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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7년 11월호)

 

  달라진 장례문화, 좋은 죽음이란
  

본문

 

인간과 죽음
인간의 죽음은 일상적인 현상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은 유한하기 때문에 인간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자연의 이치에서 보면 죽음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지만 인간은 죽음 앞에서, 그리고 타인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두려움과 공포감을 느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한 인간의 죽음으로 인해 존재가 사라지는 현상과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영원히 단절되는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죽음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점을 분명하게 각인시켜 준다.
죽음의 가장 큰 특징은 불가역성이다. 죽은 다음 다시 살아난 사람은 없다. 이는 곧 죽음이 영원한 이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은 사람들에게 슬픔과 아쉬움, 그리고 무엇보다 떠나가는 사람은 남은 자에게, 남은 자는 떠나가는 사람에게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단절과 좌절감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죽음은 사람들에게 불멸하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를 자극한다.
두 번째 특징은 불가지성이다. 인간은 죽음 이후의 세계, 즉 사후세계에 대해 알지 못한다. 물론 임사체험에 대한 증언과 연구들이 있지만, 아직까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사후세계에 대한 증거는 없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며,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죽음의 두 가지 특징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한다.
반면 죽음이 인간에게 주는 교훈도 있다. 죽음은 인간에게 단 한 번뿐인 삶, 일회성을 지닌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실존적인 물음을 던지게 한다. 역설적으로 죽음은 인간의 삶의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죽음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삶과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심리를 갖고 태어났다고 했으며, 융은 인간의 죽음도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실존주의자인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 등은 결국 대체 불가능한 죽음이 인간의 실존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말했다. 죽음은 곧 인간의 실존을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도구라는 뜻이다. 또한 셸던 솔로몬, 제프 그린버그, 톰 피진스키는 『슬픈 불멸주의자』에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일련의 행동이 문명의 다양성과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 책에서 인류 역사를 통틀어 죽음의 공포는 예술・종교・언어・경제・과학의 발달을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 행동의 주된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의미 있는 삶을 향한 인간 행동의 토대가 될 수 있고, 반대로 가장 비도덕적인 인간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양쪽 모두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인간에게 죽음은 삶을 성(聖)스럽게 만들 수도 있고, 속(俗)되게 만들 수도 있는 사건인 것이다.

