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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기독교사상 > 특집 > 한국 사회의 난민, 결혼이민자, 이주노동자
특집 (2017년 12월호)

 

  미얀마의 난민들, 그리고 선교적 돌봄
  

본문

 

버마는 미얀마의 옛 이름이다. 1988년 8월에 일어난 버마 국민들의 대규모 민주화 항쟁은 군대의 폭압적 진압으로 이어졌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된 항쟁으로 결국은 독재자 레윈이 물러나고 1990년 5월 국민투표를 통해 당시 야당이었던 국민민주주의연합(NLD)의 다수 득표로 군부독재 종식과 정권교체의 꿈을 이루는 듯했다. 하지만 다시 군부의 무력에 의하여 이 꿈은 좌절되었고, 이어진 학살과 폭력을 피해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들어온 항쟁 지도부와 가족들, 시민 약 100만 명이 지금도 난민으로 살고 있다.
이들은 유엔난민기구(UNHCR)로부터 난민 지위를 받고 태국의 인도주의적 포용정책으로 신변의 안전과 최소한의 생필품을 보급받으며 살고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이나 미래에 대한 안정을 보장받지 못한 채 극심한 소외와 차별, 가난과 불안, 고립감 속에서 지난 30여 년을 살아왔다.
미얀마는 2010년과 2015년에 치러진 총선거를 통해서 민주화의 길을 가고 있다. 2016년 국민민주주의연합의 집권으로 아웅산 수치 정권이 등장한 후 절차적 민주화가 진행 중이고, 중앙 정부는 주요 소수 인종들과 휴전협정을 맺었으며, 향후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협상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미얀마 국경 밖에 살고 있는 난민들의 무사 귀환과 재정착은 신속하게 해결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최근 유엔의 난민기구, 미얀마와 태국 정부는 이들 난민의 단계적 귀환을 결정하고 이를 실시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이곳 난민들은 여전히 소외되고 배제된 채 자신들의 운명과 장래에 관한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난민 여성의 이야기
제 이름은 세데포입니다. 저는 37살로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지금은 버마 내의 카렌주에 있는 조그마한 타귀투 마을에서 병원의 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내 남편은 5년 전 버마 군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정글 속으로 군용 물건을 운반하다가 그만 지뢰를 밟아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때 저는 딸을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이 큰 슬픔을 당한 뒤 저의 삶은 절망적이 되었습니다. 배 속의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한 이후 저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이곳 국경지역에서 활동하는 여러 의료관련 국제 NGO에서 주최하는 의료교육에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카렌 자치정부(KNU)의 의료기관에서 제공하는 훈련과 교육을 받았습니다. 또 현장에서 실무 수련을 받고 의료인이 되었습니다. 나는 우리 카렌 자치정부 보건복지부(KDHW)에서 인정하는 메딕 면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가난 때문에 또는 근처에 의료시설이 없어서 병이 들어도 치료를 못 받는 사람들에게 의료혜택을 주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카렌 난민들이 재정착할 예정인 이곳 타귀투 마을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온 사회발전프로그램을 통해 선교하는 한국–메솟협력센터(KMCC)와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후원으로 병원 건물을 건축하고 지역 주민들을 위한 진료와 의료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병원에는 7명의 의료 실무자가 상근을 합니다. 지금은 매월 약 500명의 환자들을 치료합니다. 대부분 이질, 설사, 복통과 두통 등을 호소하고, 말라리아와 뎅기열 같은 치명적인 병에 걸린 사람들도 찾아옵니다.
우리는 병원에 오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동시에 인근의 학교, 교회, 불교 사원, 마을 주민을 찾아가서 치료와 함께 대중 의료교육을 통해 예방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찾아가서 치료하고 교육하는 인원은 인근 9개 마을 약 5,000명이며, 내년부터 태국에서 살고 있는 난민들이 돌아오면 그 인구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병원을 통한 진료, 질병의 퇴치와 예방을 위한 대중 의료교육 사역은 지역 주민들과 어린이들, 청소년들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모두들 우리 병원을 저들의 희망이고 정신적・사회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곳으로 여깁니다. 특히 매달 한 번씩 하는 주민교육에는 많은 이들이 와서 여러 가지를 배웁니다. 저희는 지뢰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안전교육과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도 실시합니다. 가족 관계의 중요성과 가정에서 지켜야 할 보건위생에 대해서도 교육합니다. 그리고 건강한 사회생활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공동체성에 대해서도 강의합니다.
한국–메솟협력센터는 매월 직원들의 생활비와 활동비를 지원해주며 필요한 모든 약품을 제공해줍니다. 또 모기장, 비타민, 구충제, 어린이 학용품 같은 것도 정기적으로 제공합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아직 충분한 소득이나 생산이 없어서 몹시 가난합니다. 그래서 병원 진료에 드는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용자가 약간의 진료비를 부담하여 자립도를 높여가려 합니다. 우리를 지원해주는 한국의 좋은 기독교인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난민(Refugee), 그들은 누구인가
유엔난민기구의 정의에 의하면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합법적인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자신의 국적 밖에서 살고 있는 자로서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한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국제난민협약>, 1951년 제네바)
그러나 이 정의와 규정에 해당되지 않으면서 여타의 상황과 이유로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국적국을 떠난 사람들도 있고, 국적국을 떠나지 않고 살아가는 실질적인 난민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IDP(Internally Displace People)라 불리는 이들은 자국의 영토 내에 머물고 있는 자국 에 실향민으로, 거주하는 난민들인 것이다. 이른바 내전 중인 지역에서 일정한 마을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지 못하고 상대방 군대의 학살과 점거, 강제 징집과 노동, 방화, 약탈, 강간 등을 피해서 다른 안전한 곳으로 피난 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가난과 질병, 환경 재앙, 장기간 실직 등을 피해서 교육, 가족 보호, 질병, 치료, 취업 등 어떤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서 오랫동안 살던 곳을 떠나서 다른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나 전쟁이나 내전, 극심한 사회 갈등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 미리 삶의 터전을 옮긴 사람들도 실질적으로는 모두 난민에 속한다.

