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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8월호)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은 누구인가?
  

본문

 

해방신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해방의 맥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해방신학을 말로 표현하기에 앞서 해방을 요구하는, 불의를 야기해온 문제들을 진지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팔레스타인의 갈등을 고찰할 때, 일반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누구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는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이 누구인지를 묻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태고부터 가나안(고대의 명칭)에 거주하던 모든 고대 종족들의 자손이다. 지리적으로 팔레스타인은 항상 고대의 거대 제국들을 향하는 통로였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쪽의 고대 이집트 대제국과 북쪽의 여러 제국 간의 숱한 전쟁들이 이곳을 비롯한 주변 지역에서 발생했다. 팔레스타인의 지형은 이주자나 정복자로 와서 거주하는 이들이 정착하기에 용이했다. 성서는 아브라함이 고대 메소포타미아(오늘날의 이라크)에서 왔으며,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고 언급한다. 기존 주민들과 함께 살았던 고대 이스라엘 부족 역시 동일한 경로를 거쳤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은 항상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는 땅이었다. 팔레스타인은 계속되는 제국들–불과 몇 개의 예이지만,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아랍계 이슬람, 비아랍계 이슬람, 십자군 등–에게 정복당하고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다민족 토착민들은 역경의 시대이든 좋은 시대이든 그 땅에서 계속 삶을 이어왔다. 팔레스타인은 결코 단일화된 국가가 아니었다. 언제나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의 사회였다.
베두인족과 드루즈족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DNA를 분석한 결과, 그들은 고대 유대인을 비롯한 그 지역 고대인들의 직계 후손임이 밝혀졌다. “대부분의 유대인 집단과 가장 가까운 유전적 이웃들은 팔레스타인 사람, 이스라엘 베두인족, 드루즈족, 그리고 깃딤(Cypritos)을 포함한 남부 유럽인들이다.”1
이 땅은 여러 이름으로 알려져 왔지만, 가장 오랫동안 불려온 두 개의 명칭은 가나안과 팔레스타인이다. 기원후 2세기 이래, 이곳은 로마인들에 의해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거주민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배경과 관계없이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 새 이름은 새롭게 고안된 이름이 아니었다. 이는 이집트의 20대 왕조(기원전 1150년)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의 관행을 반영한 것이다.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곤 하는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세기에 페니키아의 남쪽을 블레셋 시리아(Philistine Syria)로 지칭했으며, 이후로 이곳은 그리스 용어로는 팔라이스티나(Palaistina), 라틴어로는 팔레스티나(Palestina)로 불렸다.2
오늘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의 역사는 기원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 그리스도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고, 그의 사역은 북쪽에 있는 갈릴리 부근과 남쪽의 예루살렘 지역을 망라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처형되고 부활한 후, 오순절에 교회가 탄생했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성령이 임재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행 2:1-4, 공동번역 개정판)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다른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의 배경을 거명했다. 그들은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로서, ‘바데와 메데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다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이집트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아의 여러 지역 사람들, 그리고 로마에서 나그네로 온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크레타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행 2:5, 9-11)이었다.
이 사람들을 통해, 그리고 기독교 복음 전도자들의 사역과 성령의 권능에 의해 팔레스타인과 인접 국가 및 그 지역의 경계를 넘어 복음의 씨앗이 심어졌다. 기독교 공동체들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4세기에 이르자 기독교는 팔레스타인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3
2,000여 년 동안 일반적으로는 교회들, 특히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은 내적 및 외적인 도전에 직면하였다. 이제 팔레스타인 기독교 교회의 생명력과 지속력에 영향을 미친 다섯 가지 주요 요소에 주목해보고자 한다.4

