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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1] 기후변화
특집 (2018년 11월호)

 

  기후변화와 인간, 그리고 윤리
  

본문

 

위기의 숫자

31.2
41
111


위의 숫자는 올해 우리가 겪은 기후변화에 대한 경험을 나타낸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해 연간 폭염일은 31.2일, 최고 기온은 41도로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기상 관측 111년 만에 발생한 최악의 폭염이었다. 하지만 이번 폭염은 이례적으로 일어난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며, 국내에만 국한된 현상도 아니었다. 보도에 따르면 스웨덴에서도 최고 기온이 35도를 육박했고,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핀란드, 러시아 등 북극권 한계선 일대 국가에서는 폭염으로 인한 화재가 최소 11건 발생했다. 서유럽과 북미에서도 폭염 관련 기사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전 지구적 폭염은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의 증거이다.
21세기 인류는 유례없는 기후변화의 징후들을 경험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더 이상 독립적인 쟁점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주요 문제들 속에서 인식되어야 한다. 기후변화가 만들어내는 문제점은 단순히 날씨나 자연 재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기후변화는 인구 증가와 별개의 문제가 아니며, 또한 에너지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물의 이용 문제와 난민 문제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기후변화는 인간의 삶과 생활 방식, 그리고 사고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영향을 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기후변화의 문제는 인간 자신의 문제이다.
기후변화를 ‘인간의 문제’라고 하는 이유는 기후변화의 원인이 인간 자신에게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창조한 문화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문화를 창조했으며, 자연을 새로운 창조를 위한 원자재로 사용했다. 그리고 근대 이후 ‘진보’라는 깃발 아래 자연을 착취하고 남용하여 창조질서를 파괴했다. 이 과정 속에서 기후변화는 진보의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불청객이다. 이런 점에서 기후변화는 더 이상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인 현상’이다.
기후변화는 경제적 손실과 인명 손실을 야기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1차적인 피해 대상이 가난한 국가들이라는 데 있다. 전 세계에 있는 굶주리는 인구 15억 명과 식수 부족에 시달리는 13억 명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식량 가격 폭등과 물 부족 현상일 것이다. 결국 기후변화는 ‘환경 재난’을 통해 ‘환경 난민’을 발생시킴으로써 사회적・국제적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이처럼 기후변화는 생태정의의 문제와 평화의 문제를 야기한다.
만약 우리가 기후변화를 생태정의의 문제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이며, 인간 자신의 문제라고 인정한다면, 이는 바로 윤리적 문제라는 인식에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문제로서 기후변화를 완화하거나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생활 양식이나 경제활동을 변화시켜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조율된 행동 양식’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조율된 행동 양식이란 미래 세대와 생명에 대한 책임의식을 지니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제약하는 요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동기와 당위다. 이 내적 동기와 당위를 우리는 윤리의 지평에서 논할 것이다.

기후변화: 인간의 문제, 그리고 윤리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 즉 우리의 자연적 환경은 더 이상 자연적 자연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비자연적 혹은 인공적 자연이다. 근대 이후 자연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창조한 그 무엇, 즉 문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기후변화는 더 이상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이미 많은 근대문명 비평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우리 역시 생태 위기의 원인을 근대 문명과 정신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근대문명은 자신의 근거를 경제와 기술, 그리고 학문이라는 거룩한 삼위(Trias)에 기초하고 있다. 생태적 위기는 도구적 이성에 의해 협소해진 자연 이해 안에 자신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 이해는 근대의 수학적-물리적 학문 개념들과 존재-신론적 형이상학, 그리고 유아적 대량소비로 유지되는 시장 자본주의에 의해 형성되었다.
근대의 거룩한 삼위에 기초한 인간 문화가 초래한 기후변화는 인간의 변화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요구한다. 2009년에 독일개신교연합(EKD)이 발간한 연구서 『생명으로의 귀환』(Umkehr zum Leben)은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기후변화의 중요한 주제로 제시했다. 그리고 동시에 기후변화는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국제적 불평등의 문제도 첨예화한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의 4차 보고서뿐 아니라 기후변화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 결과들은 기후변화의 1차적 희생자가 가난한 나라와 지역과 인간임을, 특히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소외된 자들이라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즉 사회적 약자가 곧 생태적 약자이고 기후변화에 의해 직접적인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후변화가 사회적 관계에 미치는 작용에 대한 관심 없이는 기후변화를 개념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기후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할 때, 우리는 생태정의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야만 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기후변화는 인간의 문화 혹은 인간 삶의 양식의 문제임과 동시에 그것의 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기후변화를 완화 혹은 해결하기 위한 인간적 활동 역시 새로운 문화적 이해와 윤리적 이해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즉 기후변화와 그것으로 인해 야기될 생태정의의 문제는 문화적인 동시에 윤리적인 것이다. 기후변화를 완화하거나 이에 적응하기 위한 인간적 활동은 결국 근대적 프로젝트에 대항하는 새로운 문화적・윤리적 프로젝트로 정의될 수 있다.
소비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무한경쟁과 경제성장을 추구하던 경제적 인간은 이제 경제성장 중심의 사회 체계를 유지하는 일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오늘 인류가 경험하는 위기 곧 인간 보편의 문제이자 전 지구적 문제인 기후변화를 통해 우리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가능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지속 가능성’은 기후변화와 관련해서 우리의 생활양식, 사회, 그리고 경제체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핵심이자 윤리의 중심 개념이다. 지속 가능성은 생태 보호, 빈곤퇴치를 위한 경제성장, 그리고 사회적 정의와 통합을 말한다. 그리고 미래 세대에서도 지속 가능해야 한다는 ‘간 세대적 윤리’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기후변화가 윤리에 요청하는 주제는 크게 세 가지, 즉 생태정의, 지속 가능성, 간 세대적 윤리이다.

