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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4월호)

 

  포스트휴먼 사회와 휴머니즘의 원칙
  

본문

 

포스트휴먼 사회의 도래
20세기 후반 이래 사이버네틱스, 뇌과학, 진화생물학, 의생명과학기술 등의 부상으로 하나의 물체, 물질조직으로 간주될 국면에 처한 인간 앞에 21세기 중에 ‘유사인종’(posthomo sapiens)의 출현 가능성마저 높아지면서, 인간(Homo)이 한낱 자연물인지 그 이상의 어떤 품격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더욱더 격화되고, 인간의 존엄성 개념이 근본부터 뒤흔들리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인간의 지능 못지않은 인공지능 로봇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고, 머지않아 인간 지능에 버금가는 ‘범용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이나 심지어 이를 능가하는 ‘초인공지능’(Artificial Super Intelligence, ASI)이 출현할 것이라 한다. 실로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초인공지능이 출현한다면, 그러한 인공지능은 인간 문명을 심대하게 변형시킬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불완전한 존재자인 인간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갖가지 시술이 자행되고 나면 더 이상 자연인(Human)은 없고, ‘변형인간’(Transhuman) 내지 ‘후인간’(Posthuman)이 등장할 것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어떤 이는 인공지능의 출현을 전 우주의 역사에서 ‘우주의 창조’와 ‘생명의 출현’에 이은 “세 번째 대사건”(E. Fredkin)이라 칭하기도 한다.
당초에는 인간에 의해 제작되고 조종받던 지능로봇이 정교화를 거듭하면 마침내 스스로 로봇을 제작하고 스스로 조작하고 조종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래서 초인공지능이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그 초인공지능에 의한 지능의 진화(발전)가 급속도로 진전되어 ‘지능 폭발’(intelligence explosion)이 일어나 인간의 지능으로서는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리라는 예상도 있다. 이에 초인공지능은 자연인인 “우리의 마지막 발명”으로서, 그로써 “인간 시대는 끝”(J. Barrat)이라는 경고가 뒤따른다.
다른 한편에서는 컴퓨터과학기술과 의생명과학기술이 어우러져 인체가 개조되고 수명 또한 임의로 조정할 수 있다 하며, 거기에 더하여 생명공학은 사이보그를 산출할 기세이다. 그 기세를 이어 이제까지는 생물학 영역에 있던 생명체를 물성과학의 기술로 산출해내 ‘인공생명’(Artificial Life, AL)마저 등장할 것이라 한다. 이러한 상황은 생명에 대한 새로운 개념의 형성을 강요하고, 이제까지의 인간 개념 자체를 전복시키려 한다.
땅(humus)에 사는 인간(Homo)은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다. 땅에서 호흡(anima)하며 호흡하는 동안에만 생명을 갖는 시간적 존재자인 인간은 그 제한적인 동물성/생명성(animalitas)에도 불구하고, 이성적 힘에 의해 자연 안에서도 자연을 가공하면서 산다. 그래서 인간의 생은 자연적(natural) 요소와 인공적(artificial)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리고 그 인공적 요소 안에는 창의적(creative)인 것도 포함되는 것으로 여겨져, 인간은 창조자인 신과 피조물인 동물 사이에 있는 중간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19세기 진화론의 등장과 함께 인간도 여타의 동물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동물의 일종으로 간주되더니, 20세기 물리주의(physicalism)가 득세하면서는 인간을 포함한 동물 일반이 차츰 기계적인 물체로 취급되고 있다. 급기야 21세기에 들어서 급진전하는 인공지능과학기술과 의생명과학기술은 합류 합세하여 인체를 개조하고, 더 ‘나은’ 인체를 생산해낼 것을 의욕하고 있다. 인간은 ‘인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하는 물리주의자들의 생각에는 인체의 개선이 곧 인간의 개선일 것이다. 이른바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의 출현이다. 이는 포스트휴먼 사회의 도래를 말하는 것이다.

