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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8년 3월호)

 

  재판 속의 3・1운동
  

본문

 

무단통치하의 사법 제도
일제는 이미 대한제국 시기인 1909년 7월, 이른바 ‘기유각서’(己酉覺書)에 의해 일체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탈취하여 통감부에 예속시켰다. 기유각서 제1조는 “한국의 사법 및 감옥 사무가 완비되었다고 인정할 때까지 한국 정부는 이를 일본국 정부에 위탁할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0월에는 대한제국 법부가 폐지되고 그 사무가 통감부 사법청으로 이관되었다. 이 사법청은 고등법원 1, 공소원 3, 지방재판소 8, 동 지부 9, 구(區)재판소 80개소로 구성되었고, 일본인 판사 192명, 검사 57명, 한국인 판사 88명, 검사 7명을 두어 4급 3심제(구재판소–지방재판소–고등법원 또는 지방재판소–공소원–고등법원)로 운영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재판소는 조선총독의 직속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병합 초기에는 통감부의 제도를 그대로 운영하다가 1912년 3월 법령과 사법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조선형사령’, ‘조선민사령’, ‘조선태형령’, ‘조선감옥령’ 등을 공포하고, 재판소 명칭도 법원으로 바꾸어 지방법원–복심법원–고등법원의 3급 3심제로 운영하였다. 경성(서울), 공주, 함흥, 평양, 해주, 대구, 부산, 광주 8곳의 지방법원에서는 판사 단독으로 재판함을 원칙으로 하고, 경성, 대구, 평양 3곳의 복심법원은 판사 3인이, 경성 1곳의 고등법원은 판사 5인이 합의부를 구성하여 재판하였다. 판사나 검사의 일본인 비중은 통감부 시대보다 더 높아져 1912년 당시 전체 판사 191명 중 38명, 전체 검사 54명 중 3명만 한국인이었다.
이러한 정식 재판 이외에도 무단통치하에서 헌병경찰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서 법원의 영장 없이 구속과 고문, 태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법령이 1910년 12월에 제령(총독의 명령으로 법령의 효력을 가졌다.)으로 공포된 ‘범죄즉결례’, 1912년 3월에 공포된 ‘조선태형령’, ‘경찰범처벌규칙’ 등이다. 이들 법령에서 경찰서장, 헌병분대장 및 분견소장은 즉결권자로서 “3개월 이하의 징역, 100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야 할 죄”, 구류 과료(벌금)에 해당할 경우 90대까지 태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 일제가 3・1운동을 탄압하면서 이 태형 제도를 적극 활용하였음은 물론이다.

3·1운동과 재판 과정
3・1운동에서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경우는 주동자이거나 과격 행동자에 한했다. 수용 시설도 부족하고, 판검사의 인력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동자와 과격 행동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군경, 검찰의 구타와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증거로 채택했기 때문에 만세시위 단순 가담자도 억울하게 중형에 처벌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재판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어떤 경우는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들과 같이 1919년 3월 1일 구속되었지만, 이듬해 10월 30일에야 최종 판결이 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 경우 예심 도중 숨진 양한묵을 제외한 48인에 대한 경성지방법원의 예심 종결 결정은 체포된 지 5개월 만인 1919년 8월 1일에 나왔다. 하지만 이 사건에 ‘내란죄’를 적용하여 엄중한 처벌을 함과 동시에 곤란한 재판의 책임을 회피하고자 한 경성지방법원과 이 사건을 가능한 한 축소하고 관련자에게 가벼운 처벌을 함으로써 이 사건의 의미와 파급력을 축소하려는 고등법원이 충돌하였다. 결국 이 재판은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소요 피고사건’으로 축소되어 손병희 등 8명에게 징역 3년을, 29명에게 징역 2년 6개월에서 1년에 이르는 유죄를, 길선주 등 11명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여기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신석구 목사의 경우 구속에서 석방에 이르는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에 참석하고 경무총감부에 구속 수감, 당일 경찰 신문, 3월 13일 검사 신문, 3월 14일 서대문형무소로 이감, 3월 18일 검사 신문, 5월 5일 경성지방법원 예심 신문, 8월 1일 경성지방법원 예심 종결, 8월 26일 고등법원 특별형사부 예심 신문,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 특별형사부 예심 종결,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 공판 시작, 8월 9일 경성지방법원 공소불수리 결정, 9월 20일 경성복심법원 항소심 공판 시작, 9월 22일 판사 신문, 10월 12일 검사 징역 3년 구형, 10월 30일 판사 징역 2년 선고, 상소 포기로 형 확정 후 경성형무소로 이감,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