근본 원인은 서구의 식민지배
지리적으로 태국을 중심으로 한 인도차이나 반도의 근현대사에는 여러 번 난민이 발생한 역사가 있다. 먼저 1975년 4월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난 후 라오스가 사회주의화 되면서 당시 인구의 약 10%인 40만 명의 라오스인들이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이동해 난민캠프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전쟁 기간에 친(親)프랑스, 친미 활동을 하던 중산층과 전문 엘리트 집단이었다.
캄보디아 역시 1975년에 폴포트가 주도한 크메르루즈 정부의 이른바 킬링필드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이를 피해 캄보디아 난민들은 태국 국경을 넘었다. 이들 역시 오랜 전쟁 이후 또다시 겪은 내전을 피해 온 난민들이었다.
미얀마에서의 난민 발생 원인은 더 역사적이다. 영국은 비교적 쉽게 인도를 식민지화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군사 강대국이던 버마를 식민지로 삼기 위해서 영국은 버마와 3차까지 전쟁을 치른 후 1886년 버마를 완전히 식민지에 편입하였다. 이후 1948년 버마가 독립하기까지 영국은 약 70년간 식민통치를 하였다.
영국의 버마 통치방법은 이른바 인종 간 분리정책이었다. 버마는 예전부터 약 140개의 다른 인종이 섞여 살며 지배와 피지배, 때로는 공존과 연합, 때로는 갈등과 대립의 관계를 맺고 연합국가 형태로 살아왔다. 이때 인종이란 언어와 문화와 전통, 살고 있는 지역과 영토가 전혀 다름을 의미한다. 따라서 같은 인종 간에는 강고한 동질성이 있으나, 다른 인종과는 상당한 이질성을 가지고 근본적으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의 식민주의자들은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인종을 서로 분리하여 상호 통치하게 함으로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
최근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국경지역에서 크게 이슈가 되고 있는 로힝야족의 경우가 그렇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버마인의 토지를 수탈한 후에 방글라데시에 살고 있는 이슬람교도 로힝야족을 데려다가 준(準)지배계층으로 등용하여 버마 국민들 위에 군림하게 했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부터 로힝야족과 버마족 사이에 적대감은 이미 심각했다.
독립 이후 인종 간의 갈등과 적대감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독립 이후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미얀마 정부는 자국 영토 내에 살고 있는 135개의 인종을 공식화하고 인정했는데, 이때 로힝야족은 포함되지 않았다. 결국 식민지의 희생자로 이들이 국적 없는 사람들로 살게 된 것이다.
현재 태국의 서쪽 국경에 살고 있는 100만 명에 달하는 미얀마 난민 발생의 원인도 오랜 역사적 이유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버마는 영국과의 독립에 관한 준비과정을 거쳐 1948년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버마의 독립 영웅으로 건국을 이끌던 아웅산 장군이 1947년 7월 우파 세력에 의해 암살을 당하는 등 극심한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거쳤다. 대부분 아시아 국가들은 서구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한 후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시민혁명이나 근대화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현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노정되었고 혼란과 무질서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이때 조직력을 갖춘 훈련된 군부와 군대가 애국심과 엘리트 의식을 내세워 정치와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1962년 3월 2일 새벽, 당시 버마의 군 최고사령관 겸 국방장관 레윈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후 모든 정당을 해체하고, 모든 산업을 국유화하고, 대외적인 폐쇄 정책을 쓰며 버마식 사회주의를 표방하였다. 이후 수차례 광범위한 민중의 저항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군대는 무자비한 학살과 탄압으로 진압하였다. 군사독재는 국민들의 자유와 참여를 봉쇄한 채 권력과 부를 독점하였고, 민중들의 삶은 극심한 가난과 절망을 강요받았다.
1987년 9월 군사정부는 거듭된 경제 실패를 만회한다는 명분으로 신경제자유화 정책을 발표하면서 1962년 이래 세 번째로 통화 폐기를 발표하였다. 이는 기존에 통용되는 화폐를 모두 폐기 처분하는 것으로 국가는 일시에 큰 혼란에 빠졌으며, 이에 학생들과 젊은 승려를 중심으로 전 국민적 저항이 발생하였다.
1988년 8월 8일, 이른바 8888 버마민중항쟁이 그것이다. 광범위한 저항에 부딪힌 군부는 이미 노쇠한 레윈을 실각시키고 다당제와 자유 총선거를 받아들였다. 1990년 5월 27일, 93개 정당이 참여한 총선의 결과는 아웅산 수치가 이끌던 국민민주주의연합이 전체 의석의 80%를 장악할 수 있는 59.87%의 지지로 승리했다.
그러나 군부는 그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개헌 후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다시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민중항쟁이 일어났고, 군대는 이전보다 훨씬 더 무자비한 학살과 폭력으로 진압했다. 그리하여 학생, 지식인, 노동자, 농민, 그리고 소수 인종의 지도자들은 무장 투쟁을 하다가 국경을 넘어 현재 약 100만 명의 난민이 태국에서 살고 있는 실정이다.

