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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 3·1운동 100주년
특집 (2019년 2월호)

 

  북한 지역에서 일어난 선구적 3·1운동
  

본문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은 경기도 한성부(오늘날 서울)와 고양, 평안북도 의주와 선천, 평안남도 평양, 진남포, 안주, 함경남도 원산, 그리고 황해도 해주 모두 9곳이다. 이 중 서울과 고양을 제외한 7곳이 현재의 북한 지역이다. 그 이유는 그곳에 주동자들의 조직과 철저한 준비가 사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살펴보겠지만, 이 지역 최초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는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주동하였고, 교회의 조직과 인맥이 동원되었으며, 교회가 인근 지역 3·1운동 확산의 주요 통로가 되었다.

의주, 선천에서의 3·1운동

의주에서의 3·1운동 준비는 유여대(劉如大) 목사가 선천에서 열린 평북노회에 참석한 길에 그곳 양전백 목사의 집에서 이승훈(李昇薰) 장로를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김병조 목사와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한 1919년 2월 13일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2월 17, 18일경 그는 전에 교원으로 있었던 양실학교에서 교사를 하던 정명채, 김두칠을 참여시켜 3·1운동을 준비하다가, 2월 하순경 50여 교회와 사회 각 단체에 비밀 통고문을 보냈고, 2월 28일 밤 주동자 20여 명이 양실학교에 모여 독립선언식 순서를 논의하고 준비상황을 점검하였다. 그때까지도 서울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가 도착하지 않아 도쿄(東京) 조선인유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경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의주 읍내에 있는 서예수교회당(西耶蘇敎會堂) 부근 공지에 양실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비롯한 주민 700-800여 명이 모여,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유여대 목사가 주재하는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순서는 <찬미가>–기도–식사(式辭)–선언서 낭독–<독립 창가>합창–만세–의주성(義州城) 내외의 행렬 행진으로 이루어졌다. 식이 시작되자 함께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안동현(安東縣)에 거주하던 김병농(金炳穠) 목사가 조선의 독립을 성취하도록 하나님께 비는 기도를 드렸다. 이어 유여대 목사가 ‘이로부터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다.’는 식사 후, 그날 새벽에 등사한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 할 때 마침 서울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140-150매가 도착하여 그것을 낭독하였다. 이어서 북하동교회 영수(領袖) 황대벽(黃大闢)과 송장면 창원교회 조사(助事) 김이순(金利淳)이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담은 연설을 하였다.
김두칠, 정명채, 김이순, 김창건, 강용상은 2·8독립선언서 300여 매를 배포하는 일을 중지하고, 서울에서 선천을 거쳐 그때 막 도착한, 서울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배포했으며, 이날을 위해서 미리 지어둔 <독립 창가>를 모인 사람들과 함께 합창했다. 이어서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학생들을 선두로 독립만세와 <독립 창가>를 부르며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이에 놀란 헌병들이 달려와 해산을 강요했으나, 오히려 시위대는 점점 더 늘어 2,000여 명에 이르렀다.
행사 직후 일제 헌병경찰은 유여대 목사 이하 주동자 7인을 헌병대에 구속했다. 이날 시위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3월 2일 시위부터는 천도교 측이 가세하여, 의주 남문 밖 광장에서 시작된 시위에 천도교인을 포함한 인근 지역 농민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날 오후에는 기독교인과 주민 3,0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30명이 체포되었다. 3월 3일에는 의주 일대의 1,200여 명이 읍내로 집결하여 시위운동을 벌이자 헌병대가 출동하여 총검과 쇠갈고리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결사항쟁을 다짐하고 몇 개의 시위대를 조직하여, 헌병대와 관공서로 몰려가 탄압에 항의하고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3월 4일에도 양실학교 학생 600여 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읍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3월 6일까지 계속되었다.
선천에서의 3·1운동 준비는 선천북교회를 담임하던 양전백(梁甸伯) 목사가 1919년 2월 13일 이승훈 장로, 유여대 목사, 김병조 목사와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결단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양전백 목사와 이승훈 장로는 105인 사건의 동지였다. 또 양전백 목사와 함께 선천
3·1운동을 주동한 사람은 당시 신성중학교 성경교사로 있던 홍성익(洪成益)이었다. 105인 사건의 동지이기도 한 그는 선천남교회 장로였으며, 이승훈과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동기였다. 그래서 이승훈은 그에게 선천 만세시위의 준비를 부탁하였다.
홍성익은 자신이 출석하던 교회의 김석창 목사와 신성학교 동료 교사 김지웅, 양준명 등과 여러 차례 준비 모임을 가졌으며, 신성학교 학생들의 준비는 김지웅에게 맡겼다. 김지웅은 2월 26일경 장일현, 고병간, 박찬빈, 김봉성 등 학생들에게 2·8독립선언서 한 장을 주며, 등사판을 사용하여 그것을 할 수 있는 한 많이 등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도 만들게 하였다. 2월 28일 밤 서울에서 보낸 독립선언서도 도착했다.
3월 1일 오후 2시 학교의 종소리를 신호로 신성학교 학생 100여 명과 보성여학교 학생 60여 명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만세를 부르고 행진하여 남천동 시장에 이르자 일반 주민들이 가세하여 1,000여 명이 넘게 모였다. 그러자 김지웅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청과 경찰서가 있는 방향으로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에 당황한 일본 군경이 출동하여 저지하다가 발포까지 하여 기수 강신혁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죽고, 교사 정상인과 학생 김하현 등이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교사, 학생 등 50-60명이 검거되었다.[김지웅 외 30인 고등법원 판결문(1919. 7. 12.)] 3월 3일에도 기독교인은 선천북교회에서, 천도교인은 선천교구실에서 국장 봉도식을 갖고, 만세시위에 나서 1,5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이 출동하여 30여 명을 검거하고 예배당과 교구실의 집회를 금지하였다.

