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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 평양은 어떤 도시인가
특집 (2019년 1월호)

 

  평양의 문화유산과 역사유적
  

본문

 

지난 2018년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가슴 설레는 한 해였다. 분단된 지 70여 년이 지난 한반도에서 남북의 정상이 세 차례나 만났다. 특히 9월 18일부터 2박 3일간 거의 생중계로 보도된 남측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측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만남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온종일 중계방송에 눈을 떼지 못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우리가 북한을 너무 모르고 있구나 하는 점이었다.
남북 정상이 역사적 만남을 이어온 평양은 단군조선의 신시(神市)로 알려진 곳이며, 고구려의 세 번째 수도이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주도층인 개경 세력에게 대항하여 묘청이 천도를 주장했던 서경(西京)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의 예루살렘’1이라고 불렸다.
이렇듯 오랜 역사를 가진 평양에는 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었다. 특히 평양의 고구려 유적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일본의 주요 관심 대상이었다. 한사군 가운데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으로 지목한 일제는 평양의 역사유적을 통해 그들이 주장하는 식민사관을 증명하고자 하는 작업들을 일찍부터 진행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평양 지역의 많은 유물들을 전승물로 가지고 나갔으며, 이후에는 세키노 타다시(關野貞)를 비롯한 많은 일제 관학자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평양의 고적을 발굴 조사하였다. 특히 세키노 타다시는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조선의 고건축 및 고적조사’를 진행하고 조사 유물들을 보존 상태에 따라 네 등급(갑을병정)으로 구분하여 정리한 보고서를 발행하였다. 여기서 평양의 유적 가운데 보통문・숭인전은 갑등급, 대동강안 능묘・평양정거장 전 7층석탑・영명사 8각석탑・영명사 5층석탑・부벽루・대동문 등은 을등급, 연광정・기자릉 등은 병등급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반포할 때 이 가운데 대동문은 보물 136호(현재 국보 제1호), 부벽루는 보물 137호, 보통문은 보물 138호(현재 국보 제2호), 숭인전은 보물 306호 등으로 지정할 만큼 많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정백리 지역 등의 고구려 고분에서는 유물을 발굴하여 연구 목적이라는 명목하에 일본으로 유출해갔다.2 이렇듯 평양은 일찍부터 많은 유적과 유물을 보유하던 역사적 도시이다. 이 가운데 몇 가지 문화유적들을 둘러보자.
서울의 젖줄이 한강이듯이, 평양의 젖줄은 대동강이다. 대동강변과 모란봉 일대의 많은 유적 중에서 대(臺)는 을밀대, 누(樓)는 부벽루, 정(亭)은 연광정, 문(門)은 대동문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연광정(練光亭)은 관서 8경의 하나이며, 대동문은 평양성의 정문이다.
평양은 풍수지리적으로 배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사벨라 비숍은 대동강물을 연발 길어올리는 ‘봉이 김선달’ 같은 물장수를 보면서 왜 우물을 파지 않고 강물을 길어먹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알아본즉, 평양은 배 모양이므로 우물을 파면 배가 가라앉게 되어 나라에서 금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미신의 위력이 놀랍고도 한심스럽다고 통탄했단다. 반면 유홍준 교수는 평양의 지세를 복주머니 형상에 비유하였다. 복주머니의 머리끈을 꼭 조여 당긴 자리가 북쪽의 금수산 모란봉이라면, 아랫도리의 동남 방향으로는 대동강, 서쪽으로는 보통강이 흐르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대동강과 보통강이 평양성의 해자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3
고구려는 552년(양원왕8)에 현재 평양의 중심지인 중구역과 평천구역에 걸쳐 평양성을 축조하였다. 성벽 둘레는 16km, 총연장은 23km에 달하고, 동쪽으로 대동강, 서쪽으로 보통강이 둘러싸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평양성은 크게 내성, 중성, 외성, 북성 등 겹겹이 네 개의 성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성에는 군대, 내성에는 관아가 있었고, 중성과 외성에는 민가가 자리잡았다. 4개의 성문과 크고 작은 부속물이 있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성문은 대동문(내성의 동문), 칠성문(내성의 북문), 보통문(중성의 서문), 전금문(북성의 남문), 현무문(북성의 서문), 정양문(중성의 서문), 차피문(외성의 남문), 다경문(외성의 서문) 등이다. 특히 북성 구역에는 평양의 대표 유적인 모란봉, 을밀대, 연광정, 부벽루 등이 남아 있다.
