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북한 지역의 종교
특집 (2018년 9월호)

 

  「로동신문」의 종교 관련 기사(2002-2017) 분석
  

본문

 

들어가며
이 글은 2002년부터 2017년까지 북한의 조선로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에 게재된 종교 관련 기사를 분석한 것이다. 「로동신문」은 1945년 11월 1일에 창간된 이후 지금까지 변함없이 북한을 대표하는 매체로 부동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처음 이름은 「정로」(正路)였는데 발간 이듬해인 1946년 9월 1일에 현재의 제호로 바뀌었다. 북한은 「로동신문」 창간일인 11월 1일을 출판절로 정해 지키고 있다.
「로동신문」 2002-2017년의 종교 관련 기사를 분석하는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2002년에 출간된 김흥수・류대영 공저 『북한 종교의 새로운 이해』의 부록인 “「로동신문」 종교기사 목록(1970-2001)”에 있다. 이 부록은 전체 450쪽인 책의 5분의 1에 가까운 85쪽 분량인데, 발굴과 접근이 쉽지 않은 북한 종교의 1차 자료로서 귀중한 가치가 있다. 필자는 본편보다 이 부록을 참고하기 위해 『북한 종교의 새로운 이해』를 더 자주 펼쳐보고 있다.
이 글은 그 부록의 속편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 부록도 마찬가지이지만 큰 한계가 있다. 먼저 꼽히는 문제는 「로동신문」의 성격이다. 「로동신문」은 북한의 중심 통치기구인 로동당의 입장을 대변하고 북한의 이익을 위한 매체이며, 북한의 용어를 빌면 ‘대중선전선동’의 가장 강력한 도구이고 무기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해하는 우리 식의 종교기사는 찾을 수가 없다. 이 글의 제목에서 ‘종교기사’라는 말 대신에 ‘종교 관련 기사’라는 말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도된 사실의 진실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자주 대하게 된다.
또 다른 문제는 2010년대에 들어서 종교 관련 기사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전에는 매년 30-50건 정도의 종교 관련 기사가 실렸는데 2014년에는 8건, 2015년에는 10건, 2016년에는 22건, 2017년에는 5건에 그치고 있다. 편집방침 또는 선전선동 방향의 변화, 종교정책의 변화 등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추정해보지만, 정확한 이유는 파악되지 않는다. 이런 한계들 때문에 「로동신문」의 종교 관련 기사는 많은 사실을 알려주면서도, 북한의 종교를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에 그칠 뿐 그 이상의 것이 되지는 못한다.

제일 많은 종교 관련 기사는 무엇인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종교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다. 우선 종교용어가 들어 있는 기사는 무조건 대상으로 하였다. 「로동신문」에 등장하는 사찰 기사는 사찰을 종교시설이 아닌 문화재로 다룬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종교 관련 기사로 간주하였다. 해당 기간의 「로동신문」에는 인민대학습당이 있는 남산재나 김일성・김정일의 태양상(모자이크 벽화)이 건립된 장대재 이야기가 몇 번 나왔는데 그 자리가 남산현교회와 장대현교회가 있던 자리라는 점에서 종교 관련 기사에 넣었다.
「로동신문」에는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의 출생일이나 사망일에 어김없이 관련 기사가 실린다. 특히 북한이 ‘정주년’(整週年)이라고 부르는 10단위의 해에는 전면, 또는 2-3면을 할애해서 요란한 특집을 마련한다. 김형직이나 강반석은 잘 알려진 대로 기독교인이었지만 「로동신문」에는 그런 내용이 전혀 없다. 그래서 그런 기사는 뺐다. 단, 김형직이 숭실전문 재학 시절에 종교를 반대하는 토론을 했다는 기사(2006년 3월 16일)와 신앙의 친구들과 함께 기자릉(箕子陵)에서 혈서를 썼다는 내용(2007년 3월 24일)은 종교 관련 기사로 분류했다. 혈서 이야기는 김형직의 친구였던 배민수 목사가 쓴 『배민수 자서전: 누가 그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연세대학교 출판부, 1999)의 82쪽을 인용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렇게 해서 뽑아낸 2002년부터 2017년까지 16년간의 종교 관련 기사는 모두 428건이다. 그 가운데 제일 많은 내용은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소식이 아니고 남한 종교단체들의 소식이며, 그 태반이 종교인 또는 종교단체가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거나 성명을 발표했다는 내용이다. 이런 기사가 전체 종교 관련 기사의 4분의 1 정도인 106건이다. 분석 작업을 하면서 처음 만난 기사도 “남조선의 한 종교인” 소식이었다. “《이북의 사회주의가 제일이다》 남녘겨례의 동경심”(2002년 1월 1일)이라는 제하의 이 기사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본문 중 큰따옴표로 묶은 부분과 아래처럼 인용 처리된 부분은 우리말 어법으로 고치지 않고 「로동신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참된 민중의 복지사회는 김정일장군님께서 빛내이시는 이북에서 꽃 피나고 있다. 이북사회에서는 만민이 평등하고 누구나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근심걱정없이 모두다 화목한 대가정에서 만복을 누리고 있다.》 이것은 남조선의 한 종교인이 자기가 그리던 리상사회를 공화국북반부의 현실에서 찾고 기쁨을 금치 못해 한 말이다.

