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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8월호)

 

  한국교회의 이스라엘 이해
  

본문

 

최근 한국 사회에서 진보, 보수 간 이념 갈등 현상의 일환으로 소위 ‘태극기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의 특징은 국기를 주요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인데, 이런 현상은 정치학, 사회학, 심리학, 커뮤니케이션학 등의 연구를 통해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 집회에 상당수 기독교인이 참가하는 것으로 추정되기에 신학적 연구도 필요하다. 가령 기독교와 민족주의 혹은 국가주의와의 관계 연구를 들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집회에 태극기 이외에도 미국 국기, 심지어 이스라엘 국기까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왜일까?
이 집회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이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지는 않지만 그 일부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런 현상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한국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의 미국 이해 혹은 한국교회의 이스라엘 이해는 생각해볼 만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전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연구가 있었지만, 후자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후자에 대한 간략하고 시론적인 통사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과 관련, 한국교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항을 그 시기에 따라 선별적으로 다룰 것이다. 물론 본격적인 연구는 별도의 후속연구가 필요하다.

이스라엘과의 동일시 및 선민의식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초기부터 한국교회에는 한국과 이스라엘을, 한국 기독교인과 이스라엘 백성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한국 사람들이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유는 거대담론이라 이 자리에서 상술할 수는 없지만, 언급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한국교회의 성장은 외부인인 선교사의 노력만이 아니라 현지인인 한국 기독교인의 주도성에도 기인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는 신학적 차원의 토착화는 늦게 이루어졌지만, 신앙적 차원의 토착화는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가령 한국 기독교인은 성서의 번역과 보급은 물론 성서의 교육과 실천에도 적극적이었는데, 이를 흔히 ‘성서적 기독교’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이와 같은 특성은 신학적 해석을 거치지 않고 성서를 글자 그대로 수용하는 소박한 문자주의적 해석 태도와 연관된다. 이런 맥락에서 독자인 한국 기독교인이 성서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스라엘 백성과 스스로를 동일시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특히 복음 수용의 초창기인 당시 조선과 대한제국은 엄청난 혼란과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상태였다. 따라서 극적인 정치 파노라마 속에서도 생존을 이어간 이스라엘로부터 영감을 얻고자 했던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해방과 건국의 역사, 멸망과 회복의 역사 등을 보여줌으로써 한국교회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전반적으로 비극과 절망의 역사였지만, 회복의 약속을 고려할 때 결코 비극과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환희와 희망으로 이어짐을 암시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기독교인은 성서 메시지를 내면화하였다. 흔히 한국교회는 보수적이고 비정치적이라는 평가가 있는데, 필자의 판단으로는 한국교회는 대체로 보수적이지만 항상 비정치적이지는 않았다. 가령 서광선은 민중신학을 설명하면서, 한국교회 초기에 이미 원초적인 민중신학이 나타났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이것을 “한국의 현실이란 관점에서 ‘복음의 정치적 해석학’”이 발전한 것이라고 하면서, “설교자와 주일학교 교사가… 이집트 통치하의 이스라엘 백성을 언급만 해도,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라고 예를 들었다.1 즉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한국의 역사를 읽어내면서 해방을 꿈꿨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선교사도 한국교회를 이스라엘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먼저 게일(James Scarth Gale)은 “가장 은혜스럽고 놀라운 방법으로 조선은 일종의 성경시대나 성경 지역의 모범으로 보존되어 있다.”2라며 한국 문화와 성서시대 문화의 유사성에 주목하였다. 여러 가지 면에서, 특히 문화면에서 양자가 비슷하다는 주장이다. 요약하면 한국이 동양의 이스라엘이라는 식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외국인이 낯선 나라를 설명하면서 자국 혹은 자신에게 익숙한 나라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흔한 일이다. 미국 등 영연방에 영국 지명이 유난히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게일이 한국을 설명하면서 캐나다나 이스라엘을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특이한 점은 본격적인 연구 수준으로 이런 연상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을 동양의 이스라엘로 부르고,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한 뒤에는 한국교회의 중심지인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혹은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부른 것도 넓게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선교사들은 당연히 자신의 사역지에 애착을 가졌고, 선교적 희망이 보일 때는 그곳을 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으로 부르는 경향이 있었다. 최근 옥성득은 그의 미간행 논문에서, 1920년대의 반(反)기독교적인 기사를 인용하면서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에 비견한 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경우만은 아님을 강조한 바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을 비판했듯이, 1920년대 한국교회를 비판한 기사를 작성한 사람 역시 당시 평양을 비판하면서 부정적인 예루살렘 이미지를 원용했다는 것이다.
일본도, 중국도 한때 새로운 이스라엘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한국은 그런 기대가 맞아떨어진 경우라고 할까? 대다수 재한선교사를 파송했던 미국이 스스로를 이스라엘과 연결시킨 전통이 있다는 것도 기억할 만하다. 이런 기대는 궁극적으로는 ‘선민의식’으로 이어진다. 미국 사회와 교회는 소위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개념을 통해 선민의식을 지닌 채 미국식 민주주의와 복음을 가지고 세계로 나아갔고, 당시 한국의 영어 명칭인 ‘조선’(Chosun)을 굳이 ‘선민’[選民, Chosen (people)]으로 읽고자 했다. 그런데 ‘Chosen’이란 표기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발음에 따라 새로운 영어명칭이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요약하면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선민의식을 통해 이스라엘과의 연속성을 유지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에는 이와 상이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일본 식민정부가 한국교회에 서구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일본교회와의 유대를 강화할 것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즉 일본 식민정부는 서구 기독교를 유대교적 기독교로 정의하면서 일본 기독교와 대립적인 것으로 제시했고, 한국 기독교를 일본화하려고 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대두된 일본 중심의 동양주의를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입한 경우라고 하겠다.

