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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9월호)

 

  조중 접경지 여행기 - 압록강, 두만강에 가다
  

본문

 

2018년 6월 1일 오전 9시 40분, 중국 대련공항에 내렸다. 53인승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조중 접경지역 및 백두산 평화기행”에 참가한 이들은 38명이나 됐다. 여러 차례의 조중 접경지 여행 중 가장 많은 숫자다. 이 여행을 준비한 전주YMCA와 여수YMCA 회원이 23명이고, 나머지는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번 여행에는 전주YMCA 이사장을 비롯하여 전주, 광양, 여수YMCA에서 이사장을 역임한 임수진, 정철호, 천상국 선생들도 참가하였다. 전주YMCA와는 세 번째 조중 접경지 여행이다. 이번에도 평화와 통일문제에 관심이 큰 조정현 사무총장이 여행을 준비했다. 공항에서 만난 가이드는 평양 출신의 한족 화교인데, 북한의 한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나는 만주지역 한인들의 항일운동사와 압록강, 두만강변의 기독교사 강사로 참여하였다.

여순(뤼순)으로
버스가 출발하자 전주YMCA 김종기 이사장이 기도했다. 먼저 대련의 서쪽 끝 여순으로 갔다. 여순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시작된 항구도시, 이곳에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선생 등이 재판받고 옥사한 여순법원과 감옥이 있다. 러시아의 조차지(租借地)였던 여순에는 러시아가 지은 감옥이 있는데,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한 후 일제는 최대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이곳을 증축했다. 이 감옥에서 1945년까지 한인만 4,000여 명이 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요 사학자인 신채호 선생은 1936년에,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인 이회영 선생은 1932년에 옥사했다. 감옥은 매우 커서 빠른 걸음으로 둘러보는 데도 1시간가량 걸렸다.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체포되었지만, 거기에는 일본 법원이 없어서 이곳에 와서 재판을 받았다. 선생이 144일 동안 갇혔던 방을 보니 선생의 당당한 말이 떠올랐다. “이번 거사는 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동양평화를 위해서 한 것이다.” “모든 나라가 자주독립할 수 있는 것이 평화다.” 그렇다. 국가 간의 평화는 자주독립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거사가 10년 뒤 3・1운동으로 나타났다. 우리의 조중 접경 여행에서 얻은 첫 교훈이었다.
다시 대련으로 돌아와서 단동까지는 고속도로로 이동했다. 대련을 벗어나자 멀리 비사성의 절벽이 보였다. 수, 당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성으로 고구려 천리장성의 시발점이다. 단동까지는 다섯 시간이나 걸렸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인접한 중국의 변경도시로 이미 1900년대 초부터 영국영사관과 일본영사관이 설치된 항구도시이다. 1911년 11월에는 단동과 신의주를 잇는 압록강철교가 개통되어 이 철교를 통하여 수많은 농민과 항일지사들이 만주로 갔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호텔로 가기 전에 이륭양행이 있던 곳으로 갔다. 여행객들은 이륭양행 구지로 흥륭가 25호, 즉 지금의 단동시 건강교육소를 찾아가지만, 그 건물이 아니라 흥륭가에서 압록강변 쪽으로 마지막의 안동해관 근처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륭양행은 영국인 조지 쇼가 경영하던 무역회사였는데, 단동과 상해 사이의 해상무역 운수뿐만 아니라 여객운수 사업도 했다. 조지 쇼는 임시정부와 국내 및 만주 지역의 독립단체와의 통신 업무를 전담하는 사무실을 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고 자신의 기선으로 무기, 출판물, 자금 등을 안전하게 운송, 보관해줌으로써 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백범 김구도 3・1운동 직후에 단동에 도착하여 이륭양행의 계림호를 타고 4월 13일 상해에 당도하였다. 오늘날 북중 접경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단동에서 이륭양행 구지를 찾아가는 이유도 조지 쇼의 독립운동 지원을 상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단동(단둥), 고려문, 압록강단교
어젯밤은 압록강 한가운데 섬에 서 있는 베니스호텔에서 잤다. 수년 전에 새로 지은 쾌적한 호텔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바로 눈앞에 신의주가 보였다. 7시 15분 호텔을 나서 고려문으로 떠났다. 단동에서 북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이다. 고려문은 옛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 명이나 청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처음 지났던 관문이다. 중국의 기독교가 이곳을 거쳐 조선에 소개됐다. 목책을 둘러쳐서 경계를 삼았다고 해서 ‘책문’(柵門)이라고도 하고, 변경에 있는 문이라 해서 ‘변문’(邊門)이라고도 부른다. 병자호란 때 잡혀간 고려인들이 살았다고 해서 ‘고려문’(高麗門)으로 부르기도 한다. 