평양, 진남포, 안주에서의 3·1운동

평양에서의 3·1운동 준비는 상하이(上海) 신한청년당에서 국내에 파송한 선우혁(鮮于爀)이 1919년 2월 9일 이승훈(李昇薰) 장로의 소개장을 가지고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 길선주를 찾아가면서 시작하였다. 그 자리에 장대현교회 부목사 변린서, 평양 예수교서원 안세환도 동참했는데, 이때부터 변린서 목사는 서문외교회 김선두 목사, 산정현교회 강규찬 목사, 장대현교회 이덕환 장로, 윤원삼(尹愿三) 장로, 산정현교회 김동원 장로, 도인권, 김성택 목사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2월 12, 13일경 윤원삼, 황찬영(黃賛永, 숭덕학교 교사), 김제현(金濟鉉), 곽권응(郭權膺, 숭덕학교 교사) 등이 예수교서원으로 안세환을 찾아가 도쿄 유학생이 조선독립선언(2·8독립선언)을 발표했으므로 그것을 성원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논의를 했다. 2월 15일 이승훈이 기차로 아침에 평양에 도착하여 기홀병원에 입원하여, 그곳에서 서울 정동교회를 사임하고 중국으로 떠나는 손정도 목사를 만나 평양 남산현교회 신홍식 목사를 소개받았다. 다음 날 이승훈은 기홀병원에서 신홍식, 길선주 목사를 만나 민족대표 참여를 확답받고, 저녁 기차로 상경하였다. 2월 19일 신홍식 목사가 서울에 올라가 2월 20-21일 이승훈, 박희도, 정춘수, 이갑성, 오기선 등 기독교 진영 대표 모임에 참석하고 2월 22일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신홍식 목사는 남산현교회 부목사인 박석훈 목사와 함께 평양 감리교계의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평양에서의 3·1운동은 장로교계와 감리교계, 천도교계가 각각 별도로 준비하여 실행하였다. 1919년 3월 1일 장로교계는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감리교계는 남산현교회에서, 천도교계는 설암리 교구당에서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하고 만세시위에 합류하였다.
장로교계는 3월 1일 오후 1시, 평양 장대현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교회 옆 숭덕학교 운동장에서 평양의 장로교회 연합으로 1,000여 명이 모여 광무황제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봉도식에 이은 독립선언식은 단상에 대형 태극기를 내걸고, 당시 장로회 총회장이자 서문외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김선두(金善斗) 목사가 사회를 맡았다. 서문외교회 전도사로 있던 정일선(丁一善) 장로가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산정현교회를 담임하던 강규찬(姜奎燦) 목사가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을 했다. 이어서 윤원삼의 만세 삼창으로 독립선언식을 마치고 만세시위에 들어가 숭덕학교와 숭현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3대로 나뉘어 시내를 행진하였으며, 남산현교회에서 출발한 감리교계 시위대와 설암리 천도교구당에서 출발한 천도교계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저녁 8시경에는 숭실대학 밴드부와 숭실중학 밴드부가 연합하여 숭실대학 교정에 모여 양악(행진곡)을 연주하며 만세시위대에 앞장서 교정을 한 바퀴 돌고 학당골 앞을 지나 시내로 행진하던 중 완전무장한 일본 군대의 저지로 해산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평양의 만세시위는 일경의 가혹한 탄압에도 3월 5일까지 격렬하게 이어졌는데, 일제 헌병경찰이 3월 2일 새벽부터 주동자 체포에 들어가 3월 8일까지 검거한 인원만 400명이 넘었다. 그중 154명은 태형 혹은 즉결로 처분하고, 주동자로 여긴 48명은 기소하기 위해 평양지방법원 검사국에 넘겼다.
