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번의 조선독립운동은 다른 부류의 역량을 조금도 이용하지 않고 오로지 일반 학생들의 자각심만을 의지했기에, 참으로 가장 순결하고 가장 광명한 거동이다.”라고 칭찬하였다.9

3·1운동에 대한 중국 잡지들의 성원

3·1운동에 대하여 신문의 실황 보도와 달리 잡지들은 긍정적인 시각과 성원하는 심경으로 격정적인 평론들을 게재하였다. 3·1운동을 적극 성원하는 당시의 대표적인 논평으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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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 중에서 독자들의 심금을 가장 울리는 것은 당시 북경대 5·4운동의 지도자 허덕형(許德珩, 1890-1990)이 「국민잡지」에 초승(楚僧)이라는 필명으로 기고한 “가히 경의로운 조선인”(可敬可佩的朝鮮人)이라는 글이다. 그 전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민족 자결의 외침이 우리 아시아에까지 전해져 온 이후, 저 2,000만의 자유를 모조리 빼앗기고 고통 속에서 죽기를 기다리던 조선인들은 하늘과 땅에 넘치는 기쁨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파리평화회의에 편지를 보내고 각 나라에 전보를 보내어 자신들이 일본에 탄병(呑倂)된 이후 참으로 이 천하에 있을 수 없는 각종 가혹한 학대와 잔혹한 대우를 받았다고 탄원하였다. 지난 10여 년 동안 조선인들은 죽음으로 서로 흩어졌고 인생의 즐거움이 전혀 없었다. 현재 그들은 깃발을 세워들고 자신의 일들을 강행해야 하지만, 그 강도 우두머리와 같은 자들이 말하는 공리(公理)와 정의는 전부 다 코 막고 입 삐뚤어진 말로써 그 누구도 공평한 판단을 주지 않을 것이다.
조선인들은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면서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오로지 피 흘리고 살 뜯기면서 목숨을 걸고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려 하고 있다. 지난 3월 1일부터 시작하여 서울, 평양, 진남포(鎭南浦), 안주, 중화(中和), 강서, 선성(宣城), 성천 및 기타 각지에서 많게는 수천 명, 적게는 수백 명의 남녀 학생들이 시가행진을 하고 독립가를 부르고 찬송시를 읊으며 함께 모여 강연을 하고 “독립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으리라”(不獨立毋寧死),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멈추지 말고 피를 흘리자” 등등 구호를 높이 불렀다.
여러분 보시라. 그리고 말씀해 보시라. 이야말로 얼마나 문명한 거동이고, 얼마나 위대한 정신인가! 우리가 이들 조선인들에 대해 얼마나 경의를 표해야 마땅할까? 또 얼마나 부끄러움을 느껴야 마땅할까? 저 살기등등한 일본 경찰은 손에 총을 들고 칼을 들고 눈을 감고 양심을 버리고 무차별하게 죽이고 때리고 있다. 왜 알지 못할까, 살육을 하면 할수록 때리면 때릴수록 조선인들은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에 또 일어나고 더욱 분발하여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조선인들은 참으로 피를 흘리고 참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조선인에 대해 온 몸을 땅바닥에 던질 정도로 경의를 표한다.
여기까지 말하다 보니 나는 일본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그 총은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당신의 마음은 또한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가? 저 2,000만의 기개가 있는 이들은 당신이 모조리 죽일 수 있는가? 가령 전부 죽일 수 있다 하더라도 전 세계 모든 이들의 눈을 속일 수 있는가? 당신의 양심마저 던져버린 수단과 야만적 행위는 참으로 세계에서 가장 하등(下等)의 민족이고 인류의 공적(公賊)이다. 당신은 지금 의기양양하지 마라. 당신과 같은 이러한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자는 20-30년이 지난 후 아마 조선에 비교할 수도 없이 뒤떨어져 있을 것이다.
듣자하니 현재 조선은 이미 공화국가를 세웠다고 하고, 이당휘(李唐輝)[성재 이동휘를 잘못 적은 것임-필자 주] 박사를 총통으로 선출했다고 한다. 그들 내각은 모두 학식이 깊고 의력(毅力)이 있는 이들이다. 이는 참으로 우리 동아시아의 가장 통쾌한 일이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또 듣건대 일본은 이미 우리나라에 공문을 보내 조선인들을 체포하라고 했고, 우리 정부는 거기에 아부하여 두세 사람의 조선 지사(志士)들을 체포했다고 한다. “토끼가 죽으면 여우도 비참해진다.”(兎死狐悲) 나는 권하노니, 우리는 기뻐하지 말라, 아부하지 말라. 이 몇 해 동안의 소행을 보면 우리가 조선에 비길 수 있는가?10


