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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9월호)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
  

본문

 

해방 이전 자료를 보면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고,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이라는 표현이 1934년 선교 희년 기념식 때 「동아일보」에 처음 사용되었다.(“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에 노회부인회 각종대회 개최,” 「동아일보」, 1934. 9. 5.) 그러나 1925년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에서 보듯이 당시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이라는 말이 널리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1920년대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 담론의 실상에 접근함으로써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려고 한다.

평양 기독교의 성장: 소돔에서 예루살렘으로
1915년 평양에서는 거의 모든 사업장이 일요일에 문을 닫았다. 당시 평양 인구 6만의 10%인 6,000명의 교인이 여러 교회에 모여 성경공부와 예배로 안식일을 성수했기 때문에 시내가 적막했다. 장로교회의 경우 장대현(1,157), 신학교(770), 창전리(408), 산정현(385), 남문외(348) 5개 교회에 3,068명이었고, 감리교회는 남산현(1,158), 전구리(238), 염점리(160), 이문리(85) 4개 교회 1,631명이었다.(“평양과 기독교,” 「기독신보」, 1915년 2월 19일) 교인 1,000명이 넘는 대형교회 시대가 열렸다. 북장로회는 서북부인 신양리와 경창리 일대에 양촌(洋村)을 형성하고 그곳에 선교사 사택, 숭실학당, 숭실대학, 신학교, 남녀성경학교, 숭의여학교, 외국인학교, 제중원 등의 건물이 들어선 넓은 선교지부를 형성했다. 북감리회는 그 아래 대찰리, 순영리, 남산정에 걸치는 지역에 선교지부를 조성하고 선교사 사택, 기홀의원, 광혜의원, 광성학교 등의 기관을 운영했다.
평양 지역의 교회는 1919년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기독교 민족주의를 실천했다. 5개 장로교회의 한국인 담임목사 중 장대현의 길선주, 남문외의 김선두(총회장) 등 4명이 투옥되었고, 13명의 장로도 체포되어 3명이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숭실 재학생 체포령이 내려졌다. 시골에서 19개의 장로교회가 불탔다. 26개 교회와 학교들이 3개월 이상 문을 닫았다.
1924년 장로교회는 시내 6처의 교회(연화동교회 추가)에 약 4,000명의 교인이 있었고, 주변 평양노회 지역을 합하면 교회 120여 처, 교인 2만 1,000여 명, 학교 30여 개에 달하는 큰 세력을 형성했다. 감리교회는 남산현, 유정, 신양리 등 16개 교회에 신도는 2,300여 명이었다. 또한 600여 명의 천주교회와 200명의 회중교회(치리자 이낙순)와 50명의 안식교회가 있었다.[김기전·차상찬, “조선문화 기본조사–평남도호,” 「개벽」(1924년 9월): 62.]
당시 인구비율로 볼 때 기독교가 가장 왕성한 도시는 선천, 재령, 평양, 경성 순이었다. 1925년 평안북도 선천은 인구 1만 명 중 절반이 교인이라 ‘기독교 왕국’으로, 황해도 재령은 ‘기독교 천하’로, 평안남도 평양은 ‘기독교 수도’ 혹은 ‘조선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서북 기독교 시대였다. 선교 개시 한 세대 만에 기생의 도시, ‘조선의 소돔’을 거룩한 기독교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만든 평양 기독교는 개선가를 부르며 토마스 순교 60주년을 기념했다.