첫 번째 요소: 신학적 논쟁들
교회가 확장되고 기독교인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기독교 공동체는 심각한 신학적 도전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기원후 325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 공의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당시 부각된 난제와 오해는 주로 신학적인 것이었지만, 정치적・문화적 차이에 의해 악화되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로마제국하에, 또 어떤 이들은 페르시아제국하에 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헬레니즘적인 사고 유형을 취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아람어를 쓰고 셈족의 사고 유형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된 보편적 교회’가 격렬한 신학적 논쟁에 휩싸였다.
4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중요하고 까다로운 이슈들을 검토하기 위해 수차례의 교회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수백 명의 주교와 신학자들이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에서 만나 기독교 교회의 중요한 교리를 만들었다. 5세기 말에 이르러서 이러한 공의회가 내린 결정의 결과로 오늘날 중동에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기독교 교회의 주류 그룹(이라크의 아시리아 교회, 이집트의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교회, 시리아 정교회 및 아르메니아 정교회들)과 분리시켰다.
이것이 첫 번째 주요한 분열이다. 동방 기독교인들의 분리가 기독교 파편화의 원인이 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서로 소외되었다. 동쪽에 남아 있는 것은 비잔틴(동방) 정교회였고, 이 교회는 황제 말렉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 멜키트교도(Melkite)라고 불렸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동방의 비잔틴 정교회와 서방의 로마가톨릭교회는 연합된 상태였다.
5세기 중반 팔레스타인 성지 부근에는 이미 콥트인, 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에티오피아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정교회의 기독교인들과 좋은 관계를 누리고 있었지만, 이미 전부터 ‘하나된 교회’에는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교회 내에서의 이 첫 번째 거대한 분열은 소외, 분개, 적개심, 깨어진 친교, 비난, 그리고 ‘타자’의 성례전 참여 거부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두 번째 요소: 이슬람교의 등장
7세기 이슬람교의 등장은 비잔틴 제국의 잔인함에 분개한 많은 동방 기독교인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실제로 일부 동방의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도들과 연합하여 비잔틴에 맞서 싸웠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아랍 이슬람 통치자들은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에게 관용적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 국가 정부의 요직을 누렸다.
그러나 수년이 지나면서 비아랍계 이슬람 통치자들의 관대함은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박해를 받았으며, 아랍 반도에서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또한 비이슬람교도에 대한 특별세(al-jizya, 알 지즈야) 납부와 박해를 피하고자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이는 신념이 아니라 편의 때문에 개종한 것이었다. 이슬람교의 등장이 중동의 토착민 기독교인들의 어깨에서 비잔틴제국의 멍에를 벗게 해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결국 이슬람교로의 배교를 통해 기독교 공동체를 약화시키게 되었다.

세 번째 요소: 십자군의 등장
첫 번째 십자군 전쟁(1099)이 시작되기 45년 전인 1054년에 동방의 비잔틴 정교회와 서방의 로마가톨릭교회 간의 관계 단절이 발생했다. 이것은 기독교 교회 기구 안에서 두 번째 주요한 분열이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들은 이슬람교도만이 아니라 그 지역의 유대인들과 토착 정교회의 기독교인들도 적으로 여겼다. 예루살렘의 정교회 총대주교를 로마가톨릭 대주교로 교체하는, 정교회 입장에서는 매우 분하고 억울한 일마저 발생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십자군 시대에는 동방에 있는 정교회들도 내부적으로 분열되었다. 일부 교회들이 동방 교회의 특성과 의례를 유지하면서도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충성을 강력히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리는 동방의 기독교인들을 더욱 약화시키고 파편화시켰으며, 서로 간에 큰 고통과 적대감을 느끼게 했다. 십자군의 잔혹한 유산은, 이웃 이슬람교도들과 관련된 동방의 모든 기독교인의 삶을 뒤엎어버렸으며, 서방과의 협력에 대해서 의심을 하거나 때로는 비난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동방 정교회가 정교회와 가톨릭교회로 분리된 것은 동방 기독교 내의 세 번째 주요한 분열이다.

네 번째 요소: 개신교의 등장
16세기 서유럽의 가톨릭교회는 자체적으로 분열을 겪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알려진 사건을 통해, 유럽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로마와 분리하여 자신들의 국가 교회 혹은 지역 교회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내부에서는 더 많은 분파가 발생했다. 결국 많은 신생 프로테스탄트와 복음주의 교단들이 생겨났다.
19세기 초반에 거대한 개신교 선교 운동이 시작되었다. 일부 국가에서는 식민주의가 선교보다 앞서 진행되었지만, 대부분은 식민주의가 그 뒤를 따랐다. 팔레스타인의 경우, 오스만투르크인들이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에 서구 선교사들이 들어왔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식민주의가 뒤따라 들어왔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은 레바논, 시리아, 이집트로 들어갔고, 영국 교회와 루터교는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프로테스탄트와 복음주의 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그 교인들 대부분은 그 지역의 정교회와 가톨릭교회로부터 전도를 받기도 했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기독교 안에서 네 번째 주요한 분열을 일으켰다.

다섯 번째 요소: 시온주의자와 이스라엘 국가의 등장
1897년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은 스위스 바젤에서 시온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주요 목적은 “팔레스타인에서 공개적으로 인정되고 법적으로 보장되는 유대인의 거처”5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내에 있는 기독교인과 이슬람교도를 구분하지 않고, 그들 모두를 시온주의 운동의 성공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아랍인으로 여겼다. 1895년 6월 12일로 거슬러 가보면, 헤르츨은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그 땅을 점령할 때… 우리에게 할당된 단지에 있는 사유재산을 조심해서 수용해야 한다. 우리는 이로 인해 무일푼이 된 사람들에게, 우리 땅에서는 고용이 거부되지만, 국경을 넘어 이주하는 나라들에서는 직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고무시켜야 할 것이다. 강제수용 과정과 빈민퇴치 과정 모두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수행되어야 한다.6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에서 소수 인구이고 주로 신규 이주자였던 유대인들의 국가 수립을 위해 팔레스타인 토지의 55% 이상을 내어줄 것을 유엔 분할계획(UN Partition Plan)을 통해 제안했다. 이에 반해 팔레스타인의 이슬람교도들과 기독교인들, 즉 대다수 인구를 차지하는 토착민들에게는 약 45%를 주었다. 그 계획은 완전히 부당하고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기 결정권 요구를 거부한 서구 열강 전승국들의 뜻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강요된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것을 부당한 계획으로 여기고 거부했다. 반면 시온주의자들은 이것이 그 땅에 대한 최초의 법적인 기반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유엔이 분할계획을 통과시키자마자,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마을과 도시에서 인종 정화 작업을 시작했다.7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수립의 직접적인 결과로,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슬람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은 시온주의자 군대에 의해 추방되거나 총구의 위협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탈출하였다. 시온주의자 민병대는 토지의 78%(55%가 아니다.) 이상의 땅을 정복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의 파괴는 팔레스타인과 아랍 국가들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것은 이후 수년간 이뤄져야 할 팔레스타인의 진보와 발전을 방해한 퇴보적 사건이었다.

