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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3월호)

 

  중국 유이민 소설 속의 3・1운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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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민(流移民)이란 유랑(流浪)과 이민(移民)이라는 단어의 뜻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외부 압박과 강제에 의해 제 나라를 떠나 남의 나라에 흘러 들어가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유명하지만, 우리 민족의 유이민 역사도 그에 못지않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몽골의 침략, 왜란과 호란 등 국란을 겪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포로, 인질, 공녀 등으로 끌려갔다.
일제강점기의 유이민 경험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외상(外傷)으로 남아 있다. 이 시기 무려 500만 명가량의 동포가 남의 나라 땅을 떠돌고 있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에만 200만 명 이상의 유이민이 있었다. 조선 후기 삼정(三政)의 문란과 거듭된 흉작으로 인해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외세의 침탈로 인해 국권이 흔들리자 정치적 망명자들의 이주가 늘기 시작했다. 이 숫자는 한일합방과 토지 수탈, 3・1운동 등을 거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3・1운동 직후인 1920년에 벌써 50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앞세운 일제의 토지 수탈이 먹고살기 위한 도생형(圖生型) 유이민을 발생시킨 주요인이었다면, 3・1운동은 정치적 망명과 이민을 강제한 주요인이었다. 이처럼 대규모의 유이민을 발생시킨 역사적・현실적 조건하에서, 이들 유이민 사회의 실상을 중심 모티프로 삼고 있는 소설을 유이민 소설이라 부르는바, 3・1운동을 대표적인 제재로 호명하는 작품이 적지 않다. 이들 소설이 형상화한 3・1운동의 실상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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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유이민 소설 중에서 특히 3・1운동을 주요 제재로 삼고 있는 작품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3・1운동의 실상을 현장의 체험으로 재현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3・1운동을 과거의 체험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뒷얘기를 들려주는 후일담 소설이다.
3・1운동을 현장의 체험으로 재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기월(其月)의 <피눈물>을 들 수 있다. 3・1운동을 형상해낸 작품으로서는 가장 주목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상해 「독립신문」 창간호부터 11회에 걸쳐 연재된 이 작품은 3・1운동 당시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내었으며, 일제의 서슬 푸른 감시하에 놓여 있던 국내에서는 도저히 활자화될 수 없을 만큼 사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작중 인물 윤섭과 정희는 조선인을 ‘죄인이나 견마’ 취급하는 일인 순사들에 의해 가족이 부상당하거나 끌려가고 행방불명이 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어린 학생이던 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박엄의 지휘를 받아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며 만세운동에 투신한다. 일경과 헌병들은 비폭력 만세를 부르는 군중에게 칼과 몽둥이를 휘둘러 많은 희생자를 낸다. 제중원은 부상당해 실려 온 환자들과 그 옆에서 오열하는 가족들로 인해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사망자들을 묻으러 간 공동묘지에서도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진다. 여학생 정희의 최후는 이렇게 그려져 있다.

마침 군중 속에서 큰 만세 소리가 난다. 본즉 17, 8세나 되었을 여학생이 왼편 팔에서 흐르는 피를 공중에 내어 뿌리며, 태극기를 둘러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른다. 하얀 그 여학생의 저고리와 치마에는 무섭게 피가 흘렀다. 일병의 손에 잡혔던지 머리채가 풀어져 혹은 가슴으로 혹은 귀 밑으로 흘러내렸다. 그는 높이 두 팔을 들어 태극기를 두르며 입을 열어 ‘대한동포여, 총과 칼이 우리 육체는 죽일지언정 정신은 못 죽이리라. 우리는 죽거던 귀신으로 대한 독립의 만세를 부르리라.’ 할 때에 장검이 번뜩이자 여학생의 우편 손목이 태극기를 잡은 대로 땅에 떨어지고 그리로서 피가 솟아 주위에 그의 형제들의 의복을 적신다. 불과 1, 2초 동안에 군중의 신경은 전기를 맞은 것같이 되고, 피는 끓어오른다. 처녀는 남은 팔, 그도 칼에 찍혀 피 묻은 팔을 내어두르며, ‘동포여, 분을 참으시오. 대한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할 때에 또 한 번 칼이 번득이며 처녀의 왼편 팔이 피 묻은 저고리 소매와 함께 떨어질 때에, 처녀는 팔의 피를 일본 헌병의 얼굴에 뿌리며 꺼꾸러진다.

