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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3월호)

 

  중국 신문 속의 3・1운동
  

본문

 

1919년 3월 1일, 한국 독립운동의 서막이 열렸다. 일제 식민통치를 반대하고 민족 독립을 요구하는 전 민족적인 궐기가 일어났다. 3・1운동은 우리 근대사의 주요 사건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의 혁명은 세계 혁명의 일부분”이었다.1
3・1운동이 일어날 당시 신문과 잡지를 비롯한 중국 언론들은 동시적이고 전면적인 보도와 논평을 내놓았는데 그 범위가 넓고 수량이 많아 마치 한국 현지 언론을 방불케 하였다. 중국 신문들은 3・1운동의 실황을 보도할 뿐만 아니라 이 운동에 대한 논평을 통해 한국 국민들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아울러 중국 자국의 사회 상황과 국민의 정신 상태를 비교・분석하면서 중국의 혁명에 대한 성찰을 진행하였고, 이는 곧바로 그 이후에 발생한 중국 5・4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3·1운동에 대한 신문 보도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발발한 3・1운동은 며칠 뒤인 5일 이후부터 중국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3・1운동을 최초로 보도한 주요 신문들의 보도 일자와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다.

중국 신문에 최초로 보도된 3·1운동 기사
신문 이름 발행지 일자 기사 제목
「신보」(申報) 상해 3월 5일 “서울에서의 시위행진”(漢城示威游行)
“고려의 소란”(高麗之騷亂)
「경보」(京報) 북경 3월 5일 “한국 국왕의 장례에서의 혁명”
(韓王葬時之革命)
「신보」(晨報) 북경 3월 5일 “고려인의 혁명 열기”(高麗人之革命熱)
「대공보」(大公報) 천진 3월 6일 “고려 시위에 관한 서방 기사”
(高麗亂事之西訊)
「익세보」(益世報) 천진 3월 6일 “고려가 참으로 독립을 요구하는구나”
(高麗眞要求獨立矣)
「민국일보」(民國日報) 상해 3월 9일 “조선의 혁명운동”(朝鮮之革命運動)
「순천시보」(順天時報) 북경 3월 9일 “조선 폭동의 원인”(朝鮮暴動之原因)



당시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중국 신문들의 3・1운동 보도는 매우 신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첫 보도들을 살펴보면 그 출처는 주로 서울(京城) 혹은 도쿄(東京), 오사카(大阪)에서 온 전보들, 그리고 로이터 통신과 「자림보」(字林報, North China Daily News), 「대륙보」(大陸報, China Press) 등 외신들이었다. 정보 소통이 동시적이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북경, 상해, 천진 등지에 있던 한국인들은 중국 신문의 보도를 통해 독립운동 발발 소식을 비로소 접하게 되었다.
3월 5일 이후, 중국의 주요 신문들은 거의 날마다 3・1운동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3월 초부터 5월 초까지 이들이 보도한 3・1운동 관련 기사 숫자를 필자가 조사한 결과를 그래프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3·1운동 관련 기사 수(3월 초-5월 초)

위의 통계에서 보듯 같은 기간임에도 보도의 횟수가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민국일보」가 가장 많이, 그리고 「순천시보」가 가장 적게 보도한 것이다.
사실 당시 중국의 주요 신문들은 그 배경이 상이하다. 북경의 「신보」(晨報)는 1916년 양계초(梁啓超, 1873-1929) 등이 창간하고 이대소(李大釗, 1888-1927)가 첫 주필을 맡았던 개혁 성향의 일간지였고, 상해의 「신보」(申報)는 1872년에 창간되어 언론자유를 표방하는 일간지였다. 그리고 상해의 「민국일보」는 1916년 중화혁명당이 창간하고 나중에 중국국민당의 기관지가 된 혁명 성향의 일간지였고, 천진의 「대공보」는 1902년에 강유위(康有爲), 양계초 등의 유신사상의 영향을 받은 영렴지(英斂之, 1867-1926)가 창간한 개혁 성향의 일간지였다. 또 북경의 「경보」는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소표평(邵飄萍, 1886-1926)이 창간한 혁명 성향의 일간지였고, 천진의 「익세보」는 1915년 천주교 천진교구가 창간한 천주교 기관지였다. 그리고 북경의 「순천시보」는 1901년 일본 외무성이 발간한 친일 일간지였다.
중국의 주요 신문들은 그 성향에 따라 3·1운동에 대한 관심과 시각이 서로 달랐다. 유일한 친일 신문, 즉 일본 외무성이 발간한 「순천시보」는 예상대로 3·1운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도하였다. 3·1운동의 전개 상황에 관한 보도는 단 두 편에 그친 대신 “조선에 대한 결연한 조치”, “조선 폭동 종식”, “조선 점차 평정됨” 등의 단신을 통해 한국에서의 독립운동이 이미 종결되었다고만 강조하였다. 그리고 “조선 폭동의 원인”, “어떤 나라 선교사의 악랄한 행적”, “재한 미국 선교사의 사명”, “조선 독립 음모의 중심” 등의 기사를 통해 3·1운동의 발발 원인을 기독교 선교사들의 선동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과격사상의 방지”, “조선 폭동과 과격사상”, “조선 청년학생에 대한 경고” 등 논평을 통해 3·1운동에서 청년학생들의 과격사상(당시 중국 언론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을 과격사상이라 칭했다.)을 경고하였다. 「순천시보」의 이러한 기사 구성은, 한국의 모든 언론 기관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사실을 왜곡하며 검열을 통해 3·1운동의 진상을 축소하고 은폐한 조선총독부의 「매일신문」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순천시보」를 제외한 다른 주요 중국 신문에서는 3·1운동에 대한 한국인의 입장과 평화적 시위, 그리고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한국인의 저항 및 국제적인 독립청원 등 3·1운동의 전반적인 실상을 공개하였다. 보도 기사에는 외신을 인용하거나 직접 취재한 내용도 있고 혹은 풍문으로 전해져 정확성이 떨어지는 기사도 있지만, 3·1운동의 전모를 보여주었다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국 신문들의 3·1운동 관련 기사를 분석해보면 주로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3·1운동 진행 경과에 대한 보도, 일제의 탄압정책과 군경을 동원한 탄압의 실상에 대한 보도, 해외 동포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보도, 임시정부 수립과 파리평화회의(Paris Peace Conference)에서의 청원에 대한 보도, 그리고 3·1운동에 대한 평론이다.