책문(柵門)의 ‘책’이란 한길 반쯤 되는 나무를 세우고 그 사이사이에 나무를 엮어서 사람이나 말이 드나들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토마스 선교사의 전기 『도마스목사전』을 쓴 오문환이 1930년 1월 봉천(심양) 방문 후 평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려문역에서 내린 적이 있다. 고려문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를 안내하던 역부가 앞산 중허리에 남아 있는 이전의 울타리를 가리켰다. 그것을 보고 나서 오문환은 “조선교회사 상으로서의 이 문은 우리가 주의를 일으켜 한 번 더듬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옛적 선교사들이 복음을 가지고 이 문을 깨서 조선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깨지 못하고 한 해 이태를 문 옆에서 기다리다가 그만 죽기도 하고 혹은 이 문을 깨고 들어오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후 긴 세월을 만주 벌판에서 헤매기도 하였다.” 우리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를 오문환이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 변문의 배후 마을이 변문 마을이다. 지금은 약 2,000여 채의 민가가 있다고 한다. 1780년대 연암 박지원은 이곳을 지났는데,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민가가 20-30여 채가 있다고 적고 있다. 이 마을을 지나가는 단동–심양 열차가 쉬어가는 역 이름은 이 마을 뒷산의 이름을 따서 일면산역이다. 그러나 1964년 이전, 이 역의 이름은 고려문역이었다. 지금은 행정구역으로 ‘변문진’(邊門鎭)에 속하며 단동으로부터 봉황성시(鳳凰城市)로 가는 국도 304번 그 연도에서 변문진의 표적을 볼 수 있다. 옛 책문이 있었다는 곳은 현재로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옛 고려문은 사라졌지만, 지금은 1995년 5월에 설치된 변문진이라는 비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1794년 12월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선으로 잠입했다. 그 후 김대건, 최방제, 최양업 세 소년도 바로 여기를 통해 중국으로 빠져나왔다. 사신들을 따라 연행길에 오른 상인들이 이곳 책문 일대에서 중국 상인들과 교역을 했기 때문에 ‘책문후시’(柵門後市)라는 이름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지금도 길게 늘어선 커다란 시장이 있는데, 이곳이 책문후시일 것이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휴일인지 장터에 상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단동으로 돌아와서 압록강철교에 올랐다. 철교 위에서 길이가 803km나 되는 압록강을 보니 1929년 연말 이 다리를 건넜던 오문환의 글이 생각났다. “1794년 12월에 건넌 중국 신부 주문모를 비롯하여 유방제(劉邦濟), 모방, 샤스틴, 앵벨, 김대건, 최도마를 차례로 네가 다 건네 주었지!” 백홍준과 그의 친구 세 명이 1879년 이 강을 건너가 영국의 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렇다. 압록강과 고려문은 한국인들이 새 진리와 새 문명을 수용하려면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었다. 지금은 이 관문에서 남북통일의 아우성을 듣는다.
북한과 중국을 연결하는 다리는 20여 개가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압록강단교이다. 신의주와 단동을 연결하는 압록강철교가 가설된 것은 1911년이었다. 중앙에는 철도 선로가, 양측에는 인도가 설치된 철교였다. 교량의 자재와 구조물은 미국에서 제작된 것이라 미국에서 인천까지는 해상수송으로, 인천에서 신의주까지는 화차로 옮겼다. 건설비는 중국과 일본이 분담하였다.
이 단교는 ‘105인사건’(또는 ‘데라우치 총독 모살음모사건’)의 배경이 되는 다리이다. 1911년 11월 1일에 압록강철교 준공식이 신의주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일제는 준공식 2주 전에 이 행사에 참석하는 데라우치 조선총독을 암살하려고 음모했다는 사건을 날조하고, 주로 서북 지역의 기독교인 학생들과 민족주의자들을 체포, 수감했다. 이 사건의 재판에서 105명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여 ‘105인 사건’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신의주 아래 선천의 신성학교에서 공부한 백낙준이 1927년 예일대학교 대학원에 제출한 박사논문에서 소개했다. 이런 한국기독교사는 중국 가이드로부터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해방 직후에는 소련군이 이 다리를 통해 단동에서 신의주에 들어왔다. 소련 군정에 맞서 이유필, 윤하영(신의주 제1교회 목사), 한경직(신의주 제2교회 목사)이 평북의 도청 소재지 신의주에서 만든 것이 ‘사회민주당’이었다. 동경의 연합군사령부를 수신자로 신의주에서 1945년 9월 26일 보낸 영문 서신(“To the Headquarters of Allied Forces”)에서 윤하영과 한경직은 자신들이 창당한 사회민주당을 언급하는데, 이 서신에 근거하면 창당 초기에 ‘기독교사회민주당’이라는 당명을 사용했다는 주장이 의심스럽다. 이 편지에서 윤하영과 한경직은 소련군의 신의주 진주(8월 30일) 이후 좌파 세력의 부상을 우려하면서 주민들을 “올바른 원칙들”에 따라서 인도하기 위해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고 했다.
