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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5·16 이후 한국 사회와 기독교
특집 (2018년 5월호)

 

  초창기(1965-70)의 국가조찬기도회
  

본문

 

지난 2018년 3월 8일 일산 킨텍스에서 제50회 국가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이 기도회는 지난 50년 동안 국가권력과 기독교가 만나는 장을 제공하였다. 국가조찬기도회가 무엇이기에 50년 동안 양자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변화의 과정을 거치기는 하여도 이러한 모임의 특성은 대개 초기 설립과정에 잘 나타난다. 조찬기도회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여기서는 1968년 시작된 ‘연례 대통령 조찬기도회’(현재 국가조찬기도회) 조직과정을 살펴보면서 조찬기도회의 역할과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국가조찬기도회는 ‘조반기도회’라는 조금은 소박한 명칭으로 시작되었다. 1966년 2월 3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20여 명의 국회의원이 기도회를 하고 “국제기독교지도자협의회(International Christian Leadership) 한국국회의원 조반기도회”를 결성하였다. 회장은 공화당 소속의 박현숙 의원, 총무는 민중당 원내총무 김영삼 의원이었다. 박현숙 회장은 이 자리에서 국회의원 조반기도회가 “당을 초월해서 당면한 공동과제를 기독교 정신으로 해결하고 국회 내에 명랑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밝혔다. 참석자들도 국회 내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기를 원했다. ‘조반기도회’는 이처럼 소박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임을 주선한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대표 김준곤 목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김 목사를 비롯한 참석자들은 조반기도회의 계획과 일정을 의논하는 가운데 대통령이 참석하는 조찬기도회를 열기로 하였다.1
‘한국국회의원 조반기도회’에 앞에 국제기독교지도자협의회(이하 ICL)라는 명칭이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ICL은 1935년 미국 시애틀에서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시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독교 실업가들이 모여 기도회를 하였다. 지도자협의회 모임이 긍정적 결과로 이어지자 교육가, 사업가 등 직업별로 모임이 결성되다가 당시 국회의원인 아이젠하워를 중심으로 ICL이 결성되었다. 이 ICL의 지원으로 한국국회의원 조반기도회가 열린 것이다. 모임을 주도한 박현숙과 김준곤은 미국의 경우처럼 대통령이 참석하는 조찬기도회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김준곤 목사는 1963년과 1964년 미국 국회 상하원 조찬기도회에 참석하면서 ICL 관계자들과 접촉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64년 무렵 미국 국가조찬기도회와 국회조찬기도회를 주관하는 ICL 총무 로빈슨과 국제대학생선교회 이사 겸 미국 국회조찬기도회의 하버슨 목사가 한국을 방문, 김준곤 목사에게 한국 국회조찬기도회 조직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이 김준곤 목사를 통해 한국대학생선교회 이사인 박현숙 의원에게 전달되었고, 박 의원은 김종필(공화당 의장), 김영삼(민중당 원내총무)과 의논한 후 1965년 2월 27일 조선호텔에서 김종필, 김영삼, 정일권 국무총리 등 약 20명과 함께 입법 과정에 기독교 정신을 불어넣기 위해 기도회를 하였다. 이 모임이 이듬해 2월 3일 국회의원 조반기도회로 이어진 것이다.2
1966년 2월 3일 결성된 ‘ICL 한국국회의원 조반기도회’는 대통령을 초청하여 기도회를 열기로 계획하고, 3월 8일 오전 7시 ICL 주선으로 조선호텔 볼룸에서 “대통령기도 조찬회”를 열었다. 이효상 국회의장, 정일권 국무총리, 김종필 공화당 의장, 이환신 감독을 비롯한 각 교파 지도자와 인사, 대학교 학장, 군 장성, 정・재계 주요 인사 등 500여 명이 참석하였지만, 정작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 기도회는 김종필이 고린도전서 13장을, 김영삼이 시편 23편을 낭독하면서 시작되었다. 정일권은 대통령의 불참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 기도회가 “6・25 동란으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자들과의 대항”에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는다는 신념 아래 조국 근대화에 노력하자.”라고 하였다. 대통령기도 조찬회를 주선한 존스의 짧은 강설에 이어 김활란이 기도를 하였다. 그녀는 “모세와 같은 능력으로 이 민족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에게 지혜와 능력의 지팡이를 달라.”라고 기도하였다. 설교를 맡은 김준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3

