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 대한기독교서회 | 회원가입 | 로그인
사이트 내 전체검색

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변화 속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특집 (2018년 1월호)

 

  1987년 이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변화
  

본문

 

1987년 6월의 민주항쟁과 뒤이어 폭발한 노동자대투쟁은 1930년대 일제의 총동원체제기부터 50년 넘게 한반도 내 지배세력이 일관되게 유지해온 통치 방식의 종말을 고했다. 국가의 목표를 위해 개인의 권리를 극도로 제한하는 전시(또는 준전시)체제와 급진적 산업화의 시기가 지나간 것이다. 국가권력과 인민의 권리 사이의 관계 측면에서 보자면 1987년의 민주화는 해방과 정부수립보다 더욱 급격한 정치적・사회적・경제적・문화적 상황의 변동이었다. 그리고 이런 급격한 사회 변동을 맞이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교회협)는 역설적 경험을 했다. 민주화와 인권 투쟁의 전선에서 활약하던 교회협은 민주화와 동시에 오히려 상당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침체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글은 민주화 이후부터 직전 총무인 김영주 목사가 취임하기 이전(2009년)까지의 교회협과 교회협을 둘러싼 변화를 몇 가지 측면에서 개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이를 상황의 변화, 위상의 약화, 역할의 변화로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상황의 변화로는 (1) 시민사회가 더 이상 교회를 이전처럼 필요로 하지 않게 된 점, (2) 교회협 내부에서 교권 사이의 다툼이 발생하는 것에 도덕적 부담감이 사라진 점을 주목하였다. 이어서 교회협이 지닌 위상의 약화에 관해서는 (1) 사회적 상징성이 시민운동계와 이웃 종교들의 부상으로 인해 약화된 점, (2) 개신교 대표성이 한기총의 등장으로 약화된 점을 중점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교회협의 역할 변화는 운동체적 성격이 약화되고 협의체적 성격으로 강화되었다는 것을 살펴보려고 한다.

상황은 변했다
1) 시민사회는 교회가 필요하지 않다
군사독재의 종식은 한국 시민사회의 성장을 촉진하였다. 오랫동안 군사독재와 투쟁하며 역량을 쌓아온 한국 시민사회에 이전보다 월등히 안전한 활동의 장이 마련되었다. 그동안의 엄혹한 시절에는 종교가 시민사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성이 상당히 감소하였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는 민주화・인권 운동체로서의 교회협이 침체되는 근본적 이유였다. 전문성을 갖춘 분야별 시민운동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개신교 기관에서 활동하던 인사들 상당수가 시민사회의 영역으로 무대를 옮겨갔다. 그 결과 교회협을 비롯한 진보적 개신교 진영의 역량은 지속적으로 위축되었고, 일반 시민운동이 종교계의 운동을 압도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강인철은 『한국민주화운동사』 제2권에서 한국 기독교의 민주화・인권 운동을 사회운동의 한국적 모델로 평가한다. 강압적 정부에 의해 사회운동의 토대가 완전히 파괴된 상태에서 기독교의 사회운동이 등장하였고, 스스로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반 사회의 운동을 견인하였다는 것이다. 교회협이 한국 시민운동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였다고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아기는 더 이상 인큐베이터가 필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민주화 이후의 한국 시민사회 역시 더 이상 교회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2) 도덕적 부담감은 사라졌다
교회협 스스로에게도 군사독재라는 적이 사라진 것은 긍정적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결속을 단단하게 하는 법이다. 외부의 적이 사라진 직후부터 교회협을 비롯한 에큐메니컬 운동 기구들 사이에서는 힘겨루기가 발생하였다. 그동안 진보적 소수에게 힘을 실어주던 보수적 다수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고, 일치와 연대는 군사독재 시기의 그것만큼 도덕적인 명분이 되지 못했다.
사실 교회협이 군사독재 시기에 진보적 기독교 기구로 교계 내외에 알려질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교회협 내의 보수적 교권이 암묵적 동조 내지 소극적 지지를 보내주었다는 사실이다. 교회협 내의 보수적 인사들은 계엄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진행된 진보적 소수파들의 민주화・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지는 않더라도 이를 필요한 일로 받아들였고 최소한 반대하지는 않았다. 또한 민주화・인권 운동이 내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반대 의견을 표현하기에는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군사독재라는 강력한 적과 자신의 안전을 포기한 채 대결하고 있는 이들에게 반대한다는 것은 상당한 도덕적 부담감을 이겨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화는 군사독재와 함께 도덕적 부담감까지 없애주었다.

