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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5월호)

 

  박정희 정권의 유산,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본문

 

이명박, 박근혜 보수정권이 불러낸 박정희의 망령: 개발독재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悲劇)으로, 다른 한 번은 소극(笑劇)으로. 박정희는 평생 두 번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으며, 1972년 유신 쿠데타를 통해 종신집권을 획책했다. 박정희 정권 18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사살됨으로써 막을 내렸다. 비극이었다.
독재자의 딸 박근혜는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탄핵되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알려진 국정농단 사태는 경악스럽다 못해 허탈하다. 가히 소극이라 할 만하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으로 박정희 유산의 어두운 전모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박정희-최태민 인연은 박근혜-최순실로 세대를 넘어 이어졌다. 박정희의 졸개들은 박근혜를 둘러싼 원로들로 귀환했다. 유신시대 공안검사로 승승장구한 김기춘이 박근혜 시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복귀한 예가 대표적이다.
박정희 시대의 부정적 유산은 대체로 독재, 정경유착, 그리고 남북관계 악화로 집약된다. 박근혜 정권이라는 거울에 박정희 정권을 비춰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박정희 정권 시기는 대부분 잊힌 과거이다. 박근혜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다. 박정희-박근혜 정권을 제대로 평가하고 반성해야 정권실패, 나아가 국가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
박정희의 시신은 무덤에 있지만 그의 망령은 무덤에서 빠져나온 지 오래다. 박정희가 남긴 정치적 자산은 공화당에서 민정당, 민자당, 한나라당, 새누리당을 거쳐 이명박,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졌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한국의 보수세력은 미래에 대한 전망 제시가 아닌 박정희 시대의 향수를 불러내는 퇴행적 방식으로 정권을 탈환했다.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진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보수정권의 재집권과 더불어 역사 저편에서 현실 정치로 복귀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탄생이야말로 박정희의 사후복수(死後復讐)라 할 만하다. 그들은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당시에도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찬양한다. 당대에도 수세적인 정당화 논리에 불과하던 개발독재가 박정희 사후 30여 년이 지나서 공세적 이념으로 부활한 것이다.

박정희,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인가, ‘반동적 독재자’인가: 비교 맥락에서 본 박정희 정권
한국 현대사에서 박정희만큼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없다. 그는 1961년 5월 16일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18년이 넘는 장기 집권을 했다. 이 기간에 한국은 거대한 사회적 전환을 겪었다. 이 시기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급속히 진전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도시화도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한반도 5,000년 역사에서 박정희의 통치 기간만큼 발본적인 사회변동이 일어난 적은 없다. 그렇지만 이를 당대에, 또 후대에 어떻게 평가할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박정희는 유신체제의 호위병이자 자신의 오른팔 격인 김재규에 의해 피살되었다. 개인적으로 박정희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인간’ 박정희가 아니라 ‘대통령’ 박정희이다. 대통령 박정희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비슷한 발전 단계에 있던 다른 국가들과의 비교가 필수이다. 또한 개발독재 이후 민주화된 한국에서 다른 정권들과의 비교도 필요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박정희 18년을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권 15년과 비교해야 한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발전에 부분적인 공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한국 경제의 거시적인 흐름에서 보자면 경제발전 초기 단계에서 일정한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박정희 개발독재의 성과가 보수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과대평가되었을 뿐 아니라 신화로까지 격상되었다. 산업화 세력에게 박정희 시대는 배고픔을 벗어나 산업혁명의 시대로 진입한 ‘성공시대’이다. 반면에 민주화 세력에게 그의 시대는 군사독재로 점철된 ‘야만시대’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박정희의 유산을 상속받고자 하는 이들은 박정희의 부채도 떠맡아야 한다. 박정희 시기의 경제성장을 특권화시킬 일이 아니라 그러한 고도성장의 이면도 살펴야 한다.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와 지역불균형 성장, 그리고 노동 배제적인 성장전략은 온전히 박정희의 부정적 유산이다. 급격하고도 압축적인 사회변동을 겪은 만큼 박정희 집권기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박정희 신화 만들기와 개발독재: 박정희 망령 귀환의 정치적 배경
박정희가 집권한 1961년부터 1979년 사이에 일어난 한국 경제의 양적 성장과 경제구조의 질적 변동은 부인하기 힘든 역사적 사실이다. 박정희 시대는 정치적으로 볼 때 고도로 억압적인 권위주의 체제였는데, 경제적으로는 급속한 성장을 이룩한 시기였다. 정치적 권위주의와 경제적 고도성장 사이의 인과관계를 주장하는 이론이 ‘개발독재론’이다.
개발독재론은 민주화 국면인 1997년에 ‘박정희 신드롬’과 함께 등장했다. 여기서 말한 1997년은 박정희가 정치적으로 부활한 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박정희식 발전모델이 주목받은 이유는 1987년 이래의 민주화 이후 찾아온 1997년의 경제위기 때문이었다. 박정희를 무덤에서 불러낸 장본인이 김영삼인 셈이다.
당시 개발독재론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논리적 입장이 있었다. 첫째,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당시 경제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선택이었으며, 1990년대까지도 그 필요성이 지속되고 있다는 정치적 입장이다. 둘째, 개발독재는 자본주의 산업화 초기인 박정희 시대에는 경제성장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1990년대에는 국내외 환경변화로 그 필요성이 상실되었다는 역사적 평가이다. 셋째, 개발독재는 박정희 당시에도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었으며, 독재를 정당화하는 논리에 불과하다는 비판이다.
사실 ‘개발독재’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은 개발독재와 경제성장 사이의 인과성에 대한 실증적 분석과 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규범적 판단이라는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 개발독재는 아직 부르주아 헤게모니가 형성되지 않은 체제 이행기에 높은 자율성을 가진 독재권력이 정치적 자유와 대중 참여를 억압하면서 국익과 개발의 이름으로 위로부터 국민동원과 통합을 도모하는 체제이다. 밖으로는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적응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국가주의적 근대화 체제로 볼 수 있다.