휴머니즘의 의미
인체가 생체–물체 하이브리드로 변조되고, 두뇌가 컴퓨터 정보 시스템으로 교환되는 국면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더 이상 없다. 기술적 제작물이 상품화하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개선된 인간’, ‘인간의 개선’이지 ‘현존 인간의 변형’이나 ‘자연인간의 대체’, ‘자연인간의 폐기’가 아니다. 물리생물학적 변조에 의해 현생 인류가 파멸, 소멸하고, ‘진화’라는 이름으로 신생 우월 존재가 출현하는 것은 인류가 바라는 일도 아니며, 남의 일처럼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우리가 트랜스휴먼이나 포스트휴먼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과 공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이다. 만약에 트랜스휴먼이나 포스트휴먼이 더 이상 ‘휴먼’이 아니거나, 휴먼을 지배하거나 대체하거나 파멸시킬 수 있는 국면이 도래한다면, 그때 우리가 논의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한 국면에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논의할 처지가 못 된다. 그러한 국면에서는 휴먼과 트랜스휴먼 또는 포스트휴먼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라는 논의의 주도권은 더 이상 휴먼에게 있지 않고, 트랜스휴먼이나 포스트휴먼의 수중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스트휴먼 시대의 휴머니즘 문제’는 인류와 유사인종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더 고양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욕구와 호기심에 따른 아주 자연스런 귀결이고, 그 결과 인간을 뛰어넘는–얼핏 보면 ‘인공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 역시 ‘자연적’인–어떤 존재자가 출현한다 해도 그것은 자연 진화의 과정이므로 인간이 원하든 원하지 아니하든 일어날 것이고, 인간의 선호와 상관없이 인간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라고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말해서는 안 된다. 인류 존망은, 더구나 그것이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일 경우에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닥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류 복지와 번영에 좋은 일은 장려할 일이지만, 인류 폐망의 원인이 될 만한 일은 예상되는 즉시 저지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일’이다.
“모든 생명체는 언제나 자기 생명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활동한다. 그것이 생명활동의 본성이자 본질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발전 끝에 설령 현생 인류가 멸실된다 해도 그 인간 이후의 존재자는 현생 인류보다 더 진화한, 생명체의 자기 진보의 결과라고 말하려 든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는 언제나 자기 생명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활동한다는 명제가 실로 참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자해니 자살이니 하는 행위는 없다.”라거나 “인간의 악행들도 자기 생명 유지 발전의 방편이다.”라는 주장도 수긍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악행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고,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일체의 윤리와 도덕이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확인해야 할 부분은, 생명체의 모든 활동이 그리고 인간의 모든 행위가 자기 생명의 유지 발전에 긍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우리 자신의 행위가 그릇되지 않게 늘 경계해야 하고, 부단히 교정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인간 활동의 한 종류인 과학기술의 진행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대체로 재래의 과학기술이 인간 활동의 도구의 개선과 증강을 통해 인간의 작업능력을 향상하는 데에 기여해왔다면, 21세기에 들어서 급진전하고 있는 인공지능과학기술과 의생명과학기술은 인간 자체를 증강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이는 결국 인체변조를 초래한다. 재래의 과학기술이 인간의 유익함을 명분으로 자연을 대상화하고 재료로 삼아서 개발했다면, 최근의 여러 과학기술은 인간을 대상화하고, 인간마저도 재료로 삼는다. 인간은 과학기술의 개발과 운용의 주체만이 아니라 객체가 되어 있으며, 형태 짓는 자가 아니라 형태 지어지는 자가 된 상황이다. 과학기술 앞에 인간은 여타의 사물과 다름없이 하나의 개발 ‘자원’에 불과하다. 그 결과 급진하는 과학기술의 산물이 되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한갓된 물체로 격하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기술발전=복지향상’이라는 기치를 앞세워 인류 문명을 해체하고 인간에 대한 관점마저 달라질 것을 종용하는 포스트휴먼 사회에 직면해서 우리가 재확인할 일은 무엇보다 ‘참다운’ 인간의 모습이며, 마련해야 할 것은 과학기술의 진보를 인간 문명사회의 진보의 틀 안에서 관리하는 규범이다.

