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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8월호)

 

  동예루살렘 올드시티의 종교 문제
  

본문

 

들어가는 말
동예루살렘은 기원전 2,000년 전 유대 왕국이 건국된 후 오늘날까지 유대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교의 성지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동예루살렘의 올드시티(Old City)를 포함한 주변 지역에는 각 종교의 신앙을 상징하는 건물과 장소가 산재해 있고, 이들을 중심으로 각자의 종교의례가 행해졌다. 특히 올드시티의 경우, 유대교의 통곡의 벽, 기독교의 성분묘교회, 이슬람교의 바위돔 성전 등 각 종교의 핵심 성소가 있어서 역사적・종교적・정치적 측면에서 어느 도시보다 종교적 권위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각 종교의 상이한 신앙 체계만큼 성소에 대한 정의와 범위도 서로 달랐다. 동예루살렘이 가지는 특수한 역사적・종교적・정치적 경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세 종교의 신앙 체계 사이의 차별성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민족적・종파적・정파적 갈등과 맞물려 성소의 정의와 범위를 더욱 복잡하게 하였다. 즉 어떤 장소와 건물을 성소로 할 것인지에 대한 불일치와 혼란은 동예루살렘의 정치적・종교적・민족적 갈등 상황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성소에 대한 정의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각 종교의 상징성과 역사성에 따라 서로 달랐으며, 이에 수반되는 제도적 장치와 법적 관할권에 대한 시각도 각 종교 진영별로 상이하였다. 그 결과 동예루살렘 성소에 대한 특정 정치・민족・종교 진영의 통치는 필연적으로 타 진영의 우려와 불안을 야기시켰다. 이런 불안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영국, 유엔, 미국, 아랍 진영, 로마 바티칸 등 팔레스타인 역외 세력까지 이 문제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근거를 제공했다. 그리고 각 주체들은 동예루살렘, 특히 동예루살렘 성소들에 대한 역사적・종교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법적・제도적 장치들을 강구해왔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동예루살렘의 성소 논쟁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아울러 동예루살렘에 대한 각 정치 세력의 정책 및 정치적 입장도 함께 알아보고자 한다.

오스만 제국과 영국 위임통치하의 성소 정책
성소의 정의와 범위에 대한 최초의 제도적 시도는 1757년 오스만 제국이 소위 ‘현상유지’(the Status Quo)라고 알려진 오스만 제국 칙령을 공표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스만 제국하에서 동예루살렘 성소에 대한 관리 분쟁은 로마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등 기독교 진영을 중심으로 처음 일어났는데, 분쟁의 핵심은 올드시티 내 성분묘교회에 대한 관리권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은 1757년에 성소의 기본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유지’ 칙령을 공표하였다. 이 칙령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몇 장소를 성소로 규정하였다: 올드시티 내 성분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와 부속 건물들, 올드시티 내 다이르 알–술탄 수녀원(The Convent of Dayr al-Sultan), 감람산(the Mountain Olives)의 예수승천기념교회(The Sanctuary of the Ascension), 겟세마네(Gethsemane)의 성모 마리아 무덤(The Tomb of the Virgin Mary), 베들레험(Bethlehm) 예수탄생교회(The Church of the Nativity), 베들레헴의 양치기들판교회(The Shepherd’s Field).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의 몰락과 함께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영국의 위임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영국 위임통치 정부는 예루살렘 성소 문제에 관해 오스만 제국의 ‘현상유지’ 원칙을 그대로 수용하는 한편, 이를 전담할 기구인 성소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의도와는 달리 성소와 관련된 각 종교 및 종파 진영 간에 합의를 통한 기구 설립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성소위원회의 위원 구성 방식과 함께 성소 문제를 총괄하는 위원장직을 두고 각 진영 간의 첨예한 대립이 발생했다. 결국 성소위원회의 구성에 대한 합의가 도출되지 못하자, 영국 정부는 성소위원회 설치안을 폐기하고, 대신 영국 고등위원회(The British High Commission)에 성소 관리에 대한 전권을 부여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 고등위원회는 ‘성소운영방식’(Modus Operandi)을 확정하였다. 여기에는 동예루살렘 내 모든 성소에 대한 각 종교기관의 기존 권리 인정, 성소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 보장, 성소 내 종교의식에 대한 예배 주체권의 인정, 그리고 영국 고등판무관에게 성소와 관련된 재판권 이양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영국 위임통치 정부는 성소 지정과 관련해서 오스만 제국의 ‘현상유지’를 그대로 수용하는 한편, 여기에 올드시티 내 서벽(The Western Wall),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사이에 있는 라헬의 무덤(Rachel’s Tomb), 시온산 최후의 만찬실(The Cenacle on Mount Zion) 등을 추가로 포함시켰다.

