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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통일운동으로서의 평양 방문
특집 (2018년 6월호)

 

  문익환의 방북: 평양에서의 활동과 역사적 의미
  

본문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북미회담을 앞두고 문익환의 평양 방문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 해방 이후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김구, 김규식 등의 남북협상(1948), 그리고 7・4남북공동성명의 발표(1972) 등 남과 북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방북이 있었지만, 1989년에 단행된 문익환의 방북은 정부가 아닌 민간 및 사회단체의 교류라는 측면에서 통일운동의 범위를 확장시켰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정부 차원뿐만이 아니라 민간 차원의 교류가 더 확대될 전망이다. 예컨대 민간 경제협력, 사회・문화・체육 교류, 관광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남북한 왕래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일에는 문익환의 방북이 그 시금석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약 30년 전, 냉전 화해 분위기 속에서 통일의 열망을 안고 과감하게 방북을 결행한 문익환의 노력이 재평가되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문익환의 방북 이유와 그 과정 및 북한에서의 활동, 남한 사회와 기독교계의 반응 등을 고찰해 봄으로써 한국 현대사에서 그의 평양 방문과 통일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평양 방문 과정
1) 방북 배경
문익환이 북한을 방문하기 전의 국내외적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 1989년 초반 국제적으로는 동구 및 미소의 화해 분위기, 소위 ‘신(新) 데탕트’가 조성되었다. 또한 국내적으로 노태우 정부는 취약한 정통성을 지닌 제6공화국 정부였으며, 당시에 ‘6월 항쟁’으로 민주화의 과제가 일정 정도 해결된 후 광범위하게 확산된 민간에서의 통일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7・7선언’을 통해 북한과 인도적인 교류 등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정부는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대북 포위, 개방화 압력’의 성격으로 북한과 대화하였고, 북한은 남한 당국과 정당 및 민간단체와의 교류를 시도하고 있었다.
미소 간의 신 데탕트 체제하에서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신년사에서 민간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히면서 남북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언급하였고,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수립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임기 중간에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는 중간평가를 연기한다는 발표를 통해 보수층을 결집하게 되었다. 문익환을 포함한 진보세력들은 이에 대한 돌파구가 필요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북한의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서 각 당 대표와 총재 및 김수환, 문익환, 백기완을 평양에 초청한다는 내용의 화해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러한 북한의 구체적인 방북 초청으로 인해 문익환은 방북을 고려하게 되었다.1
문익환은 4월 4일 국제클럽기자회견에서 방북 이유와 배경을 묻는 질문에 남북교류는 정부뿐만이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방북은 갑자기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준비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문익환의 방북에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은 통일을 외치며 죽은 이동수, 조성만과 같은 젊은 학생들의 죽음이었다. 문익환은 늘 이 사건을 기억하면서 통일만이 젊은이들의 죽음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고, 모든 모순과 비극의 원인을 해결하는 처방전은 민족분단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방북을 통해 통일을 견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방북에 동행한 유원호와 정경모와의 만남에 대해 살펴보자. 문익환은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사령부(G2)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때 유엔군에 지원한 정경모를 만나게 되었다. 후일 문익환은 정경모가 쓴 『찢겨진 산하』(1986)를 읽고 정경모의 사상과 노선에 공감하게 되었다. 정경모는 해외에서 통일운동에 힘쓴 진보적 민족주의자로서 문익환과 의기투합하여 북한과 남한의 통일세력을 연결해주는 매개 역할을 하였다. 그는 남한의 민주화 열기를 통일로 이어가려는 의도로 방북을 결심한 것이다. 또한 1987년 대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단식 중이던 문익환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주고자 방북을 제안하였다.
이때 ‘방북을 한다면 주선해볼 수 있다.’는 정경모의 편지를 건네주고, 후에 함께 방북을 단행한 유원호는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던 중 일본을 왕래하였고 지인의 소개로 정경모를 알고 지내왔다. 유원호는 문익환의 방북을 주선했을 뿐만 아니라 문익환의 수행원 역할도 하였다. 그는 통일에 대한 열망과 종교적 사명의식,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으로 방북을 결심하였다.