2002년 초에는 “부쉬의 행각을 반대 종교계에서”(2월 9일), “민족의 량심으로 부쉬 징벌에 떨쳐나서자 종교인들과 대학생들 주장“(2월 21일) 등의 제목을 달고 남한의 종교인들이 ‘부쉬’(부시 대통령의 북한식 표기)를 맹렬하게 반대한다는 기사가 여러 번 실렸다. 2002년에 여중생 장갑차 사망사고가 일어나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많았는데 「로동신문」은 이와 관련된 남한 종교계의 동향을 자세하게, 그리고 강렬한 어휘들을 동원하여 보도하였다.

자주 언급된 인물은 누구누구인가
해당 기간의 「로동신문」에 제일 많이 등장한 종교인도 역시 북측 종교인사가 아니고 남측 종교인사인 한상렬 목사였다.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한상렬 목사는 여중생 장갑차 사망사고 당시 방미투쟁단 단장으로 백악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이 일이 2002년 12월 13일 자 「로동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는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2010년 6월 12일에 평양을 방문하여 8월 21일에 판문점을 통해 돌아올 때까지 70일간 북한에 머물면서 여러 활동을 하였으며, 「로동신문」은 이 기간에 18건의 기사를 통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보도하였다. 대표적인 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남조선의 통일인사 한상렬 목사 만경대 방문,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 참관”(6월 17일)
“남조선의 통일인사 한상렬목사를 환영하는 군중집회 진행”(6월 2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영남동지 남조선의 통일인사 한상렬목사를 만났다”(8월 20일)


한상렬 목사는 평양 도착 열흘 뒤인 6월 22일과 북한을 떠나기 사흘 전인 8월 18일, 두 차례에 걸쳐서 기자회견을 했는데, 「로동신문」은 6월 22일에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 그의 발언들을 다음 날 신문에 자세히 보도하였다. 그리고 그가 평양을 떠난 후에도 남한에서 재판을 받은 일과 그 밖에 그와 관련된 일들을 2010년에 25건, 2011년에 5건, 총 30건의 기사로 보도했다. 2010년 8월 22일에는 한상렬 목사 관련 기사가 하루에만 3건, 다음 날에만 4건이 실린 일도 있었다. 2011년 12월 6일 이후에 한상렬이라는 이름은 「로동신문」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많이 등장한 종교인사는 천도교의 오익제(吳益濟)와 류미영(柳美英)이다. 오익제는 남한에서 천도교 제24대 교령을 지냈는데 1997년 8월에 입북하여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과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해당 기간의 「로동신문」에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 삼가드립니다”(2002년 1월 2일)에서 시작해서 오익제가 김정일에게 보낸 편지 성격의 글 다섯 편이 실렸다. 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직함을 사용했으며 글 가운데 종교적인 내용은 없다. 2007년 8월 14일에는 “한울님의 나라에서 보낸 10년을 더듬어보며”라는 그의 글이 거의 전면으로 실렸는데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있다.

- 애국적인 민족종교로 내세워주는 공화국 정치하에서 천도교는 자기 본연의 리념을 현실로 꽃피워가고 있습니다.
- 저는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는 남쪽에서 오히려 천도교인으로 배척을 당했던 사람입니다. 그 땅은 민족종교로서 천도교가 뿌리내릴 땅이 아니였습니다.
- 공화국에서 10년간은 제 자신이 《신인간》으로 다시 태여남과 동시에 새로운 모습으로 비약하는 내 조국의 놀라운 현실을 직접 체험한 행운의 나날이기도합니다.


