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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6월호)

 

  평화로 가는 길, 하나의 에피소드: 1979년 김재준의 ‘방북 기획 사건’
  

본문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분다. 분단 70여 년 만에 남과 북의 정상이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역사적 장면을 온 국민이, 전 세계가 지켜봤다. (글을 쓰는 시점에서) 머잖아 북미 간 정상회담에서는 한반도 종전선언과 관련된 실질적인 절차들이 전개되리라 예상된다. 실로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평화체제로의 염원과 꿈은 비단 오늘에야 이뤄진 것은 아니다.
시계를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유신체제가 종막으로 치닫던 그해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열망도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다른 한편으로 ‘통일’은 곧 ‘빨갱이’와 동의어로 읽히던 깊은 어둠의 시대이기도 했다. 동 트기 전에 가장 깊은 어둠이 오듯, 엄혹하던 그 시기에 해외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평화적 교류를 위한 방북 시도들이 있었는데 장공 김재준(1901-87)이 그중 한 분이다. 김재준 목사는 1970-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 전선의 지도력이자 중심인물이었다.
1979년에 일어난 이 에피소드는 김재준 목사가 캐나다로 이주한 이후 해외 민주화운동 중심에서 활동할 무렵 도모된 ‘방북 기획’으로, 당시 시대적 제약과 절박감의 교차가 여과 없이 드러난 사건이다. 또한 1980년 이후 해외 남북교류가 정례화되기까지 필요했던 역사적 현실이 담긴 이야기이다.

김재준 ‘방북 기획’의 배경
1970년대 해외 민주화운동은 일본, 북미주, 유럽의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다양한 조직들이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유신시대 박정희 독재권력을 포위, 압박하는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1974년 초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한 김재준은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한민통) 미주본부’와 ‘한국민주화운동기독자동지회’(민주동지회), ‘민주주의국민연합(국민연합) 북미주본부’ 등에서 핵심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측근에는 맏사위 이상철 목사(캐나다연합교회), 문익환의 부친인 문재린 목사 내외가 있었고, 국민연합 본부가 있던 뉴욕 인터처치센터 건물에는 구춘회, 이승만 (목사), 한승인(장로), 손명걸 등이 있었으며, 1978년 이후 민주동지회 사무국장이던 박상증도 뉴욕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해외운동 조직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중심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일에 공동의 목표를 두면서 국내 정보기관의 해외 공작에 노출되지 않도록 반(半)지하조직 또는 비공개 형태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와중에 일어난 1979년 김재준의 방북 기획은 어떤 배경에서 이뤄진 것일까?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 변화와 해외운동 진영에 미친 영향 등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냉전 중이던 1970년대 후반, 지미 카터 행정부는 동북아에 대하여 주한미군 철수 계획과 미중관계 개선 등의 전략을 통해 전반적으로 긴장완화를 추구하려 했으며, 이 연장선에서 1979년 1월 등소평의 방미(訪美)와 중미 정상회담, 한미 정상회담, 1979년 1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의 남북 당국 간 대화 제의, 카터 대통령의 남북미 3자 정상회담 제의 등이 연이어 전개된다.
한반도 긴장완화 모드에 북미 민주화운동 조직도 적극 대응하였는데, 김재준이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던 민주주의국민연합 북미주본부는 1979년 1월 29일 카터 대통령 앞으로 공개서한을 보내 분단의 외인론적 기원을 상기시키고 남북문제의 ‘자주적 해결’ 원칙을 강조하였다. 동시에 같은 날짜로 남북대화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상임 대표위원 명의로 발표하였다. 김재준(의장), 김상돈, 차상달, 한승인, 전규홍, 선우학원, 이재현 등이 그들이다. 1979년 초 한반도의 긴장완화는 미주 지역에서 운동을 펼쳐가던 진영 내에서 남북문제 인식의 변화와 통일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변화의 흐름을 형성시켰는데, 이는 기존 운동 노선과 상충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즉 박정희 독재권력의 종결을 우선하는 기존의 ‘선 민주, 후 통일’ 노선과 남북문제의 자주적 해결이라는 ‘선 통일, 후 민주’의 노선 차이가 그것이다. 미국 서부의 대표인사 김상돈, 뉴욕의 구춘회, 손명걸, 박상증, 캐나다 토론토의 이상철 등 국내 NCCK와 직접 연결된 조직의 경우 남북문제를 우선시한 통일운동의 위험성을 제기하면서 시기상조로 보았던 반면, 미국 교포사회에 일찍부터 정착했던 선우학원, 차상달, 이승만, 김정순, 임창영 등은 정세변화에 따라 통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다양한 해외 민주진영 사이의 중심에 있던 김재준은 공식적으로는 중립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큰 틀에서는 변화의 흐름을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통일과 ‘민족국가’, 기독교의 역할론을 강조하는 글을 써온 터였고,1 무엇보다 그 자신이 함경북도 경흥 출신의 월남인이었던 까닭에 남북교류와 평화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가 있었다.