1920년대 전환기적 상황: 신세대와 신사조의 등장
1920년대는 전통적인 조선이 사라지고 반권위주의로 무장한 신세대가 등장한 전환기였다. 총독부의 문화정치 아래 다양한 한글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었고, 청년들은 일본어 서적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수용했다. 중국의 반기독교 운동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은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과학(진화론),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담론으로 기독교를 비판했다. 신여성들은 반가부장제와 자유연애를 주장했다. 신구 세대 간 소통이 단절되었다.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참여했다. 경제 침체로 평지에는 소작인, 산간에는 화전민이 증가했다. 노동자의 파업 투쟁과 학생의 동맹 휴학이 줄을 이었다. 간도와 시베리아로 이주하는 한인이 폭증하여 1920년 북간도에만 40만 명 이상이 거주했다.
총독부는 일본 불교와 일본 조합교회를 통해 한국인의 정신과 종교를 친일화하려고 재정을 지원하여 급성장시켰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 기성교회의 다카하시 목사는 경찰의 후원을 받아 여러 교회를 방문하였고 미국 선교사를 떠나 조합교회에 가입하라고 설교했다. 그러나 강압적 선전과 친정부 정책은 역효과를 내어 조합교회는 쇠퇴했다.
아시아 민족주의의 고조로 교계는 선교사 교회에서 한국인 교회로 독립하는 토착화를 논의했다. 1923년 중국 복주에서 열린 한중일 남북감리회 대표자 회의는 감독 추천권과 선교회 재산 처리권을 양도해줄 것을 미국 본부에 요구했다.
1923년 YMCA 총무 이상재는 신임 선교사들에게 “당신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미국인임을 잊는 것이오.”라고 충고하고 백인우월주의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했다. 1925년 12월 만국선교위원회 의장 모트의 내한을 계기로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기독교봉역자회의에서는 조선예수교장감연합공의회를 보완하고, 경제 문제, 청년층 선교, 선교사의 권한 이양과 한인과의 협력과 자립 문제, 예루살렘선교대회(1928) 등을 토론했다. 한석진 목사는 선교사들의 장기 체류와 지도권 유지는 교회 발전에 방해가 되므로 권력 이양을 요구했다. 1926년 안식교회 순안병원의 허시모 의사가 과일을 훔친 소년의 얼굴에 초산은으로 도적이라고 쓴 사건은 반기독교-반선교사 운동에 기름을 부었다. 1930년 미국 남북 감리회 한국 선교회들이 하나의 조선감리회로 통합된 것은 자치와 연합의 결실이었으나 쇠퇴하던 감리교회의 자구책이기도 했다.

예루살렘의 조선: 반기독교 운동
1920년대의 강력한 신사상은 공산주의였고 반기독교운동을 동반했다. 평양 기독교가 세력을 자랑하며 현실을 외면하자 사회주의자들은 「개벽」지를 통해 목사와 장로의 타락을 공격했다.

그러나 평양은 세력으로나 인수로나 예수교회가 제일 크니까 그 사회의 인물을 먼저 볼 수밖에 없다. 앗다–참 평양이야 말로 목사님도 많고 장로님도 많다. 교회에 가면 물론이어니와 책사에를 가도 목사, 장로, 포목전에를 가도 목사, 장로, 연회에 가도 목사, 장로, 냉면집에를 가도 목사, 장로, 심지어 코머리(퇴기)집에 가도 목사, 장로(쉬–이것은 비밀한 일이다. 함부로 말하지 마라), 간통사건 소송자도 장로, 고리대금업자도 목사, 장로다. 아주 목사 장로의 대풍년들었다. - 김기전·차상찬, 앞의 글, 66.

개신교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신문, 잡지의 여론을 주도했는데, 가장 신랄한 비판은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이었다.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이 아니라, 조선 전체를 회칠한 무덤처럼 비정치적인 종교 공간으로 만들고 교권을 가진 기득권층이 판을 치는 예루살렘의 조선이라는 비판이었다. 개신교가 40년간 한글 보급, 교육, 의료, 여권 신장 등 많은 기여를 했으나, 이제는 현실 도피적인 인물만 모여 사회정의와 평화와 빈부문제를 외면하고 있으며, 정치경제적 학대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가서 마음의 평안이나 구하며, “언제나 요단강을 건널까 하여 마음을 가공의 천국에 매어 달아두고” 현실을 저주함으로써 조선 사회를 예루살렘으로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높은 예배당과 선교사와 장로의 큰 주택 아래 개미집 같은 오막살이에서 신자들은 예배당 십자가만 쳐다보고 있다고 비판했다.[견지동인(堅志洞人), “「에루살넴의 조선」을 바라보면서, 조선기독교 현상에 대한 소감,” 「개벽」(1925년 7월): 55-56.]
기독교 왕국 선천에서도 경제가 침체되자 50명의 일본인 창녀가 역 주변에 자리를 잡았고, 기생을 가진 7개의 고급 식당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선천에도 화류계 대번창,” 「조선일보」, 1924년 5월 12일) 1929년 선천에는 안식일 성수가 깨어졌고, 교인들은 골목 안에서 밀주를 마신다고 고발했다.[김진구, “북대(北隊),” 「별건곤(別乾坤)」(1929년 8월): 148.]
장로교회는 계급 모순을 외면하고 김익두의 ‘치유’ 중심의 부흥회로 민중에 접근했다. “벙어리가 말하고 소경이 눈을 뜬다.”라는 소문이 퍼지자 환자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은사 지속론자들은 『죠션예수교회 이적 명증』(1921)을 발간하고, 황해노회는 헌법의 은사 중지 조항을 수정하려고 시도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기도와 안수로 치유가 가능하다는 김익두 목사를 ‘기적 전매특허자’요, 과거 미신보다 더 혹세무민하는 ‘개명한 미신’인 기독교를 전파하는 ‘고등 무당’으로 비판하고, 부흥회 배척운동을 전개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선교사들이 로마서 13장을 내세워 총독부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다고 공격했으며 “기독교회여! 회칠한 무덤과 가튼 예루살넴의 조선이여! 복잇슬진저 너의 집이 터만 남으리로다.”라고 저주했다. 박헌영(朴憲永, 1900-56)은 기독교가 서구 제국주의의 영토 이권 확장의 수족이 되었으며, 조선에 미신을 선전하여 금력과 군벌에 인종과 유순을 장려하므로, 기독교를 퇴치하기 위해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한다고 주장했다.[박헌영, “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 「개벽」(1925년 11월): 64-69.]