그후 압록강철교는 전화(戰火)의 상처를 입었다.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이 이 다리를 통해 참전하자 미국 공군은 이 다리를 폭격하였다. 1950년 11월 8일 미 B29기가 이 다리를 폭파한 후 중국 쪽으로 절반만 남아 있어 압록강단교(鴨綠江斷橋)가 되었다. 미 공군은 120여 대의 B29 폭격기로 소이탄과 폭탄을 떨어뜨렸는데, 이때 신의주 제1교회로부터 제7교회까지, 그리고 동부성결교회와 서부성결교회의 예배당이 파괴 소각되었다. 폭격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는데, 첫날 수많은 신의주 주민들이 중국 단동으로 대피하다 수백 명이 다리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단동에 머물던 중국의 종군기자가 이 참상을 기록에 남겼다. 다리에 오르니 기도가 절로 나온다. “주여, 이 나라에 평화를 주소서!”
압록강철교에서 내려와 압록강 상류 쪽으로 60km쯤 떨어진 하구에 도착하니 정오가 다 되었다. 여기에도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다리가 하나 있는데, ‘하구단교’이다. 전쟁 때 끊어진 모습 그대로였다. 이 다리는 6・25전쟁 당시 모택동의 아들 모안영이 건넌 다리인데, 우리는 배를 타고 이 다리를 지나 압록강변의 동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집안(지안), 광개토대왕비, 신채호
6월 3일이다. 단동에서 고구려의 옛 수도 집안까지 다섯 시간이 걸렸다. 일행은 밤늦게 홀리데이인호텔에 짐을 풀었다. 집안은 5-6세기 고구려가 만주와 요동반도 일대를 장악했던 시절의 수도이다. 우리는 집안에서 국내성 성벽의 흔적을 보았고, 광개토대왕비와 광개토대왕의 아들 묘로 추정되는 장군총을 둘러보았다. 집안은 언제나 날이 뜨겁다.
광개토대왕비는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칭송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고구려의 건국 과정과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을 연대순으로 기록하였다. ‘총’이나 ‘분’은 특이한 유물이 발견된다든지 다른 무덤과 차별화되는 점이 있지만 누구의 무덤인지 모를 때 쓰는 말이다. 이번에 본 장군총은 지난해와 달리 ‘장수왕릉’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 외양이 웅대했다. 우리는 어제 환인현 오녀산성에 올랐다.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이다. 오녀산성에 오르기 전 우리는 버스 안에서 한자로 쓰인 광개토대왕비 비문을 몇 줄 읽었다.
신채호 선생은 1914년 현재의 길림성 환인에서 동창학교 교사로 1년가량 머문 적이 있다. 그때 윤세복, 이길룡 등과 함께 백두산에 오르고 집안의 광개토왕릉도 답사했다. 선생은 광개토대왕비를 답사하고 나서 우리의 역사를 만주를 무대로 하는 부여족이 토착족인 한족을 제압해나간 역사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부여족을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를 중시했는데, 선생 일행은 돈이 없어 일본 사람이 탁본해서 파는 광개토대왕 비문의 가격을 물어보기만 했으며, 여관에도 하루밖에 머물지 못했다. 그러나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그것만으로도 고구려의 종교, 예술, 경제력 등이 어떠하였는지가 눈앞에 훤히 되살아났다고 회고했다.

한 번은 네댓 명의 벗들과 함께 압록강 위쪽의 집안현 즉 제2환도성을 둘러본 적이 있다. 그것은 내 일생을 두고 기념할 만한 멋진 구경이었다. 여비가 부족해서 능과 묘를 모두 구경하지 못했고, 그래서 전부 몇 개가 되는지 세어보지도 못했다. 능으로 인정할 만한 게 수백이고 묘로 인정할 만한 게 1만 개 정도라고 억측해봤을 뿐이다.