생태정의
기후변화는 사회적 관계의 변화를 의미한다. 울리히 벡(U. Beck)은 기후변화를 사회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적 불평등과 기후변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따라서 기후변화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사회적 불평등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기후변화가 사회적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기후변화를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기후변화는 빈자와 부자, 중심과 변두리라는 엄연히 존재하는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동시에 불평등을 지양한다.”1 왜냐하면 위기가 커질수록 그 위기는 전 지구적이고, 전 사회적이고, 온 생명적인 위기로 다가올 것이며, 이러한 위기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은 모든 사람과 온 생명에게 동등 혹은 평등하게 희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는 명백하게 인간의 삶의 조건뿐 아니라 모든 생명의 생활 조건을 변화시키고 큰 영향을 행사한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점은 이러한 자연적 생명 조건의 변화뿐 아니라 기후변화의 결과와 그로 인한 사회적 결과와 인간 관계의 변화이다. IPCC 4차 보고서와 국제연합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 보고서가 예상하는 기후변화의 사회적 결과는 극단적인 사회적 불평등과 지역적 불평등이다. 이 보고서들에 따르면, 기후변화는 분명 인류 보편의 문제인 동시에 사회적 약자와 경제적 약자들에게 더욱 혹독한 고통을 부가한다. 즉 기후변화는 환경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경제적 차이에 의해 생태정의의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부유한 세계와 가난한 세계 사이의 문제, 즉 국가 간, 지역 간의 문제일 뿐 아니라 한 국가, 지역 안에서도 일어나는 문제이다.
국제적 영역과 국내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불평등의 문제는 생태정의의 문제를 일으킨다. 생태정의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영향이나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 국가나 지역, 집단에 따라 다르다는 불평등의 문제와 분배 문제, 즉 형평성의 문제 등을 고려해야 한다. 생태정의의 문제는 국제적 영역과 국내적 영역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 두 영역이 지니고 있는 공통점은 문제를 적절하게 다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한된 자원과 예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의 문제는 국가 간, 사회적・경제적 계층 간의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실가스의 배출원과 배출 지역은 이로 인해 피해를 입는 국가, 지역, 계층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윤리적 책임감과 공동체적 연대성이다.
기든스(A. Giddens)는 ‘누구’의 문제를 묻는다. 그에 따르면 기후변화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사회적・생물학적 약자들에게 집중된다. 그러나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원인 제공자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책임이 명확하게 가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가진 국제적・사회적 특권을 이용해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2
그리고 피터 싱어(P. Singer)는 ‘어떻게’의 문제, 즉 분배 방식에 대해 말한다. 그가 제시한 분배 방식의 원칙은 ‘오염자 부담의 원칙’이다. 즉 지난 2세기 동안 산업화된 선진국은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였으므로, 오염자 부담의 원칙에 따라 선진국들이 기후 온난화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3 이산화탄소 배출도 가장 많이 줄여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그는 선진국이 개발도상국 혹은 저개발 국가에 기술적 도움과 경제적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4 즉 기후변화를 초래한 원인 제공자들이 오염자 부담 원칙에 따라 더 많은 윤리적 책임감을 가지고 인류 공공을 위해 공동체적 연대성을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가능할 때 생태정의를 위한 기초적인 원칙이 제시되고 생태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지속 가능성
‘지속 가능성’이라는 개념은 1987년 브룬트란드 보고서 『우리의 미래』에서 처음으로 제시되면서 우리 시대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부각되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속 가능한 발전은 “미래 세대들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현재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발전”5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매우 다의적이고 모호하다. 이러한 다의성과 모호성은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용어 안에 상충하는 두 개념이 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개념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즉 ‘지속 가능한’ 발전과 지속 가능한 ‘발전’이 그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의 열쇠를 유엔환경과발전회의(UNCED)의 “Agenda 21”과 영국의 지속가능한발전위원회(SDC)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지속 가능한 경제체제’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생태적 한계 범위 내’에서 ‘강하고 건강하며 공정한 사회’라는 가장 근본적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지속적인 소비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무한한 경제발전을 뜻하지 않으며 인간, 인간의 문명, 그리고 온 생명의 삶과 존재 가능성을 지속하게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지속 가능한 발전은 지속 가능한 ‘발전’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발전이다.
이것은 인간 발달지수(HDI)를 향상시키기 위한 제한적 발전의 가능성을 긍정한다는 뜻이다. 즉 개발은 인간의 행복과 삶의 질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선에서 제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복과 삶의 질은 빈곤, 굶주림, 질병, 국내외의 격차를 해소하고 생태계의 보존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생태계의 보존 및 관리와 함께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도록 도모하며, ‘강하고 건강하며 공정한 사회’를 근본적인 목적으로 한다.
밀브래스(L. Milbrath)에 따르면, 이러한 사회는 안전, 온정, 그리고 정의라는 세 가지 핵심 가치를 가지고 있다.6 그리고 지속 가능한 사회에서는 지속성의 전제조건으로서 형평성을 확보하기 위한 분배와 참여의 정의 문제를 중요시한다. 그리고 지속 가능한 사회는 환경의 질과 문제를 전 세계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로 인식할 뿐 아니라 현 세대가 미래 세대에게 질적으로 높은 수준의 환경을 물려줄 도덕적 의무가 있다.7 그리고 관계의 형평성이라는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사회는 인간과 자연의 형평성, 인간과 인간의 형평성, 현 세대와 미래 세대의 형평성을 중요하게 부각시킨다.8 즉 지속 가능한 사회란 인간 사이에 정의로운 관계가 맺어진 사회일 뿐만 아니라 간 세대적 정의를 보장하는 사회인 것이다.