김재준 ‘방북 기획’의 시작
1979년 김재준의 ‘방북 구상’은 그해 3월 1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한국문제 세미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한국문제 세미나’는 1970년대 후반에 서독에 거주하는 개신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국제정세 변화가 민주화와 통일문제에 미칠 영향 등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당시 서독뿐 아니라 유럽, 미주 등에 산재했던 반독재운동 인사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려는 의도에서 마련되었으며, 이 행사의 조직은 ‘한국민주사회건설 재독(在獨)협의회’의 손규태, 이삼열, 이준모, 장성환, 정하은 등이 준비하였다. 마침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안병무가 신병 치료차 한독교회협의회 초청으로 서독을 방문하는 일정에 맞춰 캐나다의 김재준, 미국의 선우학원, 독일의 이삼열 등이 강연자로 꾸려져 세미나는 국외에 있는 민주인사들이 회합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재준은 ‘통일문제 전망’을 주제로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김재준의 ‘한국문제 세미나’ 참석은 표면적인 동기가 되었고, 중요하게는 일정 기간 중 제네바의 북한대표부를 방문하여 ‘1980년 5월 방북’의 ‘구두 약속’을 맺게 된다. 어떤 경위에서 ‘방북 구두 약속’이 이뤄진 것일까?
김재준의 서독 및 스위스 방문을 처음부터 기획한 사람은 선우학원이다. 선우학원은 생전에 김일성 주석과 세 번의 만남을 가졌을 만큼 미국 동포사회에서 통일운동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918년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으로 김재준과는 평양 숭인상업학교 사제지간, 도쿄 아오야마(靑山) 신학부 선후배 등으로 인연이 깊었다. 선우학원의 회고록 『아리랑 그 슬픈 가락이여』와 김재준의 자서전 『범용기』 등을 토대로 김재준의 ‘방북 기획’ 전후를 추적해보자.
최초의 계기는 이러하다. 카터–등소평 간 대화 무드가 시작될 무렵, 해외운동 진영 안에서도 통일운동 차원의 ‘행동’ 논의가 전개되었다. 1978년 12월 무렵으로 추정되는데, 선우학원을 포함하여 ‘국민연합’ 내 기독교 인사 20여 명이 조지 워싱턴 다리 뉴저지 쪽 ‘홀리데이인’에 모여 북한과의 대화 제의를 결의하고, 대화의 방향은 ‘해외-북한 기독교인 대화’로 결정하였다. 이 대화 제의 결정이 선우학원을 통해 곧바로 평양에 전달되자 평양 측은 대화의 주도 문제를 제기하였고, 선우학원은 기독교 인사 대표로 김재준 목사를 거명하였다. 이에 북한은 적극적으로 ‘김재준 목사를 데리고 이리 오라. 대화를 하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논의 결과를 선우학원으로부터 전달받은 김재준은 좋다고 응답하였다. 대화 제의와 합의 등이 오간 이후의 일정은 앞서 언급한 3월 13일의 ‘한국문제 세미나’에 맞춘 서독행이었다. 그곳에서 구체적인 방북 일정 등이 논의될 예정이었다.
여기서 김재준은 어떤 동기에서 대화 수용과 방북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앞서 보았듯이 1979년 일련의 국제정세 변화를 목도하면서 김재준 역시 냉전적 적대감의 해소와 민간 차원의 교류 및 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우학원의 ‘대화 제의’와 방북 기획이 ‘흉계’(凶計)는 아니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더 직접적으로는 이 무렵 카터 대통령의 공산권 방문 허용조치에 따라 재미동포 중에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방북하는 사례가 늘어나는 추세였다. 선우학원을 포함해 1978년 미국 북장로교 소속 이승만 목사의 방북, 토론토의 「뉴 코리아 타임스」 대표 전충림 장로의 1979년 방북 등이 대표적이다.2 북한의 대화 제의와 미국 내 방북의 기류가 김재준의 고향 방문 결심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선우학원의 방북 제의, 김재준의 결심, 여기에 손규태 목사로부터 ‘한국문제 세미나’ 강연 초청 등이 결합되면서 김재준의 서독-스위스 방문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김재준의 서독행은 1979년 3월 9일 토론토 공항을 출발한 뒤 같은 날 뉴욕에서 선우학원과 만나 서독항공사인 루프트한자(Lufthansa)에 탑승한 것으로 시작된다. 김재준은 3월 13일에 세미나에 참석한 뒤 3월 19일에는 선우학원과 함께 제네바 북한대표부를 방문하였다. 김재준은 김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나 북한의 현실을 소개한 영상을 관람하고,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주체사상’ 팸플릿 등을 건네받는다. 이 자리에서 김재준은 정식으로 1980년 5월 방북 요청을 받았으며, ‘좋다’로 화답하였다. 이때 북측은 방북 경비로 ‘미화 7천불’을 김재준에게 제공하는데,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어른에 대한 인사’라는 권유에 받게 된다. 김일 부위원장과의 대담은 일대일로 이루어져 선우학원은 동석하지 않았으며, 모든 대화가 녹음처리되고 있었음을 『범용기』는 기록하고 있다.

