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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6월호)

 

  이후락의 평양 방문: ‘대화 있는 대결’의 시대
  

본문

 

동아시아 데탕트(Detente)와 남북대화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가랑비가 내리는 거리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가게 앞에 숱한 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속에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남북공동성명’의 발표였다. 그는 “최근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관계를 개선하며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회담”이 있었다고 하면서 5월 초 자신의 평양 방문과 뒤이은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의 서울 잠행 사실을 공개했다.
시민들은 그 발표를 듣다가 “와~” 하는 함성을 지르고 “이게 정말이냐?”고 서로 되묻기도 하는 등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실향민들은 감격에 사로잡혔고, 이북 출신 해외동포들의 기대감도 대단했다. 반면 의구심 어린 시선 또한 공존했다. “정말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하면서 불안해하는 모습도 보였다. 전날까지 안보 불안과 반공을 내세우던 박정희 정권이 느닷없이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으니 충격과 동요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락은 성명 발표 후, 별도의 기자회견에서 남침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남북대화라는 방식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향후 남북관계에 대하여 “우리는 대화 없는 남북대결에서 대화 있는 남북대결의 시대로 옮겨가고 있다.”라고 언급하였다.
7・4남북공동성명의 탄생을 가져온 남북 사이의 비밀대화는 전년도인 1971년 9월부터 판문점에서 진행되고 있던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양측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적십자회담과는 별도의 정치회담 창구를 모색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의도는 북한의 평화공세를 차단하고 남북대화의 주도권을 쥐고자 하는 데 있었다. 이미 1970년 8・15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계기로 남북 간 평화공존 관계의 정립과 ‘선의의 체제 경쟁’을 모색하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남북 간 정치적 대화 통로를 마련함으로써 한반도 긴장 완화의 계기를 포착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 정권의 남북대화 의지는 대화 그 자체보다 북한의 공세를 잠재우기 위한 측면이 더 강하였다.
미국 측의 지속적인 남북대화 종용과 압력 또한 남북대화의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9년 닉슨독트린을 전후한 시점부터 미국의 대한정책 관계자들로부터 한반도 긴장완화와 남북대화를 요구받아 왔다. 그러다가 1971년 10월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두 번째 중국 방문을 마치고 11월 1일 김일성 또한 베이징을 방문하여 주언라이 수상과 미중관계의 변화 모색을 상의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남북 간 비밀접촉을 시도하였다.

