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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17년 8월호)

 

  문화예술계의 해방 후 1년
  

본문

 

축제 분위기를 주도한 문화예술계
독립의 징후가 있었다든가, 조만간에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것이라고 추측한 인사들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해방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외부로부터 주어졌다. 함석헌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도적”처럼 왔다. 그럼에도 해방 이후 거리, 극장, 운동장 등에서는 행진, 연주회, 미전, 연무회, 전람회, 연합군 환영 특별행사가 이어졌다. 특히 정치, 경제, 종교계 어떤 분야보다 해방의 축제 분위기를 살린 것은 문화예술계였다. 무용, 문학, 미술, 연극, 영화, 음악을 중심으로 해방 1년간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미 군정은 한국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이러한 중에도 일제청산 작업은 이루어졌다. 일본 국민에서 새로운 국민으로의 변화과정에 있던 모든 매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민족’이었다. 이때의 민족이란 해방, 친일청산, 한국적, 회복, 정체성 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해방 전에 사용하던 일본식 단어나 빼앗긴 말들이 본래의 단어를 찾거나 새로운 용어들로 바뀌어 갔다. 수도 ‘경성’은 우리말인 ‘서울’을 되찾았으며, 우리나라를 지칭하는 명칭도 1년 안에 조선에서 대한이나 한국으로 바뀌었다. 1907년에 설립된 대한민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 ‘단성사’는
1939년 일본인이 강제로 인수하면서 ‘대륙극장’으로 개명되었지만, 1945년 11월 원래의 이름 단성사를 되찾았다. 연극계에서도 1946년 8월 연극 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음악계에서는 해방의 기쁨을 노래로 표출했는데, 해방 직후 광복의 감격을 노래한 가요들은 ‘해방가요’(광복가요)라고 불렸다. 이 노래들은 해방공간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한시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몇 곡에 불과하다. 첫 해방가요는 <사대문을 열어
라>(1945. 8.)이다.

사대문을 열어라 인경을 쳐라
삼천리 곳곳마다 물결치는 이 기쁨
민족의 꽃은 다시 피었네
영광된 내 조국 영원무궁하리라
- 고여성 작사, 김용환 작곡, <사대문을 열어라>


해방 후 며칠 만에 위의 노래가 생산될 수 있었던 이유는 1945년 8월 22일 연예계 관련 인사들이 해외 독립인사의 환영 준비를 논의하는 가운데 축하곡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보급했기 때문이다.
해방 전 유행하던 대중가요는 일본의 엔카풍이나 중국풍의 노래였다.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재즈와 팝의 영향을 받아 리듬 패턴이 다양해졌는데, 이러한 특성을 보여주는 노래가 당시 유행한 <귀국선>(1946)이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 이인권 노래, <귀국선>


이 노래는 해방이 되자 해외에서 돌아오는 동포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작사가 손로원은 일제하에서 절필하고 있다가 해방되자 가사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위의 노래는 일본식 대중가요의 구성과 진행을 따르지 않은 곡이라는 음악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해방 전에는 기미가요가 국가(國歌)였기 때문에 새로운 국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고민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당시 “문학가동맹과 음악가협회의 공동주최로 ‘애국가’ 현상모집 상금 총액은 壹萬圓”(「예술통신」, 1945. 12. 27.)이라는 기사가 있지만, 여기서 ‘애국가’가 ‘국가’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며 현상모집의 결과 또한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료를 찾을 수 없다. 아마도 1년 동안 연합군 환영회, 단체 조직 등의 행사는 있었지만 국가를 부를 만한 국가적 행사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해방 직후 예술제와 궐기대회 등 다양한 행사에서 국가처럼 불린 곡은 월북 작곡가 김순남의 <해방의 노래>(1946)였다.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 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여
놈들에게 빼앗겼던 토지와 공장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 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 임화 시, 김순남 곡, <해방의 노래>


당시 가장 광범위하게 불린 행사가로서, 오늘날 <임을 위한 행진곡>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박세영이 월북하여 북한 국가를 작사하기 전까지 가사를 바꾸어 북한 국가로 불린 노래이다.
해방 전에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밖에 없었는데 해방 후 「조선일보」는 11월에, 「동아일보」는 12월에 복간된다. 신문보다 잡지가 먼저 창간되었고, 초기 잡지는 대부분 활자가 아니라 등사판이었다. 이는 한글말살 정책에 따라 인쇄소의 한글 활자를 녹여 납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수많은 잡지가 갑자기 한꺼번에 창간되는데, 다음은 이러한 상황을 실감 나게 보여주는 기사이다.

신문이 쏟아지고 잡지가 밀린다. (중략) 8・15 이후의 장관은 실로 유흥계와 쌍벽으로 출판계였다. (중략)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였고, 붓이 있어도 글을 못 씀은 40년 동안 통한이 뼈에 사무쳤거든, 자유를 얻은 바에야 무엇을 꺼릴 것인가? 눌렸던 것이 일시에 터진 것이니 세고당연(勢固當然)이라, 한동안 그대로 방치해 무방하리라.
- 소오생(小梧生), 「동아일보」(1946. 3. 23.)