김선두 목사는 3월 2일 새벽에 시위 주동자로 체포되었고 서울로 압송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1919년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는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그러자 김선두 목사는 이에 불복 항소하여 9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같은 죄목으로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받았다. 1, 2심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자 김선두 목사는 정일선과 함께 ‘우리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따른 의사 발동으로 범죄가 아니다. 그런데 1, 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는 부당하므로 복종할 수 없어 상고한다.’는 취지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0월 20일 기각 판결을 받아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한편 남산현교회에 모인 감리교계 시위 주동자들은 그대로 평양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불복 공소하였다. 7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제령 제7호 위반’으로 같은 판결을 받게 되자 상고하였으나, 고등법원은 9월 29일 이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하였다. 이들 중 박석훈 목사는 11월 16일 옥사(獄死)하여 11월 18일 장례를 치렀다.
진남포에서의 3·1운동 준비는 1919년 2월 18일 진남포 삼숭학교 교장이자 신흥리교회 전도사인 홍기황(洪基璜)이 평양에서 남산현교회 목사 신홍식(申洪植)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신홍식으로부터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참여하겠다고 말하고 진남포로 돌아와, 2월 22일경 노윤길(盧允吉), 최병훈(崔秉勳), 이겸로(李謙魯), 송영환(宋永煥)과 함께하기로 찬동을 얻었다. 2월 25일 다시 평양에서 신홍식을 만나 서울에서 결정된 운동 방법과 거사일이 3월 1일 오후 2시라는 것을 듣고, 26일 진남포에 돌아와 노윤길의 집에서 동지들과 함께 담당할 일을 나누어 맡았다. 28일에는 독립선언서를 받아오도록 노윤길을 평양에 보냈으며, 노윤길은 3월 1일 첫 열차로 선언서 500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그날 오전 중 삼숭학교 교사 조두식(趙斗植)에게 선언서를 발췌하여 1,000장을 등사판으로 찍고, 태극기도 등사하여 300개를 만들게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삼숭학교 남학생 100여 명, 여학생 50여 명을 포함한 500여 명이 신흥리감리교회당에 모여 고종 추도회를 갖고, 그 자리에서 홍기황이 독립선언서에 기재된 내용을 설명하고, “찬성하는 사람은 나와 함께 지금부터 시내를 ‘조선독립만세’라고 크게 외치면서 행진하자.”라고 연설하자 모두가 만세시위 대열에 참여했다. 선언서는 오후 2시경 교회 종소리에 맞추어 시내 곳곳에서 반포하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무명 베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태극기 두 개를 앞세우고 600여 명의 시위대가 진남포경찰서 앞으로 몰려갔다.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을 강요하였으나 듣지 않자 홍기황 등 주동자들을 검거하였다.[홍기황 외 19인 고등법원 판결문(1919. 9. 25.)]
안주에서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읍내교회를 담임하던 김찬성(金燦星) 목사에게 서울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가 전달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선언서를 전달받은 김찬성 목사는 안주에서도 그날 거사를 하기로 결단하고, 아들 김화식을 비롯한 교회 간부급 청년들을 자택에 소집하여 선언서를 등사하게 하는 등 준비를 하고, 교인들을 긴급히 동원하였다. 이에 따라 김화식 등 청년들은 그날 오후 5시경 서문 밖에 모여든 교인들에게 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 이들은 읍내로 진출하여 건인리, 청계리 방면에서도 모여든 군중에게 선언서를 나누어주고 연설을 하였다. 이날 시위에는 300-400여 명이 참여하였다. 그날 밤 일제 헌병대는 김화식, 박의송, 김희주, 김병제, 김병건, 전성걸, 전예순, 김영원 등 주동자 10여 명을 체포하여 재판에 넘겼다.[김화식 외 9인 고등법원 판결문(1919. 6. 5.)] 김찬성 목사는 피신하였다가 만주 길림 방면으로 망명하였다.