종말론과 이스라엘
한국교회에 종말론이 소개되면서, 이스라엘은 새로운 측면에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의 터전, 예수 그리스도의 고향이라는 차원을 넘어 세계 종말의 운명과 연관되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사야의 비전이 그렇고, 신약성서에 나타난 바울과 요한의 비전이 그렇다. 한국교회는 종말에 대한 소박한 문자주의적 이해를 넘어서, 신학적 종말론의 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에 소개된 신학적 종말론은 보수적인 것으로, 먼저 전천년설(premillennialism)이 소개되었고 이어서 극단적인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종말론이 소개되었다. 이 자리에서 종말론의 이론을 상술할 수는 없고,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두 가지만 간추리기로 한다.
첫째, 일반적으로 평가하기를 당시 종말론은 현세보다 천국을 강조하는 도피주의적 신앙을 강화했다. 이것은 20세기 후반부터 몰트만에 의해 유행한 ‘희망의 신학’적 종말론, 즉 종말론적 관점에서 현재를 변혁시키려는 적극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둘째, 일제강점기의 식민통치가 점점 강고해지고 지속됨에 따라, 종말론은 극단적 종말론인 묵시록 형태로 전이되었다. 그러나 묵시록은 비록 현재의 변화를 포기하지만, 신앙의 비밀스러운 약속으로서 미래(우리나라의 경우, 일본의 멸망과 조선의 해방)를 보장하기 때문에 편협하지만 동시에 굳건한 신앙을 유지토록 한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말에 많은 사람들이 친일의 길을 걷고 식민지 의식을 내면화하며 일본식 동양주의에 편승했지만, 묵시록적 신앙을 가진 한국 기독교인들은 해방의 꿈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일제는 종교탄압 과정에서 창조신앙과 더불어 재림신앙을 문제시했다.3 즉 이스라엘의 회복은 한국 기독교인에게 묵시록적 성취의 선례로 작용했다. 더구나 한국과 이스라엘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같은 해인 1948년(한국 8월, 이스라엘 5월) 정부를 수립하여 국가재건의 역사를 공유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기본적으로 팔레스타인보다 이스라엘에 더 친밀감을 느끼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교회의 이스라엘 방문
이상에서 살펴본 한국교회의 이스라엘 이해는 간접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928년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 예루살렘 대회는 한국교회가 이스라엘을 직접 방문하는 계기가 되었다.4 예루살렘은 동서양의 중심지로 세계대회가 열리기에 적합한 장소였고, 더구나 선교의 종료가 세계의 종말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예루살렘은 선교와 종말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상징적인 곳이었다. 당시 참가자들은 예루살렘 대회에서 그런 종말론적 분위기를 맛보았다고 전한다. 복음의 발상지인 예루살렘은 이제 2,000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 복음을 확산시킨 선교사들의 재결집지라는 새로운 모습을 나타냈다.
김활란은 “印度洋(인도양)을 넘어 예루살넴에: 紀行(기행)”이라는 글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감회를 토로했다. 더 자세히 확인할 필요가 있지만, 이 글은 아마도 예루살렘에 대한 한국인 최초의 방문기일 것이다. 조금 길지만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자.(오늘날의 어법에 맞게 고쳤다.)