태국과 미얀마 국경에서의 선교적 돌봄
이곳의 난민들은 지난 2012년 맺은 미얀마 중앙정부와 주요 소수민족 간의 휴전협정, 그리고 2015년 이후 아웅산 수치 정부의 안전하고 영구적인 난민 귀환과 재정착 지원 약속에 따라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해 기대하고 있지만, 여전히 불신과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지난 30년간 남의 나라에서 난민으로서 사회적 신분과 자유를 비롯한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 자녀들의 교육, 질병의 치료, 건강 문제와 영양 부족,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 취업을 위한 직업교육 기회의 부재, 거주 및 이전과 이동의 부자유, 재산을 취득하지 못하는 문제, 자치권과 행정, 사회복지 부재 등 큰 문제들을 가지고 살아 왔다.
필자는 2005년 12월, 태국 치앙마이에 본부가 있는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의 특별 부서인 메콩 에큐메니컬 협력프로젝트(MEPP)의 컨설턴트로 부임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정책협의를 거쳐 태국과 미얀마 국경의 난민과 IDP, 이주노동자 선교를 중심적인 과제로 채택했다. 이를 위해 인권과 인간 존엄성 회복을 위한 지도력 강화, 지역교회의 사회선교능력 강화를 위한 목회자와 신학교육, 빈곤 퇴치와 지속 가능한 발전 프로젝트, 어린이 공교육 지원, 여성 지도력 훈련, 인도주의적 지원과 긴급구호 등을 구체적 활동으로 정했다.
이후 구체적으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하여 난민의 자녀들을 위한 초・중・고등학교 12개를 건축하고 학교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어린이들이 받는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교사들을 격려・지원하고 시설의 수준을 높이고 그림 그리기, 음악활동, 체육활동, 언어교육을 증진시키는 특별 활동을 지원한다. 또 특별한 사정으로 갈 곳이 없는 어린이들을 위해 기숙사를 운영하고 지원함으로써 안정적인 주거를 제공하고 학습과 영양 상태를 살피고 사회성을 높이기 위한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상급 학교나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에게는 장학금을 지원하여 학업을 마치고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가 되도록 권면하고 도와준다. 이런 공교육 지원의 혜택을 입은 난민 자녀들은 약 3,500명에 달한다.
지속 가능한 발전과 빈곤 퇴치를 위하여 여러 마을과 학교에 암소은행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가난한 농가에 암소 1-2마리를 제공하여 기르도록 하여 가난에서 벗어나고 빈곤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주며, 매월 참여자 교육을 통해서 사회적 신뢰와 건강성을 키워 좋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도록 독려하고 있다.
또한 연간 수차례 진행되는 지역의 목회자들 재교육 훈련프로그램을 통하여 교회의 사회선교 능력을 강화하고 목회를 통하여 지역공동체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을 고양시키고 있다. 특히 여러 신학교의 신학교육을 지원함으로써 학생들이 졸업 후에 지역교회로 돌아가서 목회를 통하여 지역공동체를 돌아보도록 지도하고 있으며, 교사나 NGO 실무자 등으로도 활동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지난 2014년부터는 가까운 장래에 상당수의 난민이 자신들의 땅 미얀마로 돌아갈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미얀마 내 난민 재정착 선교적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이 사역은 지난 30년간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서 국가와 민족을 재건할 과제를 가진 난민들에게 최소한의 자립 근거지를 마련해주기 위한 사역이다. 세 곳의 마을을 택하여 유치원, 각급 학교, 병원, 교회 등 4개의 시설을 제공하고 실무진과 교사, 목회자를 배치하여 지역 주민들을 돌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태국 국경과 가장 가까운 카렌 자치주 파안군의 끌로요레 마을, 타귀투 마을, 탈러 마을에 위에서 언급한 4개의 시설을 모두 갖추고 교육과 의료, 목회적 돌봄을 실시하고 있다.
의료 분야의 경우 3개 마을 주민 각 5,000명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는 병원을 세웠으며, 이곳에 배치한 27명의 훈련된 전문 의료진이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 또한 끌로요레 마을에는 지뢰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 약 200명에게 의족을 제공해준 장애인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하여 여러 마을에 지뢰 피해방지 교육과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장애인 재활과 소득증대를 위한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탈러 마을에는 농업생산을 높이기 위해 새 농업 품목과 기술을 개발하고 공동 생산, 공동 유통을 통한 농업개발사역을 새로 시행하고 있다.