종교와 죽음
인간은 역사 이래로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의학과 종교이다. 죽음의 원인이 되는 질병을 치료하거나 사전에 예방하려는 의학은 죽음을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한 방안을 찾아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노력이라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종교는 삶의 연장이라는 방법보다는 인간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다. 즉 종교는 죽음의 특징인 불가역성과 불가지성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방식으로 죽음을 극복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의학과 종교는 죽음 문제를 해결하려는 공통의 목적이 있다. 또한 의사와 성직자는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죽음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해준다. 종교는 인간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설명해준다. 또한 종교는 우주의 기원, 세상의 시작과 끝을 설명해준다. 종교는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교의(敎義, Dogma) 체계를 잘 갖추고 있다. 종교인들은 교의체계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교의에 맞는 의례(ritual)를 수행해야 하며, 일상생활에서도 교의에 어긋남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종교인들은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으로서, 불교인은 불교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죽음에서 벗어나 천국과 극락에 갈 수 있다. 결국 죽음의 문제는 종교적인 삶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죽음은 삶과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는 죽음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인간의 죽음은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되어 유한한 존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 지옥으로 가야만 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기독교는 또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한 인간에게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준다.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을 고백함으로써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교의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의 핵심은 인간의 죽음 문제 해결이다.
이처럼 종교는 의학과 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준다. 이것이 의학적, 과학적으로 타당한지에 대한 논의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종교는 과학적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의해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를 믿는 사람(고등교육을 받고, 합리적이고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초월적 존재에 대한 경험과 성스러움에 대한 종교적 체험에 존립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달라진 장례문화
에드가 모랭은 『인간과 죽음』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장례를 치른다고 말한다. 종교적인 이유를 떠나서 장례는 죽은 자에 대한 예를 갖춰 주검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죽은 자를 수명이 다한 건전지처럼 취급하지 않는다. 죽은 자가 산 자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산 자가 죽은 자에게 어떤 행위를 하는지에 대해 죽은 자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인류사를 통해서 볼 때 사람이 살았던 곳에서는 죽은 자를 처리하는 문화와 의례를 갖고 있었다. 장례문화는 지역과 민족과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죽음을 처리하는 문화는 반드시 존재했다.
인간이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은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반영된 것이기 때문에 죽음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죽음관이 다르면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장례문화가 나타나는 것은 죽음관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고려 시대 우리나라의 장례문화는 화장과 매장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 시대에는 장례 방식에서도 불교적인 죽음관을 반영해서 화장이 성행하였다. 또한 임종이 가까워지면 사찰에 가서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곳에서 장례도 치렀고, 위패를 보관하기도 했다. 고려 사회에서는 불교 중심의 화장 문화가 성행하였으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장례문화의 중심이 불교에서 유교로 변화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은 억불숭유정책을 시행하여 불교의 화장을 오랑캐의 풍습으로 간주하고 금지(성종, 1470년)하였다. 국가에서 금지한 화장을 백성들이 하면 그 책임을 가족뿐만 아니라 관리 감독을 잘못한 관리들에게까지 물어 곤장을 치게 했다. 조선의 장례문화는 유교에 근거하여 국가적인 차원에서 진행되었으며, 화장과 매장이 공존하던 장례문화는 매장으로 수렴되었다. 사찰에서 진행하던 장례식과 제사 등을 집에서 진행하도록 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방식의 장례문화는 조선 시대의 『주자가례』를 근간으로 형성된 것이다.
한편 일제강점기에는 우리의 장례문화에 대한 강제적인 변형이 진행되었다. 일제는 묘지화장장 매장 및 화장취체 규칙(1912)과 의례준칙(1934)을 제정하여 유교식 장례문화에 대한 변화를 시도하였다. 일제의 장례문화정책은 크게 공동묘지제도 도입, 화장문화, 장례의 간소화, 삼베 수의(壽衣) 등장을 들 수 있다. 일제의 의례준칙은 해방 이후 가정의례준칙(1973)의 근간으로 활용되었다.
해방 이후 큰 변화를 보이지 않던 장례문화는 1990년대 이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변화의 핵심은 장례 장소와 장법의 변화이다. 장례 장소가 집에서 장례식장으로, 장법은 매장에서 화장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화장률은 1991년 17.8%에 불과하였으나, 2000년 33.7%, 2005년에는 52.6%로 조사되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화장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장례방식이 되었고, 2014년에는 79.2%까지 이르게 되었다. 화장한 유골을 추모공원과 가족 봉안묘에 안치하기도 하며, 화초나 잔디 혹은 나무 아래에 안치하는 자연장도 증가하고 있다. 매장과 묘지 중심으로 한 장례문화가 화장이 증가함에 따라 화장 시설이 증가하고 또 화장한 유골을 안치하는 추모시설 등이 확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 1994년 한국갤럽 조사에 의하면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72.2%, 병원 장례식장은 22.6%로 조사되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별도의 장례식장에서 치른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화와 핵가족화, 주거 공간이 협소한 주택문화(아파트, 빌라 등), 맞벌이와 직장인들의 증가, 편리성의 추구 등 다양한 요인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집은 삶과 죽음의 중심이었다. 한국인들은 집에서 태어나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현재는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1989년 병원에서의 사망률은 12.8%에 불과했으나, 2014년에는 73.6%로 증가했다. 반면 집에서의 죽음은 16.6%에 불과했다.1 병원에서의 죽음은 전통 사회에서는 좋지 않은 죽음의 조건인 객사에 해당된다. 이처럼 오늘날은 전통 사회와는 다르게 집 밖에서의 죽음이 증가하고 있다.
이렇게 장례문화 형태가 변화하면서 죽음에 관한 산업이 발달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장례식장에서의 장례가 보편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상조회사가 등장했다. 상조회사의 경우 국내 최고의 리조트 회사나 공제회가 참여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상조회사와 공원묘지 광고는 신문뿐만 아니라 유명 연예인을 앞세운 TV 광고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추석과 한식, 윤달에는 더욱 활발하게 나타난다. 한국의 장례문화는 매장에서 화장으로, 집에서 장례식장으로, 가족공동체에서 상조회사로 그 전통적 양식이 급격하게 해체되고 있다.