검열 때문에 혹은 한국어 사용금지 방침에 의해 암흑기를 보냈던 문화인들의 욕구가 일시에 분출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1945년 9월 이후로 36종, 1946년 206종의 잡지가 출판되었는데, 1937년에서 1945년 해방 전까지 18여 종이던 것에 비하면 가히 폭발적이라 할 수 있다. 다음 표는 1년간 창간된 잡지목록 일부이다.

연도 월 잡지명
1945 9 문화통신, 해방뉴스
10 선구, 조선주보
11 선봉, 민심, 민중조선
12 신문예, 예술운동, 예술문화, 인민예술, 무궁화, 백민, 인민, 민성,
건국공론, 문화창조, 여성문화
1946 1 혁명, 생활문화, 대조, 여성공론, 우리문학, 신천지
2 주간소학생, 파랑새
3 신세대, 적성(赤星)
4 신문학, 영화시대, 한글문화, 부인(婦人)
6 주보 민주주의
7 문학(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



위의 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종합지, 문예지, 여성지, 교육학술지 등 잡지의 성격이 다양해졌다. 이 기간 출간된 수많은 잡지 중 「백민」의 경우 23호까지 간행되었고, 대부분 1호에서 5호 정도 발행하고 중단되었다. 의욕은 있었지만 자본금이 적고 인쇄 시설의 제약이 많았으며, 1946년 하반기부터는 용지난으로 출판 비용이 급격히 상승했기 때문이었다.

문화예술 단체의 분열과 월북
해방 후 문화예술계는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움직였고, 이로 인한 혼란은 문화예술 단체들의 분열로 나타난다. 다음은 당시 문화예술 단체의 창립 상황을 보여주는 표이다.

연도 월 단체명 이념성향
1945 8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조선문학건설본부 좌
조선미술건설본부 좌
조선연극건설본부 좌
조선영화건설본부 좌(온건)
조선음악건설본부 좌
9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조선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 좌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좌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 좌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 좌
조선무용건설본부 좌
고려교향악협회 우
10 조선미술협회 우
12 조선연극동맹, 조선영화동맹, 조선음악가동맹 좌
1946 2 조선문학가동맹, 조선미술가동맹, 조선조형예술동맹 좌
3 전조선문필가협회 우
5 극예술연구회 재건 우
6 조선무용예술협회
대한무용예술협회
7 조선아동예술연구회



위의 표에 의하면 좌익의 활동이 활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좌우의 대립으로 인한 분열뿐 아니라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는 단체들끼리도 새로운 문화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갈등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불분명한 계급적 성격과 그 활동 방향이 임화를 중심으로 움직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그룹들이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조직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결성에 불만을 품은 그룹들이 월북한 경우를 들 수 있다.
후반으로 갈수록 탄압과 월북으로 말미암아 좌익의 활동이 부진해지고 정치색이 옅어졌다는 것, 아동에 대한 관심은 가장 늦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익 쪽에서 월북의 빈자리를 메우고자 노력했던 사실도 알 수 있는데, 이는 유치진 등이 극예술연구회를 재건하고 연극 브나로드운동 실천위원회를 조직하여 애국심 고취와 계몽을 위해 활동한 데서 엿볼 수 있다.
문화예술계의 월북은 3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해방공간 약 1년간은
1차 월북에 속하며, 이 시기의 월북은 6・25 전후의 2차, 3차 월북 예술인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1945년 11월 문화예술인 가운데 가장 먼저 이기영과 한설야가 월북한다. 예술가들의 월북은 미 군정의 좌익 탄압, 좌익 사이의 의견차, 북의 정치노선 동조와 같은 사상적 이유뿐 아니라 단순 월북도 있었다. 고향이 북쪽인 문화예술인들이 북으로 넘어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다음 표는 해방 후 1년간 북으로 간 예술인들을 연도별로 분류한 것이다.

연도 무용 문학 미술 연극, 영화 음악
1945년
8–12월 송 영(소설)
윤기정(소설)
이기영(소설)
한설야(소설)
박세영(시) 한상익(화가)
1946년
1–8월 김백봉
최승희 안 막(평론)
이태준(소설)
홍명희(소설)
조규봉(조각)
강 호(무대미술)
신고송(연극)
이백산(연극)
이재덕(연극)
나 웅(영화) 안기옥(국악)