검거에서 기소 재판에 이르는 과정은 거의 비슷하지만, 경기도 수원군 송산면 만세시위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송산면 만세시위는 면소재지인 사강리에 살던 홍면옥, 홍효선, 이규선 등이 주도하여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 계속되었다. 첫날은 200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지만, 마지막 날에는 사강 장날이어서 주민 1,000여 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수원경찰서에서 지원을 나온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가 해산을 명령하며, 홍면옥을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리고 자전거를 타고 도주하였다. 흥분한 시위대는 그를 쫓아가 돌멩이와 몽둥이로 타살하였다. 시위에 참여한 인물 중 총에 맞은 홍면옥, 그의 동생 홍준옥, 홍면옥의 장인 김명제는 그날 오후 5시경에 순사에게 체포되었고, 일제는 그 지역에 군경을 파송하여 검거에 나서 4월 20일경까지 176채의 가옥을 불태우고 175명을 검거하였다.
그 후 혹독한 고문을 통해 도망간 사람들을 추가로 검거하여, 그중 홍면옥 등 35명을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하였다. 경성지방법원은 10월 27일, 홍면옥 등 32명을 기소하고 이성봉 등 3명을 면소하는 예심결정을 하였다. 이들은 경성지방법원에 기소되어 이듬해 4월 7일 “소요, 보안법 위반, 살인” 혐의로 홍면옥 징역 15년, 홍준옥 등 3명 징역 12년, 김명제 징역 10년, 김교창 등 13명 징역 7년이 선고되었고, 진순익 등 4명만 무죄로 풀려났다.
1심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형기가 얼마 남지 않은 김도정 등 6명을 제외한 22명은 불복하여 바로 다음 날 항소하였다. 경성복심법원은 5월 31일에 홍면옥에 대한 감형(징역 15년에서 12년)과 유죄 판결을 받은 각 피고에게 미결구류일수 200일을 산입하도록 판결하였다. 그러자 임팔용 등 3명은 상고를 포기하고, 안순원 등 2명은 상고를 했다가 취소했으며, 나머지 홍면옥 등 17명은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7월 5일 기각 판결이 내려져 옥고를 치러야 했다.
고등법원 판결문에 나타난 이들의 ‘상고 취의(이유)’에 따르면 수원경찰서에서부터 극심한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 일련의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차경현의 경우, 자신은 3월 25일 수원에 갔다가 28일 오후에 돌아와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고 동네 사람들로부터 시위 소식만 들었으나, “(4월 13일) 수비대 및 순사가 갑자기 와서 집을 불태우고 또 그 마을에서 무죄한 사람을 붙잡고 수원경찰서에서 악형을 견디지 못하고 두 번이나 정신을 잃어서 어떻게 답했는지 모른다. 피고는 수원 자혜병원에서 10여 일 치료를 받고 예심 법정에서 무실한 죄라고 주장했는데 그 법정에서도 경찰서에서의 신문조서를 취하여 종결하고, 경성지방법원에서도 또한 동일하니, 복심법원에 공소를 신청하고, 복심법원에서 증인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문 중 고문에 대해서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신석구 목사도 「신학세계」(1937년 3월호)에 기고한 설교문 “십자가에 대한 명상”에서 “내가 재판소에서 예심으로 있을 때 한 작은 상자 속에 갇혀서 하루 동안 고생했다. 상자에서 나와 감옥소로 간즉 내 집에 간 것처럼 평안했다.”라며 당시 벽관 고문을 당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만세시위가 가장 격렬했던 3・1운동 초기 각 지방법원에 기소된 인원 및 법원별・종교별 비율은 다음 표와 같다.