3・1운동 당시 일제가 취한 잔혹한 탄압과 살상 행위에 대해서 다른 어떤 실기보다도 더 핍진하게 폭로하고 있다. 당시 이와 같은 직선적인 표현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고, 다른 예를 찾아볼 수도 없다. 일제의 촉수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던 유이민 사회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광수의 <유랑> 역시 3・1운동을 현재의 사건으로 들려주고 있다. 이 작품은 1919년 3월 4일 평남 강서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그 배경으로 한다. 강서의 만세운동은 참여자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이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던 일본인 형사와 조선인 보조원들까지 군중의 돌팔매에 맞아 죽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격렬했다.
1927년 「동아일보」 연재 중 발표된 내용은 “눈 오는 밤”과 “바람에 불려” 등 두 개의 서사 단락뿐이다. 이 중 “눈 오는 밤”은 주인공이 만세운동을 하던 부친을 학살한 일인 형사를 총으로 쏘고 누이와 함께 탈출하여 상해 망명길에 오르기까지의 얘기가 중심이다. 그리고 뒤의 “바람에 불려”는 탐욕스러운 중국인 선원들로 인하여 배 안에서 일어난 수난이 서사의 중심이다. 앞의 <피눈물>과는 달리 만세운동, 상일이 아버지의 죽음, 상일이 형제의 투옥, 가족 해체와 같은 사건들이 모두 화자의 언술로만 드러나 있어 핍진성이 떨어지고 있다. 혹독한 검열의 벽을 넘기 위한 자기검열의 결과일 것이다. 그럼에도 영리한 독자라면 행간에 감춰진 만세운동의 열기를 충분히 감지해낼 수 있다. 그러나 혹독한 식민주의의 횡포는 그마저도 용납지 않아 결국 연재가 중단되고 말았다.
두 작품이 모두 이광수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3・1운동 당시 이광수는 국내에 없었다. 그는 도쿄에서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해 넘기고 곧바로 동경을 탈출해 상해로 향했다. 고국으로부터 상해에 온 현순(玄楯), 최창식(崔昌植)을 만나고, 3월 5일경에 비로소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해외동포 단체에 이 소식을 알리고 영문으로 번역하여 외국에 타전하는 일은 모두 이광수의 몫이었다. 이때의 사정이 뒷날 『나의 고백』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차차 안동현을 거쳐서 국내 소식이 전하여 왔다. 조그마한 종이 조각에 잘게 잘게 기사를 적어서 꼬깃꼬깃하게 만든 것들이 왔다. 아마 옷 속이나 구두 속에 넣어 가지고 국경을 넘어 온 모양이었다. 어디서 몇천 명이 모여서 태극기를 두르고, 만세를 부르고 몇십 명이 혹은 일경에게 혹은 일 헌병에게 붙들려 갔다는 소식들이었다. 그중에는 평안남도 강서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오십몇 명이 총을 맞아 넘어졌다는 것과 평안북도 정주읍에서도 같은 모양으로 칠팔십 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것, 피비린내 나는 기사도 있었다.

그는 국내 상황을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소상하게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셈이다. 한편 <피눈물>의 지은이 ‘기월’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이미 일제의 감시망 안에 놓여 있던 상해에서 신변의 안전을 위해 익명을 쓴 것이겠지만, 아마도 이광수 자신이 아닐까 의심해 볼 수 있다. 당시 「독립신문」의 발행이 이광수의 책임 아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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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과거의 체험으로 간직하고 있는 인물을 내세운 후일담 소설들은 상대적으로 많다. 최서해는 거푸 이런 인물을 앞세워 3・1운동 이후의 세태와 정세를 분석해 보이고 있다. 데뷔작 <고국>에서는 주인공이 “큰 뜻을 품고” 서간도로 떠난 것이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해 봄”이었다고 함으로써 그의 이력과 지향하는 바를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가 말한 ‘큰 뜻’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 요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유이민들의 무지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의 토벌 때문이다. 맨 처음 백두산 뒤 흑룡강가 청시허에 정착해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주민들은 “그의 벗이 되지 못하”고 아이들은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유위한 청춘이 속절없이 스러져 가는 신세가 되는 것이” 큰 고통이던 그는 청시허를 떠나 독립군에 뛰어들었지만 일제의 토벌이 극심했다. 결국 독립군이 해산되는 바람에 귀향길에 오르고 말았다.
식민주의 폭력은 국경 너머 서간도에도 난무하는데, 그런 것 알 바 없이 생계에나 목매어 살고 있는 유이민 사회의 실상이 실망스러웠던 것이다. <해돋이>의 주인공도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옥살이를 한 뒤 “백성을 건져”야 한다는 “양심의 요구”를 따라 만주로 건너갔다. 항일독립 의지를 구현하기 위한 이념형 유이민인 것이다. <고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독립군에 투신해 싸웠지만, 일제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결국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신분을 위장하고 소학교 교사가 되어 안위를 도모하지만, 옛 동지의 밀고로 체포되어 다시 옥살이 신세가 된다. 감옥에 있다 풀려나 만주로 건너간 주인공이 고국에 돌아와 다시 감옥에 갇힌 몸이 된 것이다. 그사이 6년이라는 시간적 거리가 가로놓여 있지만, 6년 전 3・1운동이 일어난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감옥이라는 상황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 그 사이 아내는 도망가고, 동지들은 변절해 일제의 밀정이나 주구가 되었다. 만세운동 당시보다 오히려 더 절망적인 상황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작품은 이 같은 현실 인식에 매몰되지 않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전망과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주인공의 항일 의지가 여전히 강고하며, 해외에서는 독립군들의 열기가 뜨겁다. 작품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아래 인용에서 XXX로 표기된 곳은 독립군을 뜻한다.)