2) 방북 경위
문익환이 방북을 결심하게 된 시기는 1988년 6월 10일이었다. 그는 남북학생예비회담장인 판문점으로 가려는 학생들의 행진이 저지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방북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7・7선언으로 잠시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다가, 8월 10일 학생들의 판문점행이 또다시 좌절되는 모습을 보면서 방북을 재결심하였으며, 9월 중순쯤 방북을 권유하는 정경모의 편지를 유원호로부터 받게 되었다. 이후 문익환은 그해 마지막인 12월 31일에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라는 다짐을 담은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1시간 30분 만에 완성해 방북에 대한 강한 열망을 드러냈다. 전술했듯이 때마침 김일성 주석도 198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문익환의 방북을 제안했다. 2월 9일 문익환은 김일성의 개인 초청장을 정경모로부터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정주영의 방북이 알려지면서 문익환은 다시 머뭇거리게 되는데,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민족작가회의 대표들이 북측 대표들을 만나기 위해 판문점으로 가는 과정이 저지되면서 또다시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이처럼 방북 과정은 개인뿐만이 아니라 남북 모두에게 중대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문익환은 늘 고민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으로 보인다.
3월 12일 김대중, 문익환, 문동환은 올림피아 호텔에서 만나 방북 계획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은 문익환에게 가능하면 당국의 승인이나 양해를 얻는 것이 좋겠다며 문익환의 동생이자 당시 평민당 부총재였던 문동환에게 통일원 장관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지시했다. 이어 3월 19일 전민련 공동의장 이부영, 통일분과위원장 이재오, 고문 백기완, 계훈제 등과 회동해 입북 계획을 당국에 알렸다. 따라서 문익환의 방북은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전민련의 고문 자격으로, 자주민주통일운동을 이끌어오던 전민련의 대표성을 띤 것으로 보아야 한다.
3월 20일 유원호는 통일민주당 김영삼에게 문익환과 자신의 방북 계획을 알리고 김포공항을 통해 정경모가 있는 일본으로 출국했다. 중간 경유지인 일본 나리타 공항에 도착한 문익환 일행은 3월 22일 일본사회당 위원장인 도이다카코를 만나 의전 문제를 상의했는데, 북에서 모든 것을 준비하니 별도의 준비는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세카이」(世界) 편집장인 야스에 로스케는 “김 주석이 남한 국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라며 방북을 지지해주었다.
문익환 일행은 3월 24일 베이징에 도착했다가 다음 날인 25일에 북한 특별기 편으로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위원장 정준기 등의 영접을 받으며 입북하였다.