평양시 중구역에 있는 북한의 국보 제1호 대동문(大同門)은 6세기 중엽 고구려가 평양성을 축조할 때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세워졌다. 1011년 거란의 침입 때 불타서 다시 축조하는 등 여러 차례 보수를 거듭하였는데, 1635년(인조13)에 개축하고, 1852년(철종3)에 보수, 1954년에 다시 수리하였다. 대동문의 문루에는 ‘읍호루’(揖灝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읍호’란 문루에서 손을 내밀어 대동강의 푸르고 맑은 물을 떠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대동문은 조선시대 성문 건축의 대표작으로 반원형의 무지개문을 낸 석축 위에 2층 문루를 세웠다.
우리나라의 여느 성문과 비슷하나, 다른 점은 평양이 국방상 요충지인지라 성벽에나 설치하는 성가퀴(女牆, 성위에 낮게 쌓은 담)를 축대 위에 두르고 쏘는 구멍까지 내어 전시대비 체제를 갖추어놓은 점이다. 원래는 서울 동대문처럼 반달 모양의 옹성을 둘렀다고 하나 지금은 그 자취를 찾기 어렵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 2층집으로, 안에는 통기둥을 세워 시원하게 터놓고 전면에 마루를 깔았다. 대동문 정면에는 현판을 세 개나 붙여 두었는데, 먼저 무지개문 머릿돌에는 음각으로 대동문(大同門)이라 새겨져 있고, 문루 1층에는 단군 이래 최고의 명필이라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초서 현판이, 2층에는 청나라와의 전쟁 때 첩보작전에 능했다는 평안감사 박엽(朴燁)이 쓴 해서 현판이 걸려 있다.
연광정(練光亭)은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대동강변 덕바위 위에 대동문과 맞붙어 있다. 관서팔경(關西八景) 중 하나로,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쪽 장대(將臺)로 세워졌다. 그후 1111년에 이 자리에 정자를 다시 짓고 ‘산수정’(山水亭)이라 불렀다가 온갖 풍광이 고루 비친다는 뜻의 만화정(萬和亭), 그리고 대동강 물결에 햇살이 아른거리는 모습을 이끌어 연광정(혹은 德光亭)이라 이름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670년(현종11)에 평안감사 허황(許璜)이 짓고 윤홍신(尹洪愼)이 중수했다.
이 누정은 평양성의 부속 건물로서 전시에는 군사 지휘처로, 평시에는 사열대 또는 놀이터로 이용되었다. 규모가 서로 다른 남쪽채와 북쪽채 두 채가 비껴 지어져 있어 두 개의 합각지붕이 묘하게 맞물려 있다. 본래는 남쪽채만 있었는데 1573년 북쪽채를 잇대어 지었다. 건물의 남쪽채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북쪽채는 정면 2칸, 측면 4칸으로 지어졌다. 동쪽 기둥은 굵은 나무로, 서쪽은 4각 돌기둥으로 처리해 수평을 잡았고, 바닥 전면에 걸쳐 마루를 깔았다.