글을 맺으며
이른바 세계화 시대에는 세계화와 동시에 지역화를 강조한다. 우리는 한국 사람임과 동시에 아시아 사람임을 자각하고 아시아 지역화에 힘써야 한다. 우리 주변의 아시아인들은 동질성을 확보하고 공동의 번영과 공생을 모색해야 할 좋은 이웃이다.
뜻 있는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은 한국이 이룬 정치적 민주주의를 확고히 하고, 문화적으로 성숙하고 격조 있는 문화를 공유하기 원하며, 한국이 이룬 경제성장을 본받으며 그 혜택을 나누어 가지기를 바란다. 그들은 또한 남북으로 분단된 현실을 함께 마음 아파하며 남북이 하루속히 통일을 이루어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우리의 이웃, 아시아인들 중 아직도 많은 이들이 가난과 사회적 저개발의 고난을 겪고 있다. 아직도 전쟁과 내전 상태에서 폭력과 테러의 위협을 받으며 국가적 폭력, 잘못된 문화에서 오는 폭력이나 종교적 폭력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우리의 이웃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도 국가나 정부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아시아의 난민들을 생각하고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 또한 난민으로 살아가셨다. 식민통치를 하던 로마제국의 하수인으로 살았던 헤롯왕의 살기와 위협을 피해 어린 예수는 이집트로 피난을 갔다. 그가 생애를 통해서 보여주신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사랑, 자비와 관용, 자기 헌신과 희생, 특히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어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예수께서 어린 시절 보낸 난민의 삶을 통해 형성된 인격 때문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허춘중 |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메콩 에큐메니컬 협력프로젝트의 컨설턴트로 활동하였다. 현재 태국기독교회총회(CCT) 에큐메니컬 동역선교사, 한국–메솟협력센터(KMCC)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2018년 5월호(통권 71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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