류미영은, 남한의 고위장성 출신으로 외무부 장관과 천도교 제7대 교령을 지낸 최덕신(崔德新)의 부인이다. 그녀는 1986년에 입북하여 천도교 청우당 중앙위원회위원장을 비롯하여 여러 직책을 가졌던 인물이며, 북한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성명을 종종 발표했다. 북한에서는 각종 주요 행사의 참석자 명단에 나타난 이름 순서가 권력 서열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류미영은 정부요인이 사망했을 때 장례위원으로 여러 번 이름을 올렸으며, 그 순서가 매우 빨라 그가 북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예를 들어 2008년 10월 28일에 사망한 로동당 정치국 위원 박성철(朴成哲)의 경우, 장례위원이 모두 66명이었으며 그중 류미영은 20번째에 그 이름이 올라 있고, 우리 귀에 익은 이름인 장성택은 35번째, 김양건은 36번째에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이런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반면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 위원장을 지낸 강영섭 목사의 경우는 이름이 등장하는 빈도가 매우 낮다. 무엇보다도 그가 2012년 1월 21일에 사망했을 때 「로동신문」은 그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강영섭 목사는 조그련 위원장 외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등 여러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오익제와 류미영이 사망했을 때 격식을 갖춘 부고가 실렸고, 류미영의 경우 장의식 소식도 여러 차례 보도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조그련의 현 위원장인 강명철 목사의 이름은 2013년 9월 22일에 “울라프 픽세트베이트 사무총장을 단장으로 하는 세계교회협의회 대표단이 21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비행장에서 강명철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맞이하였다.”라는 기사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로동신문」은 남한에서 매년 열리는 문익환 목사의 추모행사도 거르지 않고 보도하였다. 빌리 그라함(북한식 표기)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라함이나 그 보좌진들이 방북할 때도 빼놓지 않고 보도하였다. 또 통일교 교주 문선명의 사망과 그와 관련된 일들도 비교적 소상하게 전했다.

러시아정교회의 성격
「로동신문」은 평양에 있는 러시아정교회 정백사원에 대해 자주, 그리고 자세하게 보도하였다. 정백사원 착공식, 준공식, 준공 5돌, 10돌 때마다 러시아정교회 대표단이 왔으며, 「로동신문」은 이 사실을 빠짐없이 보도하였다. 대표단은 방북할 때마다 연회를 마련하고, 기자회견을 했다. 다음은 2003년 6월 24일에 행해진 정백사원의 착공식 기사(25일 신문) 전문이다.

〔평양 6월 24일발 조선중앙통신〕 정백사원건설착공식이 24일 평양에서 진행되였다. 착공식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조창덕 부총리와 평양시인민위원장 량만길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장재언회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지재룡부부장, 외무성 궁석웅 부상, 조선로씨야친선협회 위원장인 대외문화련락위원회 홍선욱부위원장, 조선정교위원회 허일진위원장 등 관계부분 일군들, 여러 종교단체 성원들, 평양시민들이 참가하였다. 대외담당 제1부위원장 클리멘뜨대주교를 단장으로 하는 로씨야정교회 대표단 성원들, 우리 나라 주재 로씨야연방 대사 안드레이 까볼로브와 대사관성원들, 여러 나라 외교대표들과 대사관성원들이 여기에 참가하였다. 착공식에 앞서 축성례식이 있었다. 착공식에서 한 연설에서 클레멘뜨대주교는 평양에서 정백사원건설착공식이 성과적으로 진행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신 김정일장군님의 덕분이라고 하면서 조선인민과의 정신적 유대를 강화하게 될 정교사원을 건설하도록 하여 주신 그이께 심심한 사의를 표시한다고 한 다음 로씨야정교회총대주교 알레씨 2세가 보내여 온 축전을 랑독하였다. 조선정교회위원장은 연설에서 정백사원건설착공식은 조로 두 나라 수뇌분들의 력사적상봉의 의의를 더 깊게 해주고 있으며 조로친선이 더욱 공고발전되기를 바라는 두 나라 인민들과 정교신자들을 기쁘게 해주고 있다고 말하였다.
정백사원의 건설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과 존경하는 울라지미로비치 뿌친대통령의 깊은 관심속에 날로 좋게 발전하는 조로친선을 더욱 강화하며 정의와 평화를 위한 두 나라 인민들의 정당한 위업실현을 추동하는데 적극 기여하게 될 것이다.