이후락의 방북과 박정희의 친필 훈령
남북 간 비밀접촉의 양측 실무자는 정홍진(남측)과 김덕현(북측)이었다. 정홍진은 당시 남한적십자사 회담사무국 회담운영실장으로서 중앙정보부 간부였다. 김덕현 역시 북한적십자사 중앙위원회 보도부장 신분이었으나 북한의 대남총책 김중린(노동당 중앙위 비서)의 동생이라는 증언이 있을 정도로 실세로 추정되었다. 이들은 판문점에서 여덟 차례의 비밀접촉(1971. 11.-1972. 3.)을 통해 각각 남북을 대표하는 이후락–김영주 회담 라인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중앙정보부는 북측 대화 상대자로 당시 노동당 조직부장이었던 김영주를 지목했다. 그가 김일성의 친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북한의 실력자로 간주되었다. 김영주는 이후락의 평양 방문 시 회담에 나왔지만 이후 북한의 실질적인 대화 책임자는 박성철 제2부수상이었다. 김영주가 전면에 나서지 못한 이유는 신병 때문으로 알려졌다. 정홍진과 김덕현은 각각 차례로 평양과 서울을 비밀리에 단독 방문하여 이후락–김영주(박성철) 상호 방문을 위한 사전 준비를 마쳤다.
특히 4월 19-20일 김덕현의 방남 시 이후락은 그를 만나 전쟁 방지와 전쟁의 해독성에 대해 수십 차례 언급하는 등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강하게 피력한 점이 눈길을 끈다. 남이나 북이나 모두 전쟁 방식의 통일을 추구하는 극렬분자가 있다는 지적과 함께 군부를 경계해달라는 주문도 했다. 북한에 의한 남침 위협의 실제와 심각성에 대한 사실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당시 박정희 정권의 남북대화 명분은 전쟁 방지와 남침 위협의 해소였다.
이 같은 준비과정을 거쳐 이후락은 1972년 5월 2일 판문점을 경유, 극비리에 평양 방문길에 올랐다. 당시 이후락의 방북 목적은 그가 대통령 앞으로 제출한 ‘특수출장인허원’이라는 특수지역(북한) 출장에 관한 허가 요청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문서에서 밝힌 출장의 이유는 “(박정희) 각하의 통일 이념을 그들에게 설득, 관철케 해보는 것”과 “그들의 의중을 탐색해보는 것” 등이었다.
문서에서는 여행 목적을 <가>, <나>, <다> 안으로 제시해놓았다. <가> 안은 “남한 국세(國勢)가 절대 우위라는 자신으로 모든 대화에 임함으로써 북 우위의 환상적 기를 꺾고 평화통일을 위한 모든 의견을 교환해 봄에 그친다.(비밀여행)”로 되어 있다. 남북 대결적 관점에 입각한 소극적 수준의 접촉을 의미한다. <나> 안은 평양 현지에서 이후락-김영주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것이었으며, <다> 안은 귀경 후 합의된 일시에 공동성명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이후락이 희망한 코스는 <나> 안이었으나, 실제로 현실화된 것은
<다> 안이었다. 이후락의 요청서를 검토한 박정희는 “평양에서는 훈령을 받고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이라는 글을 남겼다. 이미 이후락의 방북 시 평양-서울 간 임시전화 가설이 약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기술상의 문제는 없었다. 박정희는 ‘특수지역 출장에 관한 훈령’을 친필로 작성해 기본적인 지침을 전달하였다.
훈령을 통해 드러나는 박정희의 남북관계 인식은 체제 대결과 우열론적 사고에 입각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일문제의 단계적 해결을 지향하고 있었다. 1단계로 적십자회담을 통한 남북 이산가족찾기운동, 2단계로 경제·문화 등 비정치적 회담, 3단계이자 최종 단계로 남북 간 정치회담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남과 북의 전략적 온도차
방북 당일, 이후락은 청와대 예방 후 판문점을 통해 월북하였다. 청와대 예방 시, 박정희는 떠나는 이후락에게 두 마디를 건넸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책임자에게 잘 알려주었는지와 잘 다녀오라는 말이었다. 이후락은 윗저고리 주머니를 가리키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청산가리를 준비했다는 손짓을 보였다.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사였던 만큼 비장한 각오가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말대로 이후락은 방북에 대해 미국 측과 긴밀히 협의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미 남북 실무자들의 방북, 방남 과정에서 이후락은 미 CIA 한국 책임자 리차드슨과 모든 정보를 공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쿠다 일본 외상에게도 사전 통보하였다.