무신론의 사회는 절망뿐이니 우리는 어린아이같이 하나님의 앞에 서자.
오늘 이 자리를 통해 민족을 움직이고 구제하는 역사적 기회가 되자.
우리 민족에게 발전이 없다고 하는 자는 민족반역자.
우리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
박 대통령도 링컨같이 하나님의 은총 받은 사람으로 되어주기를 바라며 다 같이 기도하는 민족이 되자.


김활란은 박정희가 모세와 같은 능력의 소유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김준곤은 박정희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과 이에 근거한 개발과 발전 논리를 지지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자는 민족의 반역자라고 하였다. 또한 박정희를 링컨과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지도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였다.
조찬기도회는 그 출발부터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은 물론 대통령의 통치 이념을 기독교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대통령은 자신의 통치 이념과 정책을 지원할 수 있는 세력을 얻은 반면, 기독교는 권력의 품에서 교세를 확장하고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얻었다.
그러나 1966년 3월에 열린 이 기도회에 대통령이 참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ICL 한국국회의원 조반기도회는 대통령 조찬기도회를 발족시키지 못하였다. 대통령 조찬기도회는 이보다 2년 뒤인 1968년에 발족되었다.
1967년 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윤인식이 국회조찬기도회 총무로 시무하면서 위원장 정일형, 부위원장 박현숙·이메리 등과 함께 기도회를 이끌어나갔다. 당시 국회조찬기도회에 참석하는 의원은 34명이었는데 이들은 대통령이 참석하는 조찬기도회를 준비하였다. 그 결과 1968년 5월 1일 오전 7시 워커힐호텔에서 박정희 대통령, 김종필 의원 등 여야 국회의원, 정・재계 인사, 외국인 등 500여 명이 참석하는 “제1회 연례 대통령 조찬기도회”(The First Annual President Prayer Breakfast)가 열렸다. 1967년 12월 박정희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뒤 처음 열리는 기도회였기에 많은 사람이 참석하였다. 개회사에서 정일형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족이 될 때, …전쟁의 두려움도 사라질 것이며 헐벗고 굶주리는 가난의 어려움도 해소될 것이요, 또한 서로 다투고 싸우는 사회의 혼란도 청산되리라고 확신”한다고 하였다. 정일형은 박정희 정권의 통치 이념과 개발 정책에 동조하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4
그러나 이환신 목사의 설교는 달랐다. 그는 1961년 5・16 군사 쿠데타의 ‘혁명공약’5 제3조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舊惡)을 일소(一掃)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淸新)한 기풍을 진작시킨다.’는 일절에 나타난 국민도의, 민족정기, 청신한 기풍, 이 세 가지는 바로 민족양식의 본연의 자세를 말하는 선언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사회가 이러한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양심의 외침은 산하를 진동시키고 그 세력을 막아낼 아무런 세력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6

이환신은 박정희가 쿠데타 당시 발표한 ‘혁명공약’ 제3조를 인용하면서 이것을 민족양식의 정체라고 추켜세웠다. 이렇게 5・16 군사 쿠데타를 옹호하였을 뿐 아니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쿠데타 세력의 주장을 양심의 소리라고 칭송한 것이다. 이어 그는 상호 갈등하는 세력 간의 조화를 통해 평화와 안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영도자 박 대통령께 하나님의 말씀이 같이 하시어서 빛과 조화로 힘차게 발전하는 우리나라에 영광이 오기를” 빈다고 하였다.7
제2회 연례 대통령 조찬기도회는 1969년 5월 1일 세종호텔에서, 제3회 연례 대통령 조찬기도회는 1970년 5월 1일 조선호텔에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당시 기도회를 주도한 이는 당시 조찬기도회 준비위원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제2회와 제3회 연례 대통령 조찬기도회의 설교자는 김준곤 목사였다. 그는 제2회 조찬기도회에서 박정희가 추진하는 개발 정책과 영적 부흥을 연결시켰다.
제3회 연례 대통령 조찬기도회 준비위원회(윤인식, 『국회조찬기도회설교집』, 248)