그 뒤 마을 사람이 주은, 대나무 잎이 그려진 쇠자[金尺]와 현지의 일본인이 탁본해서 파는 광개토왕릉비문의 가격만을 물어보았고, 부서진 수백 개의 왕릉 가운데서 요행히 남아 있는 네모반듯한 8층 석탑 형식의 광개토왕릉과 그 오른쪽에 있는 제천단을 붓으로 대강 그려서 사진을 대신했다. 왕릉의 너비와 높이는 직접 발걸음으로 재보았다. 높이는 10장(약 30미터_옮긴이) 가량이고 밑면의 둘레는 80발(1발은 두 팔을 벌린 상태에서 양손의 거리_옮긴이)이었다. 다른 왕릉의 경우에는 윗부분이 부서져서 높이를 알 수 없었지만, 밑면의 둘레는 광개토왕릉과 동일했다. 왕릉 윗부분에 올라 돌기둥 자취와 기와의 파편과 드문드문한 소나무・잣나무를 보고 《후한서》(後漢書) <동이 열전> 고구려 편의 “고구려는… 금은보물을 장례식에 다 쓰고,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고 소나무・잣나무를 심었다”는 간략한 구절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수백 원이 있으면 묘 한 개를 파보고, 수천 원 혹은 수만 원이 있으면 능 한 개를 파보겠지. 그러면 수천 년 전 고구려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겠지’ 하며 꿈을 꾸기도 했다. 슬프다. 하늘이 감춰둔 비사(秘史)를 보고 나는 무엇을 얻었던가? 인력과 돈이 없으면, 재료가 있더라도 나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비록 하루 동안 겉모습만 대략 관찰했지만 고구려의 종교・예술・경제 등이 어떠했는지 눈으로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집안현을 한 번 보는 것이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만 번 읽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 단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조선상고사』(역사의 아침, 2014)


광개토대왕은 374년에 태어나 412년에 죽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354년에 태어나 430년에 사망했으니 두 사람은 거의 동시대 사람이었다. 아구스티누스는 방대한 분량의 신학서와 철학서를 남겼다. 우리는 지금도 그의 『고백록』을 읽는다. 그런데 대왕이 토지를 넓혔다는 것 말고 그의 또는 그 시대의 사상적 유물은 무엇일까? 비문이나 벽화에서는 그런 것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집안은 광개토대왕릉뿐만 아니라 372년 불교를 공식 수용한 소수림왕의 능이 있는 곳이다. 조선인들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기독교 예배당을 세운 곳이기도 해서 한국 종교사에서도 뜻깊은 곳이다. 19세기 후반 압록강을 건너간 한인들이 예배당을 세웠는데, 그것을 기념하여 예배당 앞 바위에 새긴 글이 남아 있다. 그것을 보려면 단동 방향으로 40km쯤 떨어진 유림진(楡林鎭)으로 가야 한다. 이 바위에 “耶蘇敎 初立, 1898, 죠션인”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야소교 초립’, 예수교당이 처음 세워졌다는 뜻이다.
수년 전 이 바위를 처음 보았을 때 첫 조선인 교회사가의 메모에 가슴이 뛰었다. 이렇게 간결하고 분명하게 역사를 기록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 지역에 몸을 붙여 살던 초기 신자들은 어려운 유이민 생활 가운데서도 1898년 집안현 이양자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웠다.(『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1928, 55.) 이곳은 어제 들러야 했는데 졸본성과 가는 길이 다르고 시간도 없어서 들리지 못했다. 이곳 사람들은 심양에서 가져온 한글성서를 읽었다. 한편 조선어로 번역된 성서를 인쇄하던 식자공 김청송은 고향인 집안으로 가서 성서를 반포하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 남만주는 이렇게 기독교 전래의 통로가 되었다. 그때 성서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다. “쳐음에도가이스니도는곳 하느님이라.” 야소교 초립 바위는 당시 성암감리교회의 이한설 목사가 1994년 처음 발견했다. 그는 만날 때마다 통화며 집안을 말하면서 그 바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나는 2015년 8월에서야 이양자 교회 터를 찾아갔다.