위상은 약화되었다: 경실련과 한기총의 등장
1) 경실련과 조계사의 등장: 약화되는 사회적 상징성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은 시민사회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민운동 단체이다. 1989년 설립된 경실련은 한국을 대표하는 시민단체 중 하나로 빠르게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교회협의 몇 가지 기능을 대체하였다. 개신교인들의 주도로 설립된 시민운동 단체가 전통적인 교회연합기구의 위상을 침식시킨 셈이다.
오랜 기간 양심선언자 또는 군경을 비롯한 공적 영역의 내부고발자들은 교회협을 양심선언의 장소이자 피난처로 이용하였다. 교회협은 민주화 이후에도 양심선언의 산실로서 2–3년간 독보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다. 대표적 사례로는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민간인 사찰 양심선언(1990년)과 박정환 학생의 안기부 프락치 강요 양심선언(1989년) 등이 있다. 그러나 1991년 11월 전 목포시 양동 동장 박동렬이, 1992년 3월 이지문 중위가 선거 부정을 폭로하는 양심선언을 경실련 사무실에서 한 이후부터 양심선언의 장소가 교회협에서 경실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후 2003년 11월 강철민 이병이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양심선언을 할 때까지 교회협은 양심선언의 공간으로 이용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1994년 6월 철도기관사들과 지하철 노조원들이 동시 파업을 진행하고 교회협의 기독교회관, 천주교의 명동성당, 불교의 조계사로 피신한 사례 이후 기독교회관과 교회협은 약자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지 않았다. 이 사례에서 명동성당과 조계사로 피신한 노조원들은 비록 명동성당과 조계사의 환대를 받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보호를 받았으며 자진 해산으로 농성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회관으로 피신한 이들은 경찰에 의해 전원 연행되었다. 교회협의 ‘소도’(蘇塗)로서의 기능 역시 약화된 것이다. 이후부터 사회적 약자들은 교회협이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해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에도 꾸준히 명동성당과 조계사가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기독교회관은 약자들이 몸을 의탁하지 않는 곳이 되었다.