월북 예술인들은 주로 해방 전부터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이들의 월북이 큰 논란거리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해방 전 “시는 정지용, 산문은 이태준”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이념적 색채를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소설가 이태준의 월북은 당시 문학계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주변인들의 회고에 의하면 미군들의 정치 행태에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태준은 월북 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 6월경에 월북한 안기옥은 일제에 항거한 음악가로서 전설적인 가야금 명인이라 불렸다. 그가 월북한 이유는 남한 사회의 판소리 광대에 대한 신분차별과 좌익사상의 영향으로 보인다. 그는 가야금 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김창조(1856-1919)의 직계 제자이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사실상 후계가 끊기고 김창조의 악보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1990년 연변에서 그가 남긴 김창조의 악보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월남한 예술인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대부분 6・25 전후에 월남하게 되는데, 해방 후 1년 사이에 월북한 이들 가운데 스승 최승희와 함께 월북한 무용가 김백봉은 1・4후퇴 시 다시 월남하였다. 해방 직후 월북 이외에도 친일 예술가들의 도일(渡日), 일본 예술가들의 송환, 해외 체류 예술인들의 귀국이 이루어졌다. 한국인 최초로 유럽에서 춤을 배운 친일 무용가 방정미(본명 박영인)는 1946년 8월 도일하여 ‘구니 마사미’로 활동하면서 한국 무용계와 등을 졌다.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다나카 사보루 사장은 1945년 11월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영화인들은 1945년 11월 ‘선구영화사’를 창립하였다.
해방공간과 6・25 전후, 문인 가운데 약 4분의 3이 북으로 올라갔다. 당시 ‘알맹이는 갔고, 쭉정이만 남았다.’는 인식이 팽배할 만큼 북으로 간 예술가들의 역량은 적지 않았고 이들은 북의 문화예술 토대를 닦았다. 반대로 남쪽 예술계는 빈약성을 드러냈는데, 문학의 경우 친일과 월북한 문인을 제외하면 1980년대 해금될 때까지 약 40년간 엉성한 반쪽 문학사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문화예술의 독립의지와 퇴행
해방이 되고 일본풍의 모든 것이 금지되었지만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지 못했으며 미 군정의 문화정책마저 불안정했다. 이러한 중에 1946년 초 창설된 조선영화동맹은 해방 전의 영화정책인 국영제(國營制)를 요구하는데, 해방 후 미 군정하의 한국 영화산업이 불안정하자 안정되어 보이던 식민지 시기로의 심리적 퇴행 증세를 보인 것이다.
이는 대중가요계도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일본의 모든 문화가 금지되었지만, 대안문화를 제시하거나 형성하지 못하자 해방 전의 친일적 노래들과 중국풍 노래들이 가사만 바뀌어서 불리게 되었다. 해방 전 유행하여 친일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노래 <꽃마차>(반야월 작, 이재호 곡, 1939)의 가사는 “노래하자 하루삔 춤추는 하루삔 아카시아 숲속으로 꽃마차는 달려간다”에서 “노래하자 꽃서울 춤추는 꽃서울 아카시아 숲속으로 꽃마차는 달려간다”로 바뀌어 광복을 축하하는 노래로 둔갑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한국 내에는 레코드 프레스 공장이 한 군데도 없었다. 일본판이 금지되었지만 새로운 노래를 녹음해서 판매할 역량이 없는 기막힌 현실에 당면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일본 군국가요 음반이 거리와 업소에서 다시 흘러나오게 되었다. 정부는 이에 대해 “일본축음기판은 금후 사용치 않도록 조합을 통하여 주의”(「동아일보」 1946. 3. 12.)를 주었다고 하지만, 1946년 7월 “가요의 일제잔재 소탕”이라는 기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연극계에서도 발견된다. 해방 직후 좌익 극단의 연극운동은 정치선전의 도구로 이용되었고, 대부분의 우익 연극들은 뜻을 합치지 못하자 관객에게 외면당한다. 그때 대중을 사로잡은 것은 ‘신파극’이었다. 일본으로부터 강제 유입된 신파극은 해방 후 6・25까지 주요 무대를 차지하면서 상업극으로 번성하였다. 신파극은 교양과는 관계없는 상업적 공연으로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였다. 사극, 가정 비극, 괴기극이 주를 이루었으며, 감성적・괴기적・멜로 드라마적・우연적 성격이나 과도한 정서의 분출, 선악의 이분법 등으로 연극계에서 비판을 받았다. 신파극 내용에 춤과 무용을 곁들인 악(가)극 역시 해방 이후 30여 개 극단에서 성황을 이루었으며, 건달패의 검은 자금이 흥행사로 유입됨으로 공연질서가 문란해져 갔다. 1910년대 전반기만 해도 단성사는 판소리, 민요, 민속춤, 전통음악, 재담, 무속 등을 공연한 전통 연희 전문극장이었다. 그러던 것이 1945년 이후에는 주로 대중적인 악극만 공연하였다. 이에 연극계는 “무의식 대중의 무비판적인 연극 감상”, “연극인도 먹어야 산다는 조선 연극인의 숙명적 고통이 조선 연극을 비속한 신극의 함정으로 끌고 들어간다.”라며 비판하였다.
해방 후 문화예술도 독립해야 한다는 것은 문화예술인들의 고민이었을 것이다. 말살된 민족문화를 되살리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여 성장시켜야 했다. 그러나 해방 후 1년간 문화예술계는 해방의 축제 분위기를 띄우기는 했으나, 사회정치적인 면에서 군정의 미숙한 예술정책과 탄압, 좌익과 우익의 대립, 월북 등으로 인해 일본 문화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민족문화를 제시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정경은 | 서울여자대학교와 고려대학교에서 국문학과 비교문학을 전공하였다.(Ph. D.) 저서로는 『한국 현대 민중가요사』, 『근대 학생들의 교지 만들기』 등이 있다.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강의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7년 8월호(통권 7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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