집안 시내 옆으로 압록강이 빠르게 흐른다. 조금 일찍 일어나 조반 전에 압록강변을 걸었다. 이 강 건너편은 북한의 만포이다. 만포는 6・25 때 서울에서 피랍당한 40여 명의 인사들이 피난길에서 잠시 머문 곳인데, 독립운동가요 정치가인 김규식은 북한군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사망했다. 소설가 이광수도 이곳 만포까지 와서 병사했다. 그래서 집안은 가슴 아픈 도시이다. 신학자 서광선 교수도 어릴 적 만포에서 지낸 적이 있다. 그는 만포 아래쪽 강계와 압록강변 만포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그 후에는 양강도 김형직군(후창)에서 일했다. 압록강변에서 만포를 바라보니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11시가 넘었다. 통화로 길을 서둘렀다. 오늘은 주일이라 달리는 버스에서 전주YMCA 통일위원장 이상빈 목사가 기도회를 인도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나라가 일제의 침략으로 멸망하게 되면서 이회영, 이시영 여섯 형제와 이상룡, 김동삼, 이동녕, 여준, 김창환, 주진수 등 민족운동가들이 간 길이다. 그들은 통화 위쪽 유하현 삼원보에서 ‘경학사’라는 학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통화에 도착하니 오후 1시 40분, 서둘러 점심을 먹었다.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다. 림강시, 장백현을 거쳐 백두산 인근 송강하까지 가야 한다. 통화에서 림강까지는 90km인데 백산시를 지나면서부터는 길이 좁고 터널이 많아서 2시간이나 걸렸다. 림강은 집안처럼 압록강에 접해 있는 도시다. 압록강 건너 북한의 마을과 학교가 보인다. 여기저기 밭에서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일을 하고 있었다. 트럭도 보이고 자전거로 이동하는 사람도 보인다. 림강은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가 1874년 가을 심양을 출발하여 방문한 곳이기도 한데, 그는 여기 압록강변에 서서 강 건너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다. 로스처럼 우리 일행도 누군가는 북녘땅을 바라보면서 교회가 다시 세워지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여기도 북한으로 가는 림강압록강교가 있는데, 다리 건너편이 자강도 중강군이다. 어릴 적 학교에서 배우기를 중강군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추운 곳이라는데, 1933년 1월에 영하 43.6도를 기록했다. 중강군은 1920년경 김일성 가족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잠시 거주한 곳이기도 하다.
김일성 가족은 중강진에 잠시 거주하다 림강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여덟 살의 김일성은 한 중국인 소학교에 입학했다. 그 학교가 여기 어디 있을 텐데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중강군을 지나면 양강도가 시작되는데, 압록강과 두만강 두 개의 강이 시작되는 도라고 해서 ‘양강도’(兩江道)라는 지명이 생겼다. 자강도의 중강군에서부터 양강도의 장백현까지는 280km나 되는데, 버스는 압록강변을 따라 몇 시간을 달린다. 단동과 집안에서 압록강을 보았지만, 그곳의 압록강에 비하면 이곳의 폭이 훨씬 좁아 북한 마을이 더 잘 보이고 강이며 산, 촌락의 풍경도 더 아름답다.
양강도에 들어서면 김형직군이 시작된다. 바로 이곳에서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 독립운동을 시작했으니 양강도를 만들면서 김형직군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팔도구가 나온다. 버스가 팔도구에 잠시 섰는데 압록강 건너에 인민군 초병이 몇 사람 보였다. 우리 일행이 큰 소리로 안녕하냐고 인사하니 반응이 없었는데 버스에 오르면서 다시 손을 흔드니 초병들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압록강, 두만강 여행에서 여러 번 북측 병사들을 보았지만 그들이 이렇게 손을 흔드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남북정상회담 때문일 것이다.