중국 신문들의 3·1운동 관련 기사 유형
신문 이름 3·1운동
진행 경과 일제 탄압 해외 동포
독립운동 임시정부
관련 논평
「신보」(申報) 56 13 22 9 -
「경보」(京報) 56 13 6 18 7
「신보」(晨報) 43 17 9 19 12
「대공보」(大公報) 35 22 20 12 11
「익세보」(益世報) 50 23 - 12 15
「민국일보」(民國日報) 29 30 13 13 15




표에서 볼 수 있듯이 각 신문에서 다섯 가지 유형이 차지하는 구성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신보」(晨報), 「대공보」의 경우 균형적으로 배치되었고, 「경보」, 「익세보」, 「신보」(申報)의 경우 3·1운동 진행 경과에 관한 보도 기사가 많이 배치되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신보」(申報)가 유일하게 ‘3·1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점, 「익세보」의 경우 해외 동포들의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가 한 건도 없다는 점, 「민국일보」에서는 일제의 탄압에 관한 기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민국일보」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 “일본 군경의 조선인 학대”, “일본인이 한국인을 무차별 체포한 결과”, “일본이 악랄한 수단으로 한국인을 제압”,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참혹한 대우”, “한국에 대한 일본의 고압책”, “일본이 파병하여 조선을 진압”, “한국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학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살육 정책”, “한국인에 대한 일본군의 잔혹한 조치”, “일본이 한국인을 도둑 무리로 치부” 등등의 기사를 통해 일제의 참혹한 진압을 규탄하였다. 그리고 「민국일보」만이 “이완용이 한국인들에 한 발언”, “한국의 독립 반대자의 발언”(여기서 독립 반대자는 민원식을 뜻한다.) 등 두 건의 기사를 통해 친일파를 매국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 밖에 상해의 「민국일보」는 독립선언서 전문을 게재하여 중국 내 한국인들이 국내 독립운동의 기조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천진의 「대공보」도 3월 12일에 “독립선언서” 전문을 게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3월 16일부터 20일까지 “한국 각 도에서 독립을 선포”라는 장문의 기사를 연재하여 한국 각 지역의 3・1운동 전개 과정, 참가자 숫자 통계, 일제의 발포 진압 등 그 내용을 소상히 소개함으로써 중국 내 한국인들이 국내 3・1운동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1운동에 대한 중국 신문들의 성원
북경의 「순천일보」를 제외한 주요 신문들은 3·1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과 성원하는 심경을 가지고 격정적인 평론들을 게재하였다.
상해의 「민국일보」는 “존경스럽고 연민스러운 조선인”, “조선 독립에 대한 동정”, “앞사람이 쓰러져도 뒷사람이 이어 가는 한국인”, “조선의 정의로운 외침”, “한국인들의 정확한 반론”, “가장 존경스러운 한국 소학생”, “한국인들이 어찌 쉽게 굴복하랴!”, “한국인의 피눈물의 소리” 등등 15편의 논평을 내어 3·1운동을 성원하였다.
천진의 「익세보」는 “오호라, 가엽고도 경이로운 고려인이여!”, “조선의 독립”, “잔혹하구나! 일본은 고려인을 모조리 해외로 쫓아내려 하는가?” 등등의 논평을 내어 잔혹한 일제의 억압 아래 신음하는 한국인에 대한 동정을 보냈다.
북경의 「신보」(晨報)는 “부끄럽구나”(惭)라는 논평을 통해 3·1운동처럼 분발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탄하면서 “조선 독립운동에서의 새로운 교훈”, “조선 독립운동에서의 감상”, “불가불멸의 한국 독립운동” 등등 한국 독립운동의 정신을 칭송하고 지지하는 논평들을 발표하였다.
북경의 「경보」는 “고려의 복흥 및 중국과의 관계”, “대한, 새로운 나라의 출현을 보라” 등의 논평을 통해 성원을 보내면서 “고려 독립은 과격파의 선동을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일본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결어: 5·4운동 지도자들이 평가하는 3·1운동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된 한국의 3・1운동은 곧이어 일어난 중국 5・4운동의 온양(醞釀), 발생, 진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주창한 중국의 혁명가 쑨원(孫文, 1866-1925)은 당시 “중국과 한국은 본래 형제와 같은 이웃으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중국은 더욱 마땅히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2
