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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7년 8월호)

 

  1947년의 평양교회
  - 전투적 반공 교회와 나의 탈출

본문

 

* 이 글은 본지에 연재 중인 홍동근 목사의 유고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의 일부이다. 9월호에 게재할 예정이었으나 이번 특집 주제와 연관되기에 8월호 특집에서 소개한다. 이 글의 원래 제목은 “전투적 반공 교회와 나의 탈출”이다. 홍동근은 평안북도 피현 출신으로 서울, 교토, 엘이이(LA)에서 목회하면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헌신하다 2001년 11월 11일 평양에서 사망하였다. - 편집자 주 장완익 캄보디아 주재 GMS 선교사


평양에서의 신학교 첫 학기(1947년 봄–편집자 주)는 저에게 우리나라 고구려의 고도(古都) 평양의 인상과 함께 조선 기독교의 중심지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교회의 실상을 볼 수 있어서 흥분과 충격의 날들이었습니다. 서평양역에 내려 가방을 들고 양촌 언덕에서 바라다보이는 평양성은 흰 화강석의 하늘을 찌르는 예배당들과 십자가 철탑들로 장관을 이루었으며, “동양의 예루살렘”이란 말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제일강산 모란봉에서 내려다보이는 평양은 천년왕도답게 대동강을 끼고 천리 사방이 산과 옥야, 고적과 전설, 교회와 학원 등으로 문화국 조선을 한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광복 후 평양은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인 만큼 교회와 정권이 더욱 첨예하게 대립되어 문자 그대로 살벌하고 무서웠습니다. 저는 나이가 모자란다 하여 예과에 들어가 신학연구의 준비가 되는 성경, 역사, 철학, 영어 공부를 하라 했습니다. 다행히 의산노회의 추천서를 도와주신 신의주 제5교회의 김동수 집사님이 영접해주며 자신의 방에서 같이 공부하도록 해주었습니다. 동생같이 도와주었습니다. 윤상준 형님이 같은 방에 있었으며, 우리는 모두 의산노회 출신이었습니다.
평양신학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일찍이 개화기에 세웠으며 일제의 신사참배거부로 폐쇄되었다가 광복 후 다시 개교한 학교였습니다. 일제의 박해를 가장 많이 받은 학교이며, 광복된 새 나라에서 이제는 마음껏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온 민족에게 복음을 선교할 희망에 부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벌써 신학교 교장 김인준 목사는 소련군에 의해 감옥에 가고, 일요일선거, 신탁통치안, 토지개혁, 3・1절 사건 등으로 교회와 정권은 크게 대립되어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정권하에서의 종교의 자유 문제로 교회가 정권에 대립되었다 했습니다. 김화식 목사님(장대현교회)이 교장이 되고 이성휘 박사님이 교무 일을 담당했습니다. 이 박사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회의 목사님들이 교수가 되어 강의하고, 학생들은 일제 때의 학생들이 복교하여 대부분 나이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유택, 김영윤, 이기주, 변린서 등 목사님들이 늘 두툼한 조선옷을 입고 강의했으며 언제나 감옥으로 직행할 각오로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학생들도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신앙의 지조를 지킨다고 했습니다. 이미 일요일선거 사건에서 교회는 반대하는 “이북5도 연합노회”와 지지하는 “기독교연맹”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신학교는 전자에 속해 있었습니다. 당시 많이 들은 말은 일제의 신사참배에 굴복한 죄를 설욕하기 위해서도 사회주의 정권의 박해에 저항하고 순교의 각오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학교 초년생인 제게는 다 생소한 말들이며 일제의 신사참배와 사회주의 정권의 종교정책이 어떻게 연관되는지도 공부해야 할 새 과제였습니다. 신앙의 자유에 대해서도 성서적으로, 신학적으로, 정권과 교회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인지 연구해야 할 새 문제였습니다.