3·1운동으로 기소된 피고인 종교별 분류(1919. 3. 1.-1919. 5. 20.)
구분 기소 인원 불교 유교 천도교 기독교 천주교 무신교 미상 법원별 비율(%)
경성지법 1,576 13 5 155 195 7 779 422 20.1
공주지법 501 1  - 20 49 -  214 217 6.4
함흥지법 907  -  - 234 133 1 244 295 11.6
평양지법 1,552 1 2 563 564 1 333 88 19.8
해주지법 946 -   - 164 249 5 520 8 12.1
대구지법 936 15  - 1 282 5 417 216 11.9
부산지법 732 46 7 7 74 -  521 77 9.3
광주지법 685 3 3 67 173 -  380 59 8.7
계 7,835 79 17 1,211 1,719 19 3,408 1,382 100.0
종교별
비율(%) 100 1 0.2 15.4 21.9 0.2 43.5 17.6  


법원별 비율은 관할 지역의 시위 규모에 비례할 것이다. 그렇다면 경성지방법원 관할인 서울 및 경기 지역(강원 지역 포함)의 시위 규모가 가장 컸고, 평양지방법원 관할인 평안남북도가 그 뒤를 잇고 있으며, 황해도(해주지법), 경상북도(대구지법), 함경남북도(함흥지법), 경상남도(부산지법), 전라남북도(광주지법), 충청남북도(공주지법) 순임을 알 수 있다.
3・1운동은 종교계가 주도한 만큼 5월 20일까지 기소된 인원 7,835명 가운데 종교인은 3,045명으로 38.9%에 이른다. 여기서 종교별 비율은 각 종교계의 3・1운동 참여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기소된 자들은 주동자이거나 과격 행동자였고, 종교인들은 대부분 주동자로 기소된 것이므로 이 비율은 각 종교계의 3・1운동에서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민족대표의 구성에서도 그렇듯이 단연 기독교와 천도교의 비율이 높고, 불교가 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다음을 차지한다.
일본헌병대의 조사에 따르면 이렇게 3・1운동의 주동자나 과격 행동자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사람은 1919년 말까지 1만 9,050명에 이른다. 이들에 대한 종교별 분류는 다음과 같다.

3·1운동 피검자 종교별 분류(1919년 말, 일본헌병대 조사)

종교별 남 여 계 비율(%)
천도교 2,266 15 2,281 11.7
시천교 14   14 0.1
불교 220   220 1.1
유교 346   346 1.8
감리교 518 42 560 2.9
장로교 2,254 232 2,486 12.7
조합교회 7   7 0.04
기타 기독교286 34 320 1.6
천주교 54 1 55 0.3
기타 종교 21   21 0.1
무종교 9,255 49 9,304 47.7
미상 3,809 98 3,907 20
합계 19,050 471 19,521 100


여기서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들은 과격 행동자라기보다는 주동자로 피체(被逮)되었을 것이다. 당시 총인구를 2,000만 명, 기독교 신자를 대략 30만 명으로 보았을 때 총인구의 1.5%에 불과한 기독교계가 3・1운동 전체 피검자의 17.2%나 차지한다는 것은 3・1운동에서 기독교계의 역량과 비중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전체 471명의 여성 피검자 중 308명(65.4%)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1919년 6월 10일 조사에 따르면, 1심 판결에 불복하여 복심법원에 항소한 경우는 921건에 3,490명이었다. 이들은 드물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선고를 받거나 형량이 약간 감소된 경우는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 기각 판결을 받았다. 같은 통계에서 고등법원에 상고한 경우도 312건에 907명이 있었으나, 거의 모두가 기각되었다.