중국 5・4운동 지도자들의 3・1운동에 대한 입장과 평가를 통해 3・1운동이 5・4운동에 미친 영향을 간접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진독수(陳獨秀, 1879-1942), 이대소(李大釗, 1889-1927)가 주필인 「매주평론」(每週評論)은 3월 16일 제13호에 “조선독립의 소식–민족 자주의 사조는 이미 극동에까지 흘러왔다!”라는 글을 통해, 일제의 식민화 통치에서 ‘조선’이라는 두 글자마저 잃고 정치, 경제, 사상, 언론, 교육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우민화정책과 동화정책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는 한국인들이 독립을 위해 3・1운동을 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성원하였다. 이어 3월 23일 제14호에서는 “한국 독립운동의 상황–생기와 살기가 상충하고 정의와 강권이 고전하지만 최후의 그날을 지켜보자, 도대체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할지를!”이라는 논평을 통해 “무릇 혈기가 있는 한국인이라면 그 어느 한 명도 독립활동을 하지 않는 이가 없다. 손에 촌철을 든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 역시 한 명도 없”는 상황을 보면서 “감탄을 금할 수 없다.”라고 경의를 표하였으며, 한국 독립운동이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라고 응원하였다. 특히 진독수는 3월 23일 “조선 독립운동에 대한 감상”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이번 조선의 독립운동은 위대하고 간절하고 비장하고 명확한 이념이 있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민의(民意)를 사용하여 세계 혁명의 신기원을 열었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북경의 학생구국회가 창간하고 북경대학교 등중하(鄧中夏, 1894-1933)가 주필을 맡은 「국민잡지」(國民雜誌)는 4월에 발행한 제1권 제4호에 “감복해야 할 조선인”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3・1운동에 대해 높게 평가하였다. 한국 전역에서 “독립하지 않으면 차라리 죽으리라!” 혹은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리자,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등의 구호를 외치는 한국인들에 대하여 “이러한 행동은 얼마나 개명한 것인가! 이러한 사상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우리는 그들을 탄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감탄하면서 외세 열강에 굴복하는 북경 정부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북경대 부사년(傅斯年, 1896-1950) 교수는 3월 20일 자 「신보」(晨報)에 실린 “조선 독립운동에서의 새로운 교훈”이라는 논평에서 “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독립운동은 그 가치에 있어서 무기를 사용한 독립운동보다 훨씬 더 높으며, …무기를 들지 않은 이 혁명이야말로 진정한 정의의 결정이며, …혁명의 신기원을 개척했다.”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독립을 이루는 그날까지 한국인들의 독립 정신은 계속될 것이며 “이러한 정신은 곧 조선인이 최후 승리의 예고”이기도 하다고 확신하였다. 때문에 “우리는 모름지기 ‘조선 독립운동 정신 만세’를 높게 외쳐야 할 것이다.”라고 성원을 보냈다.
모택동(毛澤東, 1893-1976) 자신이 창간하고 주필을 맡은 「상강평론」(湘江評論)은 7월 28일 제3호에 실은 글 “동방 대사건의 논평”에서 “일본 군경의 진압으로 인하여 독립운동은 표면적으로는 잠시 중단되었지만, 조선인들의 불굴의 정신이 살아 있기에 조선의 독립은 언젠가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라고 한국의 독립을 응원하였다.
이와 같이 5・4운동의 지도자들은 3・1운동의 발전을 주시하면서 한국인들의 독립 투쟁에 감탄하며 성원을 보냈고,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에 깊은 자극을 받았으며, 일제의 잔인한 제국주의 야망을 분명히 확인하였다. 동시에 열강들의 침탈을 반대하고 민족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에서 동일한 삶의 자리에 처해 있다는 정치적 입장 때문에 3・1운동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결국 5・4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1 民意, “朝鮮代表在和會之請願(續),” 「建設」(第2卷 第2號, 1920年 3月).
2 閔石麟, 『中韓外交史話』(南京: 東方出版社, 1942), 26-27.


문영걸 | 목원대학교(Ph. D.)와 북경대학교(Ph. D.)에서 교회사와 종교학을 전공하였다. 현재 기독교대한감리회 선교사로 활동하며, 미도(美道)중국선교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중국 지식계층의 기독교 이해”, “벽사위정–한중 반기독교 비교 연구”, “서광계의 조선선교계획 전말”, “6・25전쟁과 중국교회”, “조선 남감리회의 시베리아 선교(1920-1931)”, “중국 지식계층의 루터 이해에 대한 고찰”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2018년 11월호(통권 7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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