1972년 5월 2-5일, 3박 4일간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은 김일성, 김영주와 각각 두 차례씩 회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후락은 남북교류를 제안하고 이러한 단계를 거쳐 통일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며 통일을 위한 협상기구를 제안하였다. 박정희의 훈령에 따라 인도적 회담, 즉 적십자회담을 촉진시켜 인적·물적 교류, 통신교류 등을 제안했으며, 이러한 단계를 거쳐 김영주와 자신이 임명하는 몇 사람의 그룹이 서로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교류하면서 통일을 위한 회담을 하자는 안이었다. 반면 북한은 전격적으로 박정희-김일성 회담을 의미하는 ‘수뇌(首腦)회담’을 제의했다.
북한은 남한의 단계적 접근법이 ‘지연 전술’이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니라고 보았다. 정치 협상을 하면 이산가족찾기와 각종 교류 문제는 저절로 풀린다는 생각이었다. 남한의 평화적 공존론, 통일 시기상조론, 실력양성 승공통일론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북한의 전격적인 수뇌회담 제안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재확인되었다. 그러나 이후락은 정상회담에 대해 방법론과 시기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며 유보적 태도를 보였다.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통일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때’ 박정희-김일성 회담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판단에는 박정희 훈령에서 드러난 단계적 접근론이라는 원칙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북한은 남북대화를 좀 더 공세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끌기 원한 반면, 남한은 소극적이고 안정적 입장에서 상황을 관리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같은 해 11월, 이후락이 하비브 미 대사에게 정상회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이때 그는 가까운 장래에는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5년이나 10년 후 국제적 상황이 호전되거나 한국 경제가 충분히 좋아졌을 때, 또는 북한이 국제사회에서 외교적으로 승인받는 것을 한국 정부가 막지 못할 경우에 정상회담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점에서 남한의 전략은 속도 조절에 입각한 위기관리에 치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회담에서 김일성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통일 3원칙과 남북조절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김일성은 이후락-김영주 회담을 ‘조절위원회’라고 불렀으며 남북 간에 제기되는 여러 문제를 조절해나가자고 제안하였다. 북측은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구체적인 대안 제시를 통해 회담 분위기를 이끌어나간 것으로 이해되며, 이후락도 이에 호응하면서 대화 분위기가 상승효과를 거두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5월 말에는 3박 4일 일정으로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이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하였다. 이때 박성철은 이후락과 두 차례, 박정희와 한 차례 회담하였는데 대외적으로는 ‘재일교포’로 위장하였다. 청와대 방문 명목도 ‘재일교포의 내방’이었다. 박성철은 이후락 등 중앙정보부 임원들과의 회담에서 ‘정치 협상’과 ‘남북 교류’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신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평양회담에서 보였던 정치 협상 우선주의 태도를 바꾼 것이다. 그는 조절위원회의 상설화와 경제문화교류협의위원회의 조직을 제안했으며, 또한 이후락-박성철의 상호 방문과 남북 접촉에 대해서도 공개를 주장했다. 박정희는 박성철과의 회담에서 통일의 3대 원칙, 조절위원회 설치 등을 직접 확인하고 동의했으나 북측의 일관된 요구였던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보류함으로써 최종적인 거부 의사를 표명하였다. 남한의 경제력 우위가 보장될 때 정상회담이 가능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실력배양을 전제로 한 ‘선(先) 건설, 후(後) 통일’ 사고의 반영이었다.