2) 한기총의 등장: 약화되는 개신교 대표성
1980년대 후반까지 공식적인 교단 연합체는 교회협이 유일하였다. 대한기독교연합회나 기독교지도자협의회 등의 조직이 있었으나 엄밀히 말해 이런 기관들은 임의단체였다. 교회협은 개신교 유일의 교단연합체로서 그 대표성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적극적인 사회 참여’로 노선을 변경한 보수적 교회들은 교회협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일명 ‘88선언’)에 대한 반동을 계기로 보수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를 출범시켰다. 한기총은 등장할 때부터 규모 면에서 교회협을 훨씬 상회하는 거대한 조직이었다. 출범 당시 한기총에는 36개 교단과 6개의 기관이 가입되어 있었고, 이것만으로도 교회협의 4–5배에 이르는 규모였다. 거기에 1999년 1월에는 50개 교단에 15개 기관, 2003년 8월에는 61개 교단에 16개 기관으로 계속 확대되었다. 반면 교회협은 새로운 교단을 회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몇 차례 선언하였으나 영입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1
자연스럽게 “누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인가?”라는 질문이 대두되었고, 규모가 큰 한기총의 대표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존재하였다. 한기총의 극우적 정치색과 시민사회나 정부에 맞서 교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는 교회 내 보수적인 진영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2000년대 들어 대형교회의 지원 속에 자금력과 대중 동원력까지 갖추게 된 한기총은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었고, 교회협의 흡수를 염두에 둔 통합 논의까지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대정부 관계에서 교회협을 완전히 제쳐버리기에 이르렀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교회협을 거의 ‘물 먹이는’ 태도로 대하는 대신 한기총과는 유착적 관계를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교회협이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의 각종 종교지도자 예방 일정에서 제외되거나 후순위로 밀리고 종교지도자 간담회 등에 초청조차 받지 못하는 사이, 한기총은 정부의 확고한 파트너 또는 대화상대로 인정받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역할의 변화: 운동체에서 협의체로
민주화 직후 교회협 내에서는 교단 사이의 갈등이 상시적으로 일어났다. 먼저 1988년 기장의 김상근 목사의 총무 인선이 예장 통합과 감리회의 비협조로 인해 불발되었다.2 감리회는 총무 후보 인준을 위한 실행위원회에 불참하였고, 통합 교단은 김상근 목사는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결국 김상근 목사가 후보에서 사퇴하는 대신 같은 교단의 권호경 목사를 총무 후보로 인준하는 선에서 갈등은 일단락 되었다. 그런데 몇 년 후 총무 권호경 목사가 임기 중에 사임하고 기독교방송의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교회협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통합 교단이 이에 반발하여 일시적으로 기독교방송과 교회협에서 이탈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에큐메니컬 정신과 교단 안배에 어긋나는 처사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기장(김관석 목사, 1980-87), 감리교(이재은 목사, 1987-94) 이후 자신들의 차례에 다시 기장의 인사가 기독교방송의 사장이 된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3
이때 통합 교단은 교회협이 한국교회를 보편적으로 포괄하여 그 대표성을 확보하는 데 미흡하며 민주적이고 공정하며 공개적인 협의과정을 상실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협의과정에서의 민주적 참여와 운영에서의 공정성과 책임성, 모금과 예산의 공개적인 투명성을 확보”할 것을 요구하였다.4 거칠게 말하자면 통합 측의 지적과 주장은 교회협을 교단 협의체의 성격에 맡게 운영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교회협의 대화위원회 역시 교회협은 협의체임을 명시하고 “교회협에서의 합의는 회원교회에 책임있게 확산시키고 회원교회의 반응 역시 책임있게 수렴”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통합 교단이 지나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사실 군사독재 시기의 교회협은 투명하거나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기관과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군사독재에 저항하고자 하는 단체가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가지고 투명한 예산을 운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정부의 감시에 시달리는 기관으로서는 일종의 자살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협은 무엇보다도 기구와 관련자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소수 인원의 비밀스러운 의사결정 구조와 예산 운용이 꼭 필요한 기관이었다. 이는 이 시기 교회협이 전통적인 의미의 협의체보다는 민주・인권 운동체로 운영되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교회협의 이런 성격은 일정 시기 충분히 양해될 수 있는 것이었으나, 민주화 이후에도 이런 관행이 유지된다는 것은 그리 긍정적으로 볼 일이 아니었다. 통합 교단의 주장이 아주 엉뚱한 소리는 아니었던 셈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정 부분 받아들여졌으며, 통합 교단은 2년간의 참여 유보조치를 풀고 1996년 복귀하였다.
하지만 이런 다툼이 발생하는 이유가 근본적으로 교회협의 정체성과 운영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에큐메니컬 기구의 자리다툼에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결과만을 놓고 보자면 이후 교회협은 점차 교단 안배를 통한 자리나누기에 골몰하게 되었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보다 어느 교단이 이 자리를 배정받아야 하는지가 더 우선하는 고려사항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용인되던 것은 의사결정과 예산 운용만이 아니다. 교회협의 신학적 입장 역시 회원교단들의 전반적인 경향보다 진보적이었다. 그로 인해 때로 군사독재 시기 교회협의 활동은 교회협 내부에서도 소수의 것으로 인식되곤 하였다. 이 역시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으로 이 시기 교회협은 한국교회 전반의 신학적 경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사회참여적 ‘하나님의 선교’ 신학을 기반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교단들의 협의체로서 교회협의 입지를 생각하면 이것 역시 그렇게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다. 협의체는 자신의 독특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는 기구라기보다는 다양한 입장을 가진 이들이 함께 논의하고 일치와 연대를 도모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협의 개혁논의에는 교회의 당면한 문제나 에큐메니컬 운동의 전통적 분야(일치, 성례전, 예배 등)와 관련된 활동, 또는 교회 정서에 부합하는 사업이 종종 요구되기도 하였다. 일선 교회들과의 신학적・정서적 간극을 좁혀달라는 요구일 것이다. 이런 요구들로 인해 교회협은 교회 재산 문제, 종교인 납세, 사립학교법(이상 1993년), 단군상 건립(1999년) 문제와 같은 어찌 보면 교회협의 전통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야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교회의 입장을 반영한 다양한 사업들이 교회협에 부과되면서 교회협의 운동체적 성격이 희석되었다.
한편으로 교회협의 운동체적 성격이 약화된 것은 지역 조직들이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다. 1988년 기준 교회협 인권위원회는 총 49개의 지역인권위원회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인권위원회는 상근 실무자를 두고 활발하게 운영되ㅌ었다. 그러나 시민운동이 성장하고 교계는 전반적으로 보수화되는 변화된 상황에서 지역인권위원회는 빠르게 사라져갔다. 1997년 인권주간 행사는 11개 지역에서만 개최되었으며, 2000년 지역인권위원회 실무자 회의에는 단 3명이 참석하였다. 이런 일선 현장 조직들의 약화는 자연스럽게 운동성의 약화로 연결되었다. 교회협의 운동을 실천할 지역 교회와의 연결고리가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나가며