갈등의 분출, 그 후
김재준은 서독 체류기간에 하이델베르크의 김윤옥-손규태 부부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김재준의 제자인 김윤옥의 회고록에는 북한대표부를 방문하고 돌아온 그의 심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스위스에서 돌아온 김재준은 ‘약간의 피곤과 흥분이 섞인 모습’으로 ‘방북 초청’ 사실을 손규태 부부에게 털어놓았다. 부부의 반응은 놀람, 그리고 강경한 ‘반대’였다. 김윤옥의 글을 그대로 옮겨보자.

나는 질색을 하면서, ‘목사님은 북한으로 가시면 안 돼요. 목사님은 혼자가 아니라 해외 민주화운동의 중심인물이니 다른 회원들 생각도 해야지요.’라고 하자 “그래, 그래야겠지.” 하시며 조금 쓸쓸한 웃음을 웃었다. 팔순이 다 된 할아버지는 이젠 다양한 권력투쟁의 독기들이 싫었고 목가적인 옛 고향 산천으로 평화롭게 돌아가고 싶은가 보았다.3


김재준의 북한대표부 방문 사실은 곧 캐나다에 있는 그의 가족들에게도 알려졌으며, 맏사위인 토론토의 이상철 목사는 곧바로 손규태 부부에게 전화하여 ‘목사님을 잘 지키지 않은 것’에 불호령을 내렸다. 독일과 캐나다의 가족과 동지들의 ‘강경 반대’에 부딪치자 김재준은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반대 여론은 서독에서 캐나다로 귀국한 뒤인 1979년 6월 12일 손규태 목사가 김재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명확한 논리로 표출되었다. 편지에는 ‘방북 의중’의 구체성 확인, 방북 의사 보류 요청 등이 담겨 있었다.4
독일 교회 그룹이 제시한 방북 반대 근거는 1) 국내외 민주화운동 진영 내 혼선 초래, 2) 그 결과 민주화운동 전선에 ‘회복할 수 없는 충격’ 야기, 3) 국내외 운동진영 간 결속 변질 등이었다. 덧붙여 손규태는 ‘방북 보류 요청’이 독일 내 교회 그룹의 일치된 의견일 뿐 아니라, 신병차 서독에 체류하던 안병무 역시 김재준의 방북을 반대한다는 전언을 강조하였다. 손규태의 편지는 김재준의 방북 행보가 개인적 차원의 일이 아닌 운동 전체의 무게임을 전달하고 있었다.
3월 23일 서독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뒤 김재준은 ‘국민연합’ 본부가 있는 뉴욕 인터처치센터 건물에서 구춘회, 손명걸 등의 강경한 반대 여론에 부딪치면서 재차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더욱이 김재준이 받아 온 7천불의 성격과 처리를 둘러싼 잡음과 음해들이 운동조직 안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김 목사가 이북의 정치자금을 받아왔고 선우 박사가 주선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필라델피아 교포 주간지 「독립」에 발표되는 등 상황은 악화되었다.