박정희 시대의 명과 암: 일제유산, 경제성장, 그리고 권위주의
박정희 정권의 공과를 둘러싼 논쟁은 정치적으로, 또 학문적으로도 여전히 뜨겁다. 박정희 산업(Park Industry)이 존재한다고 할 정도로 박정희를 둘러싼 긍정적・부정적 논란은 무성하다.1 박정희 정권을 둘러싼 논의는 학문의 영역에 머무르기보다는 쉽게 정치화되어 전 사회적인 쟁점으로 비화하곤 했다. 박근혜 정권이 몰락한 지금이야말로 박정희 시대의 명암을 가감 없이 평가할 수 있는 호기이다.
박정희 정권을 평가할 때는 18년 통치에 대한 전반적이고 종합적인 평가인가, 아니면 개발독재와 같은 일정 측면에 국한된 평가인가를 구분해야 한다. 또한 전후 다른 정권과의 비교인지 혹은 다른 국가와의 비교인지도 명확히 해야 한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비교하고 평가하는지가 중요하다.
이제는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 이념적 선호나 정치성향에 따라 보고 싶고 강조하고 싶은 하나의 측면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당파적 이해를 넘어서야 할 때이다. 싫든 좋든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20년 가까이 통치한 지도자였다. 그가 선택하고 추진한 정책들은 이후 우리나라의 사회발전에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을 부과했다. 박정희의 시대와 그가 남긴 긍정적・부정적 유산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박정희 정권을 연구해야 한다.
그렇지만 박정희 정권도 그 이전 시대의 산물이었다. 요컨대 박정희 대통령도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정치환경 아래에서 역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기를 한미관계와 남북관계, 그리고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야 한다. 주변국이나 사회세력과 관계를 맺고 친구와 적을 나누며 경제를 관리하는 과제를 정치적으로 수용하는 모든 과정이 통치(governing)이다.
학문적으로 박정희 시대는 풍부한 논쟁거리를 제공한다.2 최근까지도 다양한 시각에서 박정희 시대를 바라본 연구 성과들이 다수 나오고 있다. 박정희 정권을 둘러싼 핵심 쟁점 중 하나는 정치발전과 경제발전 사이의 관계이다. 이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고, 경제성장과 민주주의가 병행하여 발전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개발독재론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개념상의 문제이다. 즉 ‘박정희 정권에 의한’ 경제성장과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일어난’ 경제성장을 구분해야 한다. 둘째, 독재(정치적)가 개발(경제적)을 낳았다고 주장하려면 경제성장 ‘이전에’ 독재체제가 갖추어졌다는 점을 논리적이고 역사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박정희 정권의 통치 특징을 묘사하는 개발독재라는 개념으로 박정희 정권기의 경제변동을 설명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셋째, 만일 시기적으로 개발독재체제 성립이 급속한 경제성장에 선행한다 하더라도 시간상의 선후관계가 곧 ‘인과관계’는 아니다.