김일성 가족은 림강에 살다가 팔도구로 이사했다. 『세기와 더불어』에 김일성 가족은 팔도구에 거주하면서 주일이면 압록강 건너 포평예배당에 다녔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예배당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명칭이 한국교회사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식으로 조직된 교회는 아니었을 것이다. 김일성은 여기에서 학교를 다니다 2년 동안 자기 외할아버지가 세운 평양의 창덕소학교에서 공부했다. 김일성은 14살에 다시 팔도구가 속한 무송현으로 돌아왔는데, 그 무렵 그의 부친 김형직이 32세의 나이에 병사하였다. 얼마 후 15세의 김일성(당시 이름은 김성주)은 어머니와 동생들을 남겨두고 1927년 1월 길림으로 가서 1929년 가을까지 육문중학에서 공부했다. 그때 길림에는 오동진, 장철호, 손정도, 김사헌, 현묵관(현익철), 고원암 등 아버지의 친구들이 있었다. 김일성은 이들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과정에 독립군 간부들과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팔도구의 중국군 검문소가 보인다. 여기서는 총을 든 군인들이 여권까지 검사한다. 군인들은 산사태로 길이 막혔다며 어딘가로 돌아서 가라고 했다. 갈 길이 먼데 길이 좋지 않은 산속 길로 이동하느라고 예정보다 한 시간 이상을 더 허비했다. 그러다 원래 가려던 길을 만났는데 13도구다. 어둠 속에서 길가의 입간판을 보니 “월경자 수용 금지, 월경자 숙식제공 금지”라는 경고문이 희미하게 보인다. 2016년 10월 1일에 세운 간판이다. 월경자들은 북녘땅에서 온 사람들을 가리킬 텐데, 이런 야밤에 그들의 딱한 처지를 생각할 줄은 몰랐다. 국가가 있으면 국경이 있고 국경에는 늘 병사들이 있기 마련, 중국군 병사를 실은 차량이 한 대 지나갔다.
장백현까지는 압록강을 따라가는 길이지만, 이미 어두워져 그 아름다운 압록강 풍경이며 북녘 마을을 볼 수 없었다. 이곳 13도구의 앞쪽은 김일성의 첫째 부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김정숙군이다. 김정숙은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인데 어린 김정일과 김경희를 남기고 1949년 9월 3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김정숙군이 있고 그다음이 삼수군이다. 해방 이후에 김일성 정부는 사상범들을 삼수군 오지에 보내거나 동해 쪽 아오지탄광에 보냈다고 한다.
가로등도 없는 오지의 국경 길을 한참 더 달리니 장백이 나왔다. 밤 10시 30분이다. 장백 맞은 편 국경 도시가 북한의 혜산시인데 어두워 희미하게만 보인다. 여기서 자도 좋으련만 내일의 백두산 등산을 위해서 150km나 떨어진 송강하까지 가야 한다.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쳤다.
혜산시가 끝나니 보천군이 시작됐다. 그 위쪽으로는 백두산이 있는 삼지연군이다. 삼지연군은 산림이 군 전체의 95%나 돼서 교회도 없던 곳이다.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김일성 부대가 혜산 동북쪽의 작은 마을 보천보를 점령해 경찰 주재소와 행정 관청을 불태웠다. 이 부대는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 일경 7명이 사망했다. 학자들은 이 전투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지만, 김일성이란 이름을 전국에 알린 계기가 된 전투였다. 「동아일보」는 이 사건에 대해 ‘비적’(匪賊)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긴 했지만, 호외를 발행하며 속보로 전했다. 남한에서는 2002년까지만 해도 교과서에서 이 전투를 가르치지 않았다. 역사도 정치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보천보 전투가 6월 4일에 일어났는데 우리는 6월 3일 밤 11시에 보천군 옆을 통과했다. 그때 김일성의 나이는 25세였다.

백두산에서 용정으로
송강하의 천사(天賜)호텔에 도착하니 6월 4일 0시 30분, 고달픈 여정이었다. 운전기사는 길이 끊겨 10시간 넘게 차를 몰아야 했다. 노심초사한 가이드가 고마웠고, 아직도 우리를 기다리는 호텔 식당의 일꾼들이 고마웠다. 버스에는 하루 종일 버스타기가 힘들었을 초등학생 한 명, 중학생 한 명, 70대 중반의 어른도 세 명 있었는데 모두 감사의 박수를 쳤다.
연길에 체류하고 있는 이옥희 선생이 여행에 합류했다. 그도 어제 이 호텔에 도착했다. 며칠 동안 우리의 여행길은 기원전에는 고조선 땅이었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땅이었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발해에 속한 곳이었다. 오늘은 고조선이며 삼국시대, 고구려 사람들이 올랐을 백두산에 오르는 날이다. 이 산이 중국 사람들에게는 장백산이다. 표를 끊고 장백산 전용 버스로 한참을 올라갔다. 버스에서 내려서 1,400개의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 흔히 ‘서파’라고 부르는 서쪽 길이다. 예년보다 빨리 곳곳에 흰색의 야생화가 피었다. 백두산에 오르니 날씨가 좋아 천지가 훤히 보였다. 천지 또한 예년보다 빨리 녹아 있었다. 천지를 보니 가슴이 벅찼지만, 산정에서 누구는 갈라진 조국을 한탄하면서 평화로운 내 나라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을 것이다. 다시 계단을 내려올 때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여기서까지 조국이란 것을 생각해야 하는가?’