2006년 8월 13일에 있었던 준공식도 대개 같은 직책의 인사들이 참석하고,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종교시설 착공식에 부총리, 외무성 부상(차관), 러시아 대사가 참석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좀 지나치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로동신문」의 정백사원 관련 기사들을 살피면 ‘정백사원은 종교시설이면서 동시에 제2의 러시아 대사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사찰 이야기
불교의 경우, 「로동신문」에는 북한의 불교단체와 관련된 기사는 별로 없고, 사찰 이야기가 많은 편이다. “개성 령통사 복원락성식 진행”(2005년 11월 2일)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문화재로서의 사찰’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통치자(김정일)가 그곳을 방문하여 문화재로서 사찰을 잘 관리할 것을 당부했다는 점을 반복해서 부각하고 있다. 2002년 6월 5일에는 1면에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오랜 력사문화유적인 량천사를 돌아 보시였다”라는 제목으로 김정일이 함남 고원군 락천리에 있는 량천사를 찾은 기사가 실렸는데, 정치보도반이 작성한 이 기사에는 “우리 당의 올바른 력사문화유적보존정책에 의하여 량천사는 1천여년 전의 옛 모습을 오늘도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량천사의 관리원들이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문황산들을 더욱 빛내일 책임감을 안고 력사유적의 보존관리를 잘하고 있는데 대하여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면서 그들의 수고를 치하하시였다”라는 대목들이 있다. 같은 해 6월 9일 신문 3면에는 “절세의 애국자를 모시여 빛나는 력사문화유적 위대한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력사문화유적들을 잘 보존관리하자”라는 제목의 후속기사가 실려 있는데, 량천사의 책임자를 ‘주지’라고 하지 않고 “관리원 김기영동무”라고 하였다.
분석 대상 기간의 「로동신문」에 실린 사찰들 가운데 김정일이 방문한 사찰은 앞의 량천사를 비롯하여 평북 박천군의 심원사, 구월산의 월정사와 현암(달암절) 백두산의 종덕사 터, 안변의 석왕사이고, 소개된 사찰은 함남 금야군의 안불사, 황북 배천군의 강서사와 황남 신천군의 자혜사, 개심사, 모향산의 보현사, 황북 연탄군의 심원사(두 차례 소개) 등이다. 해당 기간의 불교 관련 기사는 모두 23건인데 그 가운데 6건은 일본 불교대표단의 방북사실을 보도한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찰 관련 기사이다.

나가며
전에는 종교단체 대표단이 해외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하고 귀국하는 기사를 종종 볼 수 있었다. 종교단체들 가운데는 조그련의 출국과 귀국 소식이 제일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런 기사가 사라졌다. 다른 채널을 통해서 알게 된 조그련의 최근 동향도 「로동신문」에서는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아쉽게 여겨지지만 해당 기간의 「로동신문」을 통해 종교와 관련된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몇 가지를 꼽으면 안창호 선생의 동생인 안신호가 ‘공화국’의 충실한 일꾼이 되었다는 이야기(2003년 8월 7일, 2006년 5월 23일), 숭실대 학장을 지낸 김성락 목사가 북한을 방문해서 1981년 7월 3일에 김일성과 식사를 같이 할 때 김일성이 ‘식전기도’를 권해 그를 감동시켰다는 이야기(2005년 8월 11일), 손정도 목사의 차남 손원태 박사의 애국열사릉 안장(2005년 1월 15일) 등이다. 또 김형직과 그의 가정이 팔도구에 거주할 때 출석하던 포평례배당이 남아 있다는 사실(2009년 1월 22일), 초산교회에서 세운 배신학교도 남아 있다는 사실(2006년 5월 5일)도 확인할 수 있었다. 북의 매체를 통해서 대하는 임현수 목사의 재판 이야기(2015년 12월 17일), 김동철 선교사 재판 이야기(2016년 4월 30일), 평양과기대 준공식 이야기(2008년 9월 17일)도 색다른 느낌을 준다.
지면이 부족해 구체적으로 소개하지 못하지만 「로동신문」을 통해 미국과 선교사들에 대해 북한이 가지고 있는 극도의 증오심을 재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북미관계가 점차 개선되고 있는데 앞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변화될지 궁금하다.
앞으로 「로동신문」 전체(1945-2018)의 종교 관련 기사 분석을 시도해 봄직한데, 필자가 이용하고 있는 통일부 북한자료센터(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 5층)에는 1940년대와 1950년대 신문은 보관되어 있지 않거나 결호가 많아 안타깝다.
이 작업을 하면서 종교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태도는 역시 우호적이 아니라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또 욕설과 심한 비난이 너무 많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올해 4월, 북한의 ‘막말’ 때문에 북미정상회담이 파국을 맞을 뻔했을 때 국내의 한 일간지에 “북한은 언어를 순화해야 국제무대에서 정상국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칼럼이 실린 일이 있었는데 이 작업을 하면서 그것은 종교분야에도 해당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유관지 | 국문학(문학석사)과 신학(철학박사)을 전공했다. 고교 국어교사, 방송 PD, 교회 담임목사, 대학 외래교수를 지냈다. 통일선교, 특히 북한교회사를 미시사(微視史)의 입장에서 탐구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북중접경, 기도하며 걷다』 외 다수의 북한 관련 저서가 있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