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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포스트휴먼, 인간 이후의 인간
특집 (2018년 4월호)

 

  포스트휴먼 시대에 종교를 말하다
  

본문

 

포스트휴머니즘 시대의 종교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휴머니즘 시대의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것에 관해서는 이미 앨리스터 맥그래스가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에서 잘 말해주었다.
종교개혁 당시 교회의 몇 가지 기본 사상은 성서를 오해한 것으로부터 나왔다. 이것에 반발해 새로운 사상, 새로운 학문이 등장했는데 그것이 휴머니즘(humanism, 인문주의)이다. 휴머니즘은 르네상스의 밑바탕을 이루는 세계관이다. 기본 방법은 라틴어로 ‘아드 폰테스’(ad fontes), 즉 ‘원천으로 돌아가자’이다.
당대 인문주의자들은 대부분 교회의 개혁에 관심을 가진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르네상스에 적용한 것과 똑같은 방법을 기독교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성서, 그중에서도 신약성서가 그들이 돌아갈 원천이라 생각했다. 기독교인들이 신약의 사상과 ‘직접’ 교감할 수 있다면 당시 교회가 안전하게 거주하고 있던 스콜라 신학의 성서해석을 밀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기독교 인문주의의 대표자가 바로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이다. 그는 교회의 미래가 성서를 아는 평신도에게 달렸다고 생각했다. 당시는 히에로니무스가 번역한 라틴어 성서 ‘불가타’가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는데, 에라스무스는 이 성서를 원어로 읽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1516년 그는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출간한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결정타였다.
종교개혁의 출정 선언이라 할 수 있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의 제1항과 2항은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성서 번역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다.[제1항–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고 하셨을 때, 이는 믿는 자의 삶 전체가 회개하는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제2항–이 말씀이 고해성사, 즉 사제에 의해 집도되는 고백과 속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불가타 성서는 마태복음 4장 17절을 “고해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로 번역하였다. 에라스무스는 그리스어 원문이 ‘고해’가 아니라 ‘회개’임을 밝히면서 성서에 대한 오해 위에 서 있던 중세 가톨릭교회의 근간을 흔들었다.
르네상스가 있었기에 종교개혁이 가능했다. 인문주의가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곧 휴머니즘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맥그래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한다고 해서 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부끄럽지만–늘 부패하고 타락한다. 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개혁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기존의 교리, 신학, 해석을 근원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는 새로운 사상적 배경이 있어야 한다. 1517년에는 휴머니즘이 그 역할을 했다. 500년이 지난 지금–만약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면–필자는 그 역할을 ‘포스트휴머니즘’이 할 것이라고 믿는다.
교회를 개혁하라는 요구 이면에는 새로운 인간이해가 있었다. 인간은 만물을 바꾸는 힘이라는 새로운 이해가 침묵과 굴종의 삶을 살던 중세인들을 문예부흥과 계몽주의와 종교개혁으로 내몰았다. 당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지도자 지오바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저 유명한 ‘르네상스 선언’(1486), 속칭 ‘미란돌라 선언’에 잘 드러나 있다.