현재의 교회협은 민주화 이전과 같은 성격의 기구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교회협의 변화를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말할 수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때 그 교회협과 지금의 교회협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원인은 교회협을 둘러싼 상황이 변한 것에 있다. 민주화는 실로 거대한 변화였다.
상황의 변화와 관련하여 몇 마디 첨언하고자 한다. 교회협을 비롯한 진보적 개신교 진영은 지금 자신의 상황을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참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교회협과 같은 기관들의 자기 현실 파악에 도움이 될 만한 개인적인 경험이 있다. 소고기 촛불집회 때 서울시가 서울광장의 사용을 불허한 적이 있다. 그때 개신교, 천주교, 불교 3대 종단이 3일간 서울광장에서 종교예식을 거행하면서 다시 시민들에게 서울광장을 돌려준 일이 있었다. 필자는 그 세 종교예식에 모두 참여하였고 맨 뒤에서 상황과 분위기를 관찰하였다.
천주교의 예식에 시민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사제들의 적절한 유머가 가미된 연설도 흥을 돋우는 이유 중 하나였다. 시민들은 즐거워 보였으며, 천주교의 등장을 진심으로 기뻐했고 한편으로 감사하게 여겼다. 그다음 날은 개신교 차례였다. 우선 사람부터 적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천주교와 개신교가 뭐가 다른지, 다르긴 한 것인지 등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부에 대한 비판 강도는 개신교가 훨씬 높았다. 웅변조의 거친 표현이 등장했고 요즘 말로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줄 ‘사이다’ 발언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시민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박수가 간간이 나오기는 했지만 주로 무대에서 가까운 앞쪽에서 나왔다. 아마 사회선교기관이나 교회협 같은 곳에서 참석한 개신교 인사들이 모여 앉아 있던 자리일 것이다.
그 상황은 필자에게 이런 의미로 다가왔다. ‘이제 한국 시민들은 자신들이 너무나 듣고 싶던 말이라도 개신교를 통해 듣는 것은 싫어한다.’ 참담한 심경이었다. 이제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해도 듣기 싫어하는 이들을 향해 우리는 무슨 말을, 어떤 운동을 할 수 있을까? 옆에 서 있는 것조차 싫어하는 이들과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교회협만이 아니라 보혁을 막론한 모든 개신교계 교회와 기관이 고민할 시점마저도 어쩌면 지나버린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 이 글은 2017년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정기 학술심포지엄 “민주화 이후 한국교회와 개혁 과제”에서 필자가 발표한 “민주화 이후 에큐메니컬 운동의 침체와 활로 모색”의 일부 내용을 정리・보완한 것이다.

1 현재 교회협은 9개 교단과 5개 기관의 연합체이다.
2 “개신 교단 연합기관장 “자리싸움” 가열,” 「경향신문」 1994년 2월 13일 자.
3 “KNCC의 고민 保(보)·革(혁)갈등,” 「동아일보」 1989년 1월 7일 자.
4 권혁률, “교회 연합운동의 과제와 책임,” 「기독교사상」 39권 2호(1995. 2): 51-52.


손승호 | 한국교회사를 전공하였다. 최근 저서로 『유신체제와 한국기독교 인권운동』이 있다. 현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간사로 재직 중이며, 연세대학교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8년 2월호(통권 710호)

이번호 목차 / 지난호 보기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
기독교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