3·1운동을 통해 보여준 조선인들의 절개와 결의를 위와 같이 극찬하면서 독립운동의 성공을 지지한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특히 당시 중국 지식인 혁명가들은 거의 전부 3·1운동에 뜨거운 성원을 보냈다. 「흥화잡지」(興華雜誌) 제16권 제45호는 저자 미상의 “고려인들은 절망 중에서 오히려 여망이 있다”(高麗人絶望中猶有餘望)라는 논평을 발표하여 조선독립의 희망을 기원하였고,11 당시 북경대의 「신조」(新潮) 창립멤버 중 한 명인 진조주(陳兆疇)는 ‘혜정’(穗庭)이라는 필명으로 「신조」 제1권 제4호에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감언”(朝鮮獨立運動感言)이라는 논설을 발표하여 3·1운동을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다.

조선의 금번 독립운동은 격랑에 격랑을 더하는 듯하고 용맹하기로 전에 비할 바 없다. 어제의 중국 신문에는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으로 4,500여 명이 체포되었으나 독립운동은 시종 식지 않고 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나는 이러한 독립정신을 가진 민족은 결코 타인의 콧바람 밑에서 오랜 기간 구차하게 연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조선이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나 우뚝 설 것을 우리는 두 눈을 닦고 그 결과를 지켜보면 될 것이다. …조선인들이 시종 끊임없이 자유를 쟁취하고 이제 광명한 천하에 또 하나의 자유국가가 생긴다면 이 또한 우리가 밤낮 기도하고 축원하는 바이다.

아울러 진조주는 조선인들의 독립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하면서 일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촉구하였다.

나는 일본 조야(朝野)가 이 일에서 하나의 근본적인 각오가 있기를 간곡히 기대한다. 즉, 조선의 독립을 용인하지 않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결사적으로 대적하는 것으로서 결국에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조류처럼 밀려오는 추세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일본은 병력만 믿고 지금의 조선의 궐기를 평정할 수 없다. 설령 일시적으로 평정했다 할지라도 해방을 위한 운동은 이미 20세기 인류 공동의 추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약소한 민족, 약소한 나라만이 강대한 민족, 강대한 나라에게 해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약소한 계층도 강대한 계층에 대해 해방을 요구하는 운동이 있다. 오늘날 이러한 억압받는 약소한 민족, 약소한 나라, 약소한 계층들은 후일에 반드시 서로 연합하여 자신들을 억압하는 자들에 대항할 것이다. 그때에 가서 일본은 또한 어떻게 조선을 대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20세기에서는 타인의 운명을 조종하는 민족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다. 조선독립은 조만간 반드시 사실로 이루어질 것이고, 일본의 허용 여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12

진독수도 “조선 민족 독립자치의 영광이 곧 실현되리라 믿는다.”라는 확고한 지지를 표명하며 일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다.

우리는 일본인들이 가령 즉각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마땅히 조선에 주둔한 군경을 감축하고 조선인들의 정당한 자치 권리를 허락해야 한다. 우선 이번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에 대해 일절 형벌을 내리지 말고 이로써 일본인의 문명 정도를 보여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번 독립운동은 조선인들의 정당한 권리이고 또한 일본의 국체(國體)를 침범하거나 일본국의 안녕과 질서를 교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 독립의 대의와 영혼이 풍부한 일본인들이 조선의 이번 비장한 실패에 대해 모두가 동정의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 생각한다.13

모택동은 자신이 창간하고 주필로 활동한 「상강평론」 제3호 “동방 대사건에 대한 논평”에서 3·1운동에서 보여준 조선인의 불굴의 정신을 찬사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다음과 같이 확신하였다.