당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법에 의해 구속되고 제약되는 고정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만은 어떠한 한계나 제약을 받지 않고 당신 마음대로 당신 본성의 한계와 제약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상위의 신성한 생명체로 다시 상승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당신’은 물론 인간이다. 중세교회의 인간관은 아주 보수적이었고 이른바 전통의 힘이 사람들을 질식시키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서 미란돌라의 선언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정적인 세계관을 무너뜨리고 자신과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는 역동적인 세계관을 제공했다. 사실 루터의 만인제사장론도 신의 부르심을 수도사로만 국한하던 중세와 단절하고 평신도들에게 새로운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다. 이렇듯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은 당대 새로운 시대적 요구와 기대, 그리고 사상과 합류하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근대 휴머니즘이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휴머니즘이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특히 인간을 다른 존재들과 범주적으로 구별하는 기독교적 버전의 휴머니즘이 문제다. 휴머니즘은 대체로 인간이 이 세계 한가운데서 절대불가침의 존엄성을 지닌 존재라는 믿음으로 정의될 수 있다. 물론 인간의 존엄성은 지금도 포기하지 말아야 할 휴머니즘 최고의 가치이다. 더구나 그것은 깊은 종교적 뿌리를 가지고 있고(특히 창세기 1장), 우리는 그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미란돌라의 선언문에는 오늘날 창조세계의 모든 생명과 인간 자신의 안전까지도 위협하는 독소조항이 숨어 있다. 다름 아닌 인간 중심적이고 종(種) 차별적인 오만한 휴머니즘이다.
여성철학자 로지 브라이도티는 근대 휴머니즘이 말하는 ‘인간’은 사실 인간 종 중에 남성, 즉 ‘그’(he)라고 말한다. 더욱이 이 ‘그’는 백인이고 유럽인이며 잘생겼고 능력 있는 몸까지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을 역사와 우주의 중심에 놓기를 고집하는 것이 근대 휴머니즘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휴머니즘은 제국주의적이었다.”라고 말한다. ‘인류’의 이름으로 행해지지 않은 범죄를 거의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예를 우리는 ‘인류세’에서 들 수 있다.
일군의 과학자들이 우리 시대를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라는 낯선 이름으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인류세란 인류가 지구에 끼친 영향이 너무나 크고 깊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1만 2,000년 전에 시작된 지금의 현세(現世, Holocene)가 끝나고 새로운 지질시대가 시작됐다는 주장이다. 한마디로 인류세란 인간이 지구를 통째로 바꾸어놓은 지질시대를 말한다.
각 지질시대에는 ‘골든 스파이크’라 불리는 중대한 특정 지표가 있다. 인류세의 골든 스파이크는 방사성 낙진, 지구를 뒤덮은 플라스틱, 화력발전소가 내뿜는 미세먼지와 매연, 그리고 특히 대규모 공장사육이 낳은 닭 뼈 등이다. 1940년대 후반 이후 수백 차례의 핵실험으로 지구에 떨어진 방사성 낙진은 우리 앞의 그 어느 지질시대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전형적인 골든 스파이크라 할 수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가 생산한 플라스틱은 그것을 랩으로 만들 경우 지구를 한 번 감싸고도 남는다. 매일 아침 양치질 등을 통해 하수구로 버려진 미세 플라스틱이 작은 물고기들의 몸에, 종국에는 우리 인간의 몸속에 쌓이고 있다. 우리의 허파 깊숙한 곳과 혈관 안에는 정말 작은 먼지들이 차곡차곡 축적되고 있다.
우리가 먹고 버린 치킨 뼈도 쓰레기 매립장에 엄청난 규모로 쌓이고 있다. 원래 닭의 학명(學名)은 갈루스 갈루스 도메스티쿠스(Gallus gallus domesticus)이지만, 우리는 ‘가축이 된 닭’을 ‘치킨’이라고 부른다. 한 해 도살되는 닭은 500–600억 마리나 되며,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은 지금의 쓰레기 매립장에서 수많은 치킨 화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외에도 알루미늄, 콘크리트와 같이 인류에 의해 창조된 이른바 ‘기술 화석’들도 발견될 것이다. 이런 화석들은 삼엽충 화석이 발견되는 고생대 캄브리아기와도 다르며, 공룡의 화석이 발견되는 중생대 쥐라기와도 구별된다. 우리는 지금 ‘인류세’라는 매우 독특한 시대, 인간이 지구 환경을 통째로 뒤집어놓는 인간 제왕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기후변화 문제를 이야기하기에는 이 지면이 모자랄 정도이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이 나왔다. ‘탈인문주의’라고 번역해도 될 것이다. 필자는 ‘탈인본주의’라고 번역하고 싶다.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먼의 종말’이 아니라 ‘특정한 휴먼 개념의 종말’을 의미한다. 오늘의 인류세 시대에 휴머니즘 안에 있는 인간중심주의의 오만과 싸우고, 또 ‘휴먼’이 “어떠한 한계나 제약을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본성의 한계와 제약을 설정할 수 있다.”라는 근대 휴머니즘의 예외주의와 싸우는 이론이다. 휴먼의 독점에 반대하고 휴먼의 월권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어떤 운명을 가진 자율적 전망 속에서 결국 인간의 신격화를 낳은 근대 휴머니즘의 과오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물론 오늘의 포스트휴먼 담론 안에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흐름도 있다. 이른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다. 이 사조는 기술 결정론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새로운 종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인간과 기계, 인간과 정보의 융합을 통해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소위 ‘인간 향상’을 꾀하는 이론이다. 기술에 우호적인 트랜스휴머니즘은 ‘허약한’ 인간의 육체를 ‘더 나은’ 기계로 대체하려 한다. 정신의 ‘탈육체화’ 및 인간의 ‘사이보그화’를 꿈꾸며 새로운 생물 종으로서의 ‘포스트휴먼’의 등장을 꿈꾼다. 우리는 영화 <채피>에서 이미 인간의 정신을 완벽하게 다운로드하여 부품만 갈아 끼우면 영생 불사하는 인간 종의 개량을 보았다. 사실 트랜스휴머니즘의 목표는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영국의 생물학자 줄리언 헉슬리의 책 『계시 없는 종교』에 잘 나타나 있다.