연광정에는 현판과 주련이 여럿 달려 있다. 그중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라 쓴 현판에 대한 내력은 이중환의 『택리지』에 실려 있다. 명나라 주지번(朱之蕃)이 사신으로 조선을 오가는 길에 평양을 지나며 연광정에 올랐는데, 그 풍광에 감탄하여 ‘천하제일강산’이라고 칭찬하며 제 손으로 현판을 써서 걸었다고 한다. 그 뒤 병자호란 때 인조에게 항복을 받고 돌아가던 청 태종이 여기에 들렀는데, 아마도 ‘천하제일’이라는 말에 심기가 상했는지 현판을 부숴버리려다, 내심 풍광도 아름답고 글씨도 아까운지라 앞의 두 글자 ‘천하’만 톱질해버리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한동안 ‘제일강산’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가 언제인가부터 누군가에 의해 ‘천하’ 두 글자가 다시 새겨졌다고 한다. 특히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칠 당시 전략회의를 했으며, 계월향(桂月香)이 김응서(金應瑞) 장군으로 하여금 왜장 고니시(小西飛)의 목을 베게 한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북한의 국보 제2호인 보통문(普通門)은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 천리마거리의 북쪽 끝 네거리에 있는 평양성 중성의 서문이다. 6세기 중엽 평양성을 축성할 때 서문으로 세운 후 여러 차례 개수를 했다. 임진왜란 시 평양성 탈환 작전 때에도 불에 타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아 사람들은 그때부터 귀신 같은 문(神門)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래서였는지
6・25전쟁 때 평양 시내가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되었을 때도 보통문은 은행 건물 한 채와 함께 무사히 살아남았다. 현재의 문루는 1473년(성종4)에 개축한 것이며, 1944년 한 차례 보수를 하였다. 옛날에는 보통강 앞에 나루가 있었다. 산과 강이 마주보는 자리에 주변 풍광이 참으로 고와 ‘보통송객’(普通送客)이라 하여 평양 팔경4 중 하나였는데, 이는 보통문에서 손님을 전송하는 풍광을 아름답게 묘사한 것이다.
구조적으로 보면 보통문은 화강석 축대 위에 2층 문루를 세웠는데,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2층 팔작집이다. 보통문을 세울 당시 뛰어난 건축 기술을 가진 사제지간의 목수가 있었는데, 스승은 대동문을, 제자는 보통문을 맡았다고 한다. 특히 보통문의 돌축대는 수직, 수평선이 어긋나는 기하학적 구성을 하고 있는데 이는 미적인 측면뿐 아니라 돌축대의 견고성을 감안하여 돌마다 얼기설기 맞물려 쌓은 것으로 지진에도 미끄러지는 일이 없게 한 것이다.
문루에는 조선 정조 때 채제공이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보통문을 개수하고 낙성할 때 써 붙인 ‘보통문중건기’ 현판이 걸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평양에서 고쳐야 할 것은 이 보통문만이 아니다. 나라 곳간이 텅 비고 재정이 고갈된 것은 문의 기둥이 썩는 것과 무엇이 다르며, 백성들이 가렴주구로 시달리는 것은 서까래 네 구석이 무너져내리는 형세와 무엇이 다르며, 풍속이 퇴폐해 날로 낮은 데로 흘러감은 기와가 땅에 떨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물건이 허물어진 것은 혹은 기다려 고치면 되겠지만 백성의 삶이 허물어진 것은 장차 어디에 기대해야 할 것인가. 나는 이 말을 여기에 기록해두어 내가 근본을 버리고 그 말엽만 힘쓴 것을 부끄러워했음을 알게 하고자 하노라.5

이 글은 나라의 관리와 백성이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오늘을 사는 남북한 우리 모두에게도 깨우침을 준다.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을밀봉 밑에 있는 을밀대(乙密臺)는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북쪽 장대로 세워진 정자이다. ‘을밀대’란 ‘웃미르터’(울밀이언덕)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먼 옛날 ‘을밀선녀’가 아름다운 이곳 경치에 반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설화와 을지문덕 장군의 아들 을밀 장군이 이곳을 지켜 싸웠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하는데, 사방이 트여 있어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을밀대는 높이 11m의 축대를 둥글게 두르고 세운 누대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을밀대 정자 안으로 들어가면 난간도 없이 곧바로 ‘성가퀴’라는 성벽의 지붕이 있다. 성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네모난 활 구멍이 뚫려 있다. 기둥은 1m 정도의 사각 돌기둥을 밑부분에 받치고 그 위에 흘림기둥을 이어 세우는 식으로 하여 비바람의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였다.