한편 “기독교연맹”을 창설하고 사회주의 정권을 지지하여 교회와 정권의 공존을 믿는 목사들과 신도들은 배신자들로 정죄를 받고 그 대표자로 강량욱, 김익두, 박상순, 배덕영 등 목사님들이 매도를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학교의 분위기는 교수도, 학생도, 사회주의 정권과의 공존은 믿지 않았으며 마치 “요한계시록” 속의 전투적 교회처럼, 사회주의 정권을 “짐승”과 “용”(계 13:1-10), “큰 음녀”와 “큰 바빌론”(17:1-18)의 적그리스도, 로마제국으로 엮여 “어린양의 14만 4천 성도”(14:1-7)의 정절과 순교로 투쟁해야 할 것으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 정권이 적그리스도였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것은 당시 평양교회와 신도들의 전투적 신앙입니다. 보다 “전투적인 반공 신앙”이라 해야 하겠습니다. 신학교의 공부는 성서연구와 영어공부에 제한하고 그 외는 주일예배와 밤마다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제 개인적인 신앙을 깨우고 다가올 큰 시련 앞에서의 성도의 절조와 충성을 연마하고 훈련하는 데 열중했습니다. 부흥회는 대체로 시련 앞에서의 신앙의 고무와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의 설교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도 장대현교회에서의 지형순 목사님(기림리교회 담임)의 부흥회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를 본문으로 하는 부흥설교는 시종일관하여, 공산주의의 무신론철학과 계급투쟁의 무자비성에 대한 비판과 공격에 집중하고, 그의 특유한 웅변과 풍자로 교중을 울리고 웃겨 흥분과 박수의 도가니를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정치 설교요, 반공 부흥회였다고 생각합니다. 거기 본문의 아버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용서나, 배반해 나간 아들 탕자의 회개와 돌아옴이나 온 가족, 온 마을 사람들의 기쁜 환영과 잔치의 화해 일치 등 성서주해와 해석은 뒷전으로 한 현실적 정치사회 상황에 대한 반공적 응답이었다고 회상합니다. 거기 “돼지”는 무신론적 공산당이요, “탕자”는 전락한 불신앙적인 교인이요, “아버지”는 전통적 보수적 신앙의 교회의 품이었습니다. 전통적 보수적 신앙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정치화하고 개인 영혼구원에만 설교의 관심을 두는 신앙 태도를 말합니다. 그 외에 친미반공의 신앙을 더한 것입니다.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성이 공산당 돼지굴이 되었다는 것이 웬 말이냐?”, “탕자 같은 이 못난 것들아, 회개하고 돌아오라!” 했던 그 음성이 제 귀에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교회 예배에서는 연화동교회(김윤찬 목사 담임) 삼일기도회에서의 어느 집사님의 특별찬송 색소폰 독주를 잊지 못합니다. 목사님의 설교 후에 반드시 색소폰 독주가 있었으며, 자주 같은 찬송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를 연주했습니다. 정권과 교회의 대결 한가운데 긴장과 흥분이 고조된 가슴에 색소폰 연주는 봄비 같은 촉촉하고 부드러운 명상에 잠기게 하고 또한 낡은 시대가 가고 혁명적 새날의 여명을 고하는 예언의 나팔소리 같은 것을 느끼게도 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그 집사님은 무엇을 목 놓아 불렀었는가?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그 구슬프고, 또 영혼 깊이에까지 울렸던 색소폰 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1.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2. 내가 걱정하는 일이 세상에 많은 중