휴머니즘의 원칙
인류 문명사는 ‘인간’ 개념의 외연이 확대되어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노예로 전락한 고대의 수많은 피정복자들, 침략해 들어온 외지인들에 의해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되고 짐승처럼 내몰리던 ‘신’대륙의 원주민들, 아직은 사람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던 태아들이 누구와도 동등한 ‘인간’임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명하다. 죄수나 전쟁 포로들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사실 또한 납득된 지 오래이며, 짐승이나 식물 등 생명을 가진 모든 것에 생명 윤리가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함 또한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이제 정말로 포스트휴먼 사회가 도래하여, 발생 방식은 인간과 다르지만 인간과 유사한 활동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어떤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유사인종, 포스트휴먼이 인간과 공존하는 국면이 오면, 유사인종에게도 과연 ‘인권’에 상응하는 권리와 그것에 짝이 되는 의무를 인정할 것인지, 또한 인간의 윤리 도덕과 법규범이 포스트휴먼에게도 타당한지가 검토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의 ‘인간임’ 곧 인간의 존엄성은 그의 자율로서의 자유의 힘에 의거하는 것이니, 인간의 존엄성이 누구나의 존엄성을 뜻하는 한 각자는 무엇보다도 똑같이 의사의 자유를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칸트가 말했듯 인간 사회에서 법의 보편적 원리는 “행위가 또는 그 행위의 준칙에 따른 각자의 의사의 자유가 보편적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는 각 행위는 법적이다/권리가 있다/정당하다/옳다(recht).” 이러한 보편적인 법 원리에 따른 ‘보편적 법 법칙’은 “너의 의사의 자유로운 사용이 보편적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라고 표현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회 여건에 따라 어떠한 법규범을 제정하더라도 제정된 법규범이 저 원칙에 저촉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권리와 의무의 보편성은 상호성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인간 사회의 윤리 도덕 또한 솔선수범을 미덕으로 내세우기는 하지만, 상호성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마 7:12, 공동번역)라는 기독교의 황금률이나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바는 남에게 시키지 말 일”(『論語』, 顔淵 2)과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도달하고자 하면 남을 도달하게 해줄 일”(『論語』, 雍也 28)이라는 유교의 ‘혈구지도’(絜矩之道)는 내가 먼저 베풀면 남도 그렇게 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반대로 남이 먼저 그렇게 하면 나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마음씨를 담고 있다. 윤리와 도덕은 타자에 대한 의식 곧 사회의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니, ‘타자야말로 인간 도덕성의 근원이자 목적’이다.
타자에 대한 의식과 상호성의 원리가 유효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인간 사회의 제 규범이 그 규범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성이 사람들 사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유정(有情) 생명체 사이에도 어느 정도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을 넘어서 인간의 윤리 규범을 확대하고자 하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하겠다. 인간과 여타 유정 생명체 사이에 윤리가 성립한다는 것은 유정 생명체들이 한낱 인간 활동의 수단이 아니며, 그러므로 만약 그렇게 대한다면 그것은 ‘비윤리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과 포스트휴먼 사이에서도 이러한 상호성의 원리가 작동한다면, 휴먼–포스트휴먼 윤리 규범도 인간의 윤리 규범에 준해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포스트휴먼 사이에 상호성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면, 인간과 포스트휴먼은 불가불 적대관계에 놓일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휴먼 사회에서 휴먼과 포스트휴먼의 공존보다 우선적으로 구현되어야 할 것은 휴먼들 간의 아름다운 공존이다. 그리고 휴먼과 포스트휴먼의 지혜로운 공존은 휴먼들의 영속적인 공존을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휴먼은 휴먼으로서 개선을 지향해야지 트랜스휴먼이 된다거나 포스트휴먼에 자리를 내어주고 소멸하는 길로 나아갈 수는 없다. 그것이 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은 트랜스휴머니즘을 경계하며,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항한다.
어느 시대이든 문명과 그 문명의 요소인 사회제도와 산업은 인간의 존엄성을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어떠한 과학기술이나 그 산출물이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할 경우에는 즉각 폐기되어야 하며, 그러할 우려가 있을 때에는 중단되어야 한다.