토마스 순교자 만들기, 1925–31년
평양 기독교는 공산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에 대해 근본주의와 평양 성시화 작업으로 대응했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처형된 토마스 목사의 순교 기념사업을 위해 전기 출판과 기념교회 설립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1926년 모펫 선교사를 중심으로 토마스 순교 6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1927년 순교기념사업전도회가 발족되고 5월에 쑥섬에서 첫 순교 추모예배를 드린 후, 9월 총회 때 토마스를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로 공식 천명했다. 숭의여중 영어교사 오문환(吳文煥, 1903-62)은 수집한 구전 자료를 중심으로 『도마스 목사전』(1928)을 출판했다. 『평양노회 지경각교회 사기』(강규찬・김선두・변인서 공저, 1925)가 토마스의 죽음을 순교로 서술한 것을 발전시켜, 그가 강가의 군중에게 성경을 던졌으며, 처형하는 군인에게 성경을 주었다고 극적으로 묘사했다. ‘조선의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맞설 수 있는 순교의 영웅이 탄생했다.

근본주의 선언: 1927년 “종교변호선언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서의 무오성을 공격하는 진화론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는 근본주의가 1910년대 중반 미국에서 형성되었다. 1923년 미국 북장로회 총회는 근본주의 ‘5대 필수 원리’를 수용했다. 그러나 1924년 성서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어번 선언’이 나왔고, 1925년 ‘스코프 원숭이 재판’에서 진화론이 승리했다. 1929년에는 프린스턴신학교가 구프린스턴 신학(전통 칼뱅주의)을 포기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천명하자, 메이첸을 중심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런 신학적 전환기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근본주의로 방향을 정했다. 구약학 교수 어드맨과 1924년 조직신학 교수로 평양에 온 레널즈와 신임 박형룡 교수는 「신학지남」을 통해 반종교 담론을 비판했다. 어드맨은 구프린스턴 켈로그 교수의 A Handbook of Comparative Religion(1899)을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소개했다. 1900년대 학생자원운동의 교과서로 사용된 이 책은 기독교의 우월성, 유일성, 초월성을 양보하지 않고 타종교를 기독교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런 책을 반종교운동의 대안으로 소개한 것은 시대착오였으며 지적인 나태였다.
1927년 조선 북장로회는 반종교운동에 대해 「신학지남」에 “종교변호선언서”를 발표하고 9개 항목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1) 기독교와 사회: 이웃을 사랑하되 중생이 사회 발전의 근본이다. 2) 성서와 신앙: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신앙의 기초이다. 3) 과학과 기적: 성서의 모든 기적과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4) 예수의 인성과 신성: 동정녀 탄생과 부활을 믿는다. 5) 그리스도교의 처세: 견고한 지식 위에 생활한다. 6)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다. 7) 기도의 능력을 믿는다. 8) 타종교와 달리 그리스도교는 초자연적 종교로 천상천하에 유일하다. 9) 신조: 요리문답과 신앙고백서의 가치를 믿는다.[“재죠션북쟝로션교회의 종교변호션언셔,” 「신학지남」(1927년 1월): 5-9.] 근본주의 5대 교리의 수용이었다. 이후 박형룡은 반기독교운동, 진화론,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근본주의의 전사로 나섰다.