인간 종족은, 만약 그들이 원한다면,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다. …전체 인류가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믿음을 부를 이름이 필요하다. 아마도 트랜스휴머니즘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판타지이다. 몸이 가진 자아의 유한한 속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판타지 말이다. 바로 이러한 환상 속에서 오늘날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기술을 통해 인간의 초월성을 추구한다. 하지만 ‘정신 업로딩’으로 대변되는 그들의 극단적인 탈체화(脫體化)는 오히려 정신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며 이성적 정신을 절대시하던 과거 휴머니즘의 전통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것이다. 그 결과 트랜스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의 영육 이원론과 주객 이원론을 전용하여 인간이 슈퍼휴먼 단계에 이를 때까지 휴머니즘적 특성을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 기계와 유전공학을 통해 인간의 본성뿐만 아니라 자연을 우리의 목적에 봉사하고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시 만들어내려는 것은 다름 아닌 근대 휴머니즘의 열망, 프로메테우스적인 열망, 즉 ‘정복을 위한 충동’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와 달리 진정한 포스트휴머니즘은 다시 이 정복의 충동을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겸손을 다시 배우는 것이다. 휴먼의 어원은 라틴어 ‘후무스’(humus)로, ‘흙’이라는 뜻도 있지만 ‘겸손’이라는 의미도 지닌 단어이다. 사실 성서에서도 하나님은 ‘아다마’(adama)를 가지고 ‘아담’(adam)을 지으신다. 아다마는 흙, 먼지, 혹은 농토이고, 그렇다면 아담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갈, 그리고 겸손히 흙을 경작하는 농부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겸손을 잃어버린 것이 근대 휴머니즘일진대, 그렇다면 진정한 포스트휴머니즘은 과학과 기술로 휴먼을 개선하고 초월하려는 ‘신 놀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진정한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이 아닌 모든 존재를 범주적으로 타자화한 근대 휴머니즘의 인간중심주의와 종 차별주의를 버리고 땅과 지구와 자연이 함께 공생하는, 생태계의 일원으로서의 새로운 인간을 지향하는 것이다. 인간이 자율적이고 초월적인 주체라는 근대 휴먼의 환상을 깨끗이 청산하고 관계적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철학자 김상봉의 말처럼 ‘홀로주체’에서 ‘서로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일찍이 성서도 자기의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아무도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기이하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 빠져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던 나르시스와 같은 인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재앙이 네게 임하리라(사 47:10–11a)

근대 인간의 문제를 ‘자폐증’의 관점에서 바라본 토마스 베리 신부의 말은 지나치지 않았다. 알다시피 자폐증이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닫아놓고 있어서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는 말하면서도, 강물과는 이야기할 줄 모르며, 강물의 말도 들을 줄 모른다. 우리는 고귀한 대화를 상실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주를 상실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참 아름다워라>에도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라는 가사가 있다. 강물과 이야기할 줄 모르고 강물의 말도 들을 줄 모르면, 신의 음성도 듣지 못하는 법이다. 강물을 토막토막 끊어 물이 흐르지 못하게 하면, 그 흐름 속에서 생명을 지으시고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토막토막 끊어버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휴머니즘 안에 강하게 남아 있는 모든 불행한 유산을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강조가 인간을 오만의 자리에, 신의 자리에 이르게 하지 않도록 인간의 존엄성이 함의하는 그 특권적 지위를 없애야 하는 것이다. 휴머니즘은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아기와 같다. 아직 미완성이다. 위대한 근대 휴머니즘의 가장 큰 역설은 인간의 비판적 지성을 찬양하던 휴머니즘이, 그것이 가장 필요한 곳에서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오늘날 휴머니즘은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휴머니티를 숭배하는 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휴먼에게 주어진 이러한 무제한적 권력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 인간의 전능성에 대한 이 미신적 신앙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 우리는 휴머니즘 전체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누리지 못하는 이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휴머니즘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했으며, 필요 이상으로 무비판적이었고, 그 결과 지금 그것이 매우 위험한 괴물처럼 자라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슈마허는 이미 ‘휴머니즘의 실패’에 대해 이렇게 통찰했다.