선교사들의 증언
다음은 1919년 4월 17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을 어렵게 방청한 한 선교사의 기록이다.

그 재판에 특별한 일은 없었다. 모두가 독립 시위에 참여했다는 것은 인정을 했지만 그들이 기소된 부분의 일들에 대하여는 부정했다. 18명의 피고들이 재판을 받았다. 8명이 먼저 호명되었는데 이들은 한 사건에 연관되어서 같은 곳에서 잡혀 왔다. 그들은 18세부터 57세까지였다. 한 명만이 학생이었다. 세 명이 여자였는데, 그중에 하나는 57세였다. 3명은 기독교인이고 5명은 천도교인이었다. 재판이 한 시간 반 동안 진행되고 나서 검사가 일어나서 논고 없이 2명에게는 징역 10개월, 또 다른 2명에게 8개월, 그리고 나머지에게 6개월을 구형했다. 선고는 19일에 내렸다.

거의 같은 무렵인 4월 1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대구 만세시위 관련자 재판에 방청했던 미북장로회 선교사 부르엔(Henry Munro Breun)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체포된 지 한 달이 넘은 4월 15일에 우리 지역 주민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날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77명, 그중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으며, 그들 중에는 목사 2명, 장로 3명, 학교 선생님들과 수십 명 이상의 학생이 있었다. 우리 셋은 하루 종일 거기에 있었다. 나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 30분까지 앉아 있었다. 단지 점심용 크래커를 사러 가게에 갔다 왔을 뿐이다.
법정은 붐비며 피고들이 법정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피고들은 밧줄로 묶여졌고, 몇몇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으나, 쇠사슬은 법정에 있는 동안 제거되었다.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깎았고 맨발이었다. 판사가 각 사람을 호명했다. 몇몇 경찰관을 제외한 모든 관리들은 일본인이었고 학생들을 제외한 모든 질문은 일본인 통역사가 한국어로 통역해야 했다. 판사는 검사가 제출한 증거에 기초하여 신문했다.
검사는 등받이가 높은 의자에 앉아 있어서, 15세 소년 2명이 호명되었을 때 소년들이 너무 작아 검사의 의자에 가려 판사가 그들의 머리도 볼 수 없어서 앞으로 나와야 했다. 그 광경에 인간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슬픈 미소를 지었지만, 그때도 검사는 미소도 짓지 않았다.
신문을 마친 후에 검사가 일어나서 긴 종이를 읽고 3년에서 6개월 사이의 징역 처벌을 요구했다. 그런 다음 오후 9시경, 피고인들에게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 중 절반이 말하겠다고 나섰다. 약 20명 정도 듣고 나서 나머지는 거부됐으며 1주일 안에 판결이 내려질 것이라고 발표한 후 해산했다.
다시 우리 2명은 단상에 있어서, 검사가 실제로 요구하는 판결을 들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훌륭한 변호를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단지 구경꾼이었을 뿐이라고 증언했다. 두 소년은 3년 집행유예로 나가게 되었다. 검사는 그들에게 6개월 징역을 구형했었다. 한 사람은 형량이 3년에서 2년 반으로, 다른 몇 명은 몇 달이 줄어들었다.


일제가 3・1운동 주동자들과 과격 행동자들을 재판에 회부한 것은 이른바 합법을 가장한 요식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재판도 없이 헌병경찰과 군대에 의해 시위 현장에서 학살되거나 태형과 구타, 고문을 당하여 희생되었다.
3・1운동에는 연인원 220만 명이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우리나라 총인구의 10% 이상이 참여한 것이다. 여기에서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지도자와 주동자로서 참여하여 민족의 수난을 동참했다는 사실은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김승태 | 한국근현대사와 한국교회사를 전공하였다. 저서로 『식민권력과 종교』 등이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2018년 7월호(통권 7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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