예루살렘, 젖이 흐르고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福地)–아,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냐? 나는 적지 아니한 아름다운 환상(幻想)을 가지고 그곳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예루살렘에 당도하였을 때에는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메마르고 사지(砂地, 모래땅)가 많고 뻔뻔하고 수림(樹林)조차 별로 없는 이 예루살렘–과연 유대인들은 이곳을 젖이 흐르고 꿀이 흐르는 복지로 생각하였는가. …생각하면 꽃 한 포기, 풀 한 대 없는 아라비아 사막(沙漠)에서 먹으며 굶으며 방황하던 유대인들이 이 ‘팔레스타인’이라도 복지로 생각한 것은 그리 괴이(怪異)치 않다.…
나는 국제선교위원회(國際宣敎委員會)에 참가하고 틈틈이 그리스도의 유적을 찾아보았다. 먼저 감람(橄欖)산을 올라가 보았다. 역시 보잘것없는 산이다. 양귀비꽃이 많고 아카시아와 감람나무들이 있다. 멀리 요단강을 바라보았다. 예수가 세례 받은 곳이라 퍽 시적인 정취가 많은 곳인 듯하나 실상은 쓸쓸한 작은 하천에 불과하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에도 가서 그 호수에서 잡은 생선 푸라이(튀김)까지 먹어보았으나 이곳에서도 역시 실망하고 말았다.
기독교인으로서 예루살렘을 상상하던 사람들은 실지(實地)로 예루살렘을 가보면 실망하게 된다. 고루거각(高樓巨閣)은 멀리서 바라보아야 하고, 위인명사(偉人名士)는 책으로 숭배하여야 한다. 무엇이든지 실제(實際)로 가보면 그리 신통한 곳이 없는 것이다. 나는 ‘게세마네’ 동산에서 감격(感激)스러운 기도를 하였다. 거기에서 예수 생전에 심었다는 감람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5


예루살렘 대회에 참석한 김활란이 예루살렘에서 느낀 감회는 성지방문(혹은 성지순례)의 양면성을 연상시킨다. 즉 성지방문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라는 말씀도 되새기게 한다. 여하튼 한국 대표단은 귀국길에 덴마크를 방문하였다.6 예루살렘 대회에서는 인종갈등, 비서구교회의 대두 등 여러 가지 문제가 거론되었는데, 그중에 농촌교회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성공적인 농업국가인 덴마크를 방문한 것은 자연스러운 여정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는 예루살렘 대회 이후 그 보고서를 번역·출간했고, 기독교 농촌운동을 본격화했다.

성지방문과 이스라엘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 경제성장과 교회성장에 힘입어 세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는데, 하나는 성지방문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선교이다. 한국교회에서 폭발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성지방문은 이스라엘에 대한 대중적 이해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이해가 확산되기 전에, 한국교회를 포함한 한국 사회는 성공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 관심을 가졌다. 즉 적국들의 틈바귀에서 생존에 성공한 군사 강국, 키부츠로 대표되는 농업실험에 성공한 복지국가, 교육(특히 육아)에 성공한 교육 선진국 등의 이미지가 한국 사회에 모범사례로 비쳐졌다.7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성지방문이 유행을 넘어 신앙과정의 일부로 정착될 만큼 일반화되었다. 또한 신학교 교육과정에도 성지답사가 수강 과목으로 포함될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한국인의 이스라엘 방문자 수는 최근 다소 줄었지만 연평균 2만 5,000명 정도이고, 대부분이 성지방문객이다. 한국은 이스라엘과 1962년에 수교를 맺었고, 1964년에 대사관을 설립했으며, 현재 1,000명 정도의 교민이 그곳에 살고 있다. 따라서 양국 간 교류는 종교분야를 넘어 활성화될 필요가 있지만,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상황에 대한 한국 사회 및 교회의 이해는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맥락에서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이해나 연구도 부족하다. 한국교회에서 반유대주의 연구는 이스라엘이나 한국교회와 직접 연관되기보다 주로 히틀러 암살과 연관된 본회퍼, 고백교회, 최근에는 종교개혁가 루터의 반유대주의 등에 국한된 경향이 있다.
한편 한국 사회는 최근 들어 4·3사건, 노근리사건 등 대량학살사건을 연구하면서 인종청소(genocide, ethnic cleansing, holocaust)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히려 최근에는 반유대주의보다 친유대주의를 문제삼기도 한다. 배덕만은 한국교회가 팔레스타인의 참상에 무심한 이유 중 하나로 “맹목적 친(親)유대주의”를 꼽은 바 있다.8