3월 1일 이후, 서울, 개성, 평양, 중화(中和), 황주, 수원, 의주 및 모든 조선 반도 각처에서 하나 된 독립의 목소리로 맨주먹을 높이 들고 국기[태극기–필자 주]를 휘날리며 그 무정(無情)한 검은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일본 군경의 간섭, 체포, 총검의 찌름, 총칼의 내리침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3월부터 5월까지 독립의 외침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 …나중에 일본 군경에게 진압당하여 표면적인 독립운동은 비록 잠시 멈추었지만, 조선인들의 이러한 불굴의 정신이 살아있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조선 독립이 실현될 날이 올 것임을 가히 단정할 수 있다.14

결어: 5·4운동의 기폭제가 된 3·1운동

중국 혁명의 선구자인 손문(孫文, 1866-1925)이 “중국과 조선은 본래 형제와 같은 이웃으로서…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해 중국은 더욱 마땅히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라고 지적했듯이,15 중국 5·4운동의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3·1운동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적극적인 성원을 보냈다. 이와 동시에 불굴의 의지로 궐기한 조선인들과 외세의 억압에 소심히 침체되어 있는 중국을 비교하면서 중국인들도 조선인들처럼 항쟁의 깃발을 들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사실상 이러한 논조는 3·1운동 이후 곧바로 이어진 5·4운동의 발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매주평론」은 5·4운동의 선두주자인 진독수, 이대소가 창간하고 주필인 주간지이다. 진독수는 3월 23일 “조선독립운동에 대한 감상”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위축되어 일말의 반항심마저 없는 중국인들의 민족의식을 질타하고 분발할 것을 촉구하였다.

조선 민족활동의 영광이 있기에 우리 중국 민족의 위축된 수치감을 더욱 볼 수 있게 된다. 공화체제가 이미 8년이 지났지만 일반 국민들은 단 하루의 명확한 정의(正義) 의식의 활동도 없었다. 국민과 정치는 천길만길로 멀리 격리되었다. 자국과 외국의 군벌이 아무리 연합하여 핍박하여도 일말의 반항의 마음마저 감히 갖지 못하고 있다. …이번 조선인들의 활동에서 볼 수 있듯이 무기가 없다고 반항하지 못하고 주인공의 자격을 포기하고 제2인자로 전략하였는가? 우리는 조선인에 비교하면 참으로 숨을 곳이 없도록 부끄럽구나! …현재 중국의 학생과 기독교인들은 왜 모두가 이렇게 죽음의 기운으로 우중충해 있는가?16

「국민잡지」는 북경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북경학생구국회가 창간하였으며, 북경대 학생운동 지도자인 등중하(鄧中夏, 1894-1933)가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5·4운동의 주된 나팔수 역할을 한 매체이다. 앞서 소개한 허덕형은 북경대 영문과 학생이었고, 「국민잡지」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5·4선언’의 집필자이자 5·4운동의 학생수령을 한 인물이다. 허덕형은 「국민잡지」에 기고한 “가히 경의로운 조선인”이라는 글에서 “독립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으리라!” 혹은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리자,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등 구호를 외치는 조선인들에 대하여 “이러한 행동은 얼마나 개명한 것인가! 이러한 사상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우리는 그들을 탄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 앞에 부끄럽지 않는가?”라고 감탄하면서 외세 열강에 굴복하는 북경 정부를 비판하였다.17
「신조」는 북경대 5·4운동의 지도자인 부사년 등이 창간하고 채원배(蔡元培, 1868-1940), 진독수, 호적(胡適, 1891-1962), 전현동(錢玄同, 1887-1939), 이대소 등 교수들이 직접 지도하였던 잡지이다. 이 역시 5·4운동의 주요한 나팔수였다. 부사년은 「신조」에 “조선독립운동에서의 새로운 교훈”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불가능 속에서 가능성을 창조”하는 조선인들을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다.

[3·1운동은–필자 주]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굳이 하는”(是知其不可而爲之) 혁명이다. 체약한 민족은 매번 중대한 사건에 직면하면 필히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묻게 되고, 역량이 부족하면 좌고우면하게 되어 결국에는 아무 일도 성사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사실 대중이 소원하는 사안이고 대중이 희망하는 사안이라면 불가능이 없으며 역량이 부족할까 염려할 것도 없다. 최후의 성공은 이르고 늦은 문제는 있겠지만 부정적인 문제는 전혀 없다. 때문에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굳이 하는” 것을 “반드시 될 줄로 알고 굳이 하는”(知其必可而爲之)으로 바꾸어야 한다.18

부사년은 조선인들의 불굴의 정신을 찬양하면서 중국인들의 정신 상태를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이 시각의 중국이 가장 우려해야 할 현상은 바로 사회 일반인들이 개혁사업에 대하여 언제나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천천만만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정해준 것이다. 모두가 하지 않으면 어찌 가능할 수 있으랴? 모두가 한다면 어찌 가능하지 않으랴? 조선인들의 견고한 의지를 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숨을 곳이 없을 정도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중국을 되돌아 생각하면 참으로 가탄스럽다. 일반적으로 자각이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고 설령 자각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아직은 심지가 박약하기 그지없다. 입으로는 안나키주의(安那其主義)[Anarchism–필자 주]를 담론하지만 손에는 금반지를 끼고 있고, 볼펜은 의지의 연마와 인격의 독립을 발휘하는 문장들을 쓰고 있지만 몸은 오히려 늘 권세에 가까이 하고 있다.19

부사년은 결국 복지부동의 중국 청년 학생들을 향한 원망을 나타내며 일어나 분발할 것을 호소하였다.