‘을밀대의 봄놀이’(密臺賞春)는 평양팔경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수려하다. 특히 봄철의 복사꽃과 어루러진 신록의 아름다움이 일품이라고 한다. 대동강 모란봉 사방의 아련한 풍광(勝景)들이 이곳에 다 모여든다 하여 취승대(聚勝臺) 혹은 최승대(最勝臺)라고도 하였다.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모란봉 동쪽 깎아지른 청류벽(淸流壁) 위에 서 있는 정자 부벽루(浮碧樓)는 본래 393년에 창건한 영명사(永明寺)의 부속 건물이었다. 원래 ‘영명루’(永明樓)라고 불렀는데, 12세기에 ‘대동강의 맑고 푸른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정자’라는 뜻에서 ‘부벽루’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여러 차례 재건과 보수를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왜적들에 의해 화재를 입고 1614년(광해군6)에 다시 지은 것이 지금의 건물이다. 구조적으로는 정면 5칸, 측면 3칸에 날씬한 흘림기둥이 팔작지붕을 받치고 있다.
부벽루에 올라서면 청류벽 밑을 흐르는 맑고 푸른 대동강물과 녹음이 비단결처럼 출렁이는 능라도가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며 펼쳐져 있다. 일찍이 고려 때의 유명한 시인 김황원(金黃元, 1045-1117)이 부벽루에서 보는 황홀한 절경을 “긴 성벽 한쪽 면에는 늠실늠실 강물이요(長城一面溶溶水), 넓은 벌 동쪽 끝으로는 띄엄띄엄 산들일세(大野東頭點點山)”라고 시를 써내려 가다가 다음 시구가 떠오르지 않아 한심스러워서 통곡하며 붓대를 꺾고 말았다6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부벽루의 승경을 보고 지은 미완성의 시 두 연이 연광정 주련에 원문과 번역문으로 걸려 있다.
부벽루의 현판 글씨는 19세기 평양의 서예가인 조광진의 명작이자 대표작이며 가장 널리 알려진 대작이다. 조광진은 당대 이름난 명필로 특히 힘차고 기발한 구성의 커다란 예서체를 잘 썼는데 추사 김정희는 “압록강 이동(以東)에 이만한 명필이 없다.”라며 그의 글씨에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한다. 부벽루는 낮 경치 못지않게 달이 떠오르는 밤 경치가 좋아 ‘부벽루의 달맞이’(浮碧玩月)가 평양팔경의 하나로 꼽혀왔다. 이 부벽루는 뛰어난 건축술과 아름다운 경관으로 하여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정자로 평가되고 있다.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 위치한 숭령전(崇靈殿)은 단군왕검과 동명성왕에게 제사 지내던 사당이다. 본래는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만을 모시던 사당이었는데,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의 사당을 여기로 옮겨와 함께 제사 지내게 된 것이다. 그후부터 ‘단군・동명왕사’라고 불리다가 1714년에 건물을 개축하고 그 이듬해부터 ‘숭령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숭령전은 본전과 그 앞 좌우의 행랑(동쪽 3칸, 서쪽 2칸), 대문(3칸)과 동서 작은문, 그리고 기타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파손되고 본전과 대문만 남아 있다.
본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인 단층으로 높은 기단 위에 굵직한 흘림기둥을 세우고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혔다. 우리나라의 옛 건물은 일반적으로 정면의 칸 수가 홀수인데, 이 건물은 짝수인 것이 특이하다. 그 까닭은 서쪽 2칸을 ‘단군 제단’으로, 동쪽 2칸을 ‘동명왕 제단’으로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숭령전은 조선 중기의 사당 건축술이 잘 반영된 건물로서 귀중한 건축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숭령전 인근의 숭인전(崇仁殿)은 기자조선의 기자를 제사지내기 위해 1325년(고려 충숙왕12)에 지은 사당이다. 처음엔 ‘기자사’(箕子祠)라고 부르다가 1612년(광해군4)에 개수하면서 ‘숭인전’이라고 불렀다. 숭인전의 본전은 현재 숭령전 옆으로 옮겨져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평양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로 사당 건물이긴 하나 고려 말기의 건축미와 구조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어 학생들의 견학터로도 이용되고 있다.