포스트휴먼 시대, 휴머니즘을 위한 최소한의 방책
‘미래 100년의 먹거리 창출’을 지향한다는 첨단 과학기술 개발이 설령 결과적으로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한다 해도 막대한 비용의 투입을 요하고, 그 과실의 대부분은 자칫 그러한 투자를 할 수 있는 소수에게 귀속될 수 있다. 그 반면에 일상생활의 편의를 위한 과학기술 개발은 투자자에게 그다지 큰 수익을 가져다주지는 못할망정, 작은 투자만으로도 다수의 생활의 질적 향상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공공의 재원은 이를 위한 과제들에도 균형 있게 지원되어야 한다. 현재의 삶이 10년, 100년 후의 삶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으니 말이다.
흔히 과학과 과학기술이 ‘가치중립적’이라고 하지만, 과학과 과학기술은 과학자나 과학기술자에 의해 연구되고 개발되는바, 이들은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가치중립적일 수도 없다. 그들은 대형 연구과제를 주도하는 정부의 정책이나 연구비 제공 기관의 의도에 부응하는 것이 상례이다. 여기서 공적 재원에 의한 과제는 공적 토의를 거쳐 채택 추진되기 때문에 그나마 공공성이 어느 정도는 확보된다.
그러나 이미 국가에 버금가거나 웃도는 수준의 연구개발비를 지원할 수 있는 사적 기관들이 생겨난 마당에서는 최소한의 공적 토의의 장조차 거치지 않은 채로 (은밀하게) 연구개발이 진행되고, 그 결과물이 지식재산권이라는 안전장치 아래서 사유화될 수 있다. 이에 새로운 과학기술의 영향이나 파장은 예상하기 어려운 만큼, 특히 인체나 인간 생명을 조작하는 데 활용될 가능성이 큰 새로운 과학기술의 산물에 관해서는 지식재산권을 제한하고 사유화를 최소화함으로써 개발 속도를 조절하고, 그것이 인간의 생명 구조의 변경과 관련이 있는 것일 경우에는 반드시 ‘과학기술 시민권’(technological citizenship)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런데 과학기술 개발은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그 여파 또한 온 인류에게 미치는 것인 만큼 지식재산권 제한과 같은 조치가 어느 특정 국가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여 과학기술 개발이 제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 사안과 관련하여 인류의 장기적인 복지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공동 규범이 제정되어 준수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유사한 ‘국제의생명과학기구’(International Biomedical Science Agency, IBSA)를 설치하여 그 준수 여부를 감시해야 한다. 의생명과학기술은 핵무기 못지않게 엄정한 국제적 규범 질서 안에서 연구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포스트휴먼 시대를 앞두고 로봇보다 더 강한 팔다리를 가진 인간, 여느 인공지능보다 월등한 지력을 갖춘 인간, 현생 자연인보다 10배나 더 장수하는(아니, 영생하는) 인간이 되기를 소망하는 이가 다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참다운 인간의 모습은 팔뚝 힘이 세고, 지능이 뛰어나며, 오래오래 사는 인간에서 드러날까?
달리기는 자동차에, 날기는 비행기에, 계산하기는 인공지능에, 산업 노동은 로봇에 맡기고서도 인간에게는 훨씬 중요한 일이 남아 있으니, 자신을 인간으로 교양하고, 주변 기계들을 조종하고 조율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보다도 균형 잡힌 통찰력, 곧 온화한 지성을 배양해야 한다. 이러한 지성(intelletus)은 기민한 지능과는 달리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의 화합에서 온다.

백종현 | 철학을 전공하였다. 대표 저서로 『이성의 역사』가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및 한국포스트휴먼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7월호(통권 7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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