구 별 이 름
위원장 정일형
부위원장 박현숙 이메리
총무위원 윤인식 송원영 윤남중 정직래 황규석 성갑식 이영민
섭외위원회 형정주 공정식 김신실 차지철 황성수 나일스–베일 호레스–언더우드
재정위원회 김삼상 김옥선 김재소 김인득 이봉수 김성업 백남조
안내위원회 김익준 김용진 이남준 전택보 김치묵 엄요섭

우리는 민족의 근대화와 민주화, 그리고 민족중흥의 과제 앞에 섰습니다. 이 사명을 달성하기 위하여 뉴우프론티어 정신의 용기를 발휘하고 그 활력소를 조처에서 찾아야 합니다. 땅 속에도 바다 속에도 경제와 과학에도 미개발의 영역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인간개발, 그 정신력 개발, 그 도덕적 부흥, 영적 신앙의 부흥에도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8
박정희 정권의 통치 이념인 개발과 발전을 지지하면서 기독교도 이에 발맞추어 영적 발전, 즉 부흥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개발과 발전을 통한 근대화론을 신앙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교회 성장과 부흥에 연결하였다. 이는 기독교 내에 박정희 정권의 통치 이념과 정책에 대한 지지를 유도하고 그 안에서 교회의 발전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대통령 조찬기도회를 통로삼아 국가권력과 기독교계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정책과 통치 이념을 지지할 수 있는 기독교 세력을 얻을 수 있었고, 기독교계는 권력의 인정 속에서 부흥과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조건들을 얻었다. 그런데 양자가 이렇게 밀착할 수 있었던 것은 김준곤 목사의 설교에서 발견되듯이 개발과 발전이라는 통치 이념과 성장과 부흥이라는 교회의 열망이 상호 시너지 효과를 줄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조찬기도회라는 회랑(回廊)을 통해 국가권력의 통치 이념과 교회의 부흥 성장이라는 신념이 밀착되었고, 이러한 정교 밀착은 국가권력의 안정과 기독교계의 종교적 기득권 보장이라는 상호 이익을 가져다준 것이다.
이후 국가조찬기도회는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초기 대통령 조찬기도회가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2018년 국가조찬기도회까지 흘러왔다.


1 “기도엔 여야 없다, 국회의원 조반기도회 발족,” 「기독교세계」, 1966. 2. 12.
2 “국가조찬기도회의 태동 배경,” 「뉴스파워」, 2004. 4. 19.
3 “여호와는 나의 목자, 대통령기도 조찬회 성료,” 「기독교세계」, 1966. 3. 12.
4 정일형, “개회사,” 『국회조찬기도회설교집』(서울: 교문사, 1971)
5 혁명공약
첫째, 반공(反共)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舊惡)을 일소(一掃)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淸新)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다섯째,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 『한국군사혁명사』(국가재건최고회의 한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 1963), 7.
6 이환신, “한국의 빛과 소금,” 『국회조찬기도회설교집』(서울: 교문사, 1971), 15.
7 이환신, 위의 책, 17.
8 김준곤, “제2회 연례 대통령 조찬기도회 멧세지,” 『국회조찬기도회설교집』, 20.


최태육 | 감리교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고, 목원대 대학원에서 “남북분단과 6・25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희생과 한국기독교의 관계연구”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사)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목원대와 감신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2018년 9월호(통권 7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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