1947년 유엔 결의안 181호와 1949년 팔레스타인 조정위원회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대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시온주의 진영과 이에 반대하는 아랍 진영 간 유혈 분쟁의 장이 되었다. 영국은 이 문제를 더 이상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1947년 유엔 총회는 이 문제에 대해 유엔 결의안 181호를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 지역과 아랍 지역으로 분리하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통과시켰다. 예루살렘 문제와 관련하여 유엔 결의안 181호는 예루살렘을 국제관리 체제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소 문제와 관련하여 1949년 팔레스타인 조정위원회(The Conciliation Committee on Palestine)를 설치하여 성소의 범위를 대폭 확대하였다.
팔레스타인 조정위원회가 정한 성소의 범위를 보면, 이슬람교 성소로 올드시티 내 바위돔 성전(Dome of the Rock)과 알악사 모스크(Al-Aqsa Mosque), 승천 모스크(Mosque of the Ascension), 다윗 무덤(Tomb of David) 등이 포함되었고, 기독교 성소로 안나 교회(Church of St. Anne), 야고보 교회(Church of St. James), 마가 교회(Church of St. Mark), 가야바 저택(House of Caiaphas), 베데스다 연못(Pool of Bethesda)이, 또한 유대교 성소로 압살롬 회당 무덤(Tomb of Absalom Synagogues), 랍비 이스마엘 욕탕(Bath of Rabbi Ishmael), 실로암 우물(Pool of Siloam), 올리브산 공동묘지(Cemetry of Mt. Olives), 자카리야 무덤(Tomb of Zachariah) 등이 포함되었다.
유엔의 분할 결정에 대해 아랍 측은 인구상 다수인 팔레스타인에게 상대적으로 작은 영토를 할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유엔 분할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유엔 분할안을 적극 지지하는 가운데 1948년 5월 14일에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스라엘의 독립선포와 함께 곧바로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였고, 결국 유엔의 팔레스타인 조정위원회가 제안한 성소안(案)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채 사문화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동안 성소의 권위에 대해 널리 인정되어 온 오스만 제국의 ‘현상유지’는 상당 부분 약화되었다. 또한 영국 정부의 성소운영 방식은 영국 정부의 팔레스타인 철수와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에도 동예루살렘의 통치를 승계한 요르단에 그대로 수용되었다.