여기서 갈등의 성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북측에서 건네받은 돈을 ‘정치자금’의 일종으로 볼 여지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당시 운동 네트워크 안에 잠재되어 있던 노선 갈등에 발화점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1978년 7월 15일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민주주의 국민연합 북미주본부’ 2차 대회의 경우 주한미군 철수와 통일노선을 제기한 선우학원과 북한의 독재권력을 비판한 이상철 목사 간에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화 7천불’의 존재가 운동 네트워크 내부의 갈등 요소가 되자 김재준은 이것을 되돌려 줄 방법을 모색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제네바 방문을 둘러싼 일련의 행보를 밝힐 필요가 절실해졌다. 우선 ‘미화 7천불’을 되돌릴 방법은 선우학원을 통해 제네바로 직접 보내는 것이 최선이었다. 1979년 6월 10일 뉴욕 교외(선우학원은 시차가 다른 보스턴으로 기억)에서 있은 김홍준 동지의 생일 기념 모임에서 선우학원을 만난 김재준은 3개월가량 자신을 괴롭혀온 ‘서류가방’을 건네면서 제네바 북한대표부에 되돌려 줄 것을 당부한다.5
이 만남에 대해 선우학원은 김재준의 ‘서류가방’ 존재를 사전에 알지 못한 것으로 기록했는데, 북측이 선우학원에게 사전에 ‘인지시켰던 내용’이 회고에 기록된 것으로 볼 때 이는 기억의 왜곡이거나 오류일 것이다. 만남 이후 김재준은 선우학원으로부터 서류가방을 제네바 대표부에 돌려주었다는 회답 일체를 받지 못한 채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다음으로 김재준은 자신의 제네바 대표부 방문 사실을 토론토에서 발행되는 「민중신문」을 통해 밝힌 것으로 보인다.6 그러나 선우학원은 김재준의 「민중신문」 발표 내용이 심각한 사실의 왜곡이며, 배후에는 김재준의 맏사위이자 철저한 ‘반공주의자 이상철’ 등 측근 인사들이 개입한 것으로 맹비난했다. 필자 생각에 ‘사실의 왜곡’이란 ‘제네바행’에 김재준의 적극성, 공개 이후 후퇴, 그리고 ‘미화 7천불’의 처리를 둘러싼 시각 차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허위사실 유포로 선우학원은 「민중신문」을 고발하는 한편,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글을 작성하여 전충림(「뉴 코리아 타임스」)에게 보내는 등 갈등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1980년 5월에 예정되었던 김재준의 방북 계획이 무산된 가장 큰 이유는 국내 민주화운동에 가해질 타격에 대한 우려였다. 민주화운동에 ‘용공’, ‘좌익’ 등의 혐의가 난무하게 가해지던 시대, 국내외를 막론하고 정보기관의 ‘공작’과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만연하던 당시 분위기에서 김재준의 ‘방북 계획’은 위험부담이 큰 행보임에 분명했다. 반면에 선우학원 등 통일진영은 민주화운동 내 기독교 인사들의 강경한 반공반북 노선이 방북 계획을 무산시켰으며, 통일 노선으로 나아가던 김재준을 후퇴시켜 그의 이력에 불명예를 남긴 것으로 이해했다. 마지막으로 김재준의 심경을 읽어보자. 그는 방북의 꿈을 자신의 ‘센티멘털리티’로, 현실적으로는 ‘전략’과 ‘순정’을 분간할 줄 모르는 전장(戰場)의 장군에 빗대어 스스로를 자조(自嘲)했다.