용정에 도착하니 어둠이 내렸다. 청산리 전적지를 답사하지 못하고 용정에 도착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벌써 여행의 반이 지났다. 두만강의 지류 해란강이 흘렀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걸어서 용문교를 건넜다. 용문교에 서니 노랫말이 생각났다.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다시 버스에 올라 일송정이 어렴풋이 보이는 길가에서 차를 멈추었다. 공터에 올라 손을 잡고 <선구자>를 합창했다.
연길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내일 일정을 상의했다. 원래 오전 중에 은진중학이며 명동학교 등 용정의 유적을 보고 나서 국경도시 도문까지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연길역에서 오후 3시 47분 하얼빈행 기차를 타는 것이 걱정되었다. 도문 방문을 포기하고 그 대신 용정을 좀 더 천천히 둘러보고 비암산 일송정에 오르기로 했다. 도문에 가서 봉오동 전적지며 두만강 나루터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두만강은 여기 용정 인근 삼합진에서도 볼 수 있는데 수년 전부터 중국 군인들이 외국인들의 방문을 차단하고 있다. 삼합진 건너편은 함경북도 회령시. 김정숙이 태어난 곳이요, 청년 시절 한때 한신대의 김재준 목사가 일했던 곳이다. 그는 경흥군 아오지탄광이 있는 아오지리 출신이다. 아오지탄광은 지금은 ‘6월 13일 탄광’으로 불린다.
호텔로 가기 전에 연길 유경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북한 정부가 운영하는 음식점이다. 식당을 나오면서 종업원들과 손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했다. 북녘 동포의 손을 잡아보기는 2004년 평양 방문 이후 처음이다. 산에 올라도, 음식점에 들러도 분단이며 통일을 생각하는 여행길이다. 조선 민중이 짊어져야 하는 짐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 이 짐을 벗을 것인가?

용정의 유적과 인물들
오늘은 6월 5일이다. 아침 7시 30분이 되니 연길의 세기호텔로 문영걸 박사가 왔다. 그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용정에서 보낸 데다 한국과 중국 대학에서 종교사를 공부해서 용정의 역사며 기독교사를 이야기해줄 수 있는 적임자이다. 오늘 오전에는 일송정에 오르고 용정과 명동촌을 방문할 것이다.
먼저 어젯밤 길가에서 희미하게 보았던 비암산 일송정으로 갔다. 전에는 길이 좁아 버스로 가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길을 넓히고 입장료를 받았다. 산 정상까지 버스가 올라갔다. 일송정에 오르니 노랫말처럼 ‘한 줄기’ 해란강이 눈앞에 보였다. 보통은 차창으로 일송정을 조망하는데 우리는 도문 방문을 취소했기 때문에 비암산에 올라 한 줄기로 뻗은 해란강을 볼 수 있었다. 해란강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흐르는 강으로 노랫말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에 등장하는 강이라서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강이다.
비암산에서 내려와서 용정 시내에 있는 일제 시기의 일본영사관 건물을 보고 명동촌 윤동주 생가로 갔다. 6월 초 날씨답지 않게 날이 뜨거웠다. 입구에 ‘중국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쓰여 있다. 윤동주가 중국인이라는 것인데,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말이다. 보통 이곳 윤동주 생가에 들르지만, 바로 근처에 있는 다른 명소는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있다. 옛 모습 그대로 새로 지은 명동학교 건물에는 ‘명동학교 옛터기념관’과 ‘명동촌 박물관’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아직 정식으로 개관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명동촌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명동학교의 역사가 사진과 함께 잘 전시되어 있었다.
명동촌에서 20km를 더 가면 삼합진이 나오고 두만강 건너 회령시가 보이는데 군인들이 통행을 막고 있다고 해서 다시 용정 쪽으로 차를 돌렸다. 캐나다장로회는 1912년 용정에 선교지부를 설치했다. 이 선교지부가 은진중학, 명신여학교, 제창병원을 운영했다. 조금 가니 장재촌이다. 이옥희 선생의 안내로 규암 김약연(1868-1942) 선생이 거주하던 옛집을 찾았다. 선생은 회령에서 북간도 화룡현 장재촌으로 이주하였다. 멀리 동네 뒷산 중턱에 그의 묘지가 보였다. 그는 땅을 사들여 한인 부락 명동촌을 만들고 사당(규암재)을 세워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1908에 그가 세운 명동서숙은 명동학교, 명동중학, 명동여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는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동만주의 대통령이
었다.