사회과학에서 서로 다른 시간 지평
결과의 시간 지평
단기 장기
원인의 시간 지평 단기 I 단기 시폭 II 축적된 효과들
장기 III 문턱 : 인과사슬들 IV 축적된 원인들


이 표는 사회과학 연구에서 상이한 시간 지평에 대한 것이다.3 박정희 개발독재를 찬양하는 이들은 원인과 결과 모두 I에 해당하는 단기 시폭(temporality)만 강조하는 근시안적인 모습을 보인다. 5·16 쿠데타와 뒤이은 박정희 정권의 성과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경로의존 시각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전근대에 이미 중앙집권화된 효율적 관료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일제식민지를 겪으면서 일본식으로 근대화된 인적 자원과 제도가 축적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일제잔재 청산에 실패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박정희 정권은 친일 인맥을 전면적으로 다시 등용했다. 한일국교 정상화와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에는 해방 전 친일 인맥이 커다란 작용을 했다. 물론 미 군정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미국식 아이디어(idea)와 제도(institution)도 유입되었다. 한국전쟁 휴전과 한미동맹으로 안보가 일정 부분 확보되었다. 전쟁을 통해 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 국가 역량(state capacity)이 강화되었다. 이승만 정권에서 이루어진 토지개혁 성공으로 지주 계층이 몰락해서 자본주의 산업화에 대항할 만한 사회세력이 부재했다. 또 교육의 팽창으로 인적 자본이 축적되어서 자본주의 산업화를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마련되었다.
한국의 자본주의 산업화에는 지정학적인 이점도 작용했다. 미국은 냉전기 동아시아에서 반공블록을 구축하면서 일본을 중심에 두고 한국을 하위 파트너로 자리매김했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이 주도한 베트남 전쟁에도 적극 참전했다. 박정희 정권의 수출주도형 산업화는 미국의 시장개방, 일본에서 도입된 자본과 기술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주어진 국제정치, 세계경제 조건에서 기회를 잘 포착한 것이다. 일개 국가의 지평에서 경제 기적을 만들어낸 게 아니다. 더욱이 경제성장의 어두운 대가는 일반 민중의 몫이었다.
박정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전쟁과 한미동맹이 현재 우리 정치 영역에 끼치는 권력효과를 안보와 자유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역사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다른 한편, 한국 정치경제의 형성과 변형을 통치라는 관점에서 성찰해야 한다. 한국 현대사를 한미관계를 축으로 삼아 민주주의 및 자본주의와의 함수관계로 자리매김하자는 말이다. 한국 현대사를 통치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입장은 역사로서의 현재에 작용하는 안팎과 위아래의 힘을 존재론적으로 전제한다. 또한 국가의 형성과 변형을 개별 시민 주체의 형성 및 변형과 동시에 추적한다. 자유주의 통치성(liberal governmentality)의 형성과 변형을 중심으로 한국 현대사를 정리할 때 배면에 전제된 한미관계를 소홀히 하거나, 역동적으로 변하는 한국 정치경제의 성격을 교조적으로 재단할 때 발생하는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나아가 민족통일이 상위의 목표냐 국가안보가 우선이냐, 혹은 개인의 자유가 먼저냐 국가안보가 먼저냐 하는 논쟁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양자택일, 제로섬이 아닌 안보와 자유의 관계에 대한 개념화를 통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박정희의 망령을 무덤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박근혜 재판을 구시대와 단절의 계기로!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경제성장이 급속하게 진행될 수 있는 조건들이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있었다. 또 미국과 일본이 냉전을 배경으로 한국과 연결돼 있던 외부조건도 한국의 급속한 경제개발에 기여했다. 박정희 개발독재를 미화하는 논자들은 박정희의 지도력을 배타적으로 강조한다. 동시에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지연시킨 것은 ‘불가피한 비용’이었다고 주장한다. 경제개발과 민주주의 희생은 동전의 앞뒤 관계라는 것이다. 이들은 경제개발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추구하여 성공한 사례는 선진국에서도 선례가 없고 후진국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비교역사사회학적 분석은 개발독재가 불가피한 선택도 아니었고, 급속한 경제성장이 개발독재 때문도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박정희의 공(功)은 박정희에게, 나머지 공은 각자에게 돌려야 한다. 