간 세대적 윤리
기후변화의 시대에 우리에게 요청되는 새로운 윤리적 문제는 생태정의, 지속 가능성, 그리고 간 세대적 정의이다. 언급했다시피 기후변화는 인간 문화와 사회의 문제, 즉 인간의 문제요 윤리의 문제이다. 만약 절망적인 빈곤과 고통에 직면한 타인을 돕는 일이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면, 그 도덕적 의무는 가까이 있는 이웃에게 베푸는 도움을 넘어 동시에 거리적으로 먼 곳에 있는, 얼굴을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도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타인을 향한 도덕적 의무의 공간적 확장을 인정할 수 있다면, 타인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시간의 확장, 즉 미래 세대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간 세대적 윤리 또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 세대에 대한 간 세대적 윤리는 생태 윤리를 기존의 전통적인 윤리 이론인 규범 윤리나 목적론적 윤리와 구분하는 결정적인 시금석이다. 이것은 윤리학 외연의 확장일 뿐 아니라 인간의 현재적 활동 혹은 윤리적 결단이 미치는 내일의 영향력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규정하는 윤리학의 시작이다. 간 세대적 윤리학은 윤리의 대상이 되는 타자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한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에 따르면, 윤리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인간 존재로서의 타자이다. 그리고 인간 존재로서의 타자를 특징짓는 것은 타자의 얼굴과의 대면이다.
그러나 간 세대적 윤리는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윤리를 넘어서 그 영역을 더욱 확장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래 세대의 얼굴을 만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 들려오는 윤리적 요청을 들어야 하고 내일의 가치를 위한 도덕적 행동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간 세대적 윤리가 목도하는 윤리적 대상인 타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즉 앞으로 우리가 만나는 타자는 시간적 외연을 확장한, 얼굴조차 볼 수 없고 오늘 존재하지 않는 미래 세대인 것이다. 만약 미래에도 인간이 존재해야 한다면, 오늘 우리는 인류에 대한 의무와 온 생명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미래 윤리는 분명 현재 인간에 대한 책임뿐 아니라 미래 인간에 대한 책임을 포함하는 윤리이다. 그리고 윤리적 담론의 장에 참여하는 사람은 현재의 인간뿐 아니라 미래의 인간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위기 속에 자라는 구원의 희망
21세기의 가장 큰 화두는 생명이다. 이 말은 우리가 생명의 위기를 이미 목도하고 있음을 웅변한다. 몰트만이 언급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생태 위기는 생명의 위기요, 동시에 인간의 위기이다. 이러한 주장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단어가 ‘기후변화’이고 글 첫머리에 제시한 31.2, 41, 111이라는 위기의 숫자이다.
생명의 문화는 죽음의 문화가 자행하는 살생의 야만적 행위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생명에 대한 사랑은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파괴행위에 대한 완강한 저항인 동시에 생명에 대한 사랑 실천의 지향이다. 하이데거는 기후변화로 표현되는 생명 위기와 인간 위기의 시대에 생명에 대한 사랑이라는 새로운 희망을 횔더린(F. Hölderlin)의 시에서 찾았다.