좋은 죽음이란
전통 사회에서 한국인들은 죽음을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으로 구분했다. 좋은 죽음이란 장성하여 시집, 장가를 간 다음 제사를 지내줄 후손을 낳고 천수를 누린 후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집안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등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반면에 나쁜 죽음은 요절, 비명횡사, 객사,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는 경우가 해당된다. 한국 사람들은 나쁜 죽음을 당한 사람의 혼(魂)은 원혼(冤魂)이 되며, 해원(解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산 사람에게 해를 준다는 죽음관을 갖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을 구분하는 기준은 삶의 길이, 임종 장소, 그리고 제사를 지내줄 후손의 유무이다. 이런 기준으로만 본다면 현대인들은 좋은 죽음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증가하는 셈이다. 현대 한국인들의 죽음은 대부분 객사에 해당하고, 사고에 의한 죽음이 점점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의학의 발전은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연장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평균수명 연장에 따른 의도하지 않은 불편함도 초래되었다. 한 사람이 임종에 이르기까지 평균 5년 이상 앓는 기간을 거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의료기술에 의한 불필요한 연명치료는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지만, 삶의 질은 악화되고 있다.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의 평균수명은 늘어났으나, 임종 직전의 무의미한 삶도 더 연장되면서 투병 기간이 늘어난 것이다. 분명 살아 있지만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사회적 죽음’의 상태로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는 날이 늘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간에 환자의 삶은 피폐해지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존엄성은 상실된 채 오직 의료체계에 자신을 의탁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의료기술에 따른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하면서 인간 존엄성의 상실을 방지하고, 존엄한 죽음 곧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을 선택하기 위해 존엄사법이 제정되었다.
존엄사법은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기의 결정이나 가족의 동의로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정식 명칭은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으로, 지난 2016년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호스피스 분야는 2017년 8월 4일 실시되었고, 연명의료 분야는 2018년 2월 4일부터 시행된다.2
현대 한국 사회는 전통 사회와는 다르게 좋은 죽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삶의 길이, 임종 장소, 후손의 유무가 좋은 죽음을 결정하는 기준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좋은 죽음의 기준으로 등장하고 있다.
좋은 죽음의 조건은 투병 기간이 짧아야 한다.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임종에 이르는 삶의 질로 이동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웰다잉(well-dying)을 위해서는 생전에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장례방식 설계와 유언장 작성, 재산 상속 등에 관한 것을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죽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위해 죽음 교육의 필요성이 요청되고 있다. 이제 한국인들은 의료기술이 발전하고 우리 사회가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웰빙을 넘어 웰다잉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죽음 경관의 변화
고려 사회의 장례문화는 불교를 기반으로 매장과 화장 문화가 공존했다. 사람들은 사찰을 요양 장소,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임종 장소로 선택했다. 죽음이 발생하면 사찰에서 장례를 지내기도 했다. 조상의 위패를 안치하는 장소는 사찰과 무당의 신당이었다. 이러한 고려의 죽음 경관은 조선 사회로 들어서면서 변화하게 된다. 장례방식은 유교식으로 수렴되어 화장은 금지되었고 매장만을 허용했다. 임종장소는 반드시 집이어야 했다. 조상을 모시는 위패는 집안이나 별도의 사당을 만들어 안치했다. 고려 사회에서 장례를 담당하는 전문가는 승려나 무당이었으나, 조선 사회로 접어들면서 가장으로 수렴되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매장은 화장으로 전환되었으며, 임종장소는 병원, 장례장소는 집에서 장례식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장례를 담당, 조력하는 사람은 가장과 가족, 지역공동체 사람들에서 장례지도사, 상조회사 직원들로 변화하고 있다.


한국의 죽음경관 변천
장례문화 요소 고려 사회 조선 사회 현대 사회
장법 화장, 매장 매장 매장, 화장
장례장소 사찰, 집 집 집, 병원
임종장소 사찰, 집 집 집, 장례식장
조상안치장소 집(유교), 사찰(불교),
신당(무속) 집(가묘) 집, 사찰, 봉안당
상제례 주체 승려, 무당 집안의 가장 가장, 종교사제,
상조회사
출처: 송현동, “조선조의 죽음의례 정책,” 「종교문화연구」 8(2006), 165-189.


한국의 죽음경관은 고려 사회부터 현재까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장례문화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장례문화의 변화는 시대와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은 죽은 자에게도 예를 갖춰 주검을 처리한다는 점과 타자의 죽음을 통해 한 번뿐인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다. 죽음이 주는 삶의 교훈을 생각해봐야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네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1 “병원 ‘객사’ 73% 역대 최고… 멀어지는 ‘품위있는 죽음’,” 「중앙일보」, 2015년 3월 13일, 19면.
2 네이버 지식백과, “웰다잉법”(『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송현동 | 종교학을 전공하였다. 대표 논문으로 “전주한옥마을과 종교: 종교관광콘텐츠를 중심으로”(「종교문화연구」, 2017)이 있다. 현재 건양대학교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8년 7월호(통권 7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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