이때 만주 시베리아 상해 등지에서는 XXX이 벌떼같이 일어나서 그 경계선을 앞뒤에 벌렸다. 내지에서 은밀히 강을 건너와서 XXX에 몸을 던지는 청년들이 많았다. 산골짝이에서 나무를 베던 초부며 밭을 갈던 농군도 호미와 낫을 버리고 XXX에 뛰어드는 이가 많았다. 남의 빚에 졸려서 XXX에 뛰어든 이도 있었다. 자식을 XXX에 보내고 밤낮 가슴을 치면서 세상을 원망하는 늙은이들도 있었다. XXX의 세력은 컸다. 이역의 눈비에 신음하고 살아오던 농민들은 한푼 두푼 모은 돈을 XXX에 바치고 곡식과 의복까지, 형과 아우와 아들까지 바쳤다. 백성의 소리는 컸다. 그 무슨 소리였던 것은 여기 쓸 수 없다.

작품이 쓰인 1923-24년 무렵에는 일제의 대토벌로 독립군 활동이 크게 위축된 형편이었는데도 이렇게 서술해놓은 것은 향후 정세에 대한 낙관적 전망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민중들의 항일투쟁 의지를 고무, 추동하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항일투쟁이 너 나 없는 민족 공동의 것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은 절망스럽지만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잃지 않고 3・1 만세운동 당시의 투쟁 의지를 되살려 ‘해돋이’를 기다리고자 하는 작가의식이 이 작품의 특별한 성과를 가능케 한 것이다. 최서해는 망명 항일운동가인 부친을 따라 직접 독립운동에 투신한 경험이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들은 아직 만세운동의 열기가 남아 있는 1920년대의 작품들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그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항일운동가들의 실패와 좌절, 그 가족들의 수난과 가족해체 등의 비극이 중심을 이룬다. 식민주의의 폭력이 그만큼 가혹해졌음을 반증한다. 30년 동안이나 항일운동에 투신해온 인물의 절절한 회한과 현실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석산의 <아들의 소식>이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주인공은 “XX년을 서울에서 울었고 XX년 전후를 상해에 방랑하였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대목이 각각 경술년 국치와 기미년 만세운동임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계계승승하여 물려오던 누거만의 돈을 오직 민족을 위한다는 피 끓는 정성 밑에 민족 사업에 모조리 털어 들였다. 언론기관의 신장을 위하여 애쓴 사람도 나이고, 얄미운 파벌을 억누르고 통일을 위하여 분주한 사람도 역시 나이었다.” 이로써 그가 벌인 실로 혁혁한 항일운동의 전모가 확인된 셈이다.
그런데 이런 그가 심각한 회한에 빠져 독립운동가로서의 지난 삶을 깊이 후회하고 있다. 5년간의 옥살이 후 사회에 돌아왔으나 “너무나 큰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모두가 공허한 듯하더라”는 것이다. 세태가 너무 변해 사회나 개인이나 “음산하기 황폐한 절기의 뜰 같은 쓸쓸한 느낌”이 들고, 생각에 “통제할 수 없는 큰 변동”이 오더라고도 했다. 그 배경을 인물 스스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저 회의만 가슴에 가득했었다. 그렇다. 마음에 그리던 생활과 실재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나니, 전 민족을 위한다는 생각은 확실히 당랑의 거철인 것을 알게 되었다. 꼭 된대도 모를 일이어니와 될동말동한 일에 자기만이 평생을 바쳤다는 것은 확실히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이것은 모래 위에 풀 나기를 기다리는 일이란 말이다.