6일 전쟁과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정책
1967년 6일 전쟁은 동예루살렘의 지위에 대대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6일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국가 차원에서 동예루살렘 정책을 추진했다.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에 대한 법적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행정명령(개정)법[The Administrative Ordinance (Amendment) Law], 지방자치단체(개정)법[The Municipal Corporation (Amendment) Law], 성소보호법(The Law of the Holy Places Protection) 등을 만들었다. 이 법을 통해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 통치에 필요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갖추었다.
이와 함께 이스라엘 정부는 요르단 통치하에서 거의 파괴된 동예루살렘 내 유대인 구역의 복원사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인 구역에 대한 대대적인 도시정비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유대인 구역은 무슬림, 기독교, 아르메니아 구역에 비해 새롭게 정비된 구역으로 탈바꿈하였고, 생활 기반시설들이 한층 개선되었다. 이외에도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교 관련 성소에 대한 주변 정비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먼저 통곡의 벽 앞 무슬림 주택지역인 마그립(The Maghrib)을 정비하여 현재의 광장을 조성하였으며, 무슬림 구역 내 통곡의 벽 지하에 터널 공사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비록 이 터널 사업은 무슬림 진영과 유네스코(UNESCO)의 강한 항의로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는 하였지만, 이스라엘의 점령 이후 가장 대표적인 종교 프로젝트였다. 아울러 동예루살렘 내 유대인 구역이 요르단 통치에서 이스라엘 통치권 영역으로 들어옴으로써 통곡의 벽과 코텔 지역 등 유대교와 관련된 성소의 관리가 가능하게 되었고, 다양한 유대교의 종교 행사와 종교 의례들이 공식적으로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올드시티 성소에 대한 정책은 초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이스라엘 시장직을 역임한 테디 콜렉(Teddy Kollek)의 시정 방향은 큰 영향을 끼쳤다. 콜렉은 동예루살렘 올드시티가 다양한 공동체가 함께 공존하는 다원주의적 모자이크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종교적 다양성이 인정되는 분위기에서 예루살렘의 문화유산과 전통이 보존되어야 함을 말하며, 이를 훼손하는 정치적 행위에 대해서 단호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런 콜렉의 시정 방향은 이스라엘 극우파진영과 보수진영으로부터 강한 비판과 저항을 받았다. 특히 1977년 이스라엘 총선에서 우파인 리쿠드 진영이 최초로 집권하면서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올드시티에 대한 정책은 큰 변화를 겪었다. 즉 리쿠드 정부는 콜렉의 다양성 정책이 예루살렘 통합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하여, 오히려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예루살렘시 당국의 동예루살렘 올드시티에 대한 정책이 친팔레스타인에서 친유대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한 급진적 민족주의 성향의 정착촌운동인 구쉬 에무님(Gush Emunim)은 이스라엘 점령지에 공격적인 정착촌 건설을 전개하였다. 구쉬 에무님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 정착촌운동 진영은 리쿠드 정부의 지원하에 본격적으로 올드시티에 대한 정착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초기에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중심으로 정착촌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80년대 후반 들어 동예루살렘으로 그 근거지를 옮겼다. 이들은 동예루살렘 올드시티 내 기독교인 구역, 아르메니아 구역, 무슬림 구역 등 전 구역에 걸쳐 이들 지역의 부동산을 공격적으로 매입했다. 이런 공격적인 유대인 정착촌 운동은 동예루살렘 내 타 종교 공동체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급기야 유혈 충돌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제1차 인티파다와 1993년 오슬로 협정
1987년 이스라엘의 통치체제에 항거하기 위해 최초의 자발적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인 제1차 인티파다가 발생했다. 제1차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인티파다로 인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기존의 점령통치 방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협상을 통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런 변화는 곧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으로 이어졌다.
오슬로 평화협정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직접적인 평화협정이었다. 그러나 오슬로 평화협정에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핵심인 동예루살렘의 최종 지위, 국경선 획정 문제,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 등 주요 사안이 빠져 있다. 특히 동예루살렘의 최종 지위 문제는 가장 복잡한 의제였기 때문에 어떠한 합의도 도출하지 못했다.
비록 오슬로 협정이 동예루살렘의 최종 지위에 대한 확정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협상 과정 중 소위 ‘홀스트 서신’(The Holst Letters)이라고 알려진 중재안은 동예루살렘 문제를 간접적으로 다루었다. 당시 노르웨이 외무부 장관 홀스트(Johan Jørgen Holst)는 당시 이스라엘 수상 시몬 페레스(Shimon Peres)에게 보낸 서신에서 “동예루살렘의 모든 팔레스타인 기관들과 기독교 및 무슬림 성소들은 팔레스타인을 위해 중요한 과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정부는 그들의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따라서 홀스트 서신에 근거하여 팔레스타인 측은 동예루살렘 내 모든 팔레스타인 기관과 조직들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기본권을 침해할 경우 이에 대해 저항할 수 있으며, 국제 사회가 동예루살렘 및 올드시티 내 이슬람 성소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영속적 지위를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홀스트의 언급이 단순히 중재안에 불과하며 실질적인 외교적 효력은 없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오슬로 평화협정은 그동안 예루살렘 및 팔레스타인 성소 관리권 논쟁에서 제외되었던 팔레스타인 측이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개입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팔레스타인 진영은 요르단을 대신해 동예루살렘 내 성소 논쟁의 핵심 당사자로 등장하였고, 이스라엘과의 협상에서도 동예루살렘 성소에 대한 실질적인 협상 대표자가 되었다.

