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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특집1] 기후변화
특집 (2018년 11월호)

 

  기후붕괴 시대의 종교
  생태 맹(盲)에서 해방되는 기독교를 기대한다

본문

 

기상 관측 이래 우리는 가장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섭씨 40도가 넘는 혹서가 상당 기간 지속되었기에 이제 한반도가 아열대 기후로 전이되고 있다는 말도 전혀 낯설지 않게 되었다. 향후 4-5년간 전 세계적으로 올해와 같은 무더위가 반복적으로 지속될 것이라 하니 기후변동으로 인한 두려움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땅에 뿌리 내린 나무들도 말라 죽었고, 사육되는 가축들 수백만 마리가 더위를 견디지 못해 폐사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동식물의 피해가 극심하니 사람 역시, 특히 노인의 경우 온전할 리가 없다. 이런 현실이 지속되면 머지않아 동식물의 운명이 우리의 가까운 미래가 될 것이다.
지난여름을 문명의 이기(利器)인 에어컨 덕에 견뎠다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정부도 누진세 적용을 완화시켜 전기료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하지만 냉방을 위해 밖으로 분출된 열기는 우리 주변을 더욱 덥게 만들었고 상대적 약자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선풍기로 더위를 견디려는 소박한 노력이 불가능한 상황처럼 여겨졌으나 그럼에도 우리 중에는 그런 삶을 선택한 이들이 있다. 국가는 국가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생태적 의식으로 운영되어야 우리의 미래가 지켜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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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연유로 필자는 국제적 차원의, 주로 아시아인들과 더불어 ‘국제기후종교시민네트워크’(Inter-religious Climate & Ecology Network, 약칭 ‘ICE네트워크’)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삶의 토대인 자연의 근간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종교와 시민단체의 역할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정부 및 국가들 차원에서 맺어진 뭇 기후협약이 올바르게 실행되도록 감시하는 역할도 우리 종교인과 시민단체의 몫이 되었다. 이 땅 서울에서 열렸던 JPIC(1990)의 후속 조치로서 리우 유엔환경회의의 정신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당시를 기점으로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30% 정도 감축하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세계 최대 소비국 미국이 리우에서 채택된 기후변화협약을 구체화한 도쿄기후협약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고 말았다. 소비를 미덕으로 알고 경제를 운용하는 미국 같은 나라가 있기에 생태계의 미래는 밝지 않다. 최근 합의된 파리기후협약도 그 실현 가능성이 의심스럽다. 자연붕괴가 곧 인간 삶의 끝인 것을 모르지 않건만, 성장을 부추겨 표를 얻고자 하는 정치가들이 원칙을 외면한 결과이다. 미래를 희생시켜 오늘을 즐겼고 제3세계의 가난을 가중시켜 자신들의 배를 불린 서구 국가들의 죄가 무척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의 눈앞에 놓여 있는 기후 문제는 정의의 문제 곧 지구적 차원의 부정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생태적 정의’라는 말이 ‘경제적 정의’ 이상으로 중요해진 것이다.
필자는 ‘기후변화’(혹은 기후변동)라는 말 대신에 ‘기후붕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과장일 수도 있겠으나, 지금 치유되지 못하면 졸지에 회복 불가능한 임계점에 이를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기후붕괴란 자연의 내적 원리들이 인간에 의해 망가진 상태를 일컫는다. 자연의 내적 원리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돕는 것은 인류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자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이런 연유로 학자들은 임계점에 도달한 자연을 이제 태어난 ‘갓난아이’에 비유했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었던 자연이 인간의 약탈로 죽을 지경이 되었기에 오히려 무한 책임의 대상이 된 까닭이다. 그래서 자연을 ‘새로운 가난한 자’(New poor)로 일컫는 이도 있다. 그럴수록 환경학자들은 기후붕괴를 주도하는 세력들을 새로운 ‘나치’로 규정하며 그들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1
분명한 점은 기후붕괴를 막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JPIC)을 발의한 바이츠제커(Carl F. Weizsäcker)의 말대로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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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실상 그 종교의 발생은 환경에 빚져 있다. 또한 각기 생겨난 풍토에 따라 종교의 성격이 달라지기도 한다. 몬순 풍토에서 비롯한 불교는 온 세상이 관계적 존재(관계성)임을 어느 종교보다 잘 표현하고 있다. 반면 사막 종교인 기독교는 관계성이 깨어진 실상(우발성)에 더욱 주목한다. 이처럼 태초의 현실이 관계임을 가르치는 불교가 있고, 깨어진 관계를 복원하려는 의지를 기독교가 갖고 있다면 이들 동서의 두 종교는 힘을 합하여 기후붕괴 현실과 맞서야 옳다. 불교가 심층생태학적 차원을 지녔다면, 기독교는 상대적으로 사회생태학적 시각으로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기후붕괴의 현실에서 두 종교가 배타적 모습으로 갈등하는 것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진배없다. 