평양에서의 활동
문익환과 조평통과의 1차 회담은 3월 26일 오후 3시 만수대 의사당 소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북측을 대표하여 정준기, 윤기복, 여연구 등 조평통의 부위원장 세 사람과 실무자로 안병수가 배속되었다. 이날 정준기는 군사적 대결 해소, 남북 불가침선언 채택, 연방제 통일방안 등 통일에 관한 북한의 공식 문건을 읽어나갔다. 이에 문익환은 이 문건에 대한 논의보다는 남쪽 국민들의 통일 열망과 자신의 방북 이유 등을 말하면서 문건과 다소 거리가 있는 발언을 하였다. 이때 북한은 1948년 남북협상 연석회의 때처럼 남한과 북한의 당사자가 통일을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읽어나가는 형식으로 회담을 진행하였다.
3월 27일 김 주석과의 1차 회담이 주석궁에서 시작되었다. 문익환과 김일성의 단독회담이었다. 이날 문익환이 김 주석에게 가장 먼저 제기한 의제는 교차승인 문제였다. 즉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러시아와 중국이 한국을 각각 승인하여 국제정세와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문익환은 교차승인을 원칙적으로는 반대하지만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했으나, 김 주석은 교차승인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문익환은 남한 정부가 먼저 유엔에 가입해 독일식 1민족 2국가 체제를 정착시키고자 남북의 입장을 절충시키고자 하였다.
두 번째로 제기한 문제는 연방제였다. 문익환은 연방제를 3단계로 분류해서 1단계는 남북이 군사외교까지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단계, 2단계는 군사외교까지 통합하는 단계, 마지막 3단계는 남북의 지방자치를 도 단위까지 세분화하는 단계로 보았다.
김일성과 문익환은 협상을 통해 이러한 과정을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단계적으로 할 수도 있다고 합의하였다. 즉 문익환이 방북하여 남측의 남북연합안과 북측의 고려민주연방제안을 절충해 이후 1991년 신년사에서 점진적인 연방제인 김일성 주석의 ‘느슨한 연방제’를 이끌어냈으며, 이를 기반으로 6・15공동선언에서 ‘낮은 단계 연방제’와 연합제의 접목에 대한 합의를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문익환은 정치와 군사 문제에 대한 회담만이 아니라 경제 및 문화 교류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김일성은 처음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다가 결국에는 동시에 추진하자고 답했다. 문익환의 끊임없는 설득으로 인해 북한은 그동안 일관되게 정치군사 회담만을 선결 조건으로 내세우던 입장에서 한발 물러났다. 결국 북측의 정치군사 해결 우선 입장과 남측의 교류협력 우선 입장을 절충해 병행추진을 이끌어낸 것이다.
3월 29일 조평통과의 2차 회담이 이루어졌다. 북쪽에서는 허담, 정준기, 윤기복, 여연구, 안병수가, 남쪽에서는 문익환, 정경모가 참석했다. 주요 안건은 문익환과 김일성의 합의사항을 공동성명으로 발표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결국 공동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하고, 그 기초는 안병수와 정경모가 맡기로 했다. 이에 덧붙여 김일성과 문익환의 의견을 반영한 4・2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의 핵심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제1항은 7・4공동성명이 천명한 통일의 3대 원칙, 즉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을 재확인한 선언적 의미를 가지며, 제2항에서는 하나의 민족, 통일된 나라를 지향해나가기로 하였다. 제4항에서는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의 통일이 필연적이고도 합리적인 통일 방도이며, 이를 한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점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한꺼번에’는 북한의 고려연방제를, ‘점차적으로’는 문익환의 3단계 통일 방안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측의 견해를 모두 수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제3항에서는 정치군사적 대결 해소와 동시에 이산가족 문제 등 다방면에 걸친 교류 및 접촉을 강조하였다. 제5항은 팀스피릿 합동군사훈련이 남북대화와 평화 및 통일의 성취와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제6항은 남북교류와 연방제 통일 방안이 두 개의 조선을 지향한 것이 아님을 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특히 문익환은 민간 차원의 대화와 교류가 남북한 간의 불신을 해소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7항은 남북교류와 협력 및 통일 논의에서 정부의 창구 일원화를 무너뜨리고 주체의 다변화를 이루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문익환과 김일성의 2차 회담은 4월 1일 모란봉 임시회담장에서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문익환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으로 인민 대중의 주체사상을 강조했다. 1992년 4월 9일 북한 헌법 개정 시 주체사상에 관한 부분이 수정되었는데, 이는 김 주석에 대한 문익환의 설득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2