동명왕릉(東明王陵)은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 위치해 있다. 427년 고구려가 수도를 옮길 때 시조 동명왕(주몽)의 능을 이곳으로 옮겼다. 왕릉 바로 뒤에는 고구려 고분 20여 기가 있으며, 앞에는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정릉사가 있다. 왕릉은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진 방대형의 남향 돌칸 흙무덤이며, 안칸의 벽과 천장에는 연꽃을 그린 고분벽화가 있었지만 대부분 훼손되어 지금은 그 흔적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동명왕릉은 1993년에 대대적으로 개건하였으며, 능의 능문 앞에는 높이 4.5m의 비석을 세웠는데 그 앞면에는 김일성이 쓴 ‘동명왕릉개건기념비’(東明王陵改建紀念碑)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한 동명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동명왕릉을 옮겨올 때 함께 지은 정릉사(定陵寺)는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퇴락하여 그 터만 전해오다가 왕릉 개건과 동시에 복원되었다.
동명왕릉 능원 구역 안에 있는 고구려 고분 가운데 동쪽에서 첫 번째 것은 진파리(眞坡里) 1호분이다. 이 무덤은 사신도를 그린 무덤으로 벽과 천장에 회칠을 하고 그 위에 벽화를 그린 벽화고분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아름답고 이상적인 천상 세계에 대한 신앙이 있었는데 이 무덤 벽화는 바로 그 천상 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다. 우수한 벽화가 있는 이 무덤은 고구려 왕실과 깊이 관련된 고위급 인물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데, 6세기 후반에 고구려의 서북방 요새인 백암성을 공격해온 돌궐을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물리친 전공을 세운 고흘 장군의 묘로 추정되고 있다. 능원 구역의 고분군 가운데 동쪽에서 네 번째에 있는 4호 무덤 역시 인물 풍속 및 사신도를 그린 벽화고분인데 이 무덤은 평강 공주와 온달 장군의 합장묘로 추정된다.
또한 평양시에는 정백동 1호분, 정백동 37호분, 석암리 9호분 등의 고구려 고분이 유명하다. 특히 정백동 37호분은 부부 합장묘이며, 축조 연대를 알 수 있는 기년명(紀年銘) 유물이 발굴된 유적이다.
이 밖에도 평양에는 구석기시대 유적인 검은모루 유적을 비롯하여 우리 역사의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 있다. 책을 통해서만 본 고구려 문화유적들을 머지 않아 평양으로 답사를 가서 볼 날을 기대해본다. 또한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평양 장대현교회, 남산현교회, 서문밖교회를 비롯한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현장을 방문할 날도 간절히 소망해본다. 그리고 옥류관에서 평양냉면 한 그릇을 먹고 을밀대에 올라 앉아 대동강 강바람도 쐬고 싶다.

1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에; 노회, 부인회, 각종 대회 개최,” 「동아일보」 1934년 9월 5일 2면 1
단.
2 이순자, 『일제강점기 고적조사사업 연구』(경인문화사, 2009) 제2장 참조.
3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4. 북한편)(창비, 2011), 79.
4 평양팔경: 을밀대 봄놀이(密臺賞春), 부벽루 달맞이(浮碧玩月), 영명사 찾아가는 길(永明尋
僧), 보통강변 능수버글 숲(普通送客), 대동강 뱃놀이(車門泛丹), 연당지 연꽃(蓮塘聽雨),
반룡산의 석양(盤龍晩翠), 봄비에 불어난 대동강물(馬灘春漲).
5 유홍준, 위의 책, 83에서 재인용.
6 한국문원, 『분단 50년 북한을 가다 1: 평양』(1995), 44.


이순자 |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사를 전공하였다. 저서로 『일제강점기 고적조사사업 연구』,
『믿음의 흔적을 찾아: 한국기독교 유적』(공저) 등이 있다. 현재 (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책임
연구원이며, 숙명여대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 1월호(통권 7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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