세계선교와 이스라엘
전통적으로 세계선교는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from Jerusalem to the end of the world) 이르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현대선교의 특징 중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에 이르는 선교가 각광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9 이런 선교관은 단순히 유대인을 선교대상 중 하나로 여기는 것을 넘어, 소위 ‘이스라엘의 운명(혹은 회복)’과 종말을 연계하는 바울적 종말론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선교를 선교의 완결 단계로 여기는 입장이 부각되면서 이스라엘 선교, 특히 복음의 발상지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는 선교(Back to Jerusalem mission)가 강조되고 있다. 한국교회도 이런 선교에 관심을 보이다가, 최근에는 새로운 선교 세력으로 등장한 중국교회가 주도권을 이어받는 양상이다. 이와 더불어 예루살렘에 이르는 경로에 있는 지역, 특히 중앙아시아가 선교 관심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위치한 중동 지역과 이스라엘에 이르는 경로인 중앙아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종교가 이슬람이라는 점에서, 자칫 ‘이슬람 포비아’(Islam-phobia, 이슬람 혐오 혹은 이슬람 공포)와 같은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백투 예루살렘 선교’와 결부될 경우 공격적 선교의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어 주의가 요청된다. 사실 최근 미국의 친유대주의의 극단적인 형태 중 하나가 ‘기독교 시온주의’(Christian Zionism)인데, 9·11사건 이후 이스라엘과 미국은 테러리즘의 관점에서 이슬람이라는 공동의 적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 대두된 것이다.10

나오며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에 관심이 있었고,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이해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교회에 이스라엘은 민족의 운명에 대한 유사 경험이 있는 나라이자 성지, 모범사례가 되는 나라 등의 이미지를 지닌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는 학교교육뿐만 아니라 지역교회의 대중교육, 즉 설교, 교회학교, 현장방문 등을 통해서 새신자와 차세대 교인에게 재생산되고 있다.11
그러나 이런 이해는 주로 종교 내지 특정 분야에 한정되어서, 실질적이고 종합적이라기보다는 제한적이고 피상적인 면이 있다. 어쩌면 한국교회는 이스라엘의 현실 자체보다는 상상 속의 이스라엘을 더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스라엘을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잘 모르는 이유일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이스라엘은 여러 가지 다양한 역사적 이미지에 의해 좌우되는 국가라는 측면이 강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생각해 볼 때 한국교회를 비롯한 한국 사회가 대(對)이스라엘 관계에서 이스라엘의 역사, 양국 간의 관계사, 한국교회의 이스라엘 이해의 변천사를 연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교회에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나라 중 특히 미국과 이스라엘이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친미주의, 미국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 등이 한국교회의 대이스라엘관(觀)에 미친 영향도 살펴볼 수 있지만 이것은 다음으로 미루자.

1 David K. Suh, “A Biographical Sketch of an Asian Theological Consultation,” in Minjung Theology: People as the Subjects of History, edited by Yong Bock Kim(Singapore: The Commission on Theological Concerns of the CCA, 1981), 19, 24.
2 J. S. Gale, Korea in Transition, 신복룡 역주, 『전환기의 조선』(서울: 집문당, 1999), 114; 안교성, “게일 목사의 신학사상의 특성과 그 유산,” 「한국교회사학회지」 34(2013. 4): 225에서 재인용.
3 창조신앙을 따르면 일본 천황은 신이 아닌 피조물이 되고, 재림신앙을 따르면 천황도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일제강점기 말에 사도신경도 일부 훼손·왜곡되었다.
4 당시 참가자는 양주삼, 신흥우, 김활란, 정인과 및 노블(W. A. Noble)과 마펫(S. A.
Moffett)이었다.
5 김활란, “인도양(印度洋)을 넘어 예루살넴으로: 기행(紀行),” 「新人文學」(n.p.: 靑鳥社, 1934): 96.
6 박희준, “1920-1930년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덴마크 농촌운동 이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 105(2014. 3): 23.
7 류태영, 『이스라엘 국민정신과 교육』(서울: 이스라엘문화연구원, 1986); 『이스라엘 농촌사회구조와 한국 농촌사회』(서울: 양영각, 1996); 『이스라엘 바로 알기: ‘이스라엘 전문가’ 류태영 박사』(서울: 국민일보 제네시스 21, 2006).
8 배덕만, “한국교회의 친(親)유대주의,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기독교사상」(2014. 9): 52.
9 최바울, 『백투예루살렘; 하나님의 마지막 글로벌 프로젝트』(서울: 펴내기, 2004). 이 운동에 대한 비판은 다음 글을 볼 것. 이진구, “한국 개신교 해외선교에 나타난 종교적 군사주의: 백투예루살렘 운동을 중심으로,” 「종교문화비평」 20(2011): 261-295.
10 미국의 친유대주의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볼 것. Chang Geon Im, “The Pro-Semitic Movement of Christianity in the U.S.: Its Theological and Secular Motives,” Journal of American Studies, 42/1(2010): 112.
11 김충렬, 『다시 예루살렘으로 갈 것입니다』(서울: 쿰란출판사, 2014).


안교성 |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한국교회와 최근의 신학적 도전』 등이 있다.

 
 
 

2018년 7월호(통권 7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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