이것으로 1979년 김재준의 방북 기획 사건은 미완으로 종결되었으나, 1980년 이후 해외 평화교류는 비약적인 전환을 맞는다.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 대표단(이화선, 이영빈, 김순환 등)의 방북, 이어 김성락, 홍동근 등 해외 기독자 중심의 교류가 활발히 전개된다.7 이 변화의 흐름에 김재준은 어떤 입장이었을까? 1980년대 교류는 북한 부주석이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김일이 해외 민주인사 10명에게 ‘통일문제 대화’ 초청 메시지와 함께 시작되었는데, 김재준과 이상철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재준은 이 제의를 국민연합 본부 안에서 공론화시킴으로써 1979년 개인 차원의 결정과는 다른 행보를 보였고, 결과적으로 방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0년 3월의 일이다. 국내 상황, 무엇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민주 진영의 ‘선 민주, 후 통일’ 노선이 여전히 주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 대표적으로 1975년 발표된 “統一된 民族國家로서의 한국과 基督敎”를 들 수 있다. 장공 김재준 목사 기념사업회, 『金在俊全集 11』(한신대학교 출판부, 1992), 198-217쪽 참조.
2 미국 북장로교 소속 이승만 목사의 1978년 방북 이야기는 김흥수, 『자유를 위한 투쟁-김관석 목사 평전』(대한기독교서회, 2017), 314-316쪽 참조.
3 김윤옥, 『빗장을 풀다 평화를 살다』(대한기독교서회, 2009), 124.
4 한신대 학술원 신학연구소, 『북미주 인권·민주화·평화통일 운동자료 (3)』(2004), ‘자료번호 109-손규태 목사가 김재준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1979. 6. 12.) 참조.
5 이때 김재준이 선우학원에게 돌려준 금액은 6,500달러인데, 차액 500달러는 「제3일」 후원 명목으로 김재준이 출판에 보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금액도 1979년 8월 31일 국제수표로 선우학원에게 돌려주어 5개월가량 김재준의 ‘양심의 고민’이 되었던 ‘미화 7천불’ 소동은 일단락된다.
6 최초로 공개된 「민중신문」의 내용은 현재 확인되지 않았으나, 김재준의 자서전 『범용기』에 일지(日誌)로 상세히 기록돼 있는데 선우학원은 『범용기』가 사실의 왜곡이라 비난하고 있다.
7 1980년대 해외의 대화와 교류 내용은 미주동포민족운동100년사편찬위원회, 『미주동포민족운동100년사』(일월서각, 2009) 중 선우학원의 글 참조.


고지수 | 한국현대사(개신교 사회운동사 전공)를 공부하였다. 대표 저서로 『김재준과 개신교 민주화운동의 기원』이 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출강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8년 10월호(통권 7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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