한국 교육사에서 명동학교만큼 뛰어난 인물을 배출한 학교가 은진중학이다. 용정에서 먼저 은진중학 터에 들렸다. 지금은 중국 학생들이 공부하는 용정시 제4중학이다. 그 교정 한쪽에 은진중학 기념비가 서 있다. 1936년 8월 평양 숭인상업학교 성서 교사 김재준이 이 학교 교사로 왔다. 캐나다장로회 선교부가 세운 중등학교였다. 김재준이 교사로 부임했을 때 문익환, 문동환, 강원용, 장준하, 안병무 등이 이 학교의 학생이었다.
이상설 선생이 세운 용정 최초의 한인학교 서전서숙 옛터로 갔다. ‘서숙’은 글방을 뜻한다. 이옥희 선생은 이 학교가 설립된 1906년 당시 8,000여 명의 조선족이 서숙 인근에 거주했다고 했다. 이상설은 1907년 4월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헤이그에서 열리는 평화회의에 갔는데, 그가 떠나게 되자 재정난과 일제의 감시와 방해가 심해져서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개교 1년만에 폐교하게 되었다. 그다음에 생긴 신교육기관이 명동학교이다. 서전서숙 자리에 지금은 조선족 학교인 용정실험소학교가 서 있다. 학교 건물에 ‘민족의 얼을 이어가는 룡정 어린이’라는 글씨가 크게 붙어 있고 운동장 한켠 커다란 돌에 ‘서전서숙 옛터’라고 새겨 있다. 1906년 10월 애국지사 이상설은 이곳에 연변 최초의 조선족 근대학교요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개숙하였다. 그 옆에는 이상설 선생을 기리는 정자가 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선생이 남긴 말이다. 2006년에 서전서숙 100주년 모임이 있었는데, 기념비는 그때 세운 것이다. 우리를 안내하는 문 박사는 자신이 이 학교 출신이라 했다.
학교 정문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중국건설은행 건물이 보였다. 문 박사는 그 자리에 용정중앙교회가 있었고 어릴 때 그 교회 건물을 보았다고 했다.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 목사가 1932년부터 목회했던 교회다. 이 교회는 공산주의자들이 교회를 접수하면서 1946년 폐쇄되었다. 여기 교인들이 서울에 세운 교회가 한빛교회인데 용정중앙교회 이야기는 이제 문영미가 쓴 한빛교회의 역사서 『세상을 품은 작은 교회』(2017)에서나 들을 수 있다.
우리는 지난 며칠 동안 우리를 태워준 버스와 연길역에서 헤어졌다. 하얼빈으로 가는 기차에 오르니 도문에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일행 중 한 사람도 도문에 가서 두만강을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는데, 왜 두만강을 보고 싶어 했는지 궁금했다. 몇 해 전에 연길호텔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니 두만강을 얘기하면서 역사의 강, 민족의 강, 희망의 강이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강을 보고 건넜지만 이렇게 많은 의미가 부여되는 강은 두만강이 처음이었다. 두만강의 길이는 505km, 그런 강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기차는 오후 3시 47분 정시에 연길역을 출발했다. 돈화, 길림, 장춘을 거쳐 하얼빈에 도착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길림은 김일성이 공부한 곳이요, 장춘은 박정희가 공부한 곳이다. 장춘의 옛 이름은 신경이다. 길림역과 장춘역을 보니 수년 전 김일성이 공부한 길림의 육문중학과 박정희가 공부한 장춘의 만주육군군관학교를 찾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장춘역과 부여역을 통과했다. 부여역은 부여족이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약 1,000년 동안 부여국을 세워 활동했던 곳이다.
오후 8시 12분에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미 날이 어두웠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이 체포된 곳, 독립운동가요 기독교 전도자였던 남자현이 옥에 갇힌 곳, 일본 수상 가쓰라 타로의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손정도 목사가 일본 경찰에 붙잡힌 역사적인 도시에 도착한 것이다. 이 도시에는 중국에서 활약한 작곡가 정율성 박물관도 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선인과 중국인, 몽골인 등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벌인 일본의 세균전 부대인 731부대도 있다. 우리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쏘았던 하얼빈역 옆의 낡은 호텔에 투숙했다.(이 여행기는 압록강, 두만강변의 여행과 그 지역의 교회사를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라서 여기서 맺는다.)

김흥수 | 목원대학교 한국교회사 명예교수이며, 본지 주간으로 일하고 있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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