더구나 기후붕괴가 지구적 정의를 파괴하는 일이기에 정의를 위한 종교들의 역할과 사명이 더없이 중한 시점이다. 그래서 혹자는 환경의 위기를 맞이한 오늘날의 시대에 종교의 역할이 다시금 부활할 것을 바라고 있다. 모든 종교 속에 담겨진 녹색 가치가 그 빛을 발휘할 때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자본주의적 욕망에 추동되어 생태 맹(盲)이 된 눈앞의 종교적 현실은 매우 뼈아프게 느껴진다. 수년 전 진화생물학자 윌슨(Edward Wilson)은 『생명의 편지』를 출간하였다.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생명의 편지’를 발송한 셈이다. 대자연을 향한 사랑을 인류 보편적 가치로 여기자고 제안할 목적으로 보낸 편지였다. 무신론적 생물학자의 눈에 자연 가치에 눈뜨지 못한 종교인들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여하튼 종교는 이제 기후붕괴를 자신들 본질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기후붕괴가 종교의 존재 이유를 붕괴시키는 탓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1인당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매우 많은 나라 중 하나이다. 자연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일에는 열심이었으나, 그 자연과 공존하는 삶의 기술은 온전히 익히지 못한 탓이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욕망지수가 가장 높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종교인 통계가 종종 이 땅의 전체 인구수보다 많이 잡히는 현실, 특히 기독교 대국 혹은 기독교 강국이라 불리는 상황에서 그간 종교들이 무슨 역할을 해왔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본래 욕망과 종교는 반비례 관계가 형성되어야 옳다. 이들 수치가 함께 높다는 것은 한마디로 종교 무용론을 적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브라질 리우회담을 비롯하여 기후 조약의 발원지였던 JPIC 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던 이유도 이 땅의 모순성을 세계인들이 공유한 결과였다. 빠른 성장을 이루었으나 빈부격차가 가장 큰 나라가 되었고 자연에 중증의 질병을 선물(?)한 나라가 된 까닭이다.
“내 몸의 중심은 가장 약하고 아픈 곳이다.”라는 말이 있다. 손가락 하나라도 아프면 온갖 신경이 그곳에 쏠리니, 이 말은 틀리지 않다. 지구도 하나의 유기체(몸)라고들 한다. 세상이 관계 아닌 것이 없다는 말도 그래서 가능할 것이다. 거룩(holiness)과 전체(wholeness), 그리고 구원(salvation)이라는 말의 어원이 동일하다는 사실도 이를 적시한다.
하지만 우리의 욕망 때문에 곳곳의 약자들이 삶의 터전을 잃는다면 우리의 행동은 달라져야 한다. 관계가 망가질 때 맞게 되는 그 비극적 종말은 소위 강대국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할 것이다. 다만 조금 더디 올 뿐이다.
지구적 정의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여러 영역에 걸쳐 참으로 많다. 그중 으뜸은 단순하게 사는 일(simplicity)이다. 최소한의 물질로 살아내는 일이 습관이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영성이라 부른다. 이것이 기후붕괴와 맞서는 종교의 첫걸음이라 하겠다. 이는 종교가 자본주의의 하수인 역할을 포기할 때 가능한 일이기에 말처럼 쉽지 않다.
가톨릭 프란치스코 교종이 언급한 것처럼, 종교는 ‘벌어’ 먹지 말고 ‘빌어’ 먹는 종교로 돌아갈 때 힘이 있다. 어느 종교든 죽어야 사는 길을 가르쳐야만 진정한 종교인 까닭이다. 종교가 가난해야 세상을 향해 생태적 지혜를 마음껏 설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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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 기후붕괴는 미래를 빼앗고 빈곤을 심화시키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부정의이다. 그럴수록 기후적 정의가 여실히 요청된다. 그래서 기후붕괴는 의당 정치적 문제일 수밖에 없다. 종교가 정부를 비판하고 시민사회와 공조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온실가스(GHGs)를 줄여가는 전(全) 지구적 기후정책을 지지하고 비판하는 일 역시 종교가 감당할 책무라 하겠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태풍 발생은 1970년 이래로 80% 증가했고, 향후 30년마다 종전의 3-4배 규모로 커진 허리케인이 발생할 것이라 예견되고 있다. 그 결과 지구상의 약자들, 대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의 피해가 가중될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미국 등 제1세계 나라들 탓이고, 한 국가 안에서는 에너지 사용량이 많은 거대 기업과 부유한 개인의 책임이라 하겠다.
기후붕괴로 인한 피해가 50년 전인 1960년대에 견주어 열 배 이상 커졌다는 사실은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더욱이 기후붕괴로 인한 재산 손실이 해마다 전체 손실의 90%에 이른다고 하니 기후적 부정의의 현실이 얼마나 위중한가를 잘 보여준다. 이들 중 다수가 힘겹게 사는 남반구 거주자들이기에 그 안타까움이 하늘을 찌른다. 부유한 서구 국가들의 환경 파시즘 탓에 뭇 약자들 곧 나무와 가축, 그리고 열악한 환경에 사는 사람들이 줄이어 고통을 받는다.
기후붕괴를 사후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의로운 기후정책을 세워서 사전에 예방하는 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 기후붕괴 상황을 초래한 범법자들, 바로 우리 자신에게 기후적 정의를 위해 헌신하라고 거듭 요구해야 한다.
필자는 이를 종교적 시각에서 ‘녹색(생명) 선교’라 칭해 왔다. 녹색 감각을 갖고서 결과를 예상하고 내다보는 삶의 양식을 좇아 사는 일 자체가 바로 선교라는 말이다. 오늘날의 종교는 종파를 불문하고 이런 삶을 가르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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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적 정의를 위한 교과서적 기본 강령은 이미 다음처럼 세워져 있다.