남한 사회와 기독교계의 반응
당시 여론조사에 따르면, 문익환의 방북에 대해 잘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20%인 반면, 잘못이라고 본 응답자가 67%로 부정적인 시각이 더 많았다. 이는 민간 부문의 남북교류보다는 정부 정책의 일관성을 중요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긍정적인 응답자 중 88%는 문익환의 방북이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해 대조를 이뤘다. 이렇듯 대다수 국민들은 통일에 대한 열망은 가지고 있지만, 통일의 주체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나타냈다.3
이에 더 나아가서 정부는 문익환의 평양 방문을 국가보안법 제6조 탈출 잠입죄를 적용해 사법처리할 것을 표명했다. 당시 대법원 형사3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문익환, 유원호에게 각각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종교계의 반응을 살펴보자. 먼저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문익환의 평양 방문이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화해와 통일을 앞당기는 큰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기독교계는 보수와 진보의 두 진영으로 찬반 견해가 나뉘었지만, 전반적으로 찬성보다는 반대쪽이 더 많았다. 방북을 비난하는 단체로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한국장로협의회, 세계복음화운동중앙협의회, 한국개신교교단협의회, 한국기독교보수교단협의회, 나라와 교회를 위한 연합대책협의회 등 20여 단체가 있었다. 반면에 찬성하는 단체로는 기독교대한복음교회, 한국기독청년협의회, 한국기독교장로회, 한국기독교사회운동연합, 전국신학대학원 학생대표자협의회, 한신대학교 교수협의회 등 10여 단체가 있었다.
이렇듯 당시에 국내외적으로 남북의 평화와 화해에 대한 분위기가 무르익었지만, 정부나 국민들의 의식 속에는 통일의 주체는 정부로 단일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종교계는 교파별로 상이한 반응을 보였지만 보수 교파가 더 많은 남한의 현실에서 문익환의 방북은 종교계의 지지를 얻는 데 한계를 드러냈다.

맺음말
1989년에는 동구 및 미소 화해 분위기인 신 데탕트가 조성되었고, 남한은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대북포위 및 개방화를 위하여 북한과의 대화를 원했다. 이에 발맞추어 북한도 남북 정당 및 민간단체 교류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내외적인 상황하에서 전민련 고문이었던 문익환은 남한의 재야통일운동의 대표자 격으로 정경모과 유원호의 도움을 받아 방북을 결행했다.
방북 후 김일성과의 제1, 2차 회담을 통해 역사적인 4・2공동성명서가 발표되었는데, 제3항에서는 북한의 정치군사회담 우선 주장을 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교류와 병행 추진하기로 합의했고, 제4항에서는 한꺼번이든, 점진적이든 연방제 방식으로의 통일에 합의했다. 이는 남북한 정부의 통일 방안을 절충하는 입장이었고, 이 내용은 6・15공동성명을 통해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이어졌다.
문익환의 평양 방문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돌출행동이 아니라 각계각층의 통일운동의 역량을 한데 모아 민중의 통일의지를 결집시킨 행보였다. 또한 그의 방북은 신앙적 지표와 함께 이동수의 죽음 등 학생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을 안고 이루어진, 민간 사회단체 대표와 북한 고위층과의 만남이었다. 이는 사실상 통일 의지가 부족했던 남한 정부와 북한 당국의 가교 역할을 함으로써 통일운동에 큰 획을 그었다는 의미가 있다.

1 이유나, 『문익환의 삶과 분단극복론』(선인, 2014), 221.
2 문익환은 김일성과의 1차 회담에서 주체사상의 강조점을 인민으로 옮겨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김 주석으로부터 긍정적 답변을 받아냈고, 2차 회담에서도 이 문제를 다시 제기해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으로 재차 확답을 얻어내고자 했다.(이유나, “문익환의 통일론과 통일운동에 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논문, 2009, 197.)
3 「한국일보」가 서강대 김학주 교수(언론학)에 의뢰, 1989년 3월 31일과 4월 1일 이틀간 전국 1,19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여론조사 결과이다.(「한국일보」, 1989. 4. 4.)


이유나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고 “문익환의 통일론과 통일운동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홍익대학교, 상명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대표 저서로 『문익환의 삶과 분단극복론』이 있다.

 
 
 

2018년 7월호(통권 7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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