위의 다섯 가지 요인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팔레스타인이 기독교인 사이의 내부 분열 속에서도 온전히 남아 있었지만 이스라엘 국가 설립으로 인해 그 땅 자체가 분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된 곳에 거주하는 이들과 그 땅에서 추방된 이들로 나누어졌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과 성직자들은 난민이 되었으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스라엘에 의해 금지당했다. 이는 그들의 복귀를 요구한 유엔 결의안을 위배한 것이었다. 약 60%의 기독교인들이 인종적으로 정화되었다. 기독교인의 수적 감소는 교회를 더 약화시켰다. 이후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로 아랍계 팔레스타인 소수민에 대한 이스라엘의 차별을 피하고자 서부로 이주하였다. 다른 피난민들도 세계 곳곳에 흩어졌으며,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피난처를 찾고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한 방편을 모색해야 했다.
이스라엘은 1967년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점령하고 동일한 차별정책을 시행했다.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많은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이 끊임없이 외국으로 이주해왔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내부보다 그 바깥에 더 많은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팔레스타인에 20만 명 미만의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는 반면, 20만 명 이상이 디아스포라로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통제시스템을 항상 사용하였다. 이 중 하나가 사람들의 분리이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이슬람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은 이른바 이스라엘 국가 내부,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가자지구 등 지리적으로 분리된 4개의 지역에 살고 있다. 이스라엘의 이동제한 정책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자유롭게 교류할 수 없다.
팔레스타인 기독교의 지난 2,000년을 요약해보면, 위의 다섯 가지 주요 요소가 명백해진다. 각 요소는 팔레스타인의 기독교 공동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이전보다 연약하고 취약하게 만들었다. 현대의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불의와 억압, 점령과 차별의 비극적인 역사였다. 또한 교회적 관점에서 볼 때 수많은 분리와 분할로 점철된, 그리스도의 분열된 몸이라는 슬픈 역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팔레스타인 안의 작은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영광을 위해 존재하며, 예루살렘과 성지에 있는 정교회, 가톨릭, 개신교, 복음주의 교파 등 모든 이들의 다양성과 풍성한 전례, 그리고 교회적 유산 안에서 보편적 교회를 나타내는 아름다운 모자이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팔레스타인 기독교에 관한 이 짧은 개요는 팔레스타인 해방신학 사역을 위한 책무로서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제시한다.

1. 이 땅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 간의 치유와 화해를 위해, 우리는 동료 기독교인들을 향한 책임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에큐메니컬 의무이다.
2. 과거 고통을 치유하고 종교 간의 상호 이해, 존중 및 수용의 발전적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우리는 이슬람 형제자매들을 향한 책임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종교 간 의무이다.
3.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사이의 정치적 갈등에 대한 평등하고 평화적인 해결책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모든 비폭력 수단을 통해 성실히 노력할 책임이 있다. 이는 유엔과 국제법의 요구에 의해 명시된 대로 정의와 진리, 자비와 화해에 기반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의 정의와 평화 의무이다.
4.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처지와 곤경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과 국제적으로 협력할 것을 촉구할 국제적 의무가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 땅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해방과 화해를 위해 노력할 수 있다.

1 Harry Ostrer and Karl Skorecki, “The Population Genetics of the Jewish People,” Human Genetics, 132/2(February 2013), 119-127.
2 Bernard Anderso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Upper Saddle River, NJ: Pearson Prentice Hall, 2007), 185.
3 Steven Runciman, “The Christian Arabs of Palestine,” Lecture, University of Essex, UK(November 26, 1968).
4 Naim Ateek, Cedar Duaybis, and Maruine Tobin, eds., The Forgotten Faithful: A Window on the Life and Witness of Palestinian Christians(Jerusalem: Sabeel Ecumenical Liberation Theology Center, 2008).
5 Alfred Lilienthal, The Zionist Connection: What Price Peace(New York: Dodd, Mead and Company, 1978).
6 위의 책, 105.
7 Ilan Pappe, The Ethnic Cleansing of Palestine(London: Oneworld, 2006).

 
 
 

2018년 10월호(통권 7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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