원산에서의 3·1운동

원산에서의 3·1운동 준비는 원산부 남촌동감리교회(원산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정춘수(鄭春洙) 목사가 1919년 2월 중순경 미남감리회 선교 100주년 기념 행사의 일로 상경하여 4-5일간 남대문 밖 신행여관에 유숙하면서 피어선기념성경학원에서 열린 ‘백년기념회’에 참석하던 중 같은 모임에 참석한 박희도(朴熙道)를 만나 기독교계의 독립운동 준비 소식을 듣고 참여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당시 종교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친구인 오화영(吳華永) 목사의 부탁으로 2월 16일 종교교회에서 저녁예배 설교를 하고, 그다음 날 자신의 숙소인 신행여관으로 오화영 목사와 함께 찾아온 박희도를 만나 독립운동 참여를 결심하였다.
2월 21일 원산에 돌아온 정춘수는 원산 중리교회 전도사 곽명리(郭明理), 원산에서 약종상을 운영하며 장로교회인 광석동교회에 출석하던 이가순(李可順), 광석동교회 장로 겸 전도사 이순영(李順榮)을 포섭하여 비밀리에 원산에서의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하였다. 정춘수는 2월 26일경 서울의 이갑성이 보낸 김성국(金成國)을 만나 3월 1일 거사 사실을 듣고, 원산에서 이 운동에 동참하기로 한 5-6명의 서명 날인서를 그에게 주어 이갑성에게 전하게 했다. 정춘수는 2월 27일 곽명리를 서울에 보내 오화영 목사를 만나 확인해보게 하였다. 곽명리는 그날로 서울에 올라가 오화영 목사를 만나 그간 사정 이야기를 듣고, 그가 준 독립선언서 300여 장을 받아 2월 28일 밤에 원산에 돌아왔다.
한편 2월 26일 정춘수로부터 거사일이 3월 1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가순은 서울에서 작성된 선언서가 늦게 도착하거나, 제때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 수량이 부족할 것을 염려하여 이순영과 의논하여 서울에서 보내올 선언서 외에 원산에서도 독자적인 선언서를 작성 등사하여 배포하기로 하였다. 이가순은 선언서를 작성하여 이순영에게 전달하였으며 2월 28일 밤 차광은의 집에서 2,000매를 등사하였다.
정춘수와 이가순은 거사 준비를 위하여 그동안 동지로 포섭한 지도급 인물들을 2월 28일 밤 진성여학교(進誠女學校)에 모이게 했다. 이날 이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정춘수, 이가순, 이순영을 비롯하여 광성학교(光成學校) 교사 이진구(李鎭九), 보광중학교(保光中學校) 교사 차광은(車光恩 또는 車廣恩), 보광학교 교사 차용운(車用運), 잡화상을 경영하던 김기헌(金基憲), 고물상을 경영하던 오경달(吳京達), 사립소학교 교사 김장석(金章錫), 광성학교 교사 정연수(鄭延壽)와 이계술(李啓述), 보광학교 교사 인이극(印利極)과 함하은(咸河殷) 등이었다.
이가순의 사회로 열린 이날 준비모임에서 정춘수 목사는 ‘지금 우리 조선은 타국의 압력하에 있다. 우리 민족의 자유 행동이 불가능하므로 이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런데 금번 구주전쟁의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에 치중하게 되었으니 이 기회를 잃어버리지 말고 조선독립을 도모하려고 경성(京城)에 중앙부를 두고 조선 전도(全道)의 수뇌자 33명이 주동이 되어 독립단을 조직하고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하여 조선 각 도(道)가 일시에 독립선언을 할 계획이므로 여러분도 독립선언을 하고 이 운동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얼마 후 정춘수는 곽명리가 서울에서 가져온 선언서를 보고, 이가순과 곽명리에게 “나는 내일 서울에 가니 이곳 일은 그대들 두 사람이 좋도록 처리해달라.”라고 부탁하고 자리를 떴다.