교회 분쟁: 노령화와 노회주의 승리로 교인 대량 유출 사태
1920년대는 교회 분쟁의 시대였다. 교회는 내부 분열로 반기독교운동에 대응할 힘을 잃었다. 1918년 황해노회 김장호 목사가 조선기독교회를, 1923년 경북노회 이만집 목사가 자치교회를 분립한 것은 선교사가 지배하는 노회에 대한 반발이었다. 1920년대에는 한국인 목사의 부정, 불륜, 노령화로 인한 지도력 부재에 대해 교인이 반발하면서 분쟁이 증가했다.
교회 분규와 노회 치리에 대한 항의 사태는 1923년 평양 서문외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새 예배당 건축 과정에서 건축위원(김선두 목사, 정일선 목사)이 “돈을 먹었다”고 분쟁이 일어났다. 유임과 분가를 놓고 투표한 결과 목사들의 유임이 결정되었다. 헌법대로 처리되었으나 교인의 불만은 잠복해 있었다. 1926년에는 장대현교회에서 “사회주의에 감염된” 청년들이 변인서 목사를 중심으로 길선주 목사와 장로들에게 지도력 부족으로 사직을 요구하자 분쟁이 지속되었다. 당회와 길 목사를 비난하는 청년들의 선언서가 배부되고, 임시노회와 특별시찰회가 열리고, 강단이 장악되는 파행과 대치가 지속되었다. 이는 결국 변 목사를 시골 교회에 임명하고, 길 목사는 성역 25주년 기념식 후 신도 500명과 함께 이향리교회로 분립하고, 반대파 청년들이 교회를 떠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후 지속된 장로교회 분란 사태에서 교권을 가진 선교사와 당회는 개교회 문제는 노회가 결정한다는 노회주의 원칙으로 청년층의 개혁 요구를 무시했다. 당시 30-40대 장로가 많았다. 이들로 구성된 당회가 청장년의 의사를 당회와 노회에 반영했다면 분규는 원만히 처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회중주의와 노회주의가 충돌할 때 당회가 후자의 손을 들어주면서, 장로교회의 발전의 원동력이었던 평신도 회중주의가 힘을 잃게 되었다.
교회의 노령화와 노회의 교권주의는 교인 감소를 초래했다. 헌금하지 않고 주일을 지키지 않는 ‘의무 잃은 신자’(오늘날의 ‘가나안 성도’)가 양산되는 교인 유출 현상이 일어났다. 1916년 장대현교회 교인 2,000명 중에 1897년에 방문한 자신을 본 사람이 16명뿐이라는 사실에 놀란 스피어 총무는 1926년 방문 때에도 동일한 현상을 확인했다. 한 해 5,521명이 세례를 받고 입교했으나, 입교자 중 사라진 자가 7,447명으로 사망자를 고려해도 기존 교인들 상당수가 교회를 떠나고 있었다. 1916년부터 1927년까지 10년간 인구가 400만 명 증가할 때 교인은 20만 명이 줄어(7.5% 감소) 전체 인구의 1.4%로 축소되었다.

맺음말
1927년 한 신자는 교회가 쇠퇴하는 원인과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쇠퇴 원인은 첫째, 사상 문제로 교회는 사상계 지배 능력이 없어 세속 사상에 요동한다. 둘째, 경제 문제로 사회 경제가 피폐하여 교회는 재정 핍절로 현상 유지를 못 한다. 해결책은 첫째, 반계급주의와 반자본주의를 통해 민중화를 이루어야 한다. 교회는 무산계급, 농민, 빈민, 노동자와 멀어져 있다. 둘째, 자각적 전도인과 자각적 신자가 많이 일어나야 한다. 직업적 목회자는 부자들을 즐겁게 하는 오락적 설교를 하거나 특정 계급을 변호하는 연설을 한다. 피동적 신자는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다. 신자는 순교적 정신을 배양하고 자율적인 신자가 되어야 한다.(익명, “교회 쇠퇴의 원인과 희망,” 「기독신보」, 1927년 1월 5일)
1920년대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이 나왔을 때 교회는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개독교’ 담론이 등장했을 때에도 교회는 의제를 무시하고 안티–기독교 행동만 비판했다. 그 결과 지난 30년간 개신교회는 세습한 중대형교회 300개, 가나안 성도 200만 명, 이단 50만 명을 양산했다. 교회 개혁을 위해서 교회의 첫 쇠퇴기인 1920년대의 담론과 대응을 복기하지 않으면, 시행착오는 반복될 것이다. 교회가 1920년대나 1980년대나 2007년처럼 ‘조선의 예루살렘’ 담론에 취해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수구화의 길을 가면, 바로 ‘예루살렘의 조선’ 담론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시대적 과제를 외면한 죄로 침체와 굴욕과 분쟁의 골짜기를 걸어갈 것이다. 화려했던 평양 기독교와 서북 기독교가 사라져버린 교훈을 되새길 때이다.

옥성득 |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였다. 저서로는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 등이 있다.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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