위험한 곳에 / 구원자도 또한 나옵니다.9

만약 우리와 우리의 세상을 위협하는 죽음의 폭력에 직면하여 생명 문화의 여러 가능성을 탐색한다면, 이 노래는 우리의 위로가 된다. 하이데거는 횔더린의 노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0

구원자는 그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다. 구원자는 위험 곁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위험 자체가 위험으로 존재할 때, 그것이 곧 구원자이다. 위험이 곧 자신의 은닉된 전향적인 본질에서부터 구원자를 이끌고 오는 한, 위험은 구원자이다.

전 지구가 황폐화되고 인간의 거처인 고향이 상실된 현재를 극복하는 생명 회복과 귀향이야말로 위기 속에서 자라나는 ‘구원자’에게 돌아가는 회복이다. 그렇다면 ‘구원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것은 ‘시적으로 [이 땅 위에] 거주함’이다. 이 말은 지상에서 인간의 본래적이고 온전한 거주의 가능성을 말하며, 동시에 이 땅에서 대지의 축복을 맞이하고 창조적으로 구원자 하나님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또 그렇게 하나님을 맞이하는 가운데 인간이 고향에 거주하는 정서에 젖게 됨을 의미한다. 다른 측면에서 이 말은 하나님이 생동하는 오늘 여기 한가운데에서 창조(신학)적으로 살아감을 뜻하고, 더 나아가 사물의 본질 가까이에 다가감을 뜻한다. 이러한 이해는 기후변화가 신학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새로운 신학적 주제를 제시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기후변화의 시대에 신학은 다양한 새로운 질문들에 직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질문들에 대한 신학적 대답의 가능성은 우리가 삶의 변화를 추동할 내적 동기와 의식 전환을 통해 생태 윤리적 삶을 과연 가능하게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1 울리히 벡, 모명숙 역, “변화의 기후가 아니면 녹색 근대가 어떻게 가능할까?,” 『기후문화: 기후 변화와 사회적 현실』(서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3), 51.
2 앤서니 기든스, 홍욱희 역, 『기후변화의 정치학』(서울: 에코리브르, 2009).
3 피터 싱어, 구영모 외 역, 『이 시대에 윤리적으로 살아가기』(서울: 철학과현실사, 2008), 105-108.
4 피터 싱어, 김희정 역, 『세계화의 윤리』(서울: 아카넷, 2003), 74.
5 Report of the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Our Common Future(Oxford: Oxford Univ. Press, 1987), 43.
6 변순용, “생태적 지속가능성의 생태윤리적 의미에 대한 연구,” 「윤리연구」 85호(2012), 178; 변순용・김나영, “생태적 지속가능성의 실천적 의미에 대한 연구,” 「초등도덕교육」 33호(2010), 174.
7 밀브래스, 이태건 외 역, 『지속가능한 사회: 새로운 환경 패러다임의 이해』(고양: 인간사랑, 2001), 12.
8 김원열 외, 『더불어 사는 세계관』(서울: 한경사, 2009), 247-249.
9 하이데거, “Die Kehre,” Die Technik und die Kehre(Pfullingen: Neske, 1962), 41.
10 하이데거, Vorträge und Aufsätze(Stuttgart: Klett-Cotta, 1994), 32.



조영호 | 독일 부퍼탈/베텔 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안양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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