7·4남북공동성명에 대한 반응의 간극
분단 정부 수립 사반세기 만에 합의한 남북공동성명 발표에 대한 국내외의 반응은 뜨거웠다. 국내에서는 대체로 적극적인 환영과 기대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냉전적 시각에 의한 반응도 있었다. 이에 대해 이후락은 통일 방침에 아무런 변동이 없으며 공동성명 3대 원칙 중 ‘외세 간섭 없는 자주적 해결’은 기존 남쪽의 통일 원칙인 ‘유엔 감시하 토착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 방침’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유엔은 세계를 관장하는 국제적 기구이기 때문에 ‘외세’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주한미군도 유엔군으로서 주둔하기 때문에 외세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유엔사령부 체제에서 벗어나 한미연합군사령부 체제로 공식 전환한 1978년 10월 이후에는 미군도 ‘외세’가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자주’에 대한 남북의 해석 차이는 주로 주한미군과 유엔을 둘러싼 것이었지만, 약소국이었던 남북한에 자주의 원칙은 사실상 통일문제에 대한 외세의 간섭 배제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반공이 국시(國是)인 나라에서 남북 상호방문은 키신저의 중국 방문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국내법으로 볼 때 위법이라는 지적도 불거졌다. 이에 대해 이후락은 곧바로 ‘대통령의 통치권 행사’로 맞받아치며 정당화하였다. 국회에서도 남북문제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는데 북한을 사실상 통치체제로 인정한 것인지, 베일에 감추어진 비밀약정들은 없는지, 왜 국회나 야당 간부들과 사전 협의 없이 진행했는지 등과 같은 의문과 지적이었다.
한편 김종필 총리는 “북한 공산주의 집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7・4성명이 조약의 성격을 띨 수는 없고 하나의 약속에 불과한 것”이라는 공동성명 폄하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공동성명 6항에서 합의한 남북조절위원회의 구성 주체가 양측의 핵심 인사인 중앙정보부장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고 있다는 점, 또 별도의 합의서에서 그 위원들을 남과 북의 장관 또는 차관(북한의 경우 상 또는 부상)급으로 임명하기로 합의한 사실 등은 이 성명이 남북 당국 간의 공식 합의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당시 신민당의 김대중 의원은 “공동성명은 원칙적으로 환영하나 비상사태의 철회, 국가보위법의 폐기,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의 개폐, 부정부패 일소 등 내정개혁, 야당 및 재야인사와 대화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밝힘으로써 정권에 의한 남북대화 독주 현상을 경계하였다. 김영삼 의원은 통일문제 논의를 위해 김일성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주목받기도 했다.
재야 민주화세력의 구심점이었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긴장 완화를 위한 남북 교류와 평화통일은 지지하지만 “비상사태 선언과 그에 따른 과잉단속으로 선량한 시민들의 눈과 입과 귀가 가리워진” 상태에서 “돌연히” 발표된 선언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정권 간의 이해득실에 얽히어 방편적인 통일 논의로 도리어 민족 분열을 영구화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엄중히 경계해야 한다.”라고 지적하였다. 재야인사들의 인식은 남북 간 교류와 회담을 앞두고 민중의 자유의사 표현을 억압하는 비상사태에 관한 특별조치법, 국가보안법, 반공법 및 기타 관계 법령을 폐기 또는 수정하고 비상사태 선언을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일반 국민들의 논의와 참여가 보장되지 않는 당국 간의 대화에 대한 비판의식도 드러냈다.
남북공동성명은 학계, 언론계, 재야 등에서 일정한 통일 논의 형성을 야기하였다. 일례로 같은 해 7월 20일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주최한 남북공동성명에 관한 공청회에서 천관우는 ‘복합국가론’을 제기했다. 복합국가란 두 개 이상의 정권이 있는 그대로 결합하여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말하는데, 남과 북이 현 체제를 유지하고 하나의 국가 형태를 추구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후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연방제 개념을 포용할 수 있는 진보적 안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안보 위기를 이용한 분단독재
7・4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박정희 정권은 국내 반응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와 여론의 동향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미국은 이미 공동성명 발표 일주일 전에 사전 통보를 받은 상태였으며, 남북대화의 처음부터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미국은 자신들의 ‘권고’를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대화는 당시 닉슨의 중국 및 소련 방문에 따른 국제정세의 개선, 즉 데탕트(Detente)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미국 내의 일반적 여론이었다.
미국이 남북대화를 적극적으로 권장한 사실은 당시 한국 측 외무부의 문서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72년 들어 미 행정부가 발표한 여러 가지 대외문서 및 미 행정부 고위 관리들의 발언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미국은 닉슨의 평화전략의 일환으로 남북한의 대화를 적극 권장하여 이러한 대화를 통한 한반도에 있어서의 긴장완화를 도모함으로써” 등과 같은 내용을 통해 볼 때, 한국 정부는 미국의 의도가 남북대화에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 또한 9월 1일에 열린 닉슨-다나카 미일 정상회담에서 남북대화에 대해 환영한다고 하였으며 동아시아 데탕트에 긴밀히 부합하는 현상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반면 이미 미중 관계개선 과정에서 북한과 긴밀한 공조관계를 형성해온 중국은 주한미군의 철수와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한국 침투를 중지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등 7・4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의 영향력을 후퇴시키려는 전략을 드러냈다.
결국 남북공동성명의 발표는 표면적으로 국내외의 찬사와 환영을 불러일으켰지만, 이 성명에 대한 의미 부여는 다양했다. 공동성명의 통일 3원칙에 대하여 남과 북은 해석의 차이를 보였으며, 박정희 정권 내부에서조차 부정적 인식이 존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야당과 재야의 비판에 직면했다. 주변국들 역시 제각각 자국의 이해관계와 영향력 확대를 고려한 반응을 보였다.
7・4남북공동성명은 남과 북 양측 정권의 통치체제 변화에도 커다란 작용을 하였다. 같은 해 10월 17일, 박정희는 ‘유신으로의 일대 개혁’을 선언하고, 국회 해산과 계엄 포고를 전격 단행하였다. 유신체제 선포는 남북대화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유신체제가 형성된 원인을 논할 때, 그 주요인을 박정희의 권력 강화 의지로 볼 것인지, 아니면 안보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체제결속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쟁점이 있다. 좀 더 복합적인 관점으로 보면,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안보위기를 활용하는 데 능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실상 북한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북한 역시 유신체제 선포 직후, 최고인민회의에서 국가주석제 신설을 포함한 사회주의 신헌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주석을 무소불위의 최고 국가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분단의 쌍생아, 남북의 거울(mirror) 효과라 할 만하다.
46년 전의 7・4남북공동성명은 세계사적 냉전(cold war)이 일시적으로 이완된 상태에서 시도된 남북관계의 빛나는 이정표였다. 그러나 북한은 박정희 정권이 이듬해 발표한 ‘6・23선언’에 대해 한미 공조에 의한 ‘두 가지 정책’의 추구로 받아들였고, 결국 미국과 직접 협상한다는 노선으로 급선회함에 따라 남북대화 중단 선언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탈냉전 이후 세 번째 남북정상회담까지 일구어낸 오늘의 상황에서 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과 논리로 전개된 사건이었지만, 그 논의와 쟁점은 아직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김지형 | 한국현대사를 전공하였다. 남북관계사, 정치사, 정치사상사, 사회운동사 등을 주로 연구했으며, 『데탕트와 남북관계』, 『한국근현대사 강의』(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 서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8년 10월호(통권 7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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