속에 근심 밖에 걱정 늘 시험하여도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1947년, 격동의 평양은 한마디로 폭풍전야를 느끼게 하고 교회가 정권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날엔 큰 불행이 제게도 올 것을 예감했습니다. 학생들이 성경주석과 신학책들을 내다 팔았습니다. 얼마 후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기숙사의 점심을 굶고 대신 받은 돈으로 한두 권씩 사서 모았습니다. 철학과 역사책들입니다. 남으로 학생들이 떠나고 있었습니다. 김동수 형님도 떠나갔습니다. 제가 히브리서 11장 8절 말씀을 읽고 권사님이신 모친께서 기도하시었습니다. 집의 친형 같으신 형님을 보내며 울었습니다. 내 운명의 배가 닿을 포구는 어디인가? 크게 고독함을 느꼈습니다. 형님의 책들도 제가 굶으며 벌은 돈으로 샀습니다. 카알라일의 『불란서 혁명사』, 어거스틴의 『고백록』, 몽테뉴의 『명상록』 등 고전들이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사회주의 정권하에서도 교회는 선교의 책임이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햇빛과 같이 신자와 불신자에게 다 같이 증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같이 몸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며 이것이 선교가 아니겠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소문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곧 평양에서 열린다 하고 “기독교정당”을 조직하여 북의 참 민의(民意)를 표명해야 한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조선민주당”(조만식 장로 대표)의 재활이란 말도 있었습니다. “신의주학생사건”으로 좌절된 “기독교사회민주당”(윤하영, 한경직 목사 주동)의 전철을 밟는 것인가 혼자서 불안하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부흥회에서 돌아온 밤에는 꿈에도 가신 증인들의 묘지를 방황하고 “내 십자가는 어디에 있는가” 찾기도 했습니다. 살벌한 세월이었습니다. 그해 5월 저는 예과를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침내 그 여름 저는 “체포령”을 받아 이미 사놓았던 고무신 수십 켤레를 배낭에 매고 장사꾼을 가장하여 고향 피현을 떠나 남으로 갔습니다. “하기아동성경학교”를 교회에서 개최하면서 학교 아이들이 일요일 “인민학교 소집일”에 학교를 안 가고 많은 수가 교회로 온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또 “하기아동성경학교”의 선생들이 인민학교 교사들이었습니다. 책임자인 제가 보안서에 두 번 호출되어 집회 허락을 안 받고 모였으니 위법이라 하고, “즉시 중지하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한다.”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제가 일제 때에도 경찰서 허가 받은 일 없고 사회주의 헌법에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느냐고 항변했습니다. “상부의 지시니 중지하지 아니하면 조치한다.”고 위협했습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저의 보고에 대한 교회의 담임 홍하순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목사님이 단호한 음성으로 “홍 선생, 감옥에 가면 이 홍하순이 가지 당신을 보내겠소?” 하고 책상을 치며 “끝까지 계속 하시오!” 했습니다. 6척 거구에 바위같이 우람한 목사님의 말씀에 저는 용기를 얻어 주일날까지 계속하여 끝냈습니다. 목사님은 일찍이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일제의 감옥을 살고 나와서는 만주에 망명했었던 애국자였습니다.
주일날 밤을 남의 집에서 자고 다음날 새벽, 오직 어머니와 명순이가 저의 남행(南行)길을 사람 없는 역두에서 배웅해 주었습니다. 쫓겨 가는 죄수처럼 남몰래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까닭에 조국에도 머리 둘 곳이 없는 몸이 되었는가. 인민증도 없어 기차표도 여행도 할 수 없었던 몸을 하나님의 천사가 도와주었습니다. 잊지 못합니다. 국내 공산당 사람들이 크게 발호하던 때입니다. 김일성 장군의 인민 정권과 연합전선의 정책이 지방엔 미치지 못했었습니다. 기약 없는 여로(旅路)에 주님이 함께해주시기만 기도했습니다.

1. 내 갈길 멀고 밤은 깊은데 빛되신 주
저 본향 집을 향해 가는 길 비추소서
내 가는 길 다 알지 못하나
한 걸음씩 늘 인도하소서

2. 이전에 나를 인도하신 주 장래에도
내 앞에 험산준령 당할 때 도우소서
밤 지나고 저 밝은 아침에
기쁨으로 내 주를 만나리

 
 
 

2017년 10월호(통권 7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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