거사일인 3월 1일은 마침 원산의 장날이었다. 이날 오전에 이가순은 곽명리가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 300매 중 50매를 함경남도 각 관청에 발송하고, 이순영과 함께 남은 독립선언서와 원산에서 자체적으로 제작 등사한 독립선언서 약 2,000매를 광성학교 학생들에게 주어 군중들에게 배포하게 하였다.
오후 2시, 각 교회에서 종이 울리자 13인의 주동 인물들은 약속한 장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모인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장촌동(場村洞) 시장으로 행진하였다. 이때 고물상을 운영하던 오경달은 자기 집에 있던 북과 나팔을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학생들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시위 대열의 선두에 나섰다. 이들을 따르는 군중은 삽시간에 700-800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일본인 거류지를 지나 원산경찰서로 향하였다. 도중에 일본 경찰, 헌병, 소방대 등이 소방 호스로 물감(色水)을 뿌리며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흩어졌던 군중은 다시 모여들고 물러섰던 군중은 다시 전진하였다. 당황한 일본 군경은 일제히 공포를 쏘았다. 그러자 군중의 일부는 흩어지고 나머지는 역전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거기에서 다시 만세를 부르다가 저녁 6시경에야 해산하였다. 이날 원산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사람은 모두 2,000명 정도였으며, 그다음 날까지 체포된 사람은 50명이었다.
원산 만세시위에서 체포된 50여 명 중 이가순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기소되었고, 나머지는 태형을 집행한 후 석방되었다. 기소된 이들은 1919년 4월 9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들이 어떤 형량을 받았는지 자료가 남아 있지 않으나, 이가순을 비롯한 13인의 주동자들은 무죄를 주장하며 항소하였다. 경성복심법원은 5월 26일 원 판결의 13인에 대한 부분을 취소하고 형량을 조정하여 판결하였다. 그러자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로 풀려난 이계술, 김진완 2인을 제외한 11인 모두가 자신들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근거하는 의사발동으로 범죄가 아니다. 그런데 제1심 및 제2심에서 받은 유죄 판결은 부당하여 복종할 수 없는 위법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다.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이를 모두 기각하여 그대로 옥고를 치르기는 하였으나, 상고 취지 및 개인별 추가 취지에서는 피고마다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과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주장하였다.