인간의 전능성에 대한 근대의 신앙이 흔들리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근대의 실험’이 실패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인간은 하늘로 향하는 문을 닫아버리고 엄청난 에너지와 창의력을 동원해 스스로를 땅에 국한하려 애썼다. 그런데 이제 그 인간은 하늘에 이르는 길을 거부하는 것이–의도하지 않았지만–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임을 발견하고 있다.

신학이 다시 하늘로 향하는 문을 열고 하늘에 이르는 길을 낼 수 있을까? 그러려면 먼저 기독교 신학이 겸허히 자신이 공모한 재앙을 정직히 성찰해야 한다. 정통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인간의 절대적 타락을 강조한다. 그런데 언뜻 신중심주의로 보이는 이 신학이 실제로는 매우 인본주의적이다. 호랑이가 없는 산에 토끼가 주인 노릇 한다고 했던가? 하나님의 초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멀리 추방해버린 결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인간이 이 세계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한다. 자신의 것도 아닌 창조세계를 맘대로 착취하고 수탈해도 그것이, 신이 인간에게 준 특권인 것처럼 미화한다. 매튜 폭스도 이를 성찰했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재앙은 종교에 닥쳤거나 그 안에서 일어난 재앙일 것이다. 그 재앙이란 성과 속을 개념적으로 분리한 일, 곧 피조물에게서 창조주를 빼앗은 일이다.”
하나님은 이 세계에 성육신해 계신다. 하나님과 세계는 동일하지 않으나 이 세계는 하나님의 육화(肉化)이며, 창조가 곧 성육신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삼라만상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표시이며 ‘하나님의 몸’이다. 이 하나님은 우주 밖이 아니라 우주 안에 계신다. 지금 여기 이 세계 안에 현존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이 세상 밖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하나님의 집’(oikos)으로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적 영성은 하늘과 태양, 그리고 달과 별들의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며, 모든 생명 가운데에 생명의 근원(Life of all life)으로 전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의 숨결보다 더 우리에게 가까이 계신 그분을 만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에서 비로소 슈바이처가 말한 경외심, 즉 모든 생명에 대해 경탄할 수 있는 능력이 나온다. 이런 능력을 우리 인간이 회복할 수 있을까? 생명에 대한 이 깊은 감수성을 기독교 신학이 회복할 수 있을까?
유발 하라리(Yuval N. Harari)는 그의 대중적 교양서 『사피엔스』에서 “사피엔스는 이제 스스로 신이 되려 한다.”라고 통찰했다. 오늘의 호모 사피엔스는 과학을 통해 ‘자연 선택’을 ‘지적 설계’로 대체하고 유기체가 아닌 생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앞으로 인간 사회와 경제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과 마음도 유전공학, 나노기술, 뇌 기계 인터페이스에 의해 완전히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심지어 죽음조차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더 이상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예수나 부처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이 죽음에도 모종의 과학적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라리는 이렇게 말한다.

7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만 신경을 쓰는 별 중요치 않은 동물이었다. 이후 몇만 년에 걸쳐 이 종은 지구 전체의 주인이자 생태계 파괴자가 되었다. 오늘날 이들은 신이 되려는 참이다. 영원한 젊음을 얻고 창조와 파괴라는 신의 권능을 가질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호모 사피엔스가 글자 그대로 ‘슬기로운 흙덩이’가 되려면 자신을 끝없이 오만하게 만든 근대 휴머니즘 그늘을 정직하게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휴먼을 넘어 생명을 사유하고, 휴먼의 권리를 넘어 생명의 권리를 옹호하며, 근대적 휴머니즘이 가지고 있는 인간중심주의의 오만함을 넘어 하나님과 인간과 창조세계의 관계에 대해 근원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포스트휴머니즘이 기독교 생명신학과 만나 함께 추구하는 의제이다.
500년 전 근대 휴머니즘이 종교개혁에 결정적 동력을 제공했다면, 이 포스트휴머니즘은 새로운 종교개혁의 불씨를 댕길 것이다. 인문주의가 전통적 가톨릭 신앙이 가지고 있던 ‘지적 혼란’을 정리해 종교개혁의 커다란 촉매가 된 것처럼, 새로운 인문주의가 전통적 개신교 신앙이 가지고 있는 지적 혼란을 정리해 제2의 종교개혁의 비전을 제공할 것이다.

장윤재 |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포스트휴먼 신학: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세계화 시대의 기독교 신학』 등이 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8년 7월호(통권 7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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