인간의 현재와 미래 세대의 이익 공유를 위해 기후 체계를 보존해야 할 것인바, 각 국가로 하여금 공통의, 그러나 각기 상이한 방식으로 책임지게 할 것.2

따라서 공평함과 책임성에 근거하여 기후적 정의를 더 올바르게 세워가는 일은 이제 인류에게 정언명령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 종교적 차원에서 인간이 초래한 기후붕괴를 지구적이고 보편적인 기후정책을 통하여 치유하는 일을 위해 부름받고 있다. 이런 자각 없이 기독교인은 천지를 창조한 하느님을 신앙할 수 없고, 불교 또한 연기설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후붕괴를 외면한 종교인들의 고백과 신조는 공허한 혀 놀림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물론 종교가 기후정책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참여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단순한 삶을 목표로 한다면 의미 있는 참여와 변화가 가능하다. 일상생활에서의 ‘탄소 발자국’을 주의 깊게 살피며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일, 유전자조작식품(GMO)을 거절하는 일, 한 그루의 나무라도 심고 가꾸는 일 등 여러 방면에서 열심을 다해야 한다. 또한 최근 화제가 된 ‘플라스틱 제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이기도 하다. 기후붕괴 시대에 자본주의적 욕망을 거스르며 불편함을 감내하는 것은 종교의 본질인 경건의 능력 곧 영성이다.
언급했듯이 필자는 기후붕괴를 주제로 하여 종교인들과 환경(시민)단체 사람들이 함께하는 모임을 이끌고 있다. 이는 국가나 기업의 환경정책을 감시하는 동시에 꼭 필요한 조언을 하기 위해 종교와 시민단체가 얼굴을 마주하며 지혜를 구하고 행동을 함께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일을 아시아 국가들과의 공조 속에서 감당하고자 ‘국제기후종교시민네트워크’를 만든 것이다.
지금껏 교회와 사찰은 의식 있는 신도들을 자신들의 울타리에만 가두었다. 그리하여 세상과의 소통을 스스로 막아 영적 자폐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종교는 기후붕괴와의 투쟁을 자신의 존재 이유라 여기며 환경(시민)단체들 곁으로 신도들을 보내야 한다. 기후붕괴가 종교적 주제인 것을 환기시켜 신도들이 환경(시민)단체들과 함께 활동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오래전 필자는 환경(시민)단체에 십일조를 내라고 몇몇 교회에 권유한 적이 있다. 교회가 생태정책에 직접 관여하기 어렵기 때문에 앞장서서 일하는 시민단체들을 도울 목적이었다. 자연에게 되갚는 일이 또 다른 선교인 까닭에 시민단체들을 도울 수 있고, 또 도와야 할 것이다. 당장은 어렵겠으나 환경선교 차원에서 시민단체와의 연계는 깊이 생각할 주제이다.
이들 시민단체는 해마다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기후회담 자리에서 약자들의 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창조신앙을 고백하는 우리보다 자연을 지키려는 이들의 열의가 훨씬 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70년간 이어진 남북의 간격을 허물어뜨릴 좋은 기운이 최근 한반도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하지만 북쪽을 남쪽처럼 만들려 한다면 그것은 다시 큰 죄를 짓는 일이다. 남북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도 기후붕괴는 극복해야 할 남북 공동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몸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듯, 기후가 붕괴하면 남북의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 관점에서의 교류와 협력만이 아니라 생태적 관점에서 북쪽과 관계하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


1 이정배, 『생태영성과 기독교의 재주체화』(동연, 2010), 33-51.
2 Steve Vanderheiden, Atmospheric Justice(Oxford Univ. press, 200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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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 | 스위스 바젤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하였고, 30년 동안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후 퇴직하였다. 현재 현장(顯藏)아카데미를 통해 신학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생명평화마당 공동대표, NCCK 신학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며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을 위해 애쓰고 있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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