해주에서의 3·1운동

해주에서의 3·1운동은 해주읍교회를 담임하던 최성모(崔聖模) 목사가 배재학당에 다니던 아들을 만나러 서울에 올라갔다가 박희도(朴熙道)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고, 정동교회 이필주(李弼周) 목사와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결단한 2월 25일경부터 시작되었다.
2월 28일 아침 박희도는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450매를 김명신에게 주며 미리 연락해 둔 해주남본정교회 오현경(吳玄卿) 목사와 옹진군 온천리교회 곽정숭(郭貞崧) 목사에게 전하게 했다. 그리고 김명신은 독립선언서 300매를 최성모 목사의 편지와 함께 해주에 살던 교인 황학소에게 맡겨 오현경 목사에게 전하게 했다. 28일 밤 황학소로부터 독립선언서와 편지를 전해받은 오현경 목사는 저녁 11시경 황학소, 임용화, 이동혁, 최명현 등 교인들을 집으로 불러 3월 1일 오후 2시 교회에서 고종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결의하고 새벽 1시 반경 헤어졌다. 그날 오후 2시 연락을 받은 교인들 170-180명이 모여 오현경 목사 주재로 봉도식을 마친 후 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한 후 모인 사람들에게 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남은 선언서는 봉투에 넣어 우편으로 각 관청에 송부하게 했다.
주동자인 오현경, 황학소, 임용하, 최명현, 이동혁 등은 그날로 해주경찰서에 구속되고 경찰의 경계가 삼엄해졌다. 독립선언서를 받아 든 교인들은 태극기를 준비하여 3월 9일 장터에서 크게 만세시위를 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탄로되어 봉영화, 최봉직, 정만기 등이 검거되어 먼저 체포된 주동자들과 함께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오현경 외 14인 고등법원 판결문(1919. 8. 18.)]

북한 지역 3·1운동의 성격과 의미

서두에 언급했듯,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가 일어난 9곳 중 7곳이 현재의 북한 지역이며 각 지역에서 일어난 선구적 3·1운동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서 그 성격과 의미를 살펴보자.
의주의 경우 전국에서 유일하게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가 직접 독립선언식을 주도하였고, 의주, 선천, 평양, 원산, 해주는 3·1민족대표를 배출한 곳이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서는 3·1민족대표의 영향력과 역할이 다른 지역보다 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담임목사가 3·1민족대표로 참여한 경우 그 교회에서 주동자들이 나오고 그 교회 전체가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의주 유여대 목사의 의주서교회, 선천 양전백 목사의 선천북교회, 평양 길선주 목사의 장대현교회, 신홍식 목사의 남산현교회, 원산 정춘수 목사의 남촌동교회, 해주 최성모 목사의 해주읍교회가 이에 속한다.
또한 북한 지역의 선구적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에는 기독교계 인맥과 교회, 학교 조직이 동원되었다. 이는 사전 준비 과정은 물론 실행과 주동자들의 재판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의주와 평양의 경우 식순까지 준비된 가장 전형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그 의례는 찬송과 기도, 축도를 포함한 기독교식이었다.
북한 지역 선구적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에는 모두 서울에서 인쇄되어 전달된 3·1독립선언서가 사용되었지만, 의주와 원산에서는 3·1독립선언서가 늦게 전달되거나 소량 전달될 것을 대비하여 독자적인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준비하였다. 의주에서는 2·8독립선언서를 원고로 하였고, 원산에서는 주동자 이가순이 저작하였다.
평양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는 한날에 일어나서 이후 합류하기는 하였지만 장로교, 감리교, 천도교가 각각 독립선언식을 진행하였다. 이것은 준비 과정에서부터 별도로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원산의 경우 준비 단계부터 장로교와 감리교가 협력하여 단일한 시위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평양과 원산의 만세시위에는 일부 밴드(樂隊)가 앞장서서 행진곡을 연주하며 시위대를 이끌기도 하였다.

김승태 | 한국근현대사와 한국교회사를 전공하였다. 저서로 『한말 일제강점기 선교사 연구』, 『식민권력과 종교』 등이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2019년 2월호(통권 7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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