1993년 바티칸–이스라엘 협정과 1994년 요르단–이스라엘 협정
오슬로 평화협정 이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동예루살렘에 대한 실질적인 대표자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동예루살렘에 대한 팔레스타인 측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동예루살렘 올드시티 내 종교적 흐름은 급속하게 ‘팔레스타인화’(Palestinization)되었다. 이런 변화에 대해 바티칸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진영은 특정 종교진영이 동예루살렘 및 올드시티에 대한 전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우려하였다. 특히 로마 바티칸은 이런 변화가 궁극적으로 올드시티 내 종교적 안정성을 훼손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오스만 제국부터 유지된 ‘현상유지’ 정책에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스라엘 또한 올드시티에 대한 급속한 종교적 변화를 원하지 않았고, 이에 대해 전략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양자 간의 공감대에 힘입어 이스라엘과 바티칸은 1993년 12월 ‘바티칸–이스라엘 기본합의’(The 1994 Vatican-Israel Fundamental Agreement)를 체결하였다. 그리고 이 합의서에 힘입어 1994년 바티칸과 이스라엘 양측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 합의를 통해 이스라엘은 1,000년 이상 지속된 로마가톨릭과의 불편한 관계를 정리할 수 있었고, 바티칸 측은 이스라엘로부터 기독교 성소에 대한 전통적 지위에 대한 지속적 보존을 약속받았다.
로마 바티칸과의 협정을 통해 기독교 진영의 지지를 어느 정도 확보한 이스라엘은 1994년 요르단과의 평화협정을 통해 동예루살렘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1994년 10월 26일 이스라엘과 요르단 양측은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중재하에 워싱턴에서 공식적인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에서 양측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내 이슬람 성소에 대한 요르단 하심 왕가의 특별한 위치를 존중”하며 “예루살렘의 영속적 지위에 대한 협상 시 이스라엘은 이슬람 성소들과 관련하여 요르단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 우선적 권리를 부여할 것”을 합의했다. 이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 내 이슬람 성소에 대한 우위권을 요르단에게 부여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의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팔레스타인의 즉각적인 반발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 문제를 국제 이슬람 진영에 호소하여 국제 여론을 팔레스타인 측에 유리하게 이끌어가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팔레스타인 측은 1994년 카사블랑카에서 개최된 이슬람회의기구에서 이 문제를 정식 의제로 상정하였다. 이 회의에서 이슬람회의기구는 동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이며, 이슬람 성소에 대한 주권은 팔레스타인 측에 있음을 선포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측은 이슬람회의기구의 결정을 확고히 하기 위해 같은 해에 요르단과 ‘평화와 협력을 위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에서 동예루살렘이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임을 선언하였지만, 동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소에 대한 요르단의 특별한 지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측은 이 협정을 통해 요르단으로부터 동예루살렘에 대한 우위권을 획득하였지만, 대신 요르단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급속하게 약화되었다.
1993년 오슬로 협정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동예루살렘 최종 지위, 국경선 문제, 테러 및 안보 문제 등에 대해 약 8년에 가까운 평화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2000년 양측은 이 문제를 일괄타결하기 위해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협상을 벌였지만, 아무런 성과물을 만들지 못하고 사실상 평화회담을 종결하였다. 그리고 캠프 데이비드 협상의 실패는 곧바로 양측의 끊임없는 유혈 충돌을 일으켰으며, 지금까지도 양측 간의 유혈 충돌은 이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가 아니라 분쟁과 갈등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나오는 말
예루살렘의 종교적 권위와 위상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함께 각 주체 간의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을 양산했다. 특히 동예루살렘의 올드시티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3대 종교의 성소들이 정치적・역사적・문화적 공간을 함께하며 그 갈등 양상을 더욱 증폭시켰다. 예루살렘 성소의 범위와 권위에 대한 국제적 규범은 오스만 제국의 ‘현상유지’ 원칙에서 시작되어, 영국 위임통치 정부의 ‘성소운영방식’, 이스라엘 정부의 성소보호법, 그리고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 1993년 바티칸–이스라엘 협정, 1994년 워싱턴 선언 및 요르단–이스라엘 평화협정 등을 거치면서 각 이해 당사자들의 우위 경쟁을 이어왔다. 이런 경쟁을 통해 예루살렘이 지니는 종교적 상징성과 역사적 정통성은 각 정치 주체들에게 정치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하였고, 이들은 또한 예루살렘을 통해 소멸된 과거의 정치적 위상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런 정치적・종교적 갈등과 대립 가운데 각 정치 주체들은 동예루살렘 성소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나름대로 유지하고자 노력해왔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현상유지’는 영국 위임통치 시기,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점령시기, 그리고 오늘날까지 예루살렘 성소들의 정치적・역사적 기능에 대한 통일되고 일관된 원칙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동예루살렘과 올드시티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정치 진영과는 무관하게 ‘견제와 균형’의 원칙이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인정되어 온 셈이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은 1967년 6일 전쟁 이후 동예루살렘을 실질적으로 점령통치하는 주체이지만, 동예루살렘 올드시티 내 각 성소의 운영 방식과 전통은 실질적 지배세력과는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작동되어 왔다. 따라서 동예루살렘 내 올드시티는 불안정한 체제 속에서도, 각 민족적・종교적 진영 간의 보이지 않는 균형점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동예루살렘 성소들을 둘러싼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그리고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과 대립은 특정 주체의 배타적 우월성을 증명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차이에 대한 존중을 인정해주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안승훈 | 중동 정치를 전공하였다. 대표 논문으로 “동예루살렘 올드시티 성소에 대한 법적 제도적 지위 발전 연구”(「중동연구」, 제36권 3호)가 있다. 현재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8년 7월호(통권 7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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