일반 고급학교[대학교–필자 주]의 학생들은 더더욱 목숨을 걸고 관료(官僚)를 배우고 정객(政客)을 배우고 있다. 현재의 학생들이 이러할진대 장래의 사회는 가히 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관료들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학생들을 원망하며, 혼미하여 가련한 노후(老朽)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말과 속마음이 다른(口是心非) 새 세대들을 원망한다.20

이와 같이 5·4운동의 지도자들은 3·1운동을 바라보면서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조선인들의 불굴의 독립정신에 깊은 자극을 받았다. 동시에 열강들의 침탈을 반대하고 민족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에서 중국도 조선과 동일한 삶의 자리에 처해 있음을 각성시키면서 3·1운동을 5·4운동의 정신적 원동력 내지는 기폭제로 삼았다.

1 民意, “朝鮮代表在和會之請願(續),” 「建設」 第2卷 第2號, 1920. 3. 1.
2 「東方雜誌」 第16卷 第7號, 1919. 6. 25.
3 「東方雜誌」 第16卷 第10號, 1919. 9. 25.
4 只眼, “朝鮮獨立運動之感想,” 「每週評論」 第14號 第2版, ‘社論’, 1919. 3. 23.
5 孟眞, “朝鮮獨立運動中之新敎訓,” 「新潮」 第1卷 第4號, 1919. 4. 1.
6 「東方雜誌」 第16卷 第7號, 1919. 6. 25.
7 只眼, “朝鮮獨立運動之感想,” 「每週評論」 第14號 第2版, ‘社論’, 1919. 3. 23.
8 存吾, “高麗基督敎與此次獨立運動之關係,” 「東方雜誌」 第17卷 第2號, 1920. 1. 25.
9 孟眞, “朝鮮獨立運動中之新敎訓,” 「新潮」 第1卷 第4號, 1919. 4. 1.
10 楚僧, “可敬可佩的朝鮮人,” 「國民雜誌」 第1卷 第4號, 1919. 4. 1.
11 未詳, “高麗人絶望中猶有餘望,” 「興華雜誌」 第16卷 第45號, 1919. 4. 1.
12 穗庭, “朝鮮獨立運動感言,” 「新潮」 第1卷 第4號, 1919. 4. 1.
13 只眼, “朝鮮獨立運動之感想,” 「每週評論」 第14號 第2版, ‘社論’, 1919. 3. 23.
14 澤東, “東方大事述評,” 「湘江論評」 第3號, 1919. 7. 24.
15 閔石麟, 『中韓外交史話』(南京: 東方出版社, 1942), 26-27.
16 只眼, “朝鮮獨立運動之感想,” 「每週評論」 第14號 第2版, ‘社論’, 1919. 3. 23.
17 楚僧, “可敬可佩的朝鮮人,” 「國民雜誌」 第1卷 第4號, 1919. 4. 1.
18 孟眞, “朝鮮獨立運動中之新敎訓,” 「新潮」 第1卷 第4號, 1919. 4. 1.
19 孟眞, “朝鮮獨立運動中之新敎訓,” 「新潮」 第1卷 第4號, 1919. 4. 1.
20 孟眞, “朝鮮獨立運動中之新敎訓,” 「新潮」 第1卷 第4號, 1919. 4. 1.


문영걸 | 목원대학교(Ph.D.)와 북경대학교(Ph.D.)에서 교회사와 종교학을 전공하였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선교사로 활동하였고, 현재 미도(美道)중국선교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중국 지식계층의 기독교 이해”, “벽사위정–한중 반기독교 비교 연구”, “서광계의 조선선교계획 전말”, “6・25전쟁과 중국교회”, “조선 남감리회의 시베리아 선교(1920-1931)”, “중국 지식계층의 루터 이해에 대한 고찰”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2019년 2월호(통권 7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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