작품이 발표된 것은 1933년, 그 시점에 일제는 이미 조선에 대한 병참기지화 정책을 수립해놓고 만주사변을 신호탄으로 본격적인 전시체제에 들어서 있었다. 자연스레 극단의 수탈과 억압이 뒤따랐다. 김사량이 <토성랑>에서 이 시대를 지옥과 무덤에 비유하며,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회로 규정한 것과 같았다. 지식인의 전향이 줄을 잇고 유이민 대열이 끊이지 않는 사회. 주인공의 고독과 회한은 이런 사정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허망하기는 계급해방운동이라고 다를 리 없다. 그래서 주인공은 사회주의자 아들에게 “제 실속을 못 보는 사람은 구실을 못하는 법”이라며 사회 민족 일체를 잊어달라고 당부한다. “삼십 년 체험에서 얻은 진리”라는 것이다. 항일투쟁 노선상의 좌・우 대립구도 안에서 파악해야 하는 작품이기에 다소 복잡한 독법이 필요한 작품이긴 하지만, 3・1운동 이후 항일 역량이 급격히 약화된 상황에서 전망 부재의 현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상의 작품들은 모두 만세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최승일의 <봉희>, 박영준의 <어머니>와 이태준의 <아무도 없소>, 남우훈의 <경희> 등은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의 가족들을 내세워 3・1운동 이후의 실상을 들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봉희>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만주의 XX현에 근거를 둔 XX단의 단장”으로 “XX운동이 일어나자 활약을 시작”했다. ‘XX단’이란 항일독립운동 단체이며, ‘XX운동’이란 기미 만세운동을 암시한다. 국내의 3・1운동이 해외 망명 지사들의 독립운동을 추동하는 힘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버지는 모종의 임무를 띠고 국경을 넘으려다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며, 아들은 독립운동을 하다 죽고, 봉희는 유랑객이 된다. 독립운동가 가족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준다.
<어머니>에서는 아버지가 기미년에 북만주로 망명해 싸우다 죽는 바람에 교육을 받지 못한 아들의 일탈로 신산한 삶을 사는 독립운동가 아내의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감리교 목사이던 아버지가 평양의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사한 뒤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작가 자신의 체험이 모티브가 되었을 법하다.
<아무도 없소>에서도 만세운동 뒤 해외로 망명해 소식이 두절된 독립운동가를 가장으로 둔 모녀의 비극을 문제삼고 있다. 딸은 생활고 때문에 벼랑에 몰려 매음녀로 전락하고, 모친은 그런 딸의 전락에 좌절해 양잿물을 마시고 자살한다. 작가의 방점은 대규모의 민족 이산을 유발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현실을 외면한 채 상업주의에 매몰되어 저속한 에로물이나 기획하는 잡지 언론의 탈선에 찍혀 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의 비극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자 하는 의도도 분명하다.
<경희>에서는 친족 살인에까지 이른 가족해체 과정이 줄거리를 이룬다. 미완의 상태라 서사의 전모를 확인할 수 없으나, 부친의 망명 중 다른 남자와 정분난 모친을 살해한 18세 소녀의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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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이후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우리 소설 속에 호명되고 재현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혹심한 검열과 탄압으로 인해 철저한 자기검열과 내연화 방법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자(伏字)나 미완의 작품이 많은 것은 다 이런 사정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3・1운동을 현장의 체험으로 재현해내는 일이 불가능했다. 망명지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지만 매체와 전문적인 작가에 한계가 있었다. <피눈물>은 그래서 더욱 소중한 성과라 할 것이다.
3・1운동을 과거의 체험으로 기억하고 있는 후일담 소설들은 여러 가지 중층적 의미를 지닌다. 한결 열악해진 객관적 정세 속에서도 여전히 항일 의지를 잃지 않으려는 작가의식의 소산인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항일 의지를 포기한 채 전향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독립운동가 혹은 그 가족의 비극을 드러내 그들이 겪는 수난의 숭고성을 부각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항일 의지를 위축시키는 역기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3・1운동 전 이광수의 <무정>에서 벌써 항일운동 노선의 분열상이 노출되어 있지만, 3・1운동 이후의 소설에서도 이 같은 노선상의 분열이나 파쟁이 드러난다. 그러면서도 망명한 유이민들의 항일투쟁의 실상을 제재로 삼고 있는 일련의 작품들은 식민주의 폭력의 실상과 그 아래에서 신음하던 민족공동체의 수난에 대한 증언이며, 3・1운동 이후의 정세와 세태 변화를 반영한 소중한 성과들이다.

표언복 |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했다. “해방 전 중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며 일본, 러시아, 미국 유이민 소설 연구로 관심을 확장해 후속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2018년 7월호(통권 7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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