박정희를 신격화하려는 시도는 이제 무의미하다. 박정희 개인의 영욕과 지도자 박정희의 통치 노선, 그리고 성과와 한계에 대한 평가를 구분해야 한다. 박정희가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쟁을 거치면서 보여준 현란한 변신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박정희의 변화무쌍한 변신이 가능했던 격동기 정치적 장(場)의 변화, 그 안에서 박정희의 선택을 면밀하게 탐구해야 한다. 또 1961년 이래 역동기의 정치적 헌신을 권력욕으로 환원하지 말아야 한다. 권력욕은 통시대적인 현상이다. 그의 권력욕이 어떻게 권위주의 제도로 구체화되는지를 살펴야 한다. 박정희에 대한 관심과 학문적 연구를 곧바로 현실정치와 연결시키는 관행을 탈피해야 한다.
무릇 보수주의자라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지혜로서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박정희로부터 물려받을 ‘전통’은 과연 무엇일까? 경제개발이라는 국가의 목표와 독재라는 목표추구 방식이 지금 여기에서 보수세력이 되살릴 박정희의 전통일 수는 없다.
박정희는 당대에 어떤 인물이었나? 그는 일본 제국주의시대에는 괴뢰정부인 만주군 장교였으며, 해방공간에서는 진짜 ‘빨갱이’였다. 군사 쿠데타 성공 이후에는 아래로부터의 역사 다시쓰기를 선도하여 ‘진보적 역사인식’을 보여주었고, 농민의 자식을 자처하는 ‘포퓰리스트’였다. 박정희가 만일 무덤 속에서 자칭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말할 기회를 갖게 된다면 그는 무어라 말할까? 아마도 이미 시효가 다한 개발독재의 망령 따위를 불러내고자 굿판을 벌이지 말고 당대의 도전에 실용적으로 대응하라고 주문했을 것이다. 안팎의 도전에 결연하게 응전한 제3세계 국가, 약소국, 분단국, 반주권국(semi-sovereign)의 정치지도자, 이것이 박정희의 초상이다. 대통령이 되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온갖 긍정적・부정적 유산을 업은 채, 국제정치와 세계경제를 마주하고 조국 근대화를 추진해간 박정희는 고독한 지도자였다. 민주화와 세계화의 시대에 정권을 잡은 박근혜는 아버지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 박근혜 정권은 역사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시대착오적인 개발독재의 논리와 실천에 사로잡혀 있었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은 박정희 노선을 확인사살한 셈이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으로 박정희 정권이 온전히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질 무대가 마련되었다. 아니 이제 무대 자체가 무너졌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무덤에 순장(殉葬)된 셈이다. 자업자득이자 사필귀정이기도 하다. 이번에야말로 관에 단단히 못질을 해야 한다. 또다시 박정희의 강시(僵尸)가 출몰하지 못하게 말이다. 그러기 위해 박정희에 대한 과도한 찬사와 가혹한 비판을 넘어, 박정희의 공(功)은 공으로, 과(過)는 과로서 평가하자. 박정희 시대의 밝은 면은 밝게, 어두운 면은 어두운 채로 드러내자. 이제야말로 독재와 정경유착, 그리고 남북대결을 넘어서야
한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무덤에서 나온 박정희의 망령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촛불집회로 정권을 교체하고 적폐청산에 나선 지금, 박정희 정권의 공과와 명암은 한낱 ‘옛이야기’일 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안의 박정희’를 몰아내는 일이다. 우리에게는 신민(臣民), 국민(國民), 시민(市民), 민중(民衆) 정체성이 공존한다. 대한민국의 현대를 만들고 현대를 완성해나가는 프로젝트는 깨어 있는 시민 개개인의 몫이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또다시 박정희의 유령에 쫓길지도 모른다. 이념과 제도는 결국 개인에서 완성된다.

1 비교적 긍정적인 시각에서 박정희 시대를 정리한 연구서로는 다음 저서를 참조할 수 있다. Byung-Kook Kim & Ezra F. Vogel eds., The Park Chung Hee Era: The Trans‐formation of South Korea(Harvard University Press, 2011).
2 가장 최근의 연구 성과로는 다음을 참조하라. 임현진, 『비교시각에서 본 박정희 발전모델: 라틴 아메리카의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칠레, 그리고 아시아의 한국』(진인진, 2017).
3 졸고, “박정희 정권기 개발독재 비판: 비교역사사회학적 접근,” 「역사비평」(2011년 여름호) 참조.


정일준 |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한미관계』, 『한국 공공사회